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의 시는 잘 찍은 예술사진을 연상하게 한다. 얼른 보기에 있는 그대로 찍
은 사진에 불과한 것 같지만 곰곰 보면 한치의 더함도 덜 함도 없이, 있는 그
대로의 세계가 시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옷을 걸치고 무심히 서 있는 것
을 볼 수 있다. 잘 차려입지도, 그렇다고 남루하지도 않은 그 옷은 그저 세계
속에 흩어져 있는 존재 중 하나인 그것들을 돋보이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보려 애쓰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는 되도록 무심히 보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하려 애쓴다. 세상에 흩어져 뒹
구는 온갖 '나' 들에 대하여 '너' 들에 대하여 더도 덜도 말고 꼭 너만큼만 아
니 나만큼만 보고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돌의 입장에서, 물의 입장에서, 나
무의 입장에서.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모두 결국 하나에서 비롯된 몸들이
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물 한 병이 사발면 한 그릇이 되고,
커피 한 잔이 되고 켜켜이 쌓인 한 병의 물'들이 가지가지 존재의 이름으로
몸 바꾸는 동안이 생이라는 걸 아는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경림 시인
-시인의 말-
길 저편에서
밀크카라멜을 우물거리는 노인이 문득
손목시계를 본다
두 번째 시집을 써야겠다.
가지 사이에서 자란 작은 새처럼 사람들이 /이영선
이 도시의 밤은 붉은 십자가에 먼저 도착한다
그다음 기다렸다는 듯 러브모텔의 네온사인이 깜빡 깜빡
거린다
서쪽에는 왼팔이 잘린 십자가가 서 있다
그 뒷골목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에 가본 적 있다
창과 창 사이에 낀 홍매화 꽃잎이 파르르 흔들리는데
무엇을 그렸는지 덕지덕지 덧칠해진 그림 위로
붉은 나비 한 마리 날고 있다
천왕선녀 점집 붉은 불빛이 사직산로 아래까지 번져 간다
이혼 하고 싶다고 주저앉아 우는 여자, 사업 망하고 허구
한 날 술만 마시는데 어디가야 귀인을 만나냐고 다그치는
남자,
그들의 눈을 마주하고 천왕선녀가 술술 주문을 외우면 신
이 접신하여
호통치고 겁박하고 얼래고 달래고 한다는데 영험하다는
소문에 굿판도 자주 벌이고 날마다 방울 속 놋쇠 부딪히는
소리가 골목을 돌아다니다는데
지금 막 내림굿을 끝냈는지 마당 한편에 떡이며 과일 그
득하고
무의를 입은 여자가 검은 철제 대문을 비죽이 열고 나간다
대문 앞을 기웃대던 노인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골목길
을 올라간다
도시의 골목은 검은 가지처럼 자라고
가지 사이에서 자란 작은 새처럼
사람들이 숨어들고 있다
안개 / 이영선
깜깜한 강물 속에서 한 올 한 올 풀어져 나왔는지
안개가 흐느적거리며 다리 난간을 감고 있다
강의 허리를 졸라매던 다리가 뭉그러지며
흐물흐물 자동차 헤드라이트 속으로 들어간다
안개가 파도처럼 자동차 유리를 친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마터면 앞서가던 너를 놓칠 뻔했다
안개를 따라간다
안개 뭉그러진 골목을 다시 뭉그러뜨리며
불 꺼진 창문 앞을 어른거리며
버려진 화분 속에 숨다가
붉게 불 켠 십자가를 빙빙 돌다가
끝내 길을 잃는다
안개 속에서 막 사랑을 시작한 슈나우저 한 쌍이
검은 비닐봉지처럼 부푼다
초파리의 하루 / 초파리의 하루
나는 축축한 곳에 앉는 습관이 있다
보이지 않는 물방울들이 무게를 가지는 습한 날이 좋다
나는 그녀가 마신 커피 얼룩이 묻은 종이컵 속으로 뛰
어 든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에어컨 소리, 전화벨 소리, 그 사이
나는 끈끈한 종이컵 벽면을 지그재그로 뛰어올라 주위
를 본다
여자가 목을 앞으로 쭈죽 늘이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표정 없는 그녀의 조금 벌어진 입술에 슬쩍 앉아본다
음식 냄새가 난다
이미 상했거나,
상하고 있거나,
아직 상하지 않은 날것들이
그녀의 입술에 얹혀 있다
다시, 포르르 날아
누가 먹다 남긴 바나나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끈적거리는 과육들은 위험하다
그러나 어차피 안전한 곳은 없다
다시, 그녀의 빨간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날고 있어도 사방이 바닥이다
장바구니 / 이영선
재래시장이 가까이 보인다
시장 뒤로 병원과 멀리 고층 아파트가 있다 시장 앞으로
회전 교차로가 보인다 건널목 근처에 시내버스가 서 있다
하얗게 꼬부라진 노인이 소설 코너에서 소리내여 책 이름
을 읽는다
기억의 퍼즐, 내 안의 보류, 허공에 기대선 여자, 꽃 같은
시절, 파란만장 내인생,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매혹된 혼,
사람이 스케이크나리, 해피 패밀리, 젊은 날의 초상, 황금
비늘,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스무 살, 단 한 번의 사랑, 꽃
의 말을 듣다, 기나긴 하루, 비단 길, 노을, 상상놀이
그녀의 손이 피아노 검은 건반을 누르듯 드문드문 책장
을 짚어가다 몇 권의 책을 장바구니가 걸린 끌차에 싣는다
얇은 시집 한 권 펼쳐놓고 나는 온라인 쇼핑을 한다
금장 단추 달린 플리츠 원피스 하나 장바구니에 담고
시 한 편 읽고
3cm 올라가는 구두 하나 장바구니에 담고
긴 머플러 하나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하지 못한 손가락으로
후루룩 책장을 넘기다가 덮는다
그녀의 장바구니가 도서관 공터를 지나 회전 교차로를 건
넌다. 꽃 같은 시절이 건너가고 단 한 번의 사랑이 가고 허
공에 기대선 여자가 흔들리고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가 들
썩거리는 것이 보인다
책들이 그녀를 밀고 간다
저, 하얀 관능이 / 이영선
화면 속 여스님이 두부를 만든다
말린 콩, 하루 동안 불린 콩, 믹서기에 갈리고 있는 콩들
이 나란히 놓여 있다
믹서기 칼날에 콩 갈리는 소리
리셋 하라 리셋 하라 어서 리셋 하라
요란하게 외치며 콩이 돌아간다
한 평 남짓한 식탁 위에서
콩, 콩, 콩 튀던 것들이 탕이 되고 있다
흰 거품들이 냄비 뚜껑을 덜썩거린다
거품을 걷어 낸다
탕이 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들
그래, 이렇게 쉽게 끓어 넘치는 것이
거품이 아닐까
간수를 넣고 살살 젓는다
순식간에 모이고 순식간에 흩어지는 것들은 결굴 엉겨
붙는다
그것들을 사각의 방에 가두고 나무 뚜껑으로 누른다
삼베보의 세밀한 무늬들이 올 사이를 스며 나온다
두부의 결이 촘촘해 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드럽다
-이영선 시인-
* 2024년 『애지』로 등단
* 이영선 시인 청 번째 시집인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는 비루한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기록이자 고백록이며, 다른 한편, 객관적 거리를 통해 주관적 판단을 생략하고 다양한 층위에서 수많은 사건과 현상들을 제시한다. 이영선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는 그야말로 잘 짜인 시의 집이고, 이영선 시인은 그의 일관된 시론 속에 시를 축조하는 빼어난 건축가라 할 수 있다.
지혜사랑298/2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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