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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20-25)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로마에서도 선교한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다. 그는 먼저 로마에 살고 있던 유다인의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차갑다. 바오로는 연금된 상태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한다(제1독서). 베드로는 요한 사도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다. 복음서 끝 부분에서도 요한 복음의 작가로 소개되고 있다. 스승님의 예언처럼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사랑으로 기록했다. 그것이 요한 복음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만을 사랑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제자를 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은 짐짓 이 표현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과 가까웠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순교한 뒤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스승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그 나름대로의 작업을 했습니다. 요한 복음의 집필입니다. 그의 소명은 주님의 말씀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 일을 순교에 버금가는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 천주 교회사』는 ‘달레 신부’의 저작입니다. 그는 1850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선교사의 꿈을 키운 사제입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보내 온 선교사들의 편지를 보면서 집필을 결심하게 됩니다. 박해 시대의 참상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1874년 파리에서 출간한 책이 『조선 천주 교회사』입니다. 달레 신부는 1877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위해 일본과 만주 지역을 방문했지만, 조선에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그는 풍토병을 얻어 베트남에서 선종합니다. 그가 남긴 자료가 없었더라면 조선 교회사 연구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시복 시성 문제도 난관을 만났을 것입니다. 달레 신부는 조선 교회에 관한 한, 요한 사도가 환생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
-김혜경-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가 요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요한과 베드로를 심리학적이고 인간학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듯하다.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 라며 조금은 거시적 물음을 하는 요한과 그런 물음을 던진 요한을 가리키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 라는 베드로의 물음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물음을 통해 나는 동서양의 사고를 보는 듯하다.
주님을 알아보는 삶 -오민환-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짝으로 보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승국신부- <낄낄빠빠>
혹시 ‘낄낄빠빠’란 말을 아십니까? 한 마디로 낄 때 낄 줄 알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 개입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투신할 줄 알고 가봐야 본전도 못 건질 곳에는 지혜를 발휘해서 미련 없이 빠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살다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괜히 이 곳 저 곳 다 기웃거립니다. 여기저기 다 들쑤시고 다닙니다. 아무 때나, 생각 없이 수시로 남의 대화에 끼어듭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가치를 실추시키기 십상입니다. 빠낄낄빠 하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가벼운 사람으로 인식되는 지금길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자주 고민하게 되는 질문이 한가기 있습니다. 내가 꼭 개입해야 될 사인인가? 내가 꼭 가야할 곳인가? 내가 가면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불편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잘 간수하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지켜나가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노력이 ‘낄낄빠빠’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낄낄빠빠’의 명수셨습니다. 정말 개입해야 될 일에는 목숨까지 걸고 개입하셨습니다. 백성들 전체를 그릇된 신앙으로 이끌고 있던 당대 유다 지도자들, 유다 본산을 향해 정면으로 반기를 드셨습니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의 위선과 비리와 이중적 신앙에 맞서셨습니다.
그러나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할 때 어떠하셨습니까? 이제는 내가 빠질 순간이로구나, 직감하시고 몰래 빠져나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낄낄빠빠’의 전문가셨습니다. 헤로데 왕의 그릇된 결혼 앞에 목숨까지 걸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직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낄 때는 목숨 걸고 낀 것입니다.
그러나 빠질 때 빠지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전성기 시절, 그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세례자 요한 당(黨)’이라고 칭할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큰 스승으로 받들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시자마자 스스로 자신을 ‘와르르’ 허물어트립니다.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반면에 베드로 사도는 낄낄빠빠에 조금 서툴렀습니다. 자주 끼지 말아야 할 때 끼어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 같은 경우도 보십시오. 어련히 예수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어느새 다가와서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베드로가 유다를 바라보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다시 끼어든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웃들의 결점을 바라보느라 너무 바쁜 우리들입니다. 형제들의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입니다. 결국 허탈함만 남는 형제들의 단점을 주제로 한 ‘뒷담화’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모든 것들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너는 그저 나를 따라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양승국신부- <부도덕에 대한 질책은 교회의 의무>
오늘 복음에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배반자 유다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참으로 안된 일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그 자식이 어떻게 감히 스승님을 배반할 생각을 했는지? 그러기에 주님, 제가 몇 번이나 느낌이 안 좋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다른 방도가 없겠지요? 유다의 최후는 죽음뿐이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일까지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 하거라. 보거라. 네 코가 석자다. 너나 배신 때리지 말고 확실하게 나를 따라 오거라." 때로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처럼 제 코가 석자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는 엉망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그런가 하면 주변을 너무나 많이 의식하면서 살아가기도 하지요. 주변의 상황, 분위기, 사건들 안에서 너무 지나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가 하면, 죽어도 손해보지 않는 삶을 살려고 기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희생이나 헌신, 투신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지요.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바로 옆의 사람이 불의하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극단적 이기주의가 보편화되는 이 시대, 너무나도 그리운 얼굴,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비장해지는 분이 계십니다. 원주교구 교구장을 역임하셨던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이십니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양심이, 인권이 무참하게 짓밟히던 시절, 용감하게도 지주교님은 유신독재의 타파의 전면에 나서십니다.
독재자와 그 일당들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지주교님은 1974년 7월 6일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시던 길,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셨지요. 이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7월 10일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성명을 내고 지주교님을 지지했습니다. 그런 주교회의의 노력에 힘입어 지주교님은 다음날 석방되어 수녀원에 연금 됐으나, 7월 23일,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여 또 다시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1974년 8월 9일 징역 15년을 선고받으셨지요. 지주교님의 민주화를 위한 강한 신념과 투신, 고독한 외침은 한국 천주교회가 민주화와 사회정의구현에 앞장서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천주교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사회투신은 당시 국민들에게 가톨릭의 이미지를 쇄신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에 가툴릭에로 귀의하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주교님! 그분은 진정 수난 받는 "주님의 종"의 상징이셨습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 힘없는 우리 민중들이 지고 왔던 십자가를, 시대의 아픔을 홀로 묵묵히 지고 가신 또 다른 예수님이셨습니다. 1975년 2월 17일 구속집행정지로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하신 다음 날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환영미사 중에 하셨던 지주교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메아리쳐지길 기원합니다. "부도덕에 대한 질책은 교회의 의무요 진리운동입니다."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 -김우성 신부- 주님, 욕심으로 가득 찬 저의 말 몇 마디는 늘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 이영석 신부-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생활하는 형제들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뿐 아니라 이 형제 저 형제를 서로 비교하기도 합니다. “저 형제는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그 형제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이런데 왜 그 형제는 저렇지!” 게다가 공동체 생활이 힘들 때 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회의 친구들과도 비교합니다.
Never ending story -김찬선신부- 오늘의 제 1 독서는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 -전삼용신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것저것 꼬치꼬치 잘 캐묻는 사람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아는 것을 다 이야기 해 줄 때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것은 좀 감추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관심을 갖는 것 같지만 다 같은 관심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캐묻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를 당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에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가 요한에 대한 참다운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라 호기심이 앞서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는 것에 단지 호기심을 못 이겨 들추어내려는 경향은 없을까요? 호기심과 관심은 분명이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가끔 호기심이 관심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입니다. 호기심은 단순히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려는 것이고 관심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을 만나 뱀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와가 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뱀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란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사랑을 거스릅니다. 결국 이 호기심이 온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하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호기심은 이렇듯 큰 죄를 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짓는 죄들 안에는 대부분 이 호기심이 들어와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성적인 것에 많이 노출이 되어있고 아이가 아이를 임신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겠습니까? 인간은 모르면 좋을 악까지도 다 알려고 해서 그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학을 공부하는 데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신학은 분명 하느님을 더 알고 그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그 지식을 통해 내가 커지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교수님은 다 좋으신데 다른 신학자들을 좀 자주 비판을 하십니다. 물론 그 분의 입장에서는, 남의 것들을 짜깁기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신학인 양 말하는 신학자들이 어리석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일면에는 은근히 자신의 현학을 자랑하는 마음이 묻어납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 왜 가르치고 배워야하는지 통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또 단순한 이야기를 왜 그렇게 어렵게 가르치고 시험을 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가운데 저도 공부를 하는 목적이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을 더 사랑하려는 관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머리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호기심에서 한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사랑과 겸손을 증가시키는 목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어느새 내 자신의 교만만 키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쌓아가는 것에 있어서도 이렇듯, 자주 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만 공부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도 독이 됩니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알려고 할 때,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인지 나의 호기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인지 내 스스로를 잘 살피며 살아야겠습니다. 참 사랑은 자신을 잊고 상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 -백남해 신부- 마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아구찜’과 또 ‘통술’이 있습니다.
섭리에 따라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 앞으로 민들레 국숫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어보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섯 해 전 4월 1일에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을 모방해서 조그만 민들레 국숫집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섭리에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후원자 조직을 만들지 않기로 하고 정부 지원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재정 마련을 위해서 재단이나 기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응모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선의의 사람들의 자발적인 도움에만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승국신부- <내 발끝부터 먼저> 공동생활의 햇수가 늘어갈수록 안타까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한 그루 거목처럼 되고 싶었는데, 한 그루 청청한 소나무처럼 되고 싶었는데, 웬만해서는 상처받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그런 삶을 꿈꿨는데... 현실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맨 날 상처입고, 매일 흔들립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들과의 관계형성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선이 다른 곳에 앞서 우선 내 발끝으로 향해야 되는데, 대체로 시선은 형제들의 허물로 먼저 가게 됩니다. 형제들은 또 한 두 명입니까? 시선이 이 형제에게서 저 형제에게로, 저 형제에게서 또 다른 형제에게로,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나중에는 하루 일과 전체가 형제의 약점 살피기, 불평불만, ‘뒷담화’, 소모적인 논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제대로 수행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배반자 유다의 미래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유다 형제를 걱정해주고, 유다 형제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싶어 묻는 질문이 아니라 호기심으로만 가득 찬 질문입니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향해 ‘너나 잘 하세요!’라고 질책하십니다. 네코가 석자면서 남의 걱정하지 말고, 너나 단단히 잘 하라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웃의 삶에 대한 적당한 관심과 형제적 나눔,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합니다. 도를 넘어서게 될 때 늘 참담한 결과가 초래됩니다. 깊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참된 예수님 추종도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영성생활도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추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발밑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과제부터 충실히 이행하고 나서, 내 약점부터 먼저 잘 처리하고 나서 형제들에게로 시선을 돌려야겠습니다.
- 장용진 신부- 내가 올 때까지’로 번역되어 있는 부분을 좀 더 직역해서 보면 ‘내가 오는 동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추종하는 자로서의 다른 모습을 띠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에 오심을 체험하는 신비가를 대변하게 됩니다. 매순간마다 자신에게 거처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머물러 있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이며 특정한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탓에 우리 자신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며 궁금해 합니다. 특히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궁금함을 견디지 못해 점을 보기도 하고 오만가지 걱정을 다 하며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 21장은 “이 사람이 이런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바로 그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일도 많이 있다. 만일 낱낱이 다 적는다면, 온 세상이라도 그 책들을 모두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독특하게 끝맺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오상선신부- 오늘 요한 복음의 말씀은
your way is My Way -김찬선신부- 오늘로 성령 강림 전 부활시기를 끝내고
-김태형 신부- 우리는 조금만 더 차분히 들여다본다면 실제로는 대단치 않은 일인데도 곧잘 흥분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이 자신의 차 앞에 끼어들려고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내며 남은 하루를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욕부터 하며 분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는 이와 비슷한, 사소하면서도 짜증스러운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얼토당토 않은 비난을 듣거나, 꺼림칙한 일을 하게 되더라도, 사소한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 방법을 깨닫는다면 그에 따르는 보상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끙끙대느라, 정력을 낭비하고 인생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새벽을 열며 어떤 한 젊은이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유산의 대부분은 부모가 평생을 땀흘려 일구어 놓은 포도밭이었지요. 이 포도밭으로 인해 젊은이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먹고 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준 고마움의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젊은이는 물려받은 포도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발전을 시킬 것을 다짐했지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 섞인 말은 이제 그만~~ 빠다킹신부
하늘의 시민
-김동하 신부- 다시 살아나신 스승님을 뵙고 제자들은 기뻐 뛰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시류 속에 확고한 믿음을 -김민수 신부-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는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도를 받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고, 성전은 기록되지 않은 형태로 교회의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과 실천적 관행을 일컫는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하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복음서임을 밝히고 있다.
“너는 나를 따라라?”
-경규봉 신부 -
호기심과 침묵
-이봉하수사-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침묵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승국신부- <왠지 모를 안도감> 오늘 요한 복음사가가 지칭하고 있는 한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고 있는 그 제자는 누구일까요? 여러 정황을 고려해봤을 때, 요한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틀림없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언제나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앞 다투어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애를 썼는데, 때로 지나치다보니 그런 모습들이 복음서 여러 곳에서 감지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베드로는 사도 요한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요한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지나친 관심과 견제에 약간 못마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하십니다. “요한이 어떻게 되든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위 말씀은 베드로 너는 왜 그렇게 요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요한은 요한 나름대로 길이 있고, 베드로 너는 너 나름대로 길이 있으니, 서로 비교하지도 말고, 서로 미워하지도 말고 너는 너 생각만 해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요한과 베드로 사도의 경쟁을 바라보며 그들도 역시 인간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에 젖어듭니다. 오늘 요한 사도의 삶을 잠깐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 요한은 어부였습니다. 이웃이었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낚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성격은 ‘천둥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로 과격하고 급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즉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요한은 그 동네를 불살라버리려고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심도 많았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오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독차지하려는 마음도 강해서 자주 다른 제자들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한 가지 떳떳하게 내세울 것이 있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 그의 마음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불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었던 요한이었기에 예수님의 수난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이 줄행랑을 놓았지만 끝까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용감하게도 대사제의 집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받으시는 광경을 지척에서 지켜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 요한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부활절 새벽, 빈 무덤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습니다. 이 모든 모습들은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불같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한때 과격한 성격,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 무척이도 소유 지향적이고도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요한이었지만, 스승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 요한 자신의 오랜 노력을 통해 요한은 서서히 전과는 전혀 새로운 참사도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요한의 급하고 과격하고 편협된 성격은 온화하고 관대하며 겸손한 성격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요한의 변화는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하나의 큰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편협 되며, 이해 타산적입니다. 죽어도 손해보고 싶지 않습니다. 늘 나와 남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내리누르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신앙인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변화, 또 다른 새 출발을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힘겹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부활시기의 에필로그(맺음말)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부활시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걸맞게 오늘 미사에는 요한복음의 끝 부분이 봉독된다.(21,20-25)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이 15-17장과 더불어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단독으로 내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았고, 그 사랑 위에 당신 양떼의 사목(司牧)을 맡기셨으며, 아울러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하셨다. "나를 따라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따라 나섰다. 그 뒤를 애제자(愛弟子)가 따르고 있었다.(20절) 자신의 미래를 계시 받은 베드로는 애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예수께 물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수제자(首弟子)와 애제자(愛弟子)가 차지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위상(位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앞서간 복음에서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은 베드로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제자의 위상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는 호기심뿐 아니라 경쟁심도 다소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따져 볼 때 이 호기심이 베드로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공동체를 포함한 후기 편집자의 호기심이다. 역사적 사실과 시간상의 간격을 따져 볼 때 원래의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점에 베드로는 이미 순교하였고(64-67년경), 요한은 아직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스승의 사랑을 받던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다.(23절) 그런데 애제자 요한도 결국은 100년경 도미씨아누스 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21장의 후기 편집자는 애제자가 뒤따르는 장면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호기심과 경쟁심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셨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예수께서는 애제자의 미래가 베드로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추종만을 요구하신다. 사실 제자들의 제각기 갈 길은 예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다. 제자는 오직 스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제자 됨의 본성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공동체의 일치를 바라셨고,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성원 모두의 강압적이거나 획일적인 추종은 원치 않으셨다. 즉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획일(劃一)은 예수님의 원의(願意)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서로의 비교(比較)나 경쟁(競爭) 등, 우열(優劣)가림을 통한 획일적인 시도의 발상이 적지 않게 있다. 자신의 신심(信心)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신심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믿음의 공동체가 각별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신부(神父)로서 이렇게 사는 데 저 신부는 왜 저렇게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남을 험담하면 그것은 일치를 깨는 일이며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고 그 안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는 일치를 도모하는 일이다. 어떤 모양으로 살던 삶은 자신의 몫이다. 그저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데 익숙해야 할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무릇 각자의 몫이겠지만, 천상(天上)의 삶은 공유(公有)하는 삶이다. 거기에는 차별(差別)도 열외(列外)도 없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이미 천상의 삶을 공유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오시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恩師)가 꼭 필요한 것이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불태우소서." 아멘.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요한은 최후 만찬에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위의 질문을 했다. 대단히 직설적이고 즉각적이며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찌르는 질문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요한이 어떻게 되든 자기와 상관없는 물음을 하고 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서양인과 남의 일에 쓸데없이 관심을 갖는 우리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베드로는 어제 복음에 이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 라는 좀 더 세련된 질문을 했더라면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는 주님의 면박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족한 듯 우직하고 덤벙대는 듯하면서도 진지하며 인간미 넘치는 베드로, 믿음이 약해 물에 빠지기도 하고 (마태 14, 22 – 33), 주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요한 18, 15 – 18. 25 – 27), 분위기 파악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하며 (루카 9, 28 – 36), 제자들의 수장이면서 제자들 앞에서 체면 구기는 말이나 듣는 베드로, 동시에 “형제들 사이에서 그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고 할 만큼 ‘소문 메이커’ 이기도 한 베드로에게 교회가 맡겨져 있다. 세상 한 복판에서, 교회의 최전방에서, 언제나 신앙인의 삶을 고뇌하며 사는 우리에게 베드로는 희망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요한 복음서에서 함께 등장하는 일이 많습니다(요한 13,23 이하;
18,15 이하; 20,2 이하). 게다가 복음서는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더 부각되면서 마무리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또박또박 전해지고 있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했던 이 제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목자로서의 죽음이 예고된 베드로는 그 제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무척이나 냉정해 보입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가 죽지 않는 게 아니라 “살아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도대체 그 제자는 누구일까요? 어렵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 제자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 곧 주님의 일들을 기억하고
증언하고 기록한 그 말씀이, 베드로 사도가 돌보아야 할 양들 안에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아닐는지요. 주님의 일이 오늘 여기 우리 안에서 기억되고
증언되고 있다면,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 제자는 항상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 제자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아뵙는 신앙인의 길은 목자의 길을 포함합니다.
‘오빠, 안녕. 연락이 통 없네. 보고 싶은데, 이거 보면 문자 줘요.’
알지 못하는 번호였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보이는 문자 메시지에 ‘누구지? 혹시 내가 아는 앤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구시죠? 제가 모르는 번호인데요?’라고 답장을 보냈답니다.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전에 문자 친구 하자고 했던 오빠 아닌가요? 아님 미안. 이것도 인연인데 저랑 문자팅 해요.’
그렇습니다. 뻔 한 스팸 문자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문자팅을 하자는 문자가 귀찮을 정도로 그 날 하루 종일 계속해서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고, 그 뒤로는 전혀 문자가 오지 않았다고 해요. 그 문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봐. 사실 나 오빠가 아니라 언니거든.’
이렇게 한 방에 해결했다고 자랑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와~ 이런 방법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세상 속에 있는 악의 유혹 역시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려 집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악이 더 이상 내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카운터펀치를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한 말씀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마귀를 쉽게 쫓아내시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 당연히 우리 역시 악이 내 근처에 오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믿고 따른다는 것이 쉽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발표하자,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라면서 물어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는 과연 어떻게 될 지를 베드로가 물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이러한 대답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에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을 따르는 것 외의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믿고 따르는 길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 새벽 묵상 글에 제 생각을 어떻게든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혹시 고인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차마 적지 못하다가 이렇게 장례가 끝난 뒤에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이렇게 적어 봅니다.
몇 달 전, 인천교구 사제단에서는 경인 운하 백지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총대리 신부님께서 미사를 시작하시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용산참사 관련 촛불시위에서 경찰이 얻어맞자 이명박 대통령이 “경찰이 맞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냐?”고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한겨울에 시위 군중에게 물대포를 쏘는 나라, 생존권을 요구하다 6명이나 죽었는데 사과 한 마디 없는 정부와 대통령이 있는 나라, 경제문제에 대해서 정부 입장과 다른 의견을 인터넷에 밝혔다고 감옥에 가두는 나라, 입으로만 법치 법치 하면서 합법적으로 임명되어 임기가 남았는데도 기관장을 강제로 쫓아내는 나라, 부자들은 세금을 줄여주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예산은 대폭 삭감하는 나라.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응수하셨지요. 그리고 “대운하 안 한다고 했다가 이름만 바꿔서 4대강 개발하는 이런 나라에 사는 게 슬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몇 개의 항목이 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편이 아니라고 검찰과 언론이 하나가 되어 한 사람과 그 가족을 초토화 시키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분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전 국민이 추모제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무서워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한 항목이 하나씩 늘 때마다 우리 국민들의 슬픔도 하나씩 늘어간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그렇다고 원망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다시 누구 탓만을 외쳐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탓 그리고 우리 모두의 탓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도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도자의 생각을 미련하게 만들고, 지도자의 결정을 어리석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민 모두가 이제 모든 것을 남한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서 이 땅에 정의를 세우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데 최선을 다할 때,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 노무현 유스토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아멘.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보다 못한 제 자신을 봅니다. 저를 사시기 위해
당신은 당신의 소유물도 아닌 당신 자신을 파셨습니다. 그렇게 산 저를 끝없이
기다려주시는 당신은 지금도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십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내놓은 그 값으로 바로 나를 사셨음을 새삼 알려주시기나 하듯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매일매일 저의 나태와 게으름으로, 늘 남에게
인정받기만을 원하는 그런 나약함으로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을 지나칠 때 그 십자가가 저와는 무관하게
느껴질 만큼 돌처럼 무디어진 저의 마음을 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
아닌 부활의 길이라 일러주셨음에도 저는 저의 생명을 제가 지킬 수 있다며
거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 이제는 주님께서 저를 팔아 넘겨주세요.
주님,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주십시오.
십자가는 복된 아멘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주님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일반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봅니다. 스스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존중감이 결여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비교하는 것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않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긍정적으로 배울 점이 있을 경우, 그것을 받아들여 나의 일부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이고 마지막 말씀은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입니다. 베드로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늘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를 계속 찾았고, 또 누군가를 따랐습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3년이라는 시간을 ‘찾고 따르고 비교’했을 것입니다. 물론 기쁨과 성공도 있었고 실패와 좌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은 더 가까이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이 되고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일대일의 대응 관계입니다. 비록 각자의 부르심과 응답은 서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이긴 하지만 함께 주님을 따르는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매듭을 짓지 않고 끝내는 느낌입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해서 전도여행을 하는 느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죽기 전에 이 책을 썼기 때문일까요?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저의 생각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사도행전을
Never ending story로 만들려 한 것 같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복음 선포는 바오로 사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선포를 멈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 선포 중에 당한 고통을
코린토 2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의지가 강하고
열성이 대단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바오로 개인의 의지와 열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주님의 의지와 복음 선포의 힘입니다.
이 주님의 뜻과 복음 선포의 힘은 바오로 사도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은 “바오로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로 끝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아무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로마에서도 분명 어떤 방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바오로 사도가 방해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얘기는 끝이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하고, 아주 힘들게 살고 있다더군요.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어서 다른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친구들로부터 위로와 안타까움을 받고 있을 뿐이네요.
이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이 판단하고 있으며, 나의 틀 안에 상대방을 맞추려 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며칠 전, 주일학교 교리 선생님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누구랑 누구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남자가 아깝다.’ ‘아니다. 여자가 아깝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를 감히 인간이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의 얼마 되지 않는 경험으로 볼 때,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더 잘 사는 경우도 많더군요.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그대로 주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어떻게 될 지를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는 ‘이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말을 서로들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꼭 집어서 말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판단하고 그래서 자기 뜻이 주님의 뜻인 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주님께서 저 사람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나요? 저 사람을 미워하고 단죄하라고 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인 양 자신 있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통술’이 뭐냐고요? 말로는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직접 드셔보셔야 하는데…. 그래도 설명하자면 안주가 여러 수십 가지 딸려 나오는 술 한 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통술집’ 수십 집이 몰려 있는 시 지정 ‘통술거리’가
두 군데나 있으니 마산을 가히 ‘통술시’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양한 수십 가지의 안주가 나오려면 주인 입장에서는 안주 장만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을 줄여주는, 어느 집이나
똑같이 내어놓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본 안주, 속칭 ‘찌게다시’입니다.
어디가든 꼭 있는 것, 없어도 그만이지만 막상 없으면 허전한 것.
사람들 중에도 이런 이가 있습니다. 어느 단체나 성당에 가든 꼭 약방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남의 일에 나서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베드로가 쓸데없이 남의 일에 나서다가 주님께 면박을 당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우리도 남의 일에 너무 궁금해하지 말고 예수님 따르는 데 더 신경씁시다.
이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배고픈 손님에게 고기반찬 하나라도 더 해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배고픈 손님들이 마음껏 드실 수 있도록 반찬도 일고여덟 가지를 차려서 대접하지만 늘 풍족합니다. 차고 넘쳐 동네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합니다.
자발적으로 도와주시는 분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매일 두세 명에서 많게는 열다섯 명도 넘는 자원 봉사자들이 도와주십니다. 노숙인들이 노숙생활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마련한 ‘민들레의 집’ 식구도 이제는 스무 명이 넘습니다. 일반 공부방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민들레의 꿈’도 잘 꾸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밥 한 그릇에 우리의 사랑이 깃들게 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일을 벌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그 일이 잘 되도록 알아서 하십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민들레 국숫집이 나중에도 존속할지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 손님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나누면 족합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은 내용이며 요한 복음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고 말씀하시며 재차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아는 것이 더 많은 근심 걱정을 불러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 봐도 될 것을, 못 볼 것을 보게 된다는 의미에서는 다른 것들에 신경쓰지 말고 정작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나의 삶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 혹은 실패할 것인가 등에 대해 파헤치는 일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고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살아가는 일입니다. 삶은 언제나 공평하여 부자든 가난하든 지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이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의 모습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며 산 이는 비움 속에서 채워짐을 경험했기에 생명의 비움 뒤에 있을 영생의 채워짐을 알고 마지막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겠지만 욕심내며 끝까지 채우고자 애썼던 사람은 생명이 끝나버린다는, 없어져 버린다는 두려움에 안절부절 못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당당히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산 이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모습과 닮았다고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른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관계된 많은 부분에서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알아야 할 부분은 남김없이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행적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하느님께나 다른 이들에게 해야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바를 더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이 들려주는 하느님을 우리가 알고 깨달아 다른 이들에게 인도하고 알려 주는 것은 옛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던 계시사건이 오늘날의 우리를 통해서 재현되는 아주 의미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예수님과 관계되는 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한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남은 책이 세상을 채우듯이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도 이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제자 공동체와 요한의 제자 공동체의
증거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은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 같은
참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러 단체들이 필요한 이유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잘 증거할 수 있을까에 대해
선의의 경쟁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주님을 섬기는 기쁨을 증거해야 하리라.
나의 본당,
내가 소속한 단체들에 대한 자긍심도 중요하고
타 본당, 타 단체들의 증거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심을 가져야 마땅하리라.
근데
교회 안에서 이러한 자세가 부족한 것같다.
서로 자기 본당 밖에,
자기 단체 밖에,
자기 수도회 밖에,
자기 나라 밖에,
자기 회사 밖에,
자기 집과 식구 밖에
모르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증거의 삶의 기초가
자기 주변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눈을 열고 마음을 드높여 나가야 하리라.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은
사도 바오로의 증거의 삶을 의미심장하게 전해 준다.
사도 바오로는 셋방에서 만 2년간 머물면서 선교를 한다.
사도 바오로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자세가
이렇게 가난하게 셋방 살림하고
손수 노동에서 밥 벌어먹고 살면서 선교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교본당이나 공소사목을 하는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평신도들을 존경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나 자신은 그러한 증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난하고 겸손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눈시울이 뜨겁도록 아름답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나의 구체적인 삶에서는
셋방보다는 전세방
전세방 보다는 내집
그것도 더 큰 평수의 집을 갖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쓰는 우리가 아닌가...
천막 성당에서
상가 성당으로
마침내는 거창한 성전으로 가야만이
뭔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해 내었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아닌가...
증거의 삶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고 소박해야 한다.
단순하고 가난해야 한다.
작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큰 능력이나 재능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성령강림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우리,
무엇을 청할 것인가...
어떤 은사를 청할 것인가...
금년에는
이렇게 작고 소박함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를
청해봄이 어떨까?
그동안 줄곧 듣던 요한복음과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자기는 순교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지 묻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그가 장수하든 말든
그것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네 일, 즉 당신을 따르는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형제에 대한 관심을 끄라는 얘기이기보다는
베드로에게 긴박한 요청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한가하게 다른 사람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시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은
“너는 나를 따라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일은
병아리가 어미 닭을 졸졸 따르는 것과 같이
주님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닌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행적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 6번에서 얘기한
주님의 양들처럼 따르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종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착한 목자의 그 수난의 삶을 피하지 않고 잘 따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착한 목자를 잘 따르기 위해
착한 목자를 바라보자고 하는데
여기서 바라본다는 말은 라틴말로 Attendo입니다.
영어로 Attention이지요.
주목하고, 집중하여 바라보고,
다른 곳으로 향하지 말고 그것만을 직면하여 보는 뜻입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고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한 눈 팔지 말고
오직 우리가 따라야 할 주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의 그 뜻입니다.
베드로도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도
주님을 따르는 주님 양으로서의 길,
"My Way"를
한 눈 팔지 않고
충실히 간 우리의 본보기들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는 제자를 가리키며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물어봅니다. 그 사람은 요한 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란 표현입니다. 열두 제자를 예수님께서 다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그분께서 더욱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사도 요한과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씌어진 복음이기에 요한에 관한 기록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져 있는 듯합니다. 사도 요한은 베드로,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맞이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기적의 장소에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만큼 스승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장에는 이들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던 그날부터 망설임 없이 따라가야 했던 것이 자신의 소명이며 숙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치 말고 베드로는 예수님만 열심히 따라 오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서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될 건지 베드로가 관심을 가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나 베드로처럼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기록하여 훗날 사람들이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요한 복음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말씀하셨던 바대로 베드로는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직책을 맡았고 사도 요한은 복음을 기록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들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일을 맡기십니다. 각자의 불리움은 서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이고 모두 중요한 것이지 어느 일이 더 중요한 것인가의 차이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처럼 다른 일을 하게 될 사람들을 두고 곁눈질하거나 잘하느니 못하느니 판단할 여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각자가 잘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우리 각자의 특성에 맞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위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걸어야 할 참된 길은 들락날락 않는다고 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 이에게 알아야 할 것은 꼭 배우고 익혀서 깨우쳐야 하겠지만 몰라도 되는 것은 아예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이 순리일 듯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각자의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전 열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어릴적 운동회때 빠지지 않는 종목, 줄다리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줄다리기 경기는 오래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행해져 왔습니다. 힘을 합쳐서 단결력을 과시하는 운동이어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신바람을 내곤 합니다. 그런데 힘을 합치면 시너지 효과가 나야 할 텐데, 선수들 본래의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5명의 선수가 있고 평균 1의 힘이 있다고 하면, 산술적으로는 5의 힘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5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실시한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힘껏 당긴 힘[張力]은 1인 평균 63㎏이었습니다.
2인 1팀으로 하여 당긴 힘은 1인 평균 53㎏이었습니다.
8인 1팀으로 하여 당긴 힘은 평균 31㎏이었습니다.
참가 인원이 많을수록 1인의 힘은 줄어듦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집단의 일원이 되면 책임감이나 의욕이 줄어드는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사회적 손빼기(social loafing)’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최선을 다하다가도 누가 있으면 '누군가가 하겠지…'하는 의존심이 자기도 모르게 생기는 것입니다.
큰 조직의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누군가가 하겠지…'하는 심리 때문에 일의 공백이 생기거나 효율이 떨어지는 것도 사회적 손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컨베이어 작업처럼 일의 성격을 명확히 해야만 손실을 막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하겠지…'하는 생각을 우리는 한 적이 없었을까요 ?
이제 우리는 나부터 최선을 다하는 형제자매가 됩시다 !
아프리카 사람들은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건넌다고 합니다. 그래야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니까요....오늘 우리에게도 무겁게 느껴지는 짐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우리를 센 물살 건너 행복으로 이끄는 복된 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가 하겠지…'하는 의존심을 버립시다. 또한 "누가 힘을 안 주고 있어"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는 탓을 남에게 돌리려는 마음을 버립시다. 힘을 합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참 용기와 "내 탓이오"하고 먼저 나서는 신앙인임을 보여 줍시다.
한 마을에 그것도 서로 옆집에 너무도 다르게 살고 있는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오손도손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비해 그 옆집은 하루가 멀다하고 식구끼리 매일 다투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매일 다투다 못해서 옆집에 다정하게 사는 가정을 좀 본받기 위해 온 가족이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저희는 가족끼리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다투는데 어떻게 하면 이 집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희는 다툴 일이 없던데요?"
마침 행복한 집의 딸이 방문 온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과일을 담을 접시를 꺼내다가 그만 깨뜨리고 말았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그만 조심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엄마가 같이 유리조각을 주워 담으며 말했다.
"아니다. 엄마가 하필이면 그런 곳에 접시를 두었구나."
엄마의 말을 듣던 아버지가 말했다.
"아니오. 내가 아까 보니까 접시를 둔 모양이 위태해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도 바로 두지를 못했소. 미안하오." ... 그 집을 방문했던 가족은 그 집 식구들의 대화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이제 부활주간이 끝나고 연중주간이 시작됩니다.
연중주간은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번 한주도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어 참 용기를 실천하는 멋진 한주 되시기를 빕니다...............◆
사방이 튼튼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포도밭, 이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포도나무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타리에는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울타리를 없애버리고 그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뒤, 이 포도밭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점점 망가져갔습니다. 울타리를 베어버리자 사람과 짐승들이 마음대로 포도밭에 들어와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포도가 열리진 않지만 포도밭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도 나무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위의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울타리보다는 포도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포도나무가 없다면 포도밭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니까요. 그러나 울타리 없이는 포도밭도 제대로 존재하기 힘듦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도와준 가족, 친구,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고생하면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주셨으며, 선생님들은 정성껏 지도하여 훌륭한 인재로 길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응원과 격려를 통해 인정과 우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재주만으로 모든 것을 일구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었던지요? 그들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는 당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 베드로는 마침 뒤따라오던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어떻게 될 것이냐고 여쭈어 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다른 제자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그런 문제에 관심 가지지 말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잘 따를 것인지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굳이 이러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른 제자에 대한 판단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고마운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계심 그 자체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뻐하던 제자들에게 스승님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
베드로가 스승님께 요한의 장래를 묻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고,
쟁기에 손을 대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루카 9,59-62)고
가르쳐주셨습니다.?가르침대로라면 제자는 하늘을 선포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하늘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필리 3,12-21).
하늘의 시민이란 뒤에 있는 땅을 마음 편히 놓고 앞에 있는 하늘을 향하여
내달리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상을 얻으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앞에 놓인 사랑을 향하여 내달리는 사람입니다.
요즘 세간에 예수님에 관련된 책이나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 「다빈치 코드」·「유다복음」·「유다가 전하는 복음」, 다큐멘터리 '예수의 잃어버린 무덤',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강해' 등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다. 심지어 기존 그리스도교 신자들마저 신앙의 혼란에 빠지고 있다. 개신교는 이에 강력히 대처하고 있지만 가톨릭은 일부 성직자만이 비판적이다. 우리 사회가 다원주의화되다 보니 기존 종교의 근본마저 상대화하려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사실이 아닌 '픽션(fiction)'이 '팩션(faction)'이라는 기교로 '팩트(fact)'로 수용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교회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에 대해 교회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를 향한 외부의 도전은 때로는 교회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대중문화와 소통하려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과 기록을 분명히 하였고 그 모든 것이 참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다양한 가치관을 쏟아내는 대중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주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시류에 쉽게 흔들리는 짝퉁 신앙인이 될 것이다.
-신동원신부-
5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요즘 저 개인으로서는 늘 둘째, 넷째 주말이 되면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왜냐면 초중고 학생들이 2, 4주 토요일은 수업이 없어 학교를 가지 않으니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만 가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시간도 좋겠지만 그래도 주일을 지키면서 가족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혼자서 걱정을 한답니다.
5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날들을 보내며 서로에게 기쁨과 감사, 그리고 사랑을 나눴던 이 시간도 벌써 다 지나가고 마지막 주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생명과 세상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시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 새로운 모습으로 영원한 참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부활의 시기도 이제 곧 다가 올 성령강림 대축일 맞이하며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시기는 이제 곧 마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삶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주어질 마지막 그날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베드로에게 들려 주신 말씀처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는 나를 따라라”하시며, 부활을 체험한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살아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진 모든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세상과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삶 전부를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삶과 그들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제자들처럼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 자신뿐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순간까지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각각 다른 모습과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삶안에서 예수님과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따를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받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될것이며, 그 사랑을 고백하고, 전하며, 나누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독서> :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를 소중히 사용하는 바울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바울로는 드디어 로마에 들어갔다. 그는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2년 동안이나 유대 법정이나 이방 법정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이제 복음은 로마와 그리고 로마 교회로부터 ‘땅 끝까지’(1,8) 퍼져나갈 것이다.
복음 선포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당국자들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을 것이며,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배려 때문에도 방해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율법 엄수주의는 이방 선교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이방 선교를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해왔다. 이제 복음 선포는 이러한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바울로는 로마에 사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말하였다. 자신은 율법을 거스른 적이 없었으나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소망인 부활의 문제 때문에 갇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들어주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 그분은 온 이스라엘의 희망인 동시에 온 인류의 희망이다. 따라서 자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유대인의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온 인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복음 선포는 세계의 중심지 로마로 옮겨졌고, 로마로부터 전 세계로 전파되어 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바울로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허락하셨다. 바울로는 감옥에 갇힌 것을 기회로 하여 복음 전파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겼다. 물론 그 자신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없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울로가 알 수 없게끔 작용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때때로 악을 허락하시는 까닭은 악을 통해서 더욱 큰일을 하시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악이며, 더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 악과 고통 속에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담겨져 있다. 때문에 신앙인은 악과 고통 속에서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신앙인은 악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바울로는 로마에서 경비병의 감시를 받기는 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셋집을 얻어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맞이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수많은 방해를 받고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록 거주의 제한을 받기는 했어도 아무런 방해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 곳에 머무름으로써 그는 기도에 잠심할 수 있었으며, 하느님과 더 깊이 만날 수 있었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신학을 키워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소중히 사용한다. 비록 주어진 여건과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할지라도 포기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이끌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주어진 여건과 상황을 나름대로 소중한 기회라고 믿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1-2)라는 말씀대로 꾸준히 하느님을 전한다.
오늘 악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자.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을 꾸준히 선포하는 삶을 살자..............◆
중요성에 대하여 많은 선지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꼭 선지자가
아니라도 일상 안에서 자주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침묵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침묵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 무지에서 오는 것,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켜야 하는 것, 정의와 선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침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하에서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분위기 반전을 위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오히려 침묵을 승화시킨
경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호기심을
떠나 다른 제자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다른
제자들처럼 침묵을 지켰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인간의 나약성과 침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판단은 호기심에서 출발합니다. 반대로 침묵은 사랑 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도 있고, 이웃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 성심 성월 동안 깊이 묵상하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