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시대 초기의 정치적 요소에서, 특별히 전대의 관습을 완전히 뒤바꾸는 일은 자주 보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건륭 초기의 여러 개혁은 기존의 제도가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점을 보이는 등의 일에 대응하는것으로, 이로 인해 청나라는 전근대 국가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통제력을 높여 수억명이 넘는 인구를 남성뿐만이 아닌 여성들까지 조사하고 총인구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로 인해 세수를 늘리고 관리들의 전횡을 통제하는등, 국가 통제력 측면에서는 '개혁' 이라기 보다는 '진보'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대의 옹정 시대에 비해 건륭 시대가 결정적으로 다른것은 대외정책의 일환입니다. 옹정제는 초기, 연갱요를 이용하여 코코노르의 전란을 봉쇄했지만, 훗날 준가르에게 대패하고 나서는 대외정책에 있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기가 꺾인 나머지 홉도, 투르판 등에서 철군하였고, 준가르와 암묵적인 휴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건륭은 야심에 넘쳤고 자신감이 대단했기에, 더 먼곳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소위 십전무공(十全武功)으로 불리우는 10번의 원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순서로 보자면, 건륭 11년에 벌어진 대금천(大金川) 전쟁입니다.
금천은 현재의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에 있습니다. 이곳이 금천(金川) 이라는 이름이 붙은것은, 그곳으 흐르는 강을 따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고, 이곳은 다시 대금천과 소금천(小金川)으로 나뉩니다. 금이 나오는곳이라 금천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주민들 말에 의하면 원래부터 금이 나온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지리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몹시 험하다고 합니다. 가까이 있는것은 모두 산과 절벽. 급류는 무섭게 흐르고, 길은 제대로 나지도 않았습니다. 주민들을 돌을 쌓아서 집을 지었는데, 금천 사람들은 모두 돌집을 아주 잘 지었다고 합니다.
금천의 기후는 한랭합니다. 날씨도 변화무쌍하여 맑다가도 갑자기 흐리는것이 일상다반사입니다. 당시 양 금천의 인구는 모두 3만여명이었고, 티베트족이었습니다. 대체로 얼굴빛은 검었고 남자는 12살이 넘으면 단도를 차고 창을 배웠고 활쏘는 법을 배웠다고 하며,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티베트로 가서 진찰을 받거나, 혹은 사원에 들러 예불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건륭 시대에 이르면 대금천과 소금천은 대립 관계에 있어서 분쟁이 심했습니다. 건륭은 사천순무에게 이러한 보고를 받고, 우선은 티베트로 가는 길목만 막히지 않게 유지하며, 향후 어떻게 전개되는지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건륭 스스로 말하기를,
"묘만(苗蠻)은 고집이 세고 무식하여 그 사람들을 나라의 신하로 쓰기에는 부족하다. 땅도 지킬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묘족 야만인들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 는 식의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건륭 11년, 대금천의 토사였던 사라분(莎羅奔)은 무리를 모아 청나라 주둔군을 공격하여 전면적으로 도전했고, 스스로 연호를 정하고 왕을 자처했습니다. 건륭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리가 생기자 적극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묘족의 난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운 장광사(張廣泗)라는 인물을 총독으로 하여 군단을 지휘학 하였습니다.
장광사는 처음에 여유있게 2만여 군대로 금천 경계로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대금천의 사라분에게 협박을 받고 협력했던 소금천의 택왕(澤旺)의 항복을 받고 대금천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문제는 현지의 날씨였습니다. 본래 장광사는 10월 안으로 적을 토벌할 계획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제 막 9월 중순이 되었는데 벌써부터 눈밭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청군은 눈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매우 불리해졌습니다. 다만 사라분도 상황이 좋지는 못했습니다. 저항하고 있었지만 많은 땅을 잃었고, 보급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청군이 결국 먼저 견디지 못하고 우선 물러갔습니다. 청군은 우선 따뜻한 평지로 내려가 쉬다가, 날이 풀리면 다시 진격하기로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처음의 기세를 잃어버리게 되자, 청군이 물러난 틈을 타 대금천은 다시 한번 세력을 키웠고, 장광사 군대의 진군도 지지부진해졌습니다. 이에 건륭은 눌친(訥親)이라는 인물을 파견했고, 건륭 시대의 장수들인 부이단, 악종기를 각각 내정대신, 사천총독으로 임명해 대금천 전쟁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문제가 또 생긴것은, 건륭이 파견한 이 눌친이라는 인물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옹정 말년부터 정계에 등장한 눌친은, 건륭제 초기에 황제가 전략적으로 키우던 대신으로, 나이가 젊고 민첩하고 청렴결백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때문에 건륭도 일부러 그를 밀어주면서 장정옥, 오르타이 등의 노신들을 견제했고, 건륭 10년에는 엄청나게 그를 밀어주어 3워에는 협판대학사, 5월에는 국사관 총재와 보화전 대학사로 임명되었고, 오르타이가 사망하자 즉시 군기처 영반대신으로 임명, 장정옥보다도 서열이 높아졌습니다.
이는 당사자인 눌친 스스로도 놀라 사양할 정도였지만, 건륭은 아랑 곧 하지 않고 그를 조정의 핵심으로 임명했습니다. 문제는, 눌친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군의 병력은 3,4만여 명으로 소수는 아니었지만 적을 완전히 반항도 못하게 찍어누를만큼 압도적인 숫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뭉쳐있을때도 압도적이라고 보기 힘든 군세를 10부대로 나뉘어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중에 1만여부대는 군량 운송을 담당했으므로 실제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대금천 군대는 별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각개격파를 해가면서 청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모르는 눌친은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막사안에서만 웅크리며 '원격 조종'을 했고, 이때문에 청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눌친은 돌로 방어벽을 쌓아 반란군에 대비하자고 제안했지만, 건륭은 "진군하여 적을 치라고 보냈는데, 이제와서 수비를 하겠다니 무슨 말인가." 같은 식으로 이를 단칼에 거절했으며, 그럴 바에야 전장으로 나가 적의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눌친은 "정예병 3만이 있으면 문제없다." 며, 병력과 군비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건륭은 눌친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것을 보았지만, 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것은 눌친을 지원한 자신의 체면에도 관련이 있으므로 먼저 파견된 장광사와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건륭은 눌친이 조금의 공이라도 세우면 어서 북경으로 '개선' 시킬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눌친이 파견되면서부터 작전에서 소외된 장광사는 사실 불만이 많았습니다.
눌친 때문에 자신의 권한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장광사는 매사에 비협조적이었고, 눌친이 상의를 하러 오면 빈정거리면서 모든 일을 눌친에게 일임하며 책임을 전가했고, 눌친이 서쪽으로 가자고 하면 그저 눌친에게 반대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지휘관들이 이렇게 반목하니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나서있는 동안, 눌친은 '단 한번' 도 전방으로 나간적이 없었습니다. 막사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건륭이 말도 하기전에 북경으로 자신을 어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는 청원까지 했고, 이를 본 건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렸습니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장광사가 처음에 금천으로 와서 소금천의 택왕을 항복시킬때, 택왕의 아우였던 양이길 이라는 인물도 같이 항복했습니다. 장광사나 눌친이나 양이길이 청군에게 충성을 바치는게 틀림없다고 여겼지만,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사실, 양이길은 대금천의 지도자, 사라분의 첩자였던 것입니다. 양이길은 형인 택왕의 아내, 즉 자신에게는 형수가 되는 여인을 항상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사라분은 그 부인을 빼앗아 양이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에 감격한 양이길은 평생 사라분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항복한 후에, 양이길은 장광사에게 군사를 받아 전쟁을 돕는 역할까지 했는데, 물론 그러면서 청군의 이동과 움직임을 샅샅히 사라분에게 보고했고, 사라분은 이를 이용해서 매복 작전을 수월하게 벌였습니다.
이 사실이 폭로되자 건륭은 당연히 어서 양이길을 처형하라고 했지만, 눌친은 도리어 이렇게 말하면서 꾸물대었습니다.
"양이길은 물론 사형을 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장광사가 이전에 이미 투항을 받아들여 정벌에 나서도록 한지가 벌써 한 해가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목을 벤다면 명목이 서지 않습니다. 양이길이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의 소식은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건륭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체면이고 무엇이고를 다 버린채 눌친과 장광사를 모두 잡아들여 목을 베어버렸고, 후임으로 부항이라는 인물을 파견했으며, 5만여명의 군대를 지원했습니다. 부항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양이길, 양이길이 얻은 택왕의 부인 등을 모두 죽이고 체계적인 공격노선을 짜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사라분은 첩자들이 모두 죽자 어려움에 처했고, 대패하여 3천여명 정도를 빼곤 대부분 전사하고 맙니다. 이에 그는 항복을 요청했습니다.
당초에 건륭은 완전히 대금천을 지워버리려고 했으나, 이미 전쟁이 2년이나 지속되어 물자 소모가 대단했으므로 전쟁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부항은 계속 전쟁을 하자고 권했지만, 건륭이 보기에도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무리였습니다. 소모된 자금만 2천만냥에 이르렀으며, 장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재정 위기가 닥쳤고 사천에서부터 대량의 인부와 수레, 가축을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통에 쌀값이 폭등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던 것입니다. 결국 십전무공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던 대금천 전쟁은 이런식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결되었던것으로 보였던 금천이, 한참 후인 건륭 36년 무렵에 다시 한번 요동쳐습니다. 당시의 청은 가장 강력한 위협 세력인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벌여, 건륭의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기에 즉시 군단을 파견하여 소금천을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양금천이 모두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했습니다. 게다가 소금천 공격에서 청군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건륭은 이참에 대금천까지 모두 격파하여 서남 지역을 완전히 평정해버리려는 욕구가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대금천은 소금천보다 세력이 강한데다, 무엇보다 지리가 수비에 매우 유리하여 청군이 공격을 하자면 대단히 불리해습니다. 건륭은 이에 압도적인 자원으로 적을 눌러버리기 위해, 사천, 귀주, 섬서, 감숙에서 총 7만이나 디는 대군을 동원헀고, 10만 9천여근의 화약과 화승 6만판, 다량의 총포와 대포등을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이에 소모된 군비가 무려 2천 900만냥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건륭은 "1천만냥이 더 들어도 아깝지 않다. 간악한 반역자들을 모두 소탕하라." 면서 작전을 밀어부쳤습니다.
당시 금천의 병력은 2~3만여명. 그리고 대금천이 강화를 요청했을때도, 건륭은 아예 상대의 조건을 들어보지도 않고 이를 모조리 거부하고 군사작전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리하여 건륭 39년에 청군이 본격적인 진군을 개시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워낙 지형이 험하여 전투는 단 한개의 참호, 단 한개의 산봉우리, 단 한개의 성벽을 차지하는 싸움에서도 대단한 혈전이 이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참혹한 전투 끝에, 청군의 끝을 모르는 규모의 대공세에 눌린 대금천은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졌고, 내부에서 결국 지도자를 독살하는 음모가 발생, 주모자의 시체와 수장들을 바치는 조건으로 청군에 화의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건륭은 이런 상황이 되어서까지 무력 수단에 의존하여, 절대로 항복을 윤허할수 없다고 엄포를 내렸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너무 관대하여' '적의 항복을 받아들여' 지금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군은 사신을 체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항복을 제안한 사신을 잡아들였고, 살육전으로 싸움을 전개했습니다.
"관병은 이미 도적의 소굴에 다다라 대세가 이미 기울었고, 관병이 또한 용감무쌍하니 도적의 두목이 오래 버틸 수 없다. 더 이상 계책이 없어 항복의 뜻을 내비쳐 목숨을 연장하려는 것이니, 장군들은 절대로 이에 미혹되거나 자비를 베풀지 마라. 금천은 은혜를 저버리고 반역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했으니 그 죄가 극악하다. 마땅히 주살해야 한다. 인심을 안정시키고 변경의 오랑캐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
청군은 적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서고 사방에서 압박하여, 대포를 쏘아대고 적을 공격했습니다. 수백명이 사살되었고 석조 가옥, 라마사 등이 모두 불탔습니다. 결국 남은 금천의 수장들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제안하는것이 아닌, 직접 수천여명의 인원을 모두 데리고 성채를 나와 목숨을 살려 줄것을 애원했고, 이 시점에서 대금천 전쟁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금천 전쟁은 결과적으로 보면, "끝을 본" 전쟁으로, 더 이상 소란이 없어지기를 원했다면 이는 성공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대소금천의 백성들은 변발이 강제되었고 복장도 바꿔입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내지화' 가 진행되어, 더 이상 반란의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금천 원정을 제외한 두번째의 금천 원정의 경우만 하더라도, 5년의 시간동안 무려 10만여명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군비는 7천만냥이라는 경악할만한 액수였습니다. 전쟁 후에 군사 배치와 변경 안전을 위해 소모된 물자까지 더하면 이는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
목적의 달성, 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금천 전쟁은 분명 성공입니다. 문제는, 7천만냥의 군비를 소모한 금천 전쟁같은 싸움이, 제국의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것들이 모두 성공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첫댓글 전쟁=돈붓기 평범한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는군요
둘다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 돼! 목이리내!
준가르도 저렇게 아작을 냈지.근데 왜 베트남이나 버마에서는 좀 쉽게 단념한듯
광희 성형전 얼굴이 건륭제와 싱크로율이 장난아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