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사라지고
김 국 자
내 꿈은 백의의 천사가 되는 것이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나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들 자랄 땐 자신의 진로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니는 딸자식 중학졸업이면 과분하다 여기는 분이라 상급학교 진학을 적극 반대했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는 군산에 있는 개정간호고등학교였다. 지금은 간호대학으로 승격했지만, 그땐 간호고등학교로 장래가 유망한 학교로 손꼽혔다. 내가 그 학교를 동경하게 된 동기는 그 학교를 졸업한 친척언니의 영향이 컸다. 그 언니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나도 언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 언니 네는 우리 보다 식구도 곱절 많고 가난했지만, 교육열만은 대단했다. 언니는 학비와 기숙사 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하고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배가 아프다며 식사시간에 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사정을 짐작한 주방 아주머니의 배려로 누룽지만 먹고 공부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으로 졸업한 용기를 본받고 싶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 학교 부속병원에 취직하는 언니를 보고 어머니 마음이 누그러지고 드디어 진학을 허락하셨다.
지금은 입학원서를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제출하지만, 그땐 입학원서를 직접 제출했었다. 언니가 보내준 입학원서를 제출하러 갈 때, 학교를 직접 보고 싶다며 부모님이 동행하셨다. 지금은 동백대교가 신설되어 교통이 편리하지만, 그땐 대천에서 장항까지 기차를 타고, 장항에서 군산까지는 배를 타고 갔다.
마중 나온 언니의 도움으로 입학원서를 제출하는데, 언니가 “감기 들었니? 왜 자꾸 코를 훌쩍거려?”하고 물었다. “코가 자주 막히고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더니 “검사부터 받아보자”며 이비인후과로 안내했다. 검사 결과 축농증이 심각하다며 수술날짜를 예약했다.
지금은 축농증수술을 하루에 마치지만, 그 땐 일주일 간격으로 한쪽 씩 나누어 수술했다. 며칠 동안 퉁퉁 부은 얼굴로 음식 먹기도 불편하고 너무 고통스러웠다. 축농증수술이 회복되기도 전에 우리 집에 대대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읍내 병원에 입원하셨다. 목에 계란노른자처럼 둥글둥글한 것이 집히고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검사 결과 갑상선암으로 판정되어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하셨다. 암 세포가 어깨까지 번져 귀를 떼었다가 다시 붙일 정도로 위험한 수술이라 내 진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어 달 만에 퇴원하신 아버지께서 “진학은 내년에 하기로 하자” 말씀하실 때, 목이 메어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다음 해 봄은 돌아왔지만, 진학의 꿈은 파랑새처럼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 어머니마저 병석에 누웠기 때문이다. 아버지 간병하느라 무리한 탓인지 어머니는 중환자가 되어버렸다. 시골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며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셨다. 대수술을 받은 어머니는 무거운 것도 들지 못하고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돕던 어느 날,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신문에서 본 여군모집 공고가 나를 유혹했다. 간호장교로 복무중인 친구의 편지를 받고부터 더욱 더 간절했다. 원서를 제출하려면 보호자의 도장이 필요했다. 아버지 몰래 도장을 찍으려다가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지금은 여군들의 활약을 자랑스럽게 평가하지만, 그땐 딸자식이 군에 입대하는 걸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자식하나 없는 셈 치겠다’며 화를 내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부모님 말씀 어기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때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더라면, 나는 평생 가슴앓이 하며 살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