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켄지(James N. Mackenzie) 선교사
길원필 목사(사랑의 교회)
소명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는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의 아일 유(Isle Ewe)라는 섬에서 아버지 케네드(Kenneth) 매킨지와 어머니
케더린(Catherine) 사이에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맥켄지가 5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맥켄지의 삶은
순탄하지 못하여 16세가 되던 1881년 10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난 그는 1882년 봄 글라스고(Glasgow)로
갔다. 이곳에서는 드와이트, 무디, 생키 등 미국의 부흥사들에 의해 전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신앙 부흥 운동의 열기 속에서 맥켄지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무디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은 그는 1883년 봄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결심을 이루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생활 대책이 서지 않았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교육과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맥켄지는 1885년 1월 중국으로 파송되는 ‘캠브릿지 세븐’(Cambridge
Seven)이라고 불리우는 일곱 청년의 선교사 파송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캠브릿지 세븐이란 캠브릿지
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일곱 청년이 자신의 모든 희망찬 미래를 뒤로 하고, 복음을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하고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으로 중국으로 향했던 젊은이들을 의미한다. 이들의 결단과 사역은 그 이후의 선교사역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맥켄지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885년 글라스고 대학에 입학해 1891년 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가을에는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 선교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였다.
한편 맥켄지로 하여금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페이튼(John Paton)이었다. 페이튼은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선교사 중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는 1858년 스코틀랜드의 개혁
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의 파송을 받아 뉴 헤브리디즈로 가서 일한 개척 선교사였다.
그는 죽음의 위험과 고통스런 날을 인내하면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피선교지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했던 인물인데, 후일 그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로 이적하였다.
그가 1881년부터는 영국과 영국의 영향하에 있는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선교집회를 열고 뉴 헤브리디즈 선교를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여러 후원자를 통해 얻은 후원금으로 데이스프링(Day spring)이란 이름의 배를 구입하고
여러 섬들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시약을 베풀었던 일은 유명한 일로 남아 있다.
페이튼이 1894년 글라스고를 방문하고 글라스고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맥켄지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때가 1894년 1월 14일 주일 오후였다. 1월 17일의 모임에도 다시 참석하였다.
이 페이튼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확실히 분명히 결단하게 되었고,
과거에는 중국을 생각했으나 이제는 식인 습관과 무지와 폐습에 빠져 있는 뉴 헤브리디즈로 가기로 작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맥켄지가 페이튼의 강연을 들을 때 지금 필요한 것은 사실 선교 기금이 아니라 선교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확신은 그로 하여금 뉴 헤브리디즈 선교를 자원하게 만들었다.
매켄지는 매주일 모이는 해외 선교를 위한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 선한 열심은 또 다른 축복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도회를 통해 후일
그의 아내가 된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를 만났고 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가렛 켈리는 1870년 1월 17일 생인데,
콩고에 선교사로 갈 목적으로 간호사 훈련을 받은 여성이었다. 이후 이들은 함께 뉴 헤브리디즈의 산토(Santo) 지방에서 일하도록 페이튼으로부터
정식 부름을 받았다. 이들은 선교지로 가기 전인 1894년 7월 3일 결혼하였다.
뉴 헤브리디즈 선교
4월 4일 시드니를 떠난 매켄지 부부는 4월 11일경 빌라 항구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산토(Santo)로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임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이곳을 떠나기까지
15년을 일했다. 우선 그는 이곳 언어인 노구구(Nogugu)어 공부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어 선생의 죽음으로인해 독학으로 언어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인내하면서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언어에 진보가 나타나자 1896년 8월에는 성경 공부를 먼저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열매에 1897년 3월 25일에는 첫 열매를 얻었다. 즉 이날 그는 12명의 현지인들에게 세례를 배풀어 원주민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쁨과 함께 많은 반대와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이국의 문화, 이국적 풍습, 특히 식인 습관이 남아 있는 문명의 오지에서 삶을 가꾸어 간다는 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으나
그보다 어려운 일은 복음의 대적들이었다. 이들의 계속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일들을 감내하면서 15년의 날들을 보냈다.
그는 1908년 12월 4일 열병으로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그의 아내를 앗아갔던 열병은 맥켄지 자신과도 무관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제 그 열대 지방에서의 생활을
다시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멜버른으로 돌아가 있던 맥켄지는 다시 임지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심했다. 의사는 맥켄지가 산토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민하던 그는 15년간 일했던 산토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1909년 5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
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에 임지를 한국으로 옮겨 주도록 정식 요청했다.
맥켄지는 해외선교부가 아니라 여전도회 연합회(PWMU) 산하에 조직된 청소년 선교단(Young People s Mission
Band)의 선교 후원을 받고, 이 단체의 첫 선교사로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때 아동 선교단(Children s Missionary
Band)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단체는 선교사를 돕기 위해 아동들이 생일 헌금 혹은 저금통을 열어 선교사를 후원하도록 지도했던 선교 후원
운동으로 시작된 매우 뜻있는 조직이었다.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1910년 1월 초 한국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1910년 1월 5일 멜버른을 떠난 그는 선편으로
시드니로 향했고, 다시 그곳에서 엠파이어 호(S. S. Empire)를 타고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