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말 1
7년 전에 애들과 함께 도서관에 다니면서 조부님의 유품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한시, 산문, 서신 등 온통 한자(漢字)뿐인 유고(遺稿)가 적잖은 분량이었는데,
주변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여 졸작이지만 문집을 내서 자손들과 한 권씩 나눠 가졌다.
작업하면서 보니 조부님의 회갑연 헌정시에 ‘희구(喜懼)’라는 단어가 두 차례 등장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기쁘지만(喜) 돌아가실까 두렵다(懼)는 뜻이다.
우리 어릴 적엔 50세가 넘으신 분들은 고된 농사일에 손을 놓고 노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니 60세 회갑연은 동네에 청첩을 내고 근사한 잔치를 열어 함께 즐겼는데,
80년대 들어 회갑연은 급속히 사라졌고, 이제는 팔순을 뜻하는 산수연(傘壽宴)도 많지 않다.
시골 마을의 노령화를 빗댄 얘기이지만, 자식들이 차려주는 칠순 잔칫상을 받았다가
동네 어른들로부터 어린놈이 생일 챙겨 먹는다고 꾸지람을 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제는 100세 시대인데 십진법으로 숫자 한 칸 더 채웠다고 대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더구나 회갑은 친구들끼리 자축하는 정도이지 자식들조차도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한다.
1500년 전에 두보는 <곡강(曲江)>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는데,
지금은 나이 70에 세상을 뜨면 안타까움이 앞서는, 지나친 말로 요절을 면한 정도다.
65세부터 경로우대라지만, 60대는 익어가는 과정이고, 70대는 초로(初老) 정도로 인식되며,
적어도 80은 되어야 늙은이 축에 속한다고 봐야 하니 우리 세대에서 20년쯤 늘어난 셈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60갑자로 표현하면 나는 올해 임인년생으로 회갑이다.
생일은 10월인데 지난 5월에 아내와 둘이서 기념여행으로 서남해안을 둘러보았다.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는 것을 비유할 때 물과 화살이 곧잘 등장한다.
“유수(流水)와 같은 세월이라.”, “세월은 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빨리 흘러간다.” 등등.
1962년생이니 나와 나이를 같이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화폐 단위인 ‘원’이 동갑내기이다.
또 1월 1일에 연호를 ‘단기’에서 ‘서기’로 바꿨으니, 면서기 동창과 더불어 ‘서기’도 친구다.
나 초등학교 때까지도 어른들은 옛일을 회상할 때 애써 단기 몇 년이라고 말씀하셨다.
62년생 기업인으로는 고교 동창인 한종희 삼성부회장, 두산 박정원, 현대가의 정몽규,
정치인으로는 중학교 동창인 어기구의원을 비롯해 우상호, 안철수, 전해철 등이 있다.
연예인으로는 최민수, 선우재덕, 최민식, 최수종, 정보석, 최양락, 최명길, 민혜경, 김청,
해외연예인으로는 톰 크루즈, 양조위, 짐 캐리, 주성치, 데미 무어, 조디 포스터.
위에 열거된 기업인이나 정치인, 연예인들은 지금이 전성기로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엊그제 고교 동창 모임에 참석해보니 직장을 다니던 친구들 상당수가 물러났다.
공무원들은 공로연수 중이고, 기업체 임원들도 몇 년 전에 퇴사하였으며,
그나마 교육계에 있는 친구들이 정년을 2년-5년 정도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몇 년 전에는 사위 본다는 청첩장이 많았으나, 요즘은 며느리 본다는 소식이 더 많은 듯하다.
자연적인 흐름이 아닌가 싶다. 옛날에는 20대에 자식이요, 30대에 재물이라 했는데
지금이야 대학까지 마치고 직장을 잡으니 30대에 자식이요 40대에 재산형성이 일반적이다.
퇴직하는 친구들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한다고 귀농, 공인중개사, 사회복지사 등을 준비한다.
임인년 호랑이띠들은 대개 1969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75년 2월에 졸업하였다.
고향에서는 69년도에 입학한 여러 초등학교 동창들을 묶은 ‘69연합회’라는 모임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가 1972년에 ‘10월 유신’으로 독재기반을 공고히 했던 시기이기도 하며,
73년도에는 파월장병 철군, 74년 6학년 때는 육영수여사 피격사건으로 온 국민이 슬퍼했다.
1962년 출생자수가 104만 명 정도라는데, 학교에서는 웃지 못 할 재미들도 참 많았다.
콩나물교실과 2부제 수업은 기본이고, 선생님도 부족하여 임시로 고졸자를 투입하기도 했고
6·25 반공, 시월유신 지지 웅변대회도 했었고, [쥐를 잡자]라는 표어를 가슴에 달고 다녔고,
혼·분식 장려 덕분에 도시락 검사는 물론 매년 채변봉투를 제출하고 회충약을 받아먹곤 했다.
1975년. 궁벽한 농어촌이라서 네 명에 한 명 정도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었고 검정색 교복을 입었다. 국졸 친구들이 제일 입고 싶었던 옷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천으로 만든 600원 짜리 운동화를 신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축복받은 셈이다.
1978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에서 3년 학창 시절을 보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8년 장기집권의 철권이 무색하게 부하의 총에 사망했고,
유신 종결과 함께 민주화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온 국민의 꿈인 ‘서울의 봄’은
전두환장군을 비롯한 신군부의 강력한 등장으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되고 말았다.
1981년에 대학교 입학정원은 62년 출생자의 6분의 1 정도인 18만 명이었다.
전년도는 11만 정도였는데 정원도 늘리고 졸업정원제를 도입(130%모집 30% 탈락)했다.
많이 뽑고 공부 안 하면 졸업 못 하게 해서 데모를 줄이겠다는 얄팍한 계산도 있었다고 한다.
올해 고3 학생은 출생자 수가 47만 명으로 대학입학 정원과 거의 일치한다니 격세지감이다.
냉전시대에 사용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던 공산권언어를 전공하면서 당구와 막걸리를 좋아했고,
민주화(학생)운동에 앞장서지는 않았으나, 함석헌, 백기완선생님의 책들을 독파하기도 했다.
졸업하고 꽤 늦은 나이에 입대했으니, 민망하게도 지휘관이 후배인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13634380, 이놈의 논산훈련소 군번만으로도 늦깎이임을 알 수 있다.
김형석 교수님은 인생을 크게 3단계로 구분하여, 30살까지는 내가 나를 키워가는 단계,
65세쯤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며, 90세까지는 사회를 위해 일하는 단계라고 했다.
나는 제대 후 29살부터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니 2단계 마무리쯤에 있는 셈이다,
103세 철학자가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여 하신 이 말씀은 나에게 퇴직 후 갈 길을 제시했다.
35년 직장생활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정리해 보기로 하고, 잠시 학창시절을 되돌아본다.
나에게 16년 학교를 다시 다녀보라고 하면 어떤 욕구가 생겨날까 궁금하다.
택시기사가 최고의 꿈이었던 초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동화책을 마음껏 읽고 싶다.
공부를 야무지게 해서 세상을 넓게 보고 싶고, 진로도 바꾸어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퇴직하면 시니어 극단에 가입하여 연극을 하고 싶다.
대사를 암기하다 보면 자꾸 까먹어서 고생스럽겠지만 치매는 다소 예방되지 않겠는가.
서울 집과 고향에 있는 농막을 왔다 갔다 하면서 채소도 가꾸고 유실수도 키우며,
바삐 사느라 못 만났던 동창들과 밥 한 끼 같이 하며 서로 살아온 얘기를 나누고 싶다.
조건이 된다면 내수면 어업권을 하나 구해서 붕어도 잡고 민물새우도 잡아서,
찜과 탕을 내놓고 지인들과 손수 빚은 막걸리로 주거니 받거니 잔을 돌리고 싶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귀향한 친구들이나 고향을 지킨 동창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 친구들에게 쓰고 있는 글들을 모아서 수필집 한 권 내서 나눠주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
퇴직 후 몸이 건강하여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소위 봉사라는 것도 해 보고 싶다.
연금을 탈 것이니 좋은 일자리가 있더라도 그 자리가 절실한 사람에게 양보하겠다.
거실에 넓은 책상을 들여놓고 무료공부방을 차려 맞벌이 부부 자녀를 돌봐주고,
몇 분의 독거노인들과 친구로 지내며 그들과 함께 이름난 카페를 순례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총각선생 시절에 독거할머니와 정들어 지내며 당신의 처절한 외로움을 가슴으로 느꼈고,
맞벌이를 하면서 애들 맡길 곳을 찾느라 발을 동동 구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또한 결코 실천하기 쉬운 일도 아님을 안다.
거창하게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고 떠들 필요 없이 주변의 요긴한 곳에 손길을 주면 되리라.
육십갑자로 임인년, 서기로 1962년, 서기에 2333년을 더해 단기 4295년, 불기 2506년,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지갑 속 ‘원’과 함께 정말 복 받은 해에 태어난 셈이다.
국민소득 85달러였던,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세 끼 밥 먹기가 쉽지 않았던 최빈국에서
나라의 경제성장과 함께 하면서 노년에 선진국 삶을 누리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으랴.
정년은 몇 년 남았다. 무슨 자격증을 취득해서 퇴직 후 제2인생을 꿈꾸기 보다는
35년 교편생활 갈무리 할 것은 없지만 의미 있었던 일들을 글로 하나둘 정리해 두면서,
다가올 백세시대의 3단계 삶은,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김교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음악, 미술공부도 하고 독서도 하고, 사회에 관심도 두고,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가겠다.
(20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