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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섬 여행을 갔다 왔다. 지난 6월에 다녀왔으니 5개월만인가 싶다.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3일까지 이어진 4박4일간의 섬 여행이었다. 11월 29일 월요일 오후에 여수로 가서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고흥으로 향해 시작된 섬 여행이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전남 완도에 있는 섬을 다녀왔다. 지난번과 다른 것은 지난번에는 조그마한 섬들이라면 이번에는 큰 섬들. 금일도와 금당도, 노화도와 보길도 그리고 소안도 등의 큰 섬과 넙도와 서넙도 그리고 후장구도와 마안도, 노록도, 예작도 증의 작은 섬들. 크고 작은 섬들 10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마지막 날인 4일차인 3일에는 강풍 때문에 발이 묶여 제대로 가보지도 못하고. 아침에 숙소인 노화도에서 출발하여 바로 옆에 있는 소안도라는 섬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남도의 대표적 섬 고장 한반도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섬 완도. 201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어 실로 ‘남도의 대표적인 섬 고장’이라 할 만하다. 본섬인 완도 외에도 신지도 고금도 금일도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당사도 청산도 등 54개의 유인도와 147개의 무인도가 모두 완도군에 속한다. 뭍이 개발과 문명으로 넘쳐날 때도 섬은 사람과 문화를 잘도 지켜왔다. 어느 섬이나 모두 독특한 풍물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 다소 신비스럽지만 지극히 토속적이다. 남도문화의 원류인 것이다. 이러한 완도의 섬을 4일 동안 돌아다녔다. 11월 30일 화요일, 아직 어둠이 채 가지도 않은 새벽 4시 넘어서 여수 백야도에서 출발한 차는 금당도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고흥 녹동으로 향했다. 녹동에 도착한 시각은 아직 6시가 채 안된 시각. 금당도 가는 첫배가 6시에 있다고 한다. 그 배를 타고 금당도에 가기로 했다. 남해안 수산물 집결지이자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진 고흥 ‘녹동항’은 지난번에도 왔었다. 목적이 있어 왔던 것은 아니고 여행을 마치고 가는 길에 자가용 회수를 위해 울산에 사는 사진작가와 잠시 들른 에피소드가 있던 장소다. 녹동항에서는 거금도, 득량도, 시산도 등 인근 도서 외에 제주도, 거문도, 금당도, 금일읍 평일도, 약산도 등을 오가는 여객선이 입출항하는 요충지 일뿐 아니라 ‘금당 8경’을 일주하는 유람선의 기착지로 유명하다. 평화해운(주)이 운항하는 ‘평화페리호’에 몸을 싣는다. 이 여객선은 녹동에서 거금도와 연흥도 등을 거쳐 완도로 오가는 배다. 녹동에서 종착지인 금일도 동송까지는 1시
간 15분 정도 소요되고 우리가 가는 금당도까지는 45분이 걸린다. 배에 올라타자마자 하차하지 않고 차 안에서 바로 눈을 붙인다. 철부선엔 크레인을 실은 트럭이 두 대나 있다. 금당도는 장흥의 회진과 고흥의 마량에 접한 섬으로 행정구역으로는 완도군에 속하지만, 장흥과 녹동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지역이다. 접근하는 것도 완도에서 보다 고흥 녹동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빠르다. 15개 무인도 거느린 금덩이 같은 섬, 금당도(金塘島) 녹동에서 사슴섬(소록도)을 멀리하고 50여 분을 달리면 금당도에 이른다. 여객선이 목적지인 금당도에 닿았다. 시간을 보니 6시 50분이 넘었다. 날은 아직 어두스름한 날씨를 보였다.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바닷물에 반짝이는 모습이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배에서 내리니 왼쪽 방파제에 섬 표지석이 있다. ‘새천년을 여는 완도군금당면’이란 표지석이다. 표지석 아래에는 섬의 연혁에 대해 적혀 있다. 금당도는 장흥의 회진과 고흥의 마량에 접한 섬으로 행정구역으로는 완도군에 속하지만, 장흥과 녹동에 생활권을 두고 있는 지역이다. 고려시대 이후 장흥에 속해오다 1896년 완도군이 신설되면서 지금의 완도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6년에 금(평)일면, 생일면과 함께 금일읍으로 합병되었고, 1986년에 금당면으로 승격되었다. 해남군과 완도군 등 지자체마다 서로 다툼이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우리 땅 최남단은 해남의 ‘땅끝’. 완도의 금당도는 위도 상으로는 해남 읍내보다 남쪽에, 땅끝보다는 북쪽에 있다. 그래서 해남에서 봄배추가 출하되고 황토밭에 감자를 심을 무렵이면 금당도에도 바다와 들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금당도는 동쪽의 고흥반도와 서쪽의 장흥반도 사이에 있다. 따라서 항상 파도가 잔잔하고 수온이 적당한 천혜의 어장이다.
득량만 끝자락에 떠 있는 아늑한 섬 금당도는 김, 톳, 미역 양식과 문어와 멸치가 많이 잡히는 황금어장을 가지고 있다. 일찍부터 완도가 김과 미역 등 해조류 양식이 발달하였지만 계속되는 양식과 해양환경의 악화로 어장이 노후하였다. 반면에 금당도는 주변에 인접한 섬이 없고 바다가 넓고 조류 소통이 좋아 좋은 어장을 유지하고 있다. 30여 년 전까지 금당도의 김은 전국에 생산량과 품질 면에서 으뜸으로 평가되었다. 완도 대부분 지역들이 김 양식을 멈췄지만 아직도 금당도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김 양식을 하고 있다. 이 주위의 섬들이 금일, 금당, 생일도의 금곡 등 ‘금’자의 지명이 붙은 것으로 보아 금이 산출된 고사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금덩이(금댕이)가 금당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당도에는 차우리와 육산리, 가학리 3개의 리에 크고 작은 마을 6개가 있는데 우리가 내린 곳은 차우리에 위치한 울포항이라는 곳이었다. 금당도에는 두 개의 선착장이 있는데 동남쪽의 비견도를 바라보는 울포항과 북서쪽의 가학항이 그것이다.
‘울포(鬱浦)’는 지명유래를 보면 술맛이 좋아 울금(鬱今)이라 호칭하였으나, 이후 울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1770년 조선 영조 대에 인천 이씨가 금일읍 평일도(현 금일도)에서 띠배를 타고 들어와 처음 입주하였으며 그 후 김씨 등이 이주하여 형성하였다고 한다. 아직 어둠이 가지 않은 7시. 우리를 싣고 온 배는 여기서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출발한다. 우리도 발걸음을 옮긴다. 선착장 옆에 매표소와 대합실이 있다. 그 옆에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후 자판기가 있어 커피 한 잔을 뽑아든다. 새벽녘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옆에 있는 관광안내도는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진행 방향으로 간다. 선착장을 벗어나니 삼거리. 오른쪽에 큰 공장이 있다. 이정표에 의하면 왼쪽은 ‘금당로’고 오른쪽으로는 ‘차우길’이다. 금당로는 차들이 다니는 도로이고 차우길은 사람이 다니는 (골목)길이다. 따라서 금당로로 가면 가학항으로 이어진다고 했으나 결국은 나중에 만나게 되어있다. 오른쪽 차우길로 해서 걷는다. 면사무소로 가는 길이다.
얼마 안가 나타나는 수협 건물. 이곳에서는 제법 큰 건물에 속한다. 수협 건물 사이로 들어가면 길이 보인다. 우체국과 함께 마트와 식당 등이 모여 있다. 약국도 있지만 주변이 이른 아침인 탓에 조용 그 자체다. 건물 벽에는 그림을 그려놓아 보기 좋게 했다. 특히 이곳은 민박하는 곳이 몇 곳 보였다. 아리랑식당 등의 식당에서는 민박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이곳 울포항 주변에 식당과 여관이 집중되어 있다. 아리랑식당, 광주식당, 대일식당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식사메뉴로 백반과 생선회 등을 내놓는다. 마침 아저씨 한 명이 서성거리기에 말을 붙여본다. 외지인에 대한 의심의 시선은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발길을 돌려 골목을 누빈다. 이곳은 골목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만 있고 이어지는 골목은 없다. 그래서 때로 갔다가 다시 나오곤 해야 했다. 건물들 자체는 제법 오래된 것들로 새로 만들어진 것은 찾기 힘들었다. 물론 여느 섬들처럼 더러 빈 집도 몇 채 보인다. 몇 번의 골목을 누빈 후 눈을 돌리니 절이 하나 보인다. ‘금당암’이라고 한다. 선착장에서도 금당암을 알리는 표시판이 보였었다. 섬에서 사찰을 보기는 힘든 편인데 이곳에는 절이 있다. 건물 한 채로 이루어진 사찰로 대웅전은 가정집 같은 그런 분위기다. 대문으로 된 일주문(?) 옆에 관음상이 있고 그 뒤로 대웅전이 있다. 역시 섬의 사찰답다. 마당은 없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대문이고 바로 앞에 대웅전이란 전각이 있다. 스님이 책상 앞에 정좌를 하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여기서 뒤돌아서서 바라보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나와 계속 가면 얼마 가지 않아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마을회관 오른쪽으로 시멘트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가면 몇 채의 조립식 건물과 함께 언덕에 통신탑이 있고 그 주위로 군 시설인 낡은 초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통신탑 아래에는 정자로 만들어진 쉼터이자 전망대가 있다. 고금도 너머 섬과 섬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일출 포인트는 면사무소 앞 헬기장.
마을회관 주위에 관공서가 집중되어 있다. 금당면사무소를 비롯하여 파출소와 보건지소가 있다. 마을회관은 2005년에 만들어진 건물이다. 2층짜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지회관 왼쪽으로 라이온스클럽 마크가 붙은 건물이 있고 그 왼쪽으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그 왼쪽 건물이 보건지소다. 면사무소는 마을 중에서도 높은 지점에 위치해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섬들이 다 그렇지만 섬의 가장 큰 사각지대는 보건시설이다. 복지 중에서도 보건복지가 가장 취약하다. 그런 면에서 이곳 보건복지는 좋은 편이다. 금당면 보건지소는 1980년대 개설됐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최첨단 진료실과 디지털시스템을 갖춘 보건지소가 새롭게 들어선 것은 지난 2007년이다. 347.80㎡ 부지에 1층 내과와 외과, 한방과, 치과를 배치하고 퇴행성관절염이 많은 도서지역 노인들을 위해 물리치료실을 마련했다. 2층에는 공중보건의 숙소다. 여기서 길은 좌우로 이어지는데 아래는 울포항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오르막길은 가학항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 옆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수령이 300년생으로 둘레는 3.9m이고 수고는 18m라고 한다.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려 오르막길로 오른다. 도로는 2차선 아스팔트길. 섬이라서 그런가, 아침 안개가 뿌옇다. 어느 정도 오르니 이제는 내리막길. 왼쪽으로 섬치고는 괜찮은 집이 몇 채 보인다. 별장은 아닌 것 같고.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교회가 있다. 금당교회다. 동화 속의 궁전같은 그런 건물로 된 교회다. 그리고 더 내려가면 길은 사거리. 오른쪽에 마을표지석이 있다. 이곳이 ‘차우마을’이고 그 맞은편 마을이 ‘봉동마을’이다. 그런데 차우마을 뒤편에 있는 뒷산이 장난이 아니다. 정상부터 아래까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인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산이 공산(공정산, 68m)인데 묵직하게 새겨 점잖은 성인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 아래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온통 안개로 자욱하다. 이 산에 수저바위(마을 뒷산에 있는 이 바위는 매년음력 정월에 공을 드리면 득남을 하고 부귀를 누린다고 전함)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육동 북쪽으로 공정산과 건너보고 있는 산이 성인산(171m)으로 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금당도에는 소나무가 귀한 섬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나무는 매우 특별하지만 여기는 소나무가 귀한 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봉산’(封山)이라 해서 ‘나무를 베는 일’을 엄하게 금하였으며, 특히 관아의 건물과 병선을 만드는 재료로 이용된 소나무는 ‘송전’이라 해 특별 관리했다. 백성들이 관아와 병영에서 필요한 땔감, 숯, 장송목(관을 만드는 나무)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화폐’로 대납하거나 병선을 만드는 일을 부역해야 했다. 18세기 장흥에 속했던 금당도는 서남해 도서에서 최초로 발견된 ‘봉산’이라고 한다. 기록에는 금당도 섬 전체를 ‘봉산으로 만들어 벌채 위반에 대한 법을 엄히 규찰’하도록 하고 있다. 사실 17~18세기 무렵이면 사람들이 섬으로 이주해 들어오던 시기였기 때문에 건축용을 비롯해 일상생활에 나무가 많이 필요했지만 이를 엄격하게 제한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이 많았던 모양이다.
‘차우마을’은 1640년 조선 인조 대에 진주 강씨가 고흥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그리고 공산을 수리(독수리)가 넘어왔다고 하여 ‘수리넘어’로 불러오다가 다시 공산을 타고 넘었다 하여 ‘차우리(車牛里)’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맞은편의 ‘봉동마을’은 차우리의 작은 마을이라 하여 ‘작은몰’이라 칭하다가 그 후 차우리 공산에서 봉이 이 마을로 날아왔다고 하여 ‘봉동(鳳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시간을 보니 7시 반.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에도 학교 건물이 있는데 폐교된 학교다. 2층짜리 건물은 페인트가 다 벗겨진 상태. 이곳이 바로 금당초등학교 차우분교. 지난 1999년에 본교에 통합되었다. 이 학교는 1970년에 금당중앙초등학교로 개교했다가 1996년에 차우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가 결국 1999년에는 폐교되고 만 것이다. 이 마을 한 가운데에는 4각형의 연못이 있다. 도로변 옆에 위치한 연못이 멋스럽다. 연못 한 가운데에 비치는 공산과 건물들의 대칭이 아름답다. 연못을 따라 3면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연못 건너편에 팔각정 쉼터와 함께 기와집으로 된 차우리사무소가 있다. 앞면 4칸 짜리의 단층 기와집은 멀리서 보면 문화재처럼 보인다. 연못을 따라 한 바퀴 돌면 다시 2차선 도로. 바로 ‘금당로’다. 그리고 왼쪽으로 들어선 큰 건물은 차우리경로복지회관. 제법 잘 만들어진 건물이다. 이어 몇 발작 더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약방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어 골목길로 들어가 본다. ‘금당로 102번길’이다. 그러나 약국은 우리가 도회지에서 보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문이 닫힌 약국은 목조로 된 조립식 건물에 마치 가게처럼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다시 나와 금당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이정표에 의하면 100m 앞에 갈림길. 오른쪽은 가학항 가는 길이고 왼쪽은 신흥으로 가는 길이란다. 갈림길까지 걸어간다.
이어 닿은 갈림길. 오른쪽에 천주교 공소알림판이 있다.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면 금당천주교회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뒤로 전형적인 성당건물이 있다. 섬에서 만나는 성당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물론 정식성당이 아닌 ‘공소’다. 경내에 들어서니 가정집 같은 아담한 모습에 잘 가꾸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다양한 조형물이 있고 휴식공간도 조성되어 있다. 마침 이재언 목사님이 운전하는 차가 온다. 그 차를 타고 가학 방면으로 향한다. 가학 가는 도로는 시멘트길. 주변은 임야. 집들은 찾기 힘들다. 이 도로를 타고 가다 마을이 나타나자 학교 앞에서 내린다. 이곳이 육동이라는 마을이다. 자세히 보면 마을 주변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지명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다가 보이지 않으므로 육골이라 호칭하다가 ‘육동(陸洞)’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육동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금당중학교와 금당초등학교가 나란히 있다. 2000년부터 두 학교를 통합 운영하고 있다. 42년의 전통을 가진 금당중학교는 1968년에 개교했으며 초등학교는 1928년에 사립금당보통학교로 개교, 1953년에 금당국민학교로 개명했으며 1996년에 금당초등학교로 개명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당중학교는 올해(2010년) 13명이 졸업함으로써 지금까지 2,81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54명이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는 올해 79회를 맞아 지금까지 3,98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사실 완도 바다의 해금강 금당도는 한때는 부자 섬이었던 곳이라 주민의 교육열도 높다. 육순, 칠순의 노인도 대부분 육지의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정도다. 이곳에서는 유명 인물도 많아 그 중 <녹두장군> <암태도> <자랏골의 비가>를 쓴 작가 송기숙 씨가 바로 이곳 금당도 출신이다. 산을 배경으로 하는 중학교 건물은 2층으로 붉은 벽돌로 되어있다. 그런데 건물 형태가 마치 펜대를 연상시키는 구조로 되어있다. 가운데에 삼각형으로 그 가운데에 동그란 원형이 있어 마치 펜촉을 이미지화한 듯싶다. 그 앞에는 ‘높은 이상, 알찬 하루, 밝은 미래’라는 황금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운동장 한 쪽 초등학교 옆에는 ‘금당관’이 있다. 체육관이다. 금당관을 지나면 바로 금당초등학교. 제법 넓은 운동장을 가진 이 초등학교는 병설유치원도 운영하고 있다. 유치원생만도 무려 15명. 정문 앞에는 ‘책읽는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학교 안 담벼락 주변에는 이승복상을 비롯하여 효자 정재수 그리고 공덕비 등이 세워져 있고 교사 앞에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한 다양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아직 8시도 안된 시각. 통학버스가 닿더니 학생들이 내린다. 5명의 중학생이 교문을 통해 운동장으로 간다. 고등학교를 나오면 옆에 금당중앙교회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일군의 비석군이 있다. ‘양세효열각’으로 열녀쌍비다. 여기에는 4기의 열녀비가 세워져 있는데 옛 비와 새로운 비로 각기 두 기씩이라 결국 두 명의 열녀비다. 이천 서씨 가문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두 열녀를 기리는 열녀각이다. 사실 이 섬에는 이 외에도 열녀비가 제법 많은 편이었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가학항을 향해 달린다. 길은 오르막. 오르다가 왼쪽을 보면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는 ‘삼산저수지’다. 금당도 경지면적 103ha의 70%인 70ha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 저수지다. 삼산지는 금당도의 절경 여덟 곳으로 꼽히는 팔경에 속할 정도로 주변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사실 금당도는 섬 자체로서의 매력은 별로 없지만 낚시꾼들이 찌맛을 느끼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감성돔(일명 강생이)과 농어가 잘 잡히는 곳이라고 한다. 저수지 전역이 모란과 뗏장수초로 덮여 있어 심한 가뭄에도 쉽게 고갈되지 않고, 자생 새우 또한 많아 붕어의 서식, 은신처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마을이 삼산마을. 마을 앞 좌우에 중골산, 중암산, 상랑산 등 삼산이 우뚝 솟아 그 산맥이 마을로 펼쳐져서 ‘산갈리’라고 호칭되다가 ‘삼산리(三山里)’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스쳐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동막재’를 지나간다. 길은 이후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내리막길이다. 이어 닿은 곳은 가학마을 입구. 높이만큼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입구에 가학교회가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가학마을’이라는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시간을 보니 8시 5분. 금당도에서 바다 의존도가 가장 높은 마을이 바로 ‘가학리’이다. 장흥에서 1620년 무렵 이씨와 정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는 가학리는 마을이 학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김 양식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톳과 미역 그리고 다시마와 가두리 양식을 많이 하고 있다. 대부분이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어 산지가 많다.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과 농업을 겸한다.
바다 의존도가 높고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어장을 이용하는 마을은 아직도 마을의례가 남아있는 지역이 많다. 이곳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가학리에는 당집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마을 가운데 어촌회관 뒤편으로 당집이 있다. 각 마을에서는 옛부터 그 마을 내의 청결한 곳(높지 않은 산봉이나 산능)에 당집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정초에 제사를 올린다. 이어서 농악(당굿)을 울리기도 하는데 당에는 그 부락의 수호신을 모셔놓고 연중 동네에 모든 재난의 예방과 태풍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매년 정월이면 할아버지당(상당)과 할머니당(하당)에 당제를 지내고, 바닷가에서 ‘갯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2002년부터는 할아버지당인 상당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대신 유래비만 세워두었다. 마을 앞은 바로 포구. 선착장은 따로 떨어져 있다. 포구에는 물이 다 빠진 상태로 배들이 바닥을 드러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 포구 방파제들도 특이하게 생긴 포구다. 마을 안에는 마을정보센터가 있다. 2층짜리 건물로 ‘가학어촌회관’이 그것이다. 그 옆에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 소나무가 특이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옆으로 길게 자라고 있었다. 저러다가 집을 덮칠 것 같다. 바로 옆에는 가게와 함께 자판기가 있고 회관에는 젊은 청년들이 제법 모여 소일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모여 놀고 있다. 통학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기다리느니 그냥 걸어가면 되겠는데 하고 이야기를 하니 (걷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어촌회관 옆에는 복지회관이 있다. 회관 옆으로 마을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 있고 이 길 이름은 ‘금당해변로 133번길’이다. 이 길로 해서 안으로 들어간다. ‘아름슈퍼’라는 이름이 좋은 가게가 있고 그 앞에는 팔각정 쉼터가 있다. 그 앞에는 놀이터가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침 학생들이 계속 나오는데 나를 보고는 인사를 한다. 어? 그래 반갑다! 외지인에 대한 인사성이 참 밟다.
길을 걷다 오른쪽 마을 끝에 가면 학교 건물이 있다. 학교 가는 길은 조금은 험하다. 이곳이 금당초등학교 가학분교장인데 역시 지난 1993년에 본교와 통합되었다. 하얀색 건물이지만 색이 회색으로 바랬다.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에는 황소 한 마리가 멀쯤하게 바라보고 있다. 주변 담벼락은 이미 거의 폐허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마을을 바라보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역시 학교는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다. 이곳 골목길은 구불구불하다. 남서쪽 마을 앞은 바다요 북동쪽 마을 뒤는 산. 집들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좁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의미다.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본 뒤 뒤쪽으로 해서 나오면 조그마한 다리를 건넌다. 그 앞은 가학선착장으로 이어지는 해안길. 2차선 해안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금당도 앞바다는 여객선이 오가는 뱃길만 빼고는 모두 양식장이다. 아니 금당도뿐 아니라 완도의 모든 섬이 그렇다. 섬이 양식장에 둘러싸인 형국. 섬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부표들이 어지럽게 떠있다. 뭍의 어느 들판보다도 광활한 미역밭이 펼쳐져 있다. 일찍부터 완도가 김과 미역 등 해조류 양식이 발달하였지만 계속되는 양식과 해양환경의 악화로 어장이 노후하였다. 완도 대부분 지역들이 김양식을 멈췄지만 아직도 금당도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김 양식을 하고 있다. 금당도에서는 1974년 가학리 인근 무인도에서 최초로 미역양식을 시작했다. 완도의 김과 톳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호황을 누려, ‘완도에는 개들도 1만 원 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가학리의 한 주민은 초등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동생을 설득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김 양식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김농사가 수지맞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김 한 톳 값이 지금과 차이가 없었으니까 그럴만하다.
길을 걷다가 해안가에서 염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 아저씨를 만난다. 길 주변에는 몇 채의 조립식 건물이 보인다.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앞바다에 떠있는 몇 개의 섬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곳에서 보이는 섬은 서너 개가 되는데 선착장 가는 해안길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 ‘도각도’라고 한다. 물론 무인도다. 그 뒤로 보이는 조그마한 섬이 재도. 그 옆으로 길쭉하게 생긴 섬이 ‘질마도’라고 하는데 해변이 좋단다. ‘금당33경’의 하나라고 한다. 물론 주변 해역은 양식장이다. 그리고 이 섬은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씨 소유 섬이라고 한다. 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개발허가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하얀 천막으로 몇 동의 시설을 설치해두었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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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당도 구석구석을 방문하신모양입니다.
대단한 열정을가지신 분인것 같습니다.
덕분에 잘 읽고 구경도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방문하여 좋은 자료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