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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스 요나스의 생태철학...
사상의 역사는 천재들의 역사다. 과학 기술의 비약적 진보와 인류 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낳은 20세기. 이 세기는 그러나 혁명과 대량살상, 인간 소외, 환경파괴로 얼룩지면서 수많은 천재들의 지적 탐구욕구를 발동시킨 세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상은 위기의 터전 위에 꽃핀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목말라 하는 사상의 프론티어들은 20세기 현실을 밑그림 삼아 갖가지 사상의 강물을 만들었고, 수많은 에피고넨들이 이에 주석을 달았다. 어떤 것들은 수정됐고 어떤 것들은 이미 절손의 운명을 겪기도 했지만 20세기가 잉태했던 사상의 대하들은 인류 지성사의 움직일 수 없는 자산이고 새로운 세기에의 통찰이다. 저 세기초의 프로이트 무의식 이론으로부터 실존주의 구조주의, 최근의 정보혁명 환경철학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사상의 창조자들을 중심으로 그 유파, 국내 이식 인맥 등을 더듬는 지성 여행을 주간연재로 싣는다. (편집자).
자연을 망치면 인간의 자유도 망친다...자연대상 윤리 일깨워 .
"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궁극적으로 돕는 길이다." 한스 요나스는 어떠한 대안도 허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점을 이렇게 간단히 서술한다. 신마저도 어찌할 수 없을 것같이 보이는 생태계의 파괴를 바라보면서, 요나스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낭만주의적 발상을 거부한다. 환경오염과 같은 부작용은 기술에 의해 산출되었지만 결국 기술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개량 주의도 반박한다. 인간에 의해 야기된 위험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생태학적 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나스의 이 말은 두 겹의 절망으로 읽혀진다. 하나는 우리가 기술권력을 더 이상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면 할수록 자유로울 수 있다는 베이컨적 이상은 인간을 언제라도 파멸시킬 수 있는 악몽으로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실제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는 힘과 수단을 제공하였지만, 기술 진보에서의 지나친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파국적인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한스 요나스라는 이름을 오늘날 녹색 사유와 생태학적의식의 대명사로 만든 것은 다른 하나의 절망적 인식이다. 자연은 인간 없이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녕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지 자연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요나스는 인간에 대한 절망을 결코 신의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바꿔놓지 않는다. 우리의 탐욕스러운 권력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할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파국이지 결코 신의 구원이 아니다. 만약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아마 환경오염을 조그만 사고 정도로 치부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자신에게 면죄부를 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는 요나스의 말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인 것이다.
이렇게 요나스는 신에 대한 희망보다는 인간의 책임에 호소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연을 지배하였지만 자연에 대한 지나친 지배는 결국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파괴할 수 있다고 요나스는 경고한다. 서양인은 자유를 이제까지 인간 의지의 표현으로만 이해하여 왔다. 전통윤리는 오직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해줄 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다른 사람의 의지와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한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약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은 결코 단순한 수단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요나스는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는 자연에 속해 있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려면 이미 자연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인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것은 결국 자유의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요나스는 윤리의 대상영역을 자연으로 확장함으로써 현대철학의 생태학적 전환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그는 물론 인간의 실존을 단순한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에서 조명하고자 하였던 실존철학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망각된 자연의 의미를 일깨움으로써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윤리학적 방향을 부여하였고, 그를 '사려깊은 경고자'로 명명한 희슬레는 인간과 자연을 살아있는 정신의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요나스의 생태학적 존재론을 계승하고 있다. 아무튼, 인간은 자유가 생명에 이바지하는 한에서만 자유에 종사해야 한다는 요나스의 생태학적 휴머니즘은 오늘날 환경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자유의 진정한 진보는 우리를 위협하는 파국에 대한 성찰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런맥락에서 위험사회로부터 출발하는 기든스는 자연과 자유의 연대를 모색하는 요나스의 철학적 보수주의를 제3의 길로 규정한다. 자유가 언제든지 파국으로 변할 수 있다는 위험사회의 특성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면, 21세기에도 요나스는 기술시대에 가능한 휴머니즘의 사상적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진우교수 약력) ▲계명대 철학과 교수 ▲1956년 서울생 ▲연세대 독문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대 철학 석-박사 ▲아우구스부르크대 전임강사 역임 ▲저서 '허무주의의 정치철학, 니체에 의한 정치와 형이상학의 관계 재규정'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에 나타난 권력과 이성' '탈이데올로기시대의 정치철학' 등.
[한스 요나스] 79년 `책임의 원칙'으로 철학에 새 장
독일출신의 유태계 철학자 한스 요나스(1903-93)는 28년 하이데거로부터 박사학위를 받고 학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중세철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던 그는 나치집권과 함께 33년 영국으로 탈출해 35년 팔레스티나로 망명했다. 이후 49년 캐나다를 거쳐 55년 미국에 정착해 본격적인 교수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 정착 후 55년부터 76년까지 비슷한 처지의 망명학자들이 중심이 된 뉴욕의 사회조사연구소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이 연구소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중세철학의 문제를 파고들던 전형적인 강단철학자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미국 지부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연구소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순수철학보다는 현실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76세가 되던 79년 '책임의 원칙'이라는 대작을 내 놓음으로써 환경윤리학 혹은 생태철학이라 불리는 새 장을 열었다. 이 책에서 요나스는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가능하고 기술에 의한 환경파괴는 불가피하다는 근대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결국 지구는 인간에게 보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환경, 지구의 권리가 인간과 동등함을 선언한 것이 다.
그리고 이 분야를 더욱 밀고 나가 85년에는 '기술 의료 윤리'라는 저작을 출간했다. 요나스 환경윤리학의 양대 저작은 이처럼 고희를 훨씬 넘기고서 이뤄진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책임범위를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으로까지 확장한데 있다. 그에게는 이렇다할 제자가 없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서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79년 '책임의 원칙'을 독일어로 낸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93년 미국 뉴로셀에서 죽었다. (이한우기자 : hwlee@chosun.com)
2. 디지털문명 전도사 네그로폰테
`비트의 세계'가 행복을 안겨주리라...디지틀 익숙해야 앞서가 .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라는 다소 생경한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5∼6년 남짓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지 않은 동안 '아톰(atoms)에서 비트(bits)로'라는 정보화·디지털 시대의 화두를 전지구적 스케일로 선언하고 확장해냈다. 디지털 문명의 전도사임을 자임하는 그의 디지털 가스펠은 이렇다. '아톰은 과거의 것이고 비트는 미래의 것이다'. '아톰에서 비트로 변화하는 것은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이전에는 '아톰' 즉 원자의 세계가 우리를 지배해 왔다. 우리는 중력의 무게를 느끼며 물리학적 역학 세계를 거니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비트'의 세계가 출현하면서 우리 일상과 세계는 송두리째 변화하기 시작했다.
비트란 무엇인가? 네그로폰테는 말한다. '비트는 색깔도 무게도 없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 그것은 정보의 DNA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다'. 아톰의 원리가 실제로 만지고 경험하는 '아날로그'의 세계를 창출했다면, 비트의 원리는 실제 이상의 '하이퍼 리얼'한 것으로 다가오는 디지털 세계를 창조한다. 비트가 소용돌이치게 만든 세계의 변화상을 소묘하면 이렇다.
PC통신과 인터넷, 그리고 PCS(개인휴대통신) 등 컴퓨터를 매개로 한 '사이버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되었다. 물리적인 육체 노동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사이버 워크'로 일 양태가 급속히 바뀌고 있다. '나인 투 파이브' 즉 아홉 시에 출근해서 다섯 시에 퇴근하는 식으로 정식화된 노동 관행이 깨지고 기왕의 24시간 분할 시간 개념이 아닌 새로운 '사이버 타임'이 국가별·지역별 시간 편차를 넘어서서 이용되고 있다. 한곳에 모여있지 않고서도 회의와 작업 그리고 놀이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이 마련되었음은 물론이다. 스타 크래프트처럼 머드게임이라고 하는 인터넷상 다자간 전자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다못해 밤을 지새 몰입하는 '사이버 키드'가 늘어만 간다.
전자 상거래가 경제 행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돈은 현금 개념에서 온라인망을 타고 달리는 '사이버 머니' 개념으로 바뀐 지 오래다. 전쟁 역시 단순한 물리적 충돌이 아닌 마치 시뮬레이션 전자 게임 같은 '사이버 워'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비트가 창출해낸 사이버 세계는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테크놀로지에 약하다. 비트로 이루어 진 디지털 세계를 두려워하다 못해 경계하기까지 한다. 컴맹이니 넷맹이니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그렇지만 디지털 세계는 더 이상 테크놀로지만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화이며 거역할 수 없는 일상이다. 아무리 테크놀로지에 주눅든 사람도 전화는 쓸 줄 안다. 그러나 100여년 전 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지금 우리는 너도나도 휴대 전화를 쓴다. 사용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휴대 전화 중 PCS는 단순히 전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 그대로 개인 휴대 통신이다 지금은 주로 음성 서비스로 제한되거나 간단한 자료 전송에만 국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확장 가능성이 열린 컴퓨터다. 비트로 이루어진 컴퓨터와 아톰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만남은 결코 좌절과 비인간화로 얼룩질 비극의 서막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비트 세계는 쉽고 친숙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마치 휴대 전화를 쓰듯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즉 휴먼 비잉 (human being)은 비잉 디지털(being digital)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디지털 인간'으로 자처하기를 주저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원자 세계로 구성된 '자연-생태 환경' 안에서 살고 있음과 동시에 점차 가속적이고 확장적으로 비트화해 가는 '커뮤니케이션-미디어 환경' 안에서도 살고 있다. 이 두 환경은 서로 배타적이기보다는 통합되길 요구하며 실제로 비트와 아톰의 결합 속에서 하나의 '에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이루어가고 있다. 새로 맞는 밀레니엄은 '에코- 커뮤니케이션 환경' 시대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인터넷의 바다를 쉼없이 파도타기하며 그 디지털 물결 속에서 비트와 아톰이 가속적· 확장적으로 결합한 새로운 삶과 생활 양식을 만들어가고 있다. 결국, 새로운 밀레니엄에서 진정한 승패는 누가 더 많이 '비트와 아톰의 결합'을 구현할 것인가에 달려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진홍교수 약력> ▲63년 서울생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저서 '커뮤니케이션 중심의 제 시대', 논문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풀뿌리 투쟁' '멀티미디어시대의 언론사 경영전략' 등.
3. 전체주의와 한나 아렌트
유태계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1961년 이스라엘에서 벌어졌던 2차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1963년에 출판된 것을 계기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악하지도, 유태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에서 관료주의적인 의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라고 논했다. 이 책은 곧 가열찬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여러 유태인 집단에서는 아렌트를 이단자로 취급하기까지 하였다. 아렌트의 이런 태도는 1951년에 출판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그 조짐을 찾을 수 있다. 아렌트에 따르면 나치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 및 그것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테러에 근거하는 완전히 새로운 지배형태이다. 사상(idea)의 로고스(logos)인 이데올로기(ideology)는 인종이나 계급 혹은 민족과 같은 특정의 사상을 구심점으로 결집한다. 그리하여 그 바탕 위에 긴밀하게 조직된 정치체제가 건설되며, 여기에는 테러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테러란 육체적, 심리적 폭력을 체계적으로, 제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합법적으로 제약이 없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서 태어난 유태인… 하이데거와 연애도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문학과 철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1924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렌트는 지도 교수였던 하이데거와 애정 관계로 발전했으며 또 평생 친구가 되는 생태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를 만났다. 그러나 하이데거와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안 아렌트는 이듬 해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 야스퍼스의 지도로 '어거스틴 에 있어 사랑의 개념'이란 논문으로 1929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순수 철학자로 출발한 아렌트가 정치철학자로 변신한 것은 유태인이라는 출신이 원인이 됐다. 1930년대 초 나치스 집권 이후 기승을 부리게 된 반 유태주의의 충격 속에서 아렌트는 지적 탐구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1933년 파리로 이주한 아렌트는 브레히트, 벤야민, 츠바이크 같은 지성인들과 교유했으며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면서 미국으로 피신, 뉴욕에 정착했다. 이후 아렌트는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시카고 대학과 뉴욕 신사회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197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아렌트는 가치 중립적 입장에서 연구활동을 수행한 상아탑의 학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회로부터 거부된 존재'(패 리어·Pariah)인 유태인으로서 자신의 절실한 경험에 입각해 서 사유와 행위를 통해 전체주의의 분석과 대안 모색을 시도했다. 아렌트의 저서로는 '전체주의의 기원들' (1951), '인간의 조건'(1958), '혁명론(1963) 등 주저 외에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공화국의 위기'(1972) 등이 있으며 사후'정신 생활'(1978), '칸트의 정치 철학 강의'(1982)가 출간됐다.
이중 '인간의 조건'(이진우 등 역, 한길사)과 1959년 레싱상 수상연설을 담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역, 문학과 지성사) 만이 우리말로 옮겨졌을뿐 대부분의 저술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이는 오랫동안 계속된 냉전 시대에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를 동시에 비판한 아렌트같은 입장이 환영받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 아렌트는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전체주의가 20세기의 특징적 현상으로 인식되면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선민기자 : smlee@chosun.com)
[전체주의 어떻게 보나] 국가가 절대권력 행사…
'전체주의(Totalitarianism)'란 "국가가 개인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말한다. 20세기 세계사에 나타난 전체주의는 다시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에따라 우익 전체주의(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와 좌익 전체주의(소련의 스탈린주의)로 나뉜다.
무솔리니는 1925년 6월 한 연설에서'강렬한 전체주의적 의지'를 언급했으며 이후 자신이 수립한 사회를'전체주의 체제'라고 불렀다. 그는"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을 것" 이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전체주의'보다 '권위주의'란 표현을 즐겨 사용했고 소련은'전체주의'를 파시즘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며 소련 체제를 '전체주의'라 고 부르는 것을 극력 경계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유럽에 나타난 이들 사회운동이나 체제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전체주의'는 널리 사용됐다. 영국 '더 타임즈'신문은 1929년 의회제에 대비되는 체제로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을 아울러 '전체주의'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우익 전체주의의 붕괴에 따라 전체주의는 소련과 그 위성국가를 주로 지칭하게 됐지만 이론적으로 전체주의는 좌와 우를 모두 포괄한다.
전체주의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독재자,이데올로기와 당, 선전활동과 테러, 상징, 경제의 중앙통제 등이 꼽힌다.전체주의는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대중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물리적 강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권위주의'와 구별된다. 전체주의의 학문적 연구는 2차대전의 충격에서 벗어난 195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는 체제의 분석에 중점을 둔 쪽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중점을 둔 쪽으로 대별된다. 전자를 대표하는 학자는 프리드리히와 브레진스키, 레이몽 아롱, 칼 도이치, 샤피로 등이며 한나 아렌트, 칼 포퍼, 탤먼 등은 후자에 속한다. (이선민기자)
4.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
마샬 맥루한만큼 평이 엇갈리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금세기 최고의 미디어 이론가'라는 찬사에서부터 '바보상자(TV)의 도사'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비평가 톰 울프의 말처럼 "만약 에 그가 옳다면 어쩔 것인가?" 프로이드나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우리 시대 최고의 사상가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란한 은유에도 불구하고 맥루한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그는 모든 매체가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고 본다. 책은 눈의 확장이고, 바퀴는 다리의 확장이며,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 계통의 확장이다. 감각기관의 확장으로서 모든 매체는 그 메시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말하자면 매체가 곧 메시지이다. 같은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얼굴을 맞대고 직접 말하는 것과 신문에 나오는 것, 그리고 TV로 방송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사진설명 : 백남준의 설치미술 작품 'TV나무'. TV모니터와 비디오 화면으로 꾸민 이 작품은 미디어 시대, 맥루한의 예언을 설명해주는 듯하다.
결국 매체가 다르면 메시지도 달라지고 수용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여기서 맥루한은 모든 매체를 그것이 전달하는 정보의 정세도와 수용자의 참여도에 따라 쿨(cool) 미디어와 핫(hot) 미디어로 구분한다. 맥루한에 의하면 신문과 영화, 라디오는 핫 미디어이지만 텔레비전, 전화, 만화등은 쿨 미디어이다. 쿨 미디어는 핫 미디어보다 정보의 정세도가 낮아서 수용자의 높은 참여, 즉 더 많은 상상력이 요구되는 매체이다. 맥루한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매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문명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보았다.
맥루한에 의하면 원시부족시대에 인간은 청각, 시각, 촉각 등 오감이 조화를 이뤄 감각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혁신으로 감각이 확장되면서 감각의 균형은 무너지고, 그것은 다시 기술을 낳은 그 사회를 재구성하게 된다. 즉 알파벳처럼 시각적으로 고도로 추상화된 인쇄문자의 발명은 원시인들의 감각균형을 무너뜨려 시각중심형 인간을 만들기 시작했고, 16세기 인쇄술의 발명은 이런 시각중심현상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전신의 발명으로 전자매체시대가 열렸고, 특히 복수의 감각을 요구하는 텔레비전의 발명과 보급은 인간의 감각균형을 복구시켜 궁극적으로 인류를 다시 부족화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선형적 논리에 매몰되었던 인쇄시대의 시각 중심형 인간이 감각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며, 오래 전에 추방되었던 낙원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인류문명에 대한 맥루한의 이런 기술결정론적 관점은 같은 캐나다 사람인 해롤드 이니스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다. 이니스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혁신이 사회변천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기술혁신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체로 비관적이었다. 왜냐하면 기술발전으로 인해 나타나게 될 커뮤니케이션의 독점이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유산을 파괴하는 억압적 권력으로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루한의 생각은 달랐다. 초기에는 이니스의 영향이 컸지만 대표작인 '구텐베르그 은하'(1962)와 '미디어의 이해'(1964)에 이르러 그는 테크놀러지의 잠재력을 찬양하게 된다. 즉 현대의 전자과학기술 이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고 인류를 인쇄시대의 선형적 세계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이런 낙관적 기술결정론에 대해선 논란이 많지만, 어쨌든 맥루한은 자신의 생각을 재치있는 문장이나 극적인 은유로 표현하는 데 능했다. '미디어는 마사지'라는 표현이나 쿨 미디어와 핫 미디어 같은 용어는 그의 독특한 언어감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이런 재치있 는 언어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 대담한 가설을 제시함으로써 "그와 비 교하면 슈펭글러는 오히려 신중하고, 토인비는 몹시 현학적"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폭넓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논리적 설명이 부족하고 통찰력과 직관에 의존함으로써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맥루한 자신은 "나는 설명하지 않는다, 탐구할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디어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탐구를 인쇄시대의 '선형적' 방식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TV시대에 걸맞게 '온 몸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건 반대하는 사람이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은 미디어에 대한 그의 견해가 대단히 독창적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코스텔라네츠에 의하면 맥루한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들이 데이터만 보거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고 한다. 사이버 공간이 창출하는 가상현실의 세계가 급속히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맥루한이 30년 전에 간파한것을 이제야 깨닫는 기분이다. 전자 네트워크의 신기술로 페르소나(가상인격)의 신세계가 창조되면서 우리의 삶이 근본부터 변하고 있지 않은가. (양승목·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 ▲1950년생 ▲서울대 신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언론학 석사, 스탠퍼드대 언론학 박사 ▲충남대 교수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현) ▲역서 '현대언론사상사', 논문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 '언론과 여론:구성주의적 접근'등.
[마셜 맥루한은…] 캐나다 출신 영문학박사
캐나다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미국 3대 네트워크 TV에 단골출연하고, 학자로선 드물게 시사전문지 '뉴스위크' 표지인물로까지 등장한 사람. 허버트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 McLUHAN·1911∼1980)은 캐나다인이면서 미국 미디어 팝 문화의 고승처럼 대우받는 인물이다.그는 사회과학자라기보다는 예언자로 평가받는다. 현대 매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사용하는 '미디어'란 단어와 가장 근접한 개념을 그는 35년전 이미 제시했다. '미디어의 이해'란 책에서다.
그는 1911년 7월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 애드먼턴에서 스코티쉬,아 이리쉬계 양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8년 캐나다 마니토바대학에 입학,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나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국 엘리자베스1세 시대 시인 토마스 내시의 수사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미국 텍사스 출신 여배우 코린 루이스와 결혼한 그는 영화에도 애정이 깊어 나이 66세인 1977년 우디 앨런 감독의 '애니 홀'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엔지니어를 한때 지망했던 맥루한은 71년 그의 조카와 함께 속옷에서 오줌냄새를 제거하는 물질을 개발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발명가이기도 했다. 64년 '미디어의 이해' 출간이후 '텔레페서'(TV에 잘 출연하는 교수)가 됐고, 각종 강연, 인터뷰에 불려다닌 '스타 교수'였다.
1960년 인류학자 에드먼드 카펜터와 공저한 '커뮤니케이션의 탐구' 이후, '구텐베르크 은하'(1962년) '미디어의 이해'(1964년)로 '맥루한 시대'를 활짝 열었고, '맥루한적인' '맥루한주의'등의 단어가 국제 미디어학계에 전파돼 갔다. '지구촌의 전쟁과 평화'(1968년) '교실로서의 도시:언어와 미디어의 이해'(1977년)등을 계속해 펴냈다.
맥루한은 1980년 마지막 날 숨을 거두었지만, 그후에도 책 출간과 사상 소개는 이어졌다. '커뮤니케이션 저널' 1981년 여름호가 '맥루 한 특집'을 한데 이어, '맥루한 서신'(1987년) '미디어의 법칙:신과 학'(1988년) '지구촌'(1989년) '맥루한 요론'(1995년)등이 속속 나왔다. 이중 몇개 책은 그의 아들 에릭 맥루한에 의해 편집, 출간됐다. 1996년'와이어드' 1월호가 맥루한 특집을 했으며,한국에서도 민음사가 발행하는'현대사상'창간호(1997년 봄호)가 '맥루한 르네상스'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진성호기자 : shjin@chosun.com)
[미디어 사상 변천사] 17세기 밀턴에서 발원…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미국 언론학자 허버트 알철은 저서 '밀턴에서 맥루한까지'(1990년)에서 현대 언론의 철학적 사상 뿌리를 17세기 영국의 존 밀턴에서 찾는다. '실락원'을 쓴 시인 밀턴(1608∼1674)은 '아레오파지티카'를 통해 "모든 주의와 주장이 이 땅위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게 하라"는 주장을 펴,최근 자유주의 언론의 창시자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밀턴의 사상은 18세기 프랑스에서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볼테르 (1694∼1778)와 장-자크 루소(1712∼1778)에게 전승된다. 볼테르는 '의견의 자유'를 3가지 행복의 조건으로 주창했으며, 반면 루소는'언론의 사회적 책임론'을 폈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1806∼1873)과 칼 마르크스(1818∼1883)는 대립된 언론사상을 설파했다. 표현 권리를 찬미한 점에서 둘다 밀턴의 후예라 할수 있지만, 밀은 '개인'을, 마르크스는 '사회'를 중시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리고 20세기. 맥루한은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테크놀로지 발달로 등장한 뉴 미디어 시대에 포착한 새로운 사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맥루한은 특정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는 프리랜서의 역할에 머물렀고, 그의 생각들은 많은 미디어학자들에 의해 인용되고,때론 비판받기도 했다.
국내에는 그의 저서중 '미디어의 이해'(박영률출판사)와 '미디어는 마사지다'(열화당)가 번역, 소개됐다. '미디어의 이해'는 미국 MIT 출판부와 정식계약을 맺은 민음사에 의해 올 가을 새로 번역돼 출간 될 예정이다. 국내 미디어학자들은 현대 언론-미디어 사상사를 전공 하지 않더라도, 강의 시간에 맥루한을 단골로 등장시킨다. (진성호기자)
5.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오늘날 새롭게 개척된 인문학적 주제나 이론치고 데리다의 해체론 덕을 보지 않은 것은 드물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이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신역사주의, 문화연구 등 실로 다양한 사조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해체론이라는 저수지에서 물줄기를 끌어오고 있다. 이 저수지에는 플라톤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사뿐만 아니라 언어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 그리고 보들레르 이후의 문학과 예술 등 유럽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 흘러들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데리다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철학자로서 군림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거시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적 측면이다. 해체론은 2000년 전통의 서양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사상사적 천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방대한 계획을 고전적 문헌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통해 실천해 나가고 있다. 미시적 엄밀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데리다의 장인적 글읽기와 글쓰기는 문학에서 건축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문헌 해석의 새로운 경지를 일깨우기에 족 했다.해체론의 충격은 그 목표의 거대성만이 아니라 절차상 세밀성이 빚어내는 효과다. 해체론의 첨단성도 이 두 측면의 성공적 결합에 있다.
해체론이 싸우는 괴물은 철학 자체다. 이때 철학이란 좁게는 필로 소피아란 이름으로 태어난 이론적 사유이고, 넓게 보아서는 서양 문화의 근간, 서양성의 구심점이다. 플라톤에 의해서 철학적 탐구 계획이 확립된 이후 장구한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수많은 학파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론에 대하여 이러한 변화는 표피적 현상이다. 서양 사상사의 심층은 단일한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단일한 시대를 이룬다. 이런 사상사적 장기 지속을 유지해온 은폐된 원리와 무의식적 전제들을 발견하고 그 지배력의 범위와 한계를 표시하는 전략,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론이다.
해체론은 종종 터무니없이 파괴와 부정의 취미로서 평가 절하된다. 그러나 파괴하지 않는 사상, 부정없는 해방은 없다. 가령 로고스 중심주의의 창시자 플라톤은 신화적 사유와 시적 사유의 파괴자였다. 근대의 출발점인 데카르트는 절대적 확실성을 구하기 위해서 회의 가능한 모든 것을 부정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미래적 구상의 출발점으로 해체 불가능한 것을 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해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체한다. 데카르트의 회의불가능자가 자아의 존재였다면, 데리다의 해체불가능자는 차연, 흔적, 보충, 유령, 선물 등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노자의 도처럼 고정된 의미가 없고 개념적으로 표상할수 없다. 이는 그것이 과도한 실재성을 띠어서가 아니라 무에 가까운 과소한 실재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 해체불가능자는 형이상학에 대하여 이중적 관계에 있다. 먼저 그것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기원보다 더 오래된 기원이며 형이상학의 필수적 자양분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이 요소를 망각하거나 배제해 왔다.그 망각과 배제가 형이상학적 체계 안에서 사유되지 않는, 그러나 그 체계의 가능 조건이다. 그러므로 이 해체불가능자는 형이상학적 체계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이용되고 있으면서 감추어져 있다.
간단히 말해서 형이상학은 이항 대립적 체계다. 현전과 부재, 참 과 거짓,보편과 특수, 동일성과 차이, 안과 밖, 남과 여 등 끝없이 변주되는 이분법이 형이상학적 건축술의 뼈대를 이룬다. 해체불가능자는 이런 대립적 양항의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사태다.양자 사이의 경계에 출몰하는 초월자, 이탈언어적 사태는 이론적 언어의 팽창을 유발하는 동인이지만, 그 언어를 통하여 이미 형이상학의 세계안에 기입되어 있는 내재적 사태다. 그리고 그렇게 기입되기 위하여 지워졌거나 왜곡된 형태로 남아있는 희미한 사태다.
해체한다는 것은 서양적 사유를 구성하는 동시에 벗어나는 이 경미한 초월자를 찾는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그것이 변형과 소멸을 겪으며 기록된 문헌을 자세히 읽는다는 것과 같다. 텍스트의 밖은, 그 밖에 따로 존재하는 초월자는 없다. (김상환 서울대교수).
○약력. /▲1960년생 ▲연세대 철학과 학부-석사 졸업, 프랑스 국립 파리제4대학 철학과 박사 ▲연세대 문리대 조교수, 현재 서울대 철학과 조교수 ▲저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비데카르트적 코기토'(1991) '해체론 시대의 철학'(1996) '매체의 철학'(공저·1998) 등.
[데리다] `텍스트 밖에는 없다'로 구조주의 대세에 파문
데리다의 삶과 학문은 대부분 다수 보다는 소수, 주류 보다는 비주류 쪽이었다. 1930년 본국이 아닌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난 데리다의 학창시절은 별로 평탄치 못했다. 유태인이란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비시정권때는 다니던 중학교에서 1년동안 쫓겨나기도 했고, 고교생때는 축구에 빠져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도 떨어졌다. 재수 끝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도 역시 한번 낙방한 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다.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고등사범학교 교수 재직중이던 1967년 '그라마톨로지' '목소리의 현상' '글쓰기와 차이' 3부작을 잇달아 내놓으면서부터. 텍스트 뒤의 구조를 밝혀내려는 구조주의가 유행하던 당시에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철학계에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데리다는 플라톤 이후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육체보다는 정신, 문자언어보다는 음성언어 중심인 서양형이상학의 해체를 주장한 것.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텍스트의 범위를 음성-문자언어를 넘어 정치적, 윤리적 차원으로까지 확대하는 한편 현실문제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1년엔 프라하에서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비밀회합을 갖다가 체포돼 미 테랑 대통령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편 끝에 추방되기도 했고, 만델라 구명운동과 '반 아파르트헤이트'전도 기획했다.
또 예술가들과도 어울려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스만과 함께 공원을 설계하고, 비디오아티스트 게리 힐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 90년대 들어서는 '마르크스의 유령' 등 기아, 인종주의, 핵문제 같은 현실문제에 대한 저서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그의 해체주의는 프랑스 안팎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는 그의 해체주의가 문학, 건축,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 응용되고 예일대 존스홉킨스대 등이 정기적으로 그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명예박사학위를 주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개념의 난해함(모호함), 하이데거 철학의 아류로 보는 시각때문에 '현대판 소피스트'라는 비아냥도 그를 귀찮게 한다. 프랑스 학계의 데리다 푸대접은 1980년 파리 10대학 철학과 폴 리쾨르 후임교수 선발때 잘 드러났다. 이 자리 를 따기 위해 나이 쉰에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온 데리 다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그후 데리다는 1983년 국제철학학교를 창설,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중이다. (김한수기자 : hansu@chosun.com)
[해체주의 연원과 현황] 프랑스 냉대로 영국에 파급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플라톤 이후 로고스에 얽매인 서양 철학과 형이상학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니체와 하이데거에 맥이 닿는다고 전문가들을 말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뒤에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뭔가가 있다는식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니체는 인간을 떠받치고 있던 '배후의 실체'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진리 대신에 '지금 여기 있는' 인간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 데리다 역시 구조주의에 남아있는 형이상학의 잔재를 비판했던 것. 그밖에도 데리다에 영향을 준 사상가로는 기호학적 방법론을 제공한 소쉬르, 데리다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삼았던 현상학의 후설 등이 꼽힌다. 마르크스의 비판정신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 학계의 냉대 때문에 데리다 사상의 후계자는 미국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파계열의 수용자로는 1975년 이후 데리다와 함께 예일대에서 강의했던 폴드만, 블룸 등의 '예일학파'를 들수 있다. 이들은 문학비평에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응용한 경우. 좌파에서는 인도출신 학자로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번역한 스피박과 '해체론과 맑시즘'의 저자 라이언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서양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현실 정치- 사회-경제적 질서와 제도에 대한 비판과 페미니즘 이론에 해체주의를 적용했다.
90년대 들어 국내에도 데리다의 저작이 상당수 번역돼 나왔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민음사)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옮김·한 빛)'다른 곶'(김다은-이혜지 옮김·동문선) '시네퐁쥬'(허은아 옮김·민음사) '에쁘롱, 니체의 문체들'(김다은-황순희 옮김·동문선)과 대담집 '입장들' (박성창 편역·솔) 등이 있다. 또 '데리다 읽기'(이성원 엮음· 문학과지성사) '해체론 시대의 철학'(김상환 지음·문학과지성사) 등 해설서도 나와있다. (김한수기자 : hansu@chosun.com)
6. 동서고금 꿰뚫는 문화 뿌리 캐내기
멀치아 엘리아데의 [호모 렐리기오수스]논 - 김종서
20세기는 무엇보다도 세계의 문화들이 타문화를 본격적으로 만난 시대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바로 이 숙명적 만남을 서구학자들에게 일깨우고, 동양과 원시문화를 모두 포함하는 현대의 [다원적 세계 문화 읽기]의 새 패턴을 구축하였다. 일상을 탈출해 신나게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래도 집구석이 제일이야." "우리나라가 최고야." 사실, 진리는 먼 발치에 있지 않고, 늘 우리 근처에 있게 마련이다. 다만 감춰져 있어서 모르고 지내기 일쑤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가까이 있는 은밀한 진리를 꼭 먼 낯선 땅엘 가본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는 사실이다. 각개 문화 전통들의 표피적 도그마때문에 가려진 자기 문화의 참 모습을 보자면 다른 문화를 경험해야 한다고 엘리아데는 역설하는 것이다.
물론 근대 이후 수많은 사상가가 인류의 보편적 정신성을 전제로 깔고 세계 문화를 총체적으로 읽어보려는 과감한 도전을 한다. 이들에 비해 엘리아데의 특징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원초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본질]의 환상을 추구해온 서구사상의 [경험과 이성] 같은 인위적 틀을 거부한다. 더구나 현상과 분석, 실존과 구조 등 낯설고 닫힌 개념들로 포장된 유행 철학의 논쟁들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을 감히 다 [해체]하려는 그런 가상한 전략가도 아니다. 어차피 모두 국지적 서양 문화 유산 속에서만 헤적거리는 부질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엘리아데는 세계 문화의 저변에 깔려있는 더 근본적인 것, 즉 서양-동양 심지어 원시 문화를 모두 존재하게 하는 그 뿌리를 찾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오직 주어질 뿐이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여러 문화에서는 신이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그것이 철학 이전, 역사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사실이다. 엘리아데가 세계 문화의 상징체계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상징들은 사상의 형식 속에서 조작되기 이전부터 고유한 암호로 빛을 내온 인류 문화의 유전인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문화의 모든 상징에 단일한 해독 원리를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마치 화엄의 경지나 하이퍼 텍스트 세계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각개 상징들이 지닌 의미는 그 상호 연관 속에서 잘 번득인다. 그러니까 그 상징들의 연결 그물망을 따라가 원형을 밝히고, 의미의 바다를 항해하는 약도를 그린것이 엘리아데가 한 일이다.
왜 우리는 아무데나 묘를 쓰지 않는가? 문지방에 걸터앉지 말고, 또 아무데로나 다리 뻗고 눕지 말라고 하나? 풍수지리의 상징 체계를 알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 있는 성산들과 그들을 본따서 지은 사원과 궁궐들, 그리고 바빌론, 예루살렘, 멕시코시티, 북경 등 세계 주요 도시의 배치도 같은 논리인 것을 엘리아데는 보여준다. 즉 모두 다 중심적인 곳에 공간적 의미를 두고, 다른 곳과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심은 성(성)스럽고 다른 곳은 속되다.
결국 엘리아데를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는 게 아니라, 세계 문화의 근저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뿐만 아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와 만다라와 서낭당의 의미 지평도 모두 중심상징에서 비롯한 것으로 서로 갈등없이 만난다. 마치 배꼽과 연관된 상징들이 세계 여러 문화에서 사다리, 무지개, 은하수, 굴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세계 도처의 신화와 제의 속에 반복되는 수많은 상징의 심층적 의미를 엘리아데는 상호연관 속에서 살려낸다.
첨단 과학 시대에 웬 신화와 상징 타령인가? 하지만 현대 문화의 첨병으로 떠오른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에서조차, 여성 일자리가 몇 개 더 생기는가, 일산화탄소량이 얼마인가 하는 것은 피상적 물음들에 불과하다. 여성과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땅, 물, 달, 농경, 여성 등에 관련된 상징 체계의 의미를 알아야 문제의 핵심에 이를 수 있다. 또 SF 영화의 모티브나 컴퓨터 가상 현실 장면이 진정 그럴 법하게 보이는 것도 생짜 상상이 아니라, 그 원초적 상징의 그물망과 닿아 있을 때다.
엘리아데는 이처럼 보편적 인류 문화의 원초적 의미들을 깨닫게 되었을때, 비로소 인간은 그 참 모습([호모 렐리기오수스])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의미있는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구별되고, 따라서 성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엘리아데 현상]의 슬로건, 즉 [새로운 휴머니즘]의 신화다.
/ 서울대 교수 · 종교학 ▲1952년생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미국 캘리포니아대 석-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저서 [현대종교다원주의의 이론 연구](1990) [현대 신종교의 이해](1994) [종교와 경제간 상관관계론의 현대적 의미](1998) 등
7. 아도르노, 이성의 자각을 위해…
"도구적 이성이 서구문명 타락시켰다"…분야 국한 않은 비판이론 .
이 시대의 서양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철학자로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듯싶다. 하버마스가 세계 최고의 철학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세계적 지위에서 유래한다.
비판 이론을 20세기 서구의 주요 사상으로 끌어올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1세대 이론가들 중에서도 이론의 깊이와 학문적 업적면에서 가장 탁월한 이론가는 단연코 아도르노였다. 하버마스의 명성은 아도르노가 남기고 간 '이성의 자기자각'이라는 개념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발전시킨데 근거한다.
아도르노 사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핵심 개념은 '도구적 이성'이다. 나치가 들어서기 이전인 1931년, 28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교수 자격을 따낸 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의 현재적 중요성'이란 강연을 통해 칸트이래 서양 관념철학의 전통에서 사고가 사물을 사물 자체로 대하지 않고 사고의 총체성에 종속시키고 있음을 비판했다. 대상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의 단초는 아도르노 사상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론을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경험한 산물로 일방적으로 환원하려는 견해는 옳지않다. 다만 사고의 폭력성에 대한 그의 시각이 나치즘 등을 경험한 후 더욱 급진적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이 원시 제전의 미메시스적 행동, 오딧세우스의 자기 보존적 전략들, 올림피아 제신들이 행하는 지배권력, 근세이래 형식논리의 발달, 시민사회의 경제적 합리성 등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모든 대상을 사고에 종속시키는 동일화 사고로까지 부정적으로 진보하였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이 바로 서구 문명의 타락사이며 그 정점에는 나치즘-스탈린주의-동구권 사회주의가 자리잡는다. 그는 1960년대 말 서구의 풍요사회도 도구성의 총체적 매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도구적 이성은 사회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총체적 지배를 가능하게하는 불의의 연관관계로 만든다. 인간이 자연의 절대적 위력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첫 시도인 원시제전에서 사회가 출발한 것으로 본 아도르노에게는 사회가 조직된다는 것 자체가 개인이 사회에 강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기 보존이라는 강제적 필연성에서 출발한 사회는 따라서 개인을 목적으로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한다. 사회는 이미 그 출발점에서부터 개인에게 부자유한 노동과 희생을 강요하며 자기 주체의 포기를 요구하는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시민사회 발달과 더불어 이윤 추구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가 사회 구성의 주도적 원리로 등장하면서 사회는 개인을 교환의 대상으로 관리하기에 이른다. 교환 합리성은 아도르노 사회 이론의 핵심적 개념이며, 교환 원리가 총체적으로 작동되는 사회를 그는 잘 알려진 대로 '관리된 세계'라고 명명하였다.
예술에 대한 아도르노의 관심도 진정한 예술 작품에서는 도구적 이성이 비판되고 있음에 착안한 것에서 유래한다. 원시 제전이래 삶의 실제에 직접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면서도 그러한 실제로부터 거리를 두 면서 실제를 비판한 역사를 갖고 있는 예술은 도구적 이성이 저지른 타락에 대한 증언이자 비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사회에 대한 사회적인 반테제'이다. 보편 사상으로서 아도르노 사상은 크게 보아 역사철학, 인식론, 사회이론, 미학, 문학이론, 음악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특정 분야에 대한 특정 이론이 그 분야에만 국한되어 구성된 것이 아니고 다른 분야와 상호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계를 형성하는 공통분모는 '비판'이다. 그의 미학은 철학이자 사회 이론이다. 비판이 지향하는 바는 도구적 이성의 자기자각이며, 자기자각은 화해로 이어진다. 화해는 서로 상이한 것들이 평화롭게 함께 존재하는 상태이며 화해상태에서는 대상이 수단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문병호· 광주여대교수 ·서양철학). <문
교수 약력> ▲1954년생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학사-석사,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박사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강사 ▲현재 광주여대 문화정보학과 교수 ▲저서 '아도르노의 사회이론과 예술이론'(1993), '서정시와 문명비판'(1995), 역서 '계몽의 변증법'(근간) 등.
[아도르노] 음악등 다방면 재능…`계몽의 변증법' 유명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는 20세기 사상가 중에서 가장 음악에 밝은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성악가였던 덕분에 어린 시절 일찍이 소리의 세계를 깨우쳤다. 아도르노는 192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음악학도 파고들었다. 훗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도 작곡과 피아노 연주 수업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음악 평론을 썼고, 12음계 기법을 창시한 현대음악가 쇤베르크를 일생동안 존경했다. 아도르노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에 대한 소양도 깊었다. 대학시절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 중에서 루카치의 문예 이론서 '소설의 이론'을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도르노 사상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달랐다. 그는 생전에 '신음악의 철학'을 펴냈고, 사후엔 '예술이론'도 나왔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음악이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해 아도르노보다 더 잘 청중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도르노는 1938년 미국으로 이주, 상업주의와 대중문화가 만개한 그곳에서 '문화산업론'을 구상했다. 자본주의 문화산업이 내포한 대중기만이란 정치적 의미를 냉엄하게 지적한 그의 비판은 어린시절부터 몸에 익힌 고급예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학자로서 아도르노의 명성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동료였던 호르크 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높아졌다. 이 책은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의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명저이다. 아도르노는 50년대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 뒤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로 강의하면서 '부정 변증법' 출간 등 왕성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출연, 자신의 비판 철학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68혁명'이라고 하는 60년대 말 서구학생 운동의 폭력 사용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학생들과 심한 논쟁으로 골치가 아팠던 그는 1969년 스위스로 휴가를 떠났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박해현기자)
[아도르노 사상계보]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 벤야민 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1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1930년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헤겔 변증법적 역사관의 계승 발전, 마르크스 자본주의 분석의 재해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등을 결합해 현대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을 전개했다. 이들은 나치즘 대두로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에도 연구지를 발간하고 공동연구서를 내놓으면서 동질성을 확대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50년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으며 마르쿠제, 하버마스, 슈미트 등 유럽과 전세계에 지적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60년대 후반 서방 세계의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운동의 지적 배경이 됐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점차 폭력성을 더해가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친화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양자는 큰 갈등을 빚게 됐다.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아도르노에 대한 관심은 지난 7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이 활발하게 소개되면서 높아졌다. 마르크스의 원전이 금서로 묶였던 시절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은 산업화사회의 폐해를 경험하기 시작한 젊은 지식인들의 눈길을 끌었 다. 하지만 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아도르노는 그리 매력적인 이론가는 아니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물론 베버와 프로이트 이해가 필수적인 아도르노 사상은 실천적 무기가 되기엔 너무 어려웠다. 또 소련 이론가들이 수립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이 급격히 영향력을 확대하는 가운데서 비판 이론에 대한 관심은 식어갔다.
그러나 전문 연구가들은 이 시기에 아도르노의 저작들을 잇따라 번역하기 시작했다. 독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주연 교수(숙명여대)가 '아도르노의 문학 이론'을 편역했고, '미학 이론'(홍승용 옮김) 등이 나왔다. 90년대 들어 '계몽의 변증법'(김유동 외 옮김)이 뒤늦게 나왔고, 문병호 교수(광주여대)의 연구서 '아도르노의 사회 이론과 예술이론', 김유동 교수(경상대)의 연구서 '아도르노와 현대 사상'이 속속 출간됐다. 또 올해 2월엔 서울대 음대에서 서양음악학 을 전공한 김방현씨의 '아도르노의 음악이론'이 박사 논문으로 통과됐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엘리아데/지적계보] 뮐러-프레이저 등 영향
엘리아데의 폭넓은 문화와 종교 인식은 동양학자 막스 뮐러(1823∼ 1900)와 인류학자 프레이저(1854∼1951)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뮐러는 동양 종교의 경전들을 서양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며 프레이저는 저서 '황금가지'를 통해 세계의 문화 현상들을 과감하게 한데 묶어 놓은 인물이다. 엘리아데 자신 "뮐러와 프레이저의 저서를 읽으려고 영어 공부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엘리아데는 또 1950년 심리학자 칼 융(1875∼1961)을 만나 그로부터 인간의 상징과 상상을 내용적으로 규정하는 '원형(archetypes)'개념을 받아들인다. 또 그가 종교 자체의 독자성-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스러운 것'(the sacred)'이란 용어는 기독교의 신 개념을 넘어 타종교의 신앙 대상까지 포함하는 '거룩한 것'(the hol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종교사학자 루돌프오토(1869∼1937)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 선배 학자들의 업적과 그 자신의 연구-체험을 종합, 인류의 삶에 나타나는 종교 현상의 본질을 '성스러움의 나타남(히에로파니·hierophany)'이란 개념으로 밝히려고 했다. 그는 마르크스, 뒤르켐, 프로이트 등도 인간의 삶을 세계의 보편 문화 속에서 파악하려고 했지만 종교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경제-사회-심리현상의 일부로 잘못 보았다고 비판했다. 엘리아데는 유럽에 있을 때에도 서양 문화의 한계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관심을 끌었지만 특히 미국으로 건너간 뒤 '시카고학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전세계의 종교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84년에 착수, 사후인 1987년 출간된 '종교학대사전(The Encyclopedia of Religion)'은 인류 종교 문화의 집대성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말부터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엘리아데의 저서가 교재로 사용됐다. 국내의 종교학 연구자 대부분이 그의 영향을 받아 이기영 장병길 문상희 정진홍 교수 등이 그의 책을 강의하고 번역했으며, 많은 관련 논문이 발표됐다. 또 종교학자뿐 아니라 불문학자-영문학자-동양학자도 엘리아데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며 나아가 국문학-한국고대사-민속학 등에서도 한국의 문화 상징과 고대 사상을 이해하고자 그의 이론에 많이 의존했다. 이같은 폭넓은 관심을 반영하듯 엘리아데의 저서 중 국내에 번역된 것은 '요가'(정위교 옮김·고려원) '우주와 역사'(정진홍 옮김· 현대사상사) '성과 속'(이동하 옮김·학민사) '신화와 현실'(이은봉 옮김·성대출판부) '종교형태론'(이은봉 옮김·한길사) '종교의 의미' (박규태 옮김·서광사) '만툴리사 거리'(홍숙영 옮김·전망사) 등 10여종에 이른다. (이선민기자)
[엘리아데 누구인가] 중학때부터 철학 소질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190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 슈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등학교에 재학중일 때 이미 철학-종교사 관련글과 문학평론을 발표하는 조숙성을 보여주었다. 부쿠레슈티대 문학철학과에 입학해 이탈리아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엘리아데는 대학 졸업 후 신부가 될 생각이었지만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가 도서관에서 기다리는 동안에 인도철학사를 읽고는 마음을 바꾸어 인도로 갔다. 1928년 11월 인도에 도착한 엘리아데는 캘커타대학의 다스쿱타 교수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스승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쫓겨났고 이어 히말라야로 가서 요가 수행에 몰두했다.
3년여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엘리아데는 1933년 '요가:인도 신비주의의 기원'이란 논문으로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3년뒤 프랑스와 루마니아에서 동시에 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또 여러 편의 소설과 기행문 등을 발표,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엘리아데는 1939년부터 종교학 연구 논문집인 '잘목시스'를 발간하면서 연금술, 우파니샤드, 불교 등을 통한 상징 해석 등 동양종교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또 영국과 포르투갈의 루마니아 대사관에서 문화담당관으로 일하는 한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조국이 공산치하에 들어가자 엘리아데는 파리에 머물면서 연구를 계속했고 1949년 그의 주저중 하나 로 꼽히는 '종교형태론'를 출간했다. 유럽의 대학들을 두루 돌며 강의와 연구를 하던 엘리아데는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에 자리잡음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는 이곳에서 '이니시에이션의 의례와 상징'(1958) '성과 속'(1961) '신화와 현실'(1963) '종교사상사'(전3권:1978∼1985) 등을 잇따라 내 놓았다.
엘리아데는 필생의 역저인 종교사상사의 수정작업을 하던 1985년 12월 그가 즐기던 시가 때문에 발생한 연구실 화재로 소장 서적과 수정원고를 통째로 잃고 말았으며 이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지내다 1986년 세상을 떠났다. (이선민기자 : smlee@chosun.com)
8. 중국 최고 계몽철학자 리쩌호우
"문혁의 잿더미서 개성을 구조하라" …서양몸-중국옷 주장 .
1949년부터 1999년까지 50년 사이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가장 엄청난 소용돌이는 마오쩌둥(모택동)이 주도한 '문화대혁명'(1966∼1976)이다. 그것은 정치와 사상 투쟁을 통한 지식인들의 의식 개조를 의미했다. 핵심은 바로 '무산계급'과 '유산계급'간 '네가 죽어야만 내가 사는'(적대적인) 투쟁(양군대전)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경제-철학-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생각-감정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은 10년 동안 상호 파멸적인 비참한 사상 투쟁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중국 최고의 계몽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리쩌호우(이택후·1930∼)의 사상은 바로 이런 '문화대혁명'의 비극성을 고발하는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자신과 남의 사상 비판에 종사해야 했던 문혁기 지식인들은 결과적으로 '자아를 상실'했다. 하늘도 원망 못하고 사람도 원망 못하면서, 힘들든 원망스럽든, 집안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여전히 자신을 깎아 공공에 헌신해야(극기봉공)만 했다.
"혁명하는 일은 아무리 작아도 큰 일이요, 개인의 일은 아무리 커도 작은 일"이란 식의 복종 철학을 믿고 받들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양심과 진실은 기계적으로 변해갔고, 죽어갔다. 이들의 감성 생명은 집단적 이성에 의해 철저하게 삼켜져서 소외되어 버렸다고 리쩌호우는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무생명-무개성'의 허수아비들로부터 '살아있는', 즉 개성이 있는 인간으로 해방될 것을 외친 것이다.
개인을 중시하는 리쩌호우의 주체적 비판 시각은 뒤떨어진 중국의 현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중국 현대사에 나타난 지성사의 흐름전체를 '계몽과 구망의 이중 변주'로 파악하여 서술했다. 20세기 초 부터 시작된 전통 청산의 '계몽' 운동은 봉건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망'하는 과제와 맞물려가면서, 전자가 후자에 밀려났기 때문에 아직도 전근대요, 따라서 근대로 대변신하기 위한 철저한 계몽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서양 문물을 수입한 19세기 양무 운동으로부터 비극적 '문혁'의 사회주의 실험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모든 '근대화' 계몽운동은 리쩌호우가 볼 때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중국의 전근대적인 도덕 이상주의, 즉 중국적 실체(중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아직까지도 서구적인 현대화(서용)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리쩌호우는 이제라도 중국이 현대화를 이루려면, 중국의 알몸에 서양의 현대옷을 입히는 중체서용이 아니라, 중국의 몸을 서양의 몸으로 변신시키고 거기에 중국 옷을 입히는 서체중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리쩌호우의 과감한 논의는 1980년대에 중국의 개방과 현대화를 추구하려는 젊은 지식 청년들에게 반전통과 서방의 자유주의적인 문화 수입에 강한 열기를 불어 넣었다. 리쩌호우는 지나치게 도식적인 중국 학자들의 '유물론/유심론' 이분법적 도식을 과감히 철폐하고, '문화심리구조' 또는 '주체적 실천이성 확립'이라는 관점에서 전통적 중국 철학 사상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리고 서양 철학과 차별을 보여주는 중 국적사유의 특질을 '실용이성' 또는 '낙관적 문화'(낙감문화) 등의 개념 으로 설명해 나간다.
철학자이면서 미학자인 리쩌호우는 유려한 필치로 단순히 '논리적 사유'의 이론 전개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등의 '이미지적 사유'를 감각적으로 그려주고 있기때문에, 그의 저술들은 중국의 청년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1989년 프랑스 '국제철학원'에서 원사로 받아들여 세계적 대철학자로 공인해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1989년 '천안문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도자로 지목되면서 중국당국으로부터 여러 면에서 압박을 받고있다. 1992년부터 미국 콜로라도대학(Colorado College)에 머물고 있으며, 영구 귀국이 보류된 상태이다. 그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학생 운동과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 1994년 중국개혁에 있어서 어떤 형태의 집단적 폭력, 즉 '혁명'에 의한 개혁을 포기한다는 대담집 '고별혁명'을 출간했다.
리쩌호우(이택후)는 1930년 후베이(호북)성 우한(무한)에서 우체국 상급 직원이던 아버지와 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홀어머니가 고생하면서 리쩌호우 형제를 교육했지만, 어머니도 40세가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호남성립제일중학에 합격하고도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학비가 면제되는 성립제일사범학교를 다녀야 했다. 리쩌호우가 1950년 북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할 당시 중국 대학은 사상 개조 운동에 동원돼,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러시아어 외에 학과 과정은 거의 개설되지 않았다. 그는 독학으로 담사동(담사동)과 강유위(강유위) 등 근대 개혁 사상가들을 연구했다. 이 무렵 리쩌호우는 여전히 어려웠던 경제 사정과 지나친 독서 때문에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 배속돼 연구에 종사했다. 스물 여덟에 이름을 떨치게 한 첫 저작 '강유위 담사동사상 연구'는 건물 옥상의 컴컴한 골방에서 쓰여졌다. 이 때문에 문화혁명 때는 '백전' (전문 분야에만 몰두하고 혁명 사상에는 관심이 없다는 비난)으로 몰렸으며 허난(하남)성으로 하방돼 '5·7간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리쩌호우는 몰래 가지고 간 칸트 '순수이성비판' 영문판을 '마오쩌둥 선집' 밑에 숨겨놓고 보면서 칸트를 연구했다고 한다. 72년에 직장에 복귀한 후, '비판철학 비판 칸트 술평'과 '중국근대사상사론'을 출판하면서 집필활동을 재개했다.
리쩌호우는 1988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문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이어 국무원 학위위원회 위원, 중화전국미학학회 부회장, 파리 국제철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에는 미국-싱가포르에 객원교수로 초빙돼 서구 학계에도 얼굴을 알렸다.
리쩌호우는 1989년을 전후해 언론 인터뷰와 학술 발표회에서 공개적으로 정치-경제 개혁과 함께 언론 자유, 법치 실현을 주장했다. 그는 또 학생 운동을 지지하고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지식인 서명 운동에도 적극 앞장섰다. 이 때문에 리쩌호우는 민주주의와 과학이라는 5·4운동 정신을 다시 제기한 1989년 천안문 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돼 2년간 가택연금 당했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 지식 분자'로 몰려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고 학술활동도 금지됐다. 결국 그는 91년 미국 정부와 학계 압력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기철기자 : kichul@chosun.com)
[리쩌호우 사상] 칸트 통해 중국철학 재해석
당대 중국 사상계의 1인자로 손꼽히는 리쩌호우(이택후)의 사상적 원천은 마르크스와 칸트다. 호남성립제일사범학교를 다니던 1940년대부터 그는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었으며 이 때문에 학교에서 '위험분자'로 지목받기도 했다. 1956년 발표한 미학 논문은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활용, 미의 본질을 연구한 것으로 평가된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정부에서는 리쩌호우를 반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 규정했지만, 정작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리쩌호우는 또한 칸트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현대 중국의 첫 세대 철학자로 손꼽힌다. 1979년 출판한 '비판철학 비판'은 중국 대륙에서 1949년 이후에 나온 최초의 칸트 연구 서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칸트로부터 주체적 능동성이란 개념을 빌려 중국 철학을 기술하면서 기존 유물론적 시각을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이런 태도는 중국 철학을 유물론과 유심론 대립 구도가 아니라 '문화심리 구조'나 '실용이성' 등의 분석 도구를 빌려 새롭게 해석하는 길을 열었다.
리쩌호우에게 정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아Q정전'으로 이름난 작가 루쉰(노신)이다. 루쉰은 1930년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장제스(장개석) 정권에 저항한 지식인이다. 리쩌호우 자신도 1960년대 문화혁명 광풍에 맞서면서 루쉰의 고독한 저항을 떠 올렸을것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혼자 세상을 살아나가야 했던 리쩌호우는 '고독과 비애'로 상징되는 루쉰에게 깊은 애정을 품었다.
리쩌호우의 저서로는 '중국근대사상사론'(1979) '중국고대사상사론' (1985) '중국현대사상사론'(1987)등 중국 사상사 3부작 외에 '미학 논집'(1980)'미의 역정'(1981) '중국미학사'(1984) '이택후 철학·미학문선'(1985) '화하미학'(1988) 등이 있다. 그의 저작은 90년대 들어 국내에도 활발하게 소개됐다. 주저인 '중국현대사상사론'은 92년 김형종(동양사) 서울대교수가 '중국현대사 상사의 굴절'(지식산업사)이란 이름으로 번역했다. 또 '화하미학'(권 호 옮김·동문선) '미의 역정'(윤수영 옮김·동문선) '중국미학사' (대한교과서) 등 미학 관련 서적도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리쩌호우는 96년 5월 서울대에서 열린 제5차 아시아 아프리카 철학자 대회 겸 한국철학회 춘계 학술발표대회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했다.(김기철기자)
9.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이론 ........박혜경
여성문제 논의, 울타리를 뛰쳐나오다…실존주의적 접근 .
여성학자이기보다 작가로 일컬어지기를 원했던 보부아르였지만 1948∼49년 사이에 쓴 '제2의 성'을 통해 세계적 여성학자로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제2의 성'은 여성을 생물학적 육체, 역사, 신화 측면에서 다양하게 조명했을 뿐 아니라 유년기, 성적 입문기, 레즈비언 문제 등의 여성 성적 형성기까지 다루고 있다. 또 결혼, 모성, 사회내 여성, 제도화된 창녀, 노년 문제 등을 섭렵하여 여성 문제에 관한 한 거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제공하고있다.
(사진설명 : 평생 계약 결혼 관계로 지낸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실존주의 이론을 토대로 한 그의 여성학 이론에는 사적 유물론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는 자기가 불신하고 비판했던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여성의 내면 심리 세계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완벽할 정도의 방법론적 서술을 얻어내기도 했다. 보부아르는 무엇보다도 여성 문제가 인종이나 계급 문제와 달리 '커플'이라는 개념에 연결돼 있고, 이는 곧 가족, 혈연 등의 문제로 직결되어 뚜렷한 계급적 이슈를 갖기 어려운 데 그 특성이 있다고 보았다. 모계 사회에서 여성이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고 주장하는 엥겔스나 베벨과 달리, 보부아르는 오랜 역사 속에서 여성은 결코 우월한 지위를 가져본 적이 없으며, 사회와 정치 권력은 언제나 남성 수중에 있었다고 단언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연구에서 보듯 여성은 남성들이 결혼 관계를 통해 부족끼리 재산을 교환하는 화폐와 같은 도구로 쓰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 문제가 노동자 계급 해방과 더불어 해결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사유재산제로 여성의 열등한 지위가 확정된 것은 인정하면서도 엥겔스나 마르크스, 베벨이 주장한 것만큼 노동자와 여성 사이에 연대감이 존재하지 않으며, 엥겔스가 여성 억압 문제를 계급 갈등 문제로 희석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성욕, 후계자 계승 필요성, 노동력 확보 등을 위해 필요한 여성의 몸, 여성의 출산 능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역사속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보부아르는 자연성과 초월성, 그리고 주체와 타자라는 실존주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즉, 임신, 출산, 수유 등은 행동이 아니라 자연적 역할 기능이며 우연적이거나 무용한 생물학적 운명을 수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성이 고정된 자연, 육체를 통한 종의 반복 등을 실현하고 있 다면 남성은 새로운 가치와 군주적 의지를 자연에 투사하여 이를 변형하고 창조하여 주체로서 지배적 힘을 확인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성은 결코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지고 사회나 존재 상황 속에서 '타자'로만 취급됨으로써 부동의 자연성 (즉자적상태, 무의지적 상태) 위에 행사되는 남성의 지배권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은 물론 출산마저도 존재에 있어 본질적 가치가 되지 못하는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단순 재생산으로 보며, 여성의 열등성이 이러한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보부아르의 인식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다. 특히 실존주의 이념에서 보이는 자연에 대한 경시, 그로부터 배태된 인간 중심주의와 생명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폄하, 철저한 이성중심주의, 자본주의 신화에 위험하게 맞닿아 있을 수도 있는 책임과 생산에 대한 열광, 공존과 화합을 통해 타자와 만나지 않고 "타자, 그것은 지옥"이라는 대립 의식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 설정 등을 그대로 여성학 이론에 수용하고 있는 것은 여성주의를 통해 실존주의가 진정한 인본주의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보부아르는 실존사상이 안고 있는 반여성적 여러 인식들을 걸러내지 않은채 실존주의와 여성주의를 그대로 접목했다. 여기서 지극히 남성주의적, 서구적 이성 중심주의로 점철된 사르트르의 실존사상을 여성 문제 해석의 잣대로 갖고 있는 보부아르의 여성 주의는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프로이트에 의해 고착된 성 역할과 페니스의 생물학적 우월성에 기인하는 여성의 상대적 불완전성 등을 거부하고, 여성 문제에 있어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읽어냈다는 점은 일단업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나아가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이 만든 수많은 이론과 편견에 가득찬 명제들을 여성의 눈으로 여성과 관련지으며 검색해 내어 여성의 문제와 그 세계를 완벽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재구성낸 작업의 의미는 간과될 수 없다. 이제 그의 이론은 여성주의적 인식의 또다른 확장으로 여겨지는 생명주의와 전우주적 세계관과 접목되어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영남대교수·불문학).
<필자 약력> ▲1954년 출생 ▲이화여대 불어교육과, 프랑스 소르본느대학 대학원 졸업 (불문학 박사) ▲저서 '프랑스 소설 속의 여인들을 찾아서'(1997, 공 저) 역서'연출사'(1987), '여성의 권리'(1993).
[여성주의 역사] 1792년 영국여성 저서가 시초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보부아르의 이 말은 이미 17세기 이래 태동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사상에도 담겨있던 생각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와 볼테르 등은 여성의 열등성은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교육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1792년 쓴 영국 여성 메리 월스톤크래프트의 '여권 옹호론'은 여성의 참정권과 교육권, 직업에 대한 권리 등을 주장한 것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여성 문제에 체계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페미니즘 역사를 200년으로 잡는 것은 이 책에 나타낸 이론 체계를 현대 페미니즘의 시초로 보기 때문이다.
'제2의 성'을 통해 나타난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은 그 후 등장한 페미니즘이론가들에게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1963년 '여성의 신비'로 일약 여성 운동 기수이자 이론가로 떠오른 베티 프리단, 1970년 '성의정치학'에서 여성 억압의 원인으로 가부장제를 정면 공격한 케이트 밀레트, 사회주의적-정신분석학적 색채가 짙은 줄리엣 미첼, 여성과 남성 심리의 차이점을 연구한'다른 목소리로'(1982)의 저자 캐롤 길리건 등은 모두 많든 적든 보부아르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주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다.
여성 억압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페미니즘 이론은 워낙 다앙한 학문 분야에서 갖가지 분석 틀을 가져온 관계로 일관된 계보를 세우기 어렵다. 60년대가 제도 개선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시대였다면, 70-80년에는 사회주의적 견지에서 가부장제를 여성 억압의 최대 원인으로 꼽으며 여성의 생물학적 특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급진적 페미니즘이 세력을 떨쳤다. 80년대 들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 영향으로 "하나로 고정된 여성 이론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이 우세해졌고 90년대에는 생태학과 페미니즘을 결부한 에코페미니즘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한국에 여성학이 본격 도입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5년 UN 여성대회를 계기로 77년 이화여대에 첫 여성학 강좌가 개설됐고, 84년에는 학술 모임인 한국여성학회가 발족했다. 여성학 1세 대로 꼽히는 이효재 정세화, 2세대 조형 조혜정 조옥라 등에 이어 지금은 젊은 3세대 여성 학자들이 인문 사회과학 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상당 기간 서구 이론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는 상황이었으나, 최근 들어 한국적 상황 해석과 페미니즘 이론 개발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이미경기자 : mklee@chosun.com)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평생 연인이자 동지로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파리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변호사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맏딸로 보수적 교육을 받고 자랐다. 보부아르는 한 학년을 월반해 17살에 대학에 들어갔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독립적 삶에 눈을 떴고 자신을 키워낸 부르조아 사회의 위선적이고 획일적인 도덕과 가치관에 강한 회의를 품게 된다.
21살때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난 3살 연상의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나보다 완전하고 나와 닮은 사람"을 찾던 보브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이상형을 발견했다. 그해 교수자격 시험에서 사르트르가 1등, 보부아르가 2등을차지하면서 눈길을 끈 두 사람은 이어 파격적인 '계약결혼'으로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2년 단기 계약으로 시작된 이들의 계약결혼은 평생 계약으로 발전했다. 결혼식도 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으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계약결혼은 사르트르의 분방한 연애 행각으로 보부아르를 종종 고통스럽게 했지만, 보부아르에게 문학적 영감과 소재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의 데뷔작인 '초대받은 여인'(1943)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제3의 여자문제를 둘러싼 체험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45년 사르트르가 창간한 '레 땅 모데른'(현대)지 편집을 맡으면서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문학운동의 선봉에 서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며 사회참여 운동을 벌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절대적 책임을져야 한다는 실존주의 사상을 늘 생활에 접목시키려 애썼다. 1949년 써낸 '제2의 성'은 보브아르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제2의 성'은 지금도 여성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룬 최고의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발간 1주일만에 2만부 이상 팔려나가는 등 반향이 컸지만, 그것이 곧 프랑스 여성운동이나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70년대 사르트르와 거리가 멀어지고 부터는 오히려 여성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임신중절의 합법화를 위해 노력했고, 19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성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헌신했다.
문학작품으로 '타인의 피'(1944), '사람은 모두 죽는다'(1947), '레 망다렝'(54·콩쿠르상 수상) 등을 남겼다. 50세 이후에는 자기 반성과 늙음-죽음의 문제를 천착한 '조용한 죽음'(64),'아름다운 영 상'(66), '위기의 여자'(68), '노년'(69) 등을 펴냈다.(이미경기자)
10. 토머스 쿤의 과학철학
"과학 발전은 불연속적" 기존인식 뒤엎은 `혁명'
토마스 쿤의 기념비적 저작인 '과학혁명의 구조'(이후 줄여서 '구조')는 역설적이게도 오트 노이라트, 루돌프 카르납 등이 기획한 '통일과학의 국제적 백과사전'의 일부로 1962년 출간되었다.
노이라트와 카르납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영향력이 컸던 빈 학파의 구성원들로서,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라 부르게 된 과학철학적 견해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학자들이다.
논리경험주의적 과학관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 활동은 이론 중립적 관찰과 논리적 추론이 근간을 이루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적 활동의 전형이며, 과학적 지식은 역사를 통해 연속적이고 축적적인 형태로 성장한다. 이에 반해 쿤은 과학사를 배경으로 그러한 과학관이 과학 활동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쿤은 과학적 탐구를 공동체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두 가지 이질적 과학 활동을 구분했다. 정상과학(normal science)과 과학혁명(scientificevolution)이 그것이다.
정상 과학'이란 동일한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행하는 과학적 탐구 활동이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쿤이 기호적 일반화, 모형 가치, 범례(exemplar)라고 부른 이질적 요소들의 복합체이다. 정상 과학에서 과학자들은 자기가 채택하게 된 패러다임을 시험하는 태도로 임한다. 정상 과학의 성격에 대한 이런 이해는, 중립적 관찰을 토대로 연산법적 규칙을 적용해 이론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이 성립하는 것으로 보았던 기존 과학관과는 궤가 다른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에서 관찰 역시 다른 여러 가지 과학 활동과 마찬가지로 패러다임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다. 관찰에 대한 이런 견해는 관찰이 이론 중립적으로 이뤄진다는 당시의 방법론적 통념과 배치되는 동시에 논리경험주의적 과학관의 인식론적 구도를 뒤흔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 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쿤은 과학 변동의 단절적이고 불연속적 측면을 극적으로 부각한다. '과학 혁명'은 패러다임이 교체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쿤은 패러다임 교체를 형태 전환(gestalt switch) 또는 종교적 개종에 비유한다. 이러한 비유는 경쟁하는 패러다임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초패러다임적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과 함께 과학자들의 패러다임 선택을 비합리적이 되게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쿤은 자신도 패러다임 선택에는 나름대로 이유들' 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이유들은 연산법적규칙 적용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폭넓게 공유하는 과학적 가치-예를 들어 정확성, 일관성, 단순성 등- 적용에서 비롯한다고 대응했다. 결국 과학자들의 이론 선택이 합리성을 결여한다고 말하기보다는 합리성에 대한 기존 개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쿤의 주장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과학 혁명기의 경쟁 패러다임들은 공약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구조'에서 공약불가능성의 여러 측면이 언급되지만, 쿤 자신 이나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은 의미상의 공약 불가능성이다. 과학 혁명기의 경쟁이론들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조차 상이한 의미를 가지며, 경쟁 이론들 사이의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 논제는 즉각적으로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비판자들은 그것이 경쟁 이론간 비교 불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론간 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선택은 비합리적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으므로, 과학에 대한 비합리주의는 공약 불가능성 논제의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쿤은 미국 과학철학회(PSA)의 1982년도 모임에서 발표 한 논문에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국소적 공약 불가능성'(두 이론에 공통적인 용어들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견해)에 해당하며, 따라서 공약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경쟁 이론간 비교가 불가능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해명했다.
쿤은 20세기의 과학철학 논의에서 역사적 전환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논리 경험주의자들이 과학적 발견의 연속성을 부각하는 쪽으로 치우쳤다면 쿤은 그 불연속성을 부각하는 쪽으로 치우쳤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좀더 균형잡힌 시각을 확보하는 작업이 요구되며, 이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서울대 교수·과학철학).
조인래씨 약력> ▲1953년 생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서울대 철학과 석사, 미국 존스홉킨 스대학 철학박사 ▲편역 '쿤의 주제 들: 비판과 대응'(1997) 공저 '현대 과학철학의 문제들'(1999).
[20C 과학철학] 빈학파-포퍼 경험주의 핸슨 등이 비판
과학의 성격과 발전을 이해하려는 20세기의 철학적 논의들은 '통일'과 '경험'을 화두로 출발했다. 1920년 카르납으로 대표되는 빈학파(논리실증주의)는 모든 과학 활동을 '관찰 또는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열을 가하면 금속이 늘어 난다는 많은 관찰 결과를 모으면,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 다"는 일반화가 귀납적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퍼는 아무리 많은 관찰 결과가 모이더라도, 단 하나의 반증 사례만 있으면 일반 법칙은 무의미해진다는 점을 강조, 귀납주의를 거부한다. 대신 그는 과학적 지식의 판단 기준으로 '반증 가능한가'하는 새로운 잣대를 제시했다.
1950년대부터 과학철학자들은 빈 학파와 포퍼의 '경험주의'에 집중적 비판을 가해 탈경험적 태도를 취한다. 콰인과 핸슨등 은 "관찰과 이론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핸슨의 표현에 따르면 "경험에 대한 서술이란 항상 이론의 등에 업혀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념적 틀이나 이론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실 그대로 된 관찰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핸슨의 이같은 태도는 쿤에게서는 '공약 불가능성'(incommesurability)이란 개념으로 발전한다. 예를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 이후 뉴턴 과학이나 현대 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아주 유치하지만, 2000년 이상 최고 이론으로 자리잡 았던 것은 나름대로, 이후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정교한 설명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과 근대 물리학은 서로가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즉 공약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파이어아벤트에 이르면 쿤의 공약 불가능성은 더욱 극단적 형태를 띠게 된다. 경쟁하는 두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선택 과정은 철저히 과학자 개인의 주관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을 흔히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모태준기자: taimo@chosun.com)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등 명저 남겨
토마스 쿤(Thomas Kuhn)은 1922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엔지니어인 사무엘 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최우등(summa cumlaude)으로 졸업했고 49년 물리학박사를 받았다. 쿤이 과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때쯤이다. 쿤은 당시 하버드 총장이었던 코넌트 박사의 권유로 학부생들에 게 자연과학개론을 가르치면서 과학의 발전이 '단선적이고 누적적' 이라는 기존 생각에 반감과 회의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버클리 (1956∼64), 프린스턴(1964∼79), MIT(1979∼91) 등을 거치며 과학사를 가르치고 연구했다.
쿤은 과학 발전이 한 시대의 세계관(패러다임)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과학혁명은 바로 한 패러다임 내의 과학이 모순으로 부글부글 끓다가 위기에 닥쳐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혁명가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 과학자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 법칙, 지식, 가치, 심지어 믿음이나 습관 같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 다. 쿤의 생각은 과학이 누적적 지식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당시 생각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쿤의 저서로는 문제작 '과학혁명의 구조'(1962) 이외에 구체적인 과학혁명의 예를 다룬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과 '흑체이론과 양 자 불연속성'(1978), 과학철학적 주제를 모은 논문집 '주요한 긴장' (1977)이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숙명여대 김명자 교수와 이화여대 조형 교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됐으며, 한국과학사학회는 지난 80년 한림대 송상용 교수 주도로 '쿤의 과학사 서술과 인접 과학 의 영향'이라는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쿤에게 직접 배운 서울대 김영식 교수는 "쿤은 남의 얘기도 잘 듣지만, 좀처럼 자기 이론을 굽히지 않는 토론쟁이" 라고 그를 기억했다. 사회학계에선 성균관대 정창수 교수가 쿤에 관심이 많다. 쿤이 1996년 6월 17일, 73세에 후두암으로 사망했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과학사 과학철학자였다"(MIT의 제드 부발트 과학기술사 교수)는 평가를 받았으며 뉴욕타임스는 6월 19일 "그는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들 사이에도 상당한 논쟁을 촉발했다"는 조사를 실었다. (모태준기자)
11.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
현상은 서로 달라도 원리는 하나...구조적 무의식 규명 노력 .
레비-스트로스는 주저 중 하나인 '슬픈열대'의 초반부에서 어떻게 구조인류학자가 되었으며, 무엇을 탐구하려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널린 바위의 견고성과 그 다양한 형태 속에 '감지할 수 없는 차이성' 지층 위에 존재했던, 또한 존재하는 농업과 지리적 이변,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파란곡절을 넘어 살아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지배하는 '또 다른 의미를 찾는것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구조주의 인류학은 다양한 현상 뒤에 숨겨진 '명료한 구조'를 찾으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방법론을 구조언어학에서 찾는다. 과거의 인간이나 현재의 인간, 현대인이나 미개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사용했던,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라는 상징 체계의 바탕이 되고 있는 원리는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 뒤르켐 통해 학문적 접근…지적계보
인간의 언어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수만개의 소리 중에서 가장 차이성이 큰, 즉 대립이 두드러진 몇 안 되는 소리들을 조합하여 단어 수십 만개를 만들고, 이 단어들을 결합해 문장을 구성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우리는 언어라는 상징 체계와 기호를 통해 감정-사상-가치관을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 체계를 분석하면서 언어와 마찬가지로 교환 원리와 호혜성 원칙을 들어 설명한다.
그는 먼저 인간 사회 제도를 법칙의 세계로 보며,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문화 상태로 넘어오는 최초의 법칙을 '근친상간 금제' 규칙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동물들과 같이 짝짓기 해야 하지만 아무하고나 혼인하지는 않는다. 근친이라고 생각되는 범위의 사람들과는 혼인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은 근친과 혼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타인에게 주고 타인것을 내가 갖는, 즉 교환을 일으키는 원리이다. 내 누이와 딸을 타인에게 주고 타인의 딸이나 누이를 내가 데려오는, 즉 교환을 일으키는 법칙인 것이다.이는 나와 타인, 내 집단과 타 집단간 대립을 교환을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 연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법칙은 주면 받아야 하고 받으면 반드시 되돌려주어야만 하는 호혜성 원리이며,이것이야말로 모든 개인과 집단들간 대립을 통합하는 사회의 구성 원칙이라고 말한다. 언어적 차원의 교환, 여자 교환과 더불어 물질 교환 역시 단지 물질 만을 교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질 교환은 감정-의무-가치관 교환을 수반하게 되며 결국 이 세 층위의 교환은 사회를 구성하는 통합 원리로 작용한다.
언어는 의미가 없는 대립적 차이성만을 가진 소리(음소)를 바탕으로 의미있는 단어(의미소)를 만들었지만, 언어와 또 다른 층위에 있는 친족-예술-신화-종교 등은 이 의미가 있는 단어(의미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체계이기 때문에 언어와 같은 층위에서 연구될 수 없다. 이미 의미가 있는 항(단어)들로 이루어진 친족 용어라든가 신화 등은 그 항들이갖고 있는 의미를 따라 해석하기보다, 그 친족 호칭들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적 관계를 바탕으로 이러한 체계를 분석해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와 같은 원리로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방대한 신화를 네 권의 '신화론'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인간 심층에 존재하는 문화형성 원리, 즉 구조적 무의식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다. 레비-스트로스가 찾으려는 구조적이고 일반적인 무의식은 결국 차이성과 유사성의 관계를 통해상징과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화 속의 친족 체계 내에서 그 항(친족 용어)들이 가지는 의미는 다른 항들간의 대립적 관계로 분석될 때 찾을 수 있으며, 신화 역시 한 체계내에서 그들이 가지는 구조적 관계를 보았을 때 이들은 체계를 이루며, 더욱 큰 메타체계(metasystem)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주어진 항(신화소)들간 대립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아주다양하며, 같은 구조를 가진 신화도 다양한 내용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800여개가 넘는 신화를 모두 분석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결국 "신화는 하나의 대립적 체계를 갖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단지 그 변환, 혹은 치환 그룹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따라 다양한 신화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양한 현상 속에 숨어 있는 일반적인 이원적 무의식 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임봉길/강원대교수.문화인류학).
------------ △1943년 생 △서울대 불문과-프랑스 파리5대학 인 류학과 졸업, 몽펠 리에 3대학 및 고등사회과학원 인류학 석-박사 △현재 강원대학교 인 류학과 교수, 한국 문화인류학회 회장 △저서 '묘족(Hmong)의 사회와 종교적 표상 '(1985) '도시 중산층의 생활 문화'(1992) '구조주의 혁명' (1998)'레비-스트로스와 구조 인류학'(근간), 역서 '신화론1. 날 것과 익힌 것'(근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문화를 관통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구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청년 시절부터 시작됐다. 그는 10대 후반 마르크스의 사상에 접하면서 경험적 사건을 넘어서는 일반화의 중요성에 눈떴다. 이어 프로이트를 통해 감정,비논리 등 표면 뒤에 숨어 있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다.그리고 무질서하게 보이는 암석들의 내재적 구조를 연구하는 지질학을 통해 수시로 변화하는 현상 뒤에있는 불변의 것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레비-스트로스가 이같은 문제의식을 보다 명료하게 학문적으로 다듬을 수 있게 된 것은 프랑스 근대사회학의 창시자 뒤르켐(1858∼1917)과 그의 제자 모스를 통해서였다. 여러 가지로 나뉘어졌고 서로 구별되면서도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을 분석대상으로 제시한 뒤르켐과 정치-경제-사회-종교 등 모든 차원이 기능적으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 모스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는 '내부적으로 짜여진 보다 근본적인 실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됐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이 실체를 '구조'로 이름짓고 그 분석 방법으 로 구조주의를 채택한 것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접하면서였다.
"언어는 그자체안에 독립된 상관 구조를 갖고 있다"는 입장에 바탕한 구조주의 언어학은 소쉬르(1857∼1913)에 의해 시작돼 유럽과 미국에서 발달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유럽 구조주의 언어학을 대표하는 프라그학파의 주요 인물 야콥슨(1896∼1982)을 통해 구조주의의 기본틀을 익히고 이를 문화의 분석에 적용했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은 1950년대 말 프랑스 지성계를 강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던 실존주의에 대신하여 새로운 학문으로 각광받았다. 레비-스트로스 뿐 아니라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하여 무의식과 언어의 관계를 파고 들었던 자크 라캉, 구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적용했던 루이 알튀세르, 광기-권력- 담론-인식 등의 변화 과정을 추적한 미셀 푸코 등이 모두 구조주의자로 불린다. 그러나 정작 레비-스트로스는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 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라며 구조주의가 지나치게 넓게 적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세계를 하나의 무시간적인 전체로 파악하고 원시사회에 대해 동경의 정을 표시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은 사르트르 등으로부터 역사적 진보를 부정하고 변화에 회의적인 보수적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다. 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와 정치체제의 어떤 관련성도 부인하며 순수학문적 입장을 내세웠다. (이선민기자)
[레비-스트로스] 철학자로 출발, 인류학으로 `만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190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태계 프랑스인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원래는 철학자로 출발했다.생후 2개월 때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931년 철학 교수 자격 시험에 최연소 합격한 뒤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1935년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교수로 부임했고 이곳에서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아마존강 유역 원주민 사회를 답사하면서 인류학에 눈을 떴다.
1939년 귀국한 레비-스트로스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미국으로 피신함으로써 인류학자로서 학문적 생애에 도약의 발판을 얻게 된다. 뉴욕신사회 조사연구원에서 8년간 머물면서 그는 당시 만개하던 미국의 인류학 연구 성과를 흡수했다. 저명한 구조주의 언어학자 야콥슨과 깊이있는 학문적 대화를 나눔으로써 구조주의 방법론을 터득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48년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 부관장으로 돌아온 레비-스트로스는 이듬해 '친족의 기본 구조'라는 방대한 저서를 출간했다. 구조주의 방법론을 결혼과 친족 관계 분석에 적용한 이 저서는 학계와 사상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인류학자로서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1955년에는 브라질 원주민 부족들의 민족지를 중심으로 자기의 사상적 편력 등을 담은 철학적 기행문 '슬픈열대'(박옥줄 옮김·한길사)를 발표했는데 이 역시 독서계에 큰 화제가 됐다.
이후 레비-스트로스는 파리대학 고등연구원 원시종 연구교수(1950 년), 콜레주 드 프랑스 사회인류학 정교수(1959) 등을 역임하며 정력적인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다. 특히 구조주의 방법을 신화 분석에 적용하는데 몰두하여 1964년 '신화학' 제1권(임봉길 옮김·근간)을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71년까지 전4권을 차례로 내놓음으로써 구조주의 인류학을 완성했다. 그는 1981년 한국을 방문하는 등 80년대 중반까지도 전세계를 돌며 강연과 조사활동을 벌였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요 저서로는 앞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인종과 역사'(1952),'구조인류학'(1958·김진욱·종로서적), '오늘날의 토테미즘''야생의 사고'(1962·안정남 옮김·한길사) 등이 있다. (이선민기자 : smlee@chosun.com)
12. 존 롤스의 사회철학 `정의란 무엇인가' 철학적 해답 제시…"구성원간 합의 대상" .
존 롤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윤리학자이며 정치철학자이다. 특히 1971년'정의론' 출간 이후 그에 관한 연구붐은 윤리학과 정치철학 뿐 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으로 확산되는추세이다. 정치철학적으로는 특히 규범론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설명 : 롤스의 정의개념은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현실 속의 개인들이 이뤄낸 최소한의 합의로 보는 데 그 독창성이 있다. 사진은 정의를 상징하는 천칭을 들고 있는 법의 여신상. 1971년의 '정의론'과 1993년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나타난 롤스의 이론은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크게 봐서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공동체주의 등과 구별된다.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복지를 위해 개인의 권리는 희생될 수 있다는 이념으로 이미 현실 속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자유 지상주의는 학계에서 강한 영향을 발휘한 것으로 자유방임주의를 잇는 사상적 흐름으로 최소국가주의,나아가 무정부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었다.공동체주의는 오히려 롤스의 등장 이후에 매킨타이어 샌들 테일러 등에 의해 옹호되는 것으로 개인보다는 공동선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는 입장이다. '정의론'이 주로 상대하려 했던 입장은 현실 속의 공리주의와 학계의 자유지상주의였으며 양자 는 미국적 상황이기도 했다.
롤스의 이론은 사회계약론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데 특히 그것을 '구성'과 '합의'의 대상으로 본다는데 그의 독창성이 있다. 그의 접근방법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정의를 찾아 나선 긴 여로의 출발점은 사회의 기본구조를 운영하는 원칙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개인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다.
롤스는 사회 기본구조를 설정하는 정의의 원칙들을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도덕적 신념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과거의 방식을 피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대적이다. 또한 그는 정의를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서 그것을 알아내어 사회운영에 적용하려는 직관주의의 전통과 결별한다.그가 취하는 입장은 구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특히 정치적 구성주의에 의해 그의 작업은 구체화된다.
롤스의 정치적 구성주의는 실천이성과 원초적 입장이라는 장치를 통한 정치적 합의로 구체화된다. '원초적 입장'은 공적 문제 또는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기 위한 합의의 장치인데 그 핵심적 특징은 '무지의 베일'이다. 이 무지의 베일은 합의 당사자의 타고난 능력 및 재능, 심리상태 및 가치관, 사회경제적 지위 등을 모르게 한다는 가상장치이다. 이런 장치는 합의의 공정성을 보장하여 합당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기능을 한다. 흔히 정의를 '분배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로 대립시킬 때 롤스가 후자에 서게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정의 개념의 핵심은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인 것이다.
이어 그는 이상과 같은 합의 과정을 거쳐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정의의 두 원칙에 합의할 것으로 본다. 첫 번째 정의원칙은 사람들이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정의원칙은 우선 사회의 직위 직책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의 입장을 개선시키는 한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차등 원칙(the difference principle)이 그것이다.
결국 롤스는 이같은 정의의 두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질서 정연한 사회로 규정하면서 이런 사회에서는 여러가지 신념체계를 지닌 여러 집단들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정의관을 그는 철학적,종교적, 도덕적 신념을 달리하는 사회의 제반 집단들이 실천적 이성에 의해 지지할 수 있는 중첩적인 합의로 간주했다. 이는 정치적 다원주의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롤스 정치철학의 탁월성은 사회 운영의 기본원칙이 그 사회구성원의 합의대상임을 명백히 함과 동시에 이러한 합의에 있어서 개인적 특성에 근거한 주장보다는 공적 관점에서 문제해결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롤스의 정치철학은 시대의 조류에 따라 일시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정치철학사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마르크스 칸트 홉스 로크루소 밀 등의 유명한 이론가들을생략할 수 없듯이 롤스는 미래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존 롤스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작 '정의론'의 키워드는 정의, 사회계약, 공리주의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의란 말은 윤리학계에서 잊혀졌던 낱말이다. 특히 영미권에서 그랬다. 심지어 분석철학과 실증주의가 횡행하면서 "정의는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하며 따라서 정의의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 바로 롤스이며 그래서 그는 위대한 사회철학자가 됐다.
롤스는 근대 서구사회의 성립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는 국가의 구성 문제를 둘러싸고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때였다. 홉스, 로크, 루소, 칸트 등 사회계약론자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섭렵하면서 그는 정의의 개념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서로 갈등하는 정의의 두 원리이다.그리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몇가지 장치를 통해 그는 자유와 자유주의의 길을 택하면서도 평등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기회의 균등'에 대한 강조도 그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롤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사상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자유를 지키는데도 적극적이었다. 그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는 전체복리 운운하는 공리주의적 정의관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출발점은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자유로운 개인도 지키고 사회적 평등도 확보하려는 전략이 '정의론'을 관통하는 핵심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롤스의 사상은 중도적 성격을 띄게 된다. 미국 내에서는 노직 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맥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 사이에 끼었고 다른 나라에서는 좌우 논란의 가운데 끼었다. 간단히 얘기하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은 준수하되 사회적불 평등 문제에 관해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정의에 이르는 첩경이라는게 롤스 사상의 골자이다.
국내에서는 황경식 교수(서울대.철학)가 1977년 '정의론'(서광 사)을 번역하고 1997년에는 '시민공동체를 향하여'(민음사)라는 저서를 통해 롤스 사상의 한국적 적용을 시도했다. 최근에는 롤스가 1993년에 펴낸 '정치적 자유주의'(장동진 옮김, 동명사)라는 저작의 영향때문인지 국내 정치학계에서도 그에 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이한우기자)
[존 롤스는…] `정의론' 출간후 명성
'세인트(Saint) 하버드'. 존 롤스(1921∼)의 성실함을 존경한 그의 제자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동시에 그는 전형적인 '프로페서 철학자', 즉 강단 철학자이다. 그의 이력이 그것을 보여준다.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인 그는 1950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코넬대, MIT대 등을 거쳐 1962년부터 줄곧 하버드대에서 봉직했다.
1980년에는 '유니버시티 프로페서'로 임명돼 단과대학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과목을 자유롭게 개설해 가르쳤다. 그는 97년 초 중풍으로 쓰러져 현재병상에 있다. 롤스는 1971년에 출간한 '정의론' 하나로 태산같은 업적을 이뤘다. 그 명성 때문에 그의 강의에는 1천명 가까운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강당에서 마이크로 강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의론'은 출간과 동시에 20세기를 대표하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동시에 "누구나 알고 집에 사놓기는 하면서도 거의가 읽지 않는 책"이 라는 고전의 조건도 갖췄다. 특히 국내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선 그의 책이 소개된 시점이 1977년인데 이는 우리 대학가에 좌파 이념이 씨앗을 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좌파의 시각에서 볼 때 롤스의 이야기는 '한가로운 객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사상적 깊이를 잘못 읽은 결과이다. 롤스는 구미를 휩쓴 '68혁명'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직시했다. 거기서 그는 사회정의에 관한 도도한 요구를 목격했다. 다만 그는 거기에 휩쓸리지는 않고 그 요구를 자신의 학문적 뿌리인 '사회계약론에 바탕을 둔 확고한 자유주의'와 접목하려고 노력했다.
롤스는 미국에서는 80년대에 이미 다양한 논쟁구도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며 활발한 학문적 쟁점을 제공했지만 미국 이외의 학계로 그에 대한 관심이 확산된 것은 90년대 들어서이다. 계기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가 제공했다.다시 보니 롤스의 '정의론'에 사회비판의 에너지가 풍부하게 담겨 있었던 것이다. (
우리는 종종 한 석학의 업적을 대표작을 통해 이해하려는 경향이있다. 촘스키를 설명할 때의 어려움은 그의 대표 분야가 너무 다양하고, 그것들이 모두 중요하다는 점이다.촘스키를 보통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심리학, 철학, 인지 과학, 정치학 등에서 대단치 않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범위를 일단 언어학으로 좁혀 볼 때, 촘스키의 학문적 성과는 내용과 방법 양면에서 모두 탁월하다. 대서양 연안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음운자료의 축적에 치중하고, 당대를 풍미하던 행동주의 심리학이 인간의 언어습득이 미끼로 비둘기 훈련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을 때, 촘스키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보편 언어설과 언어생득설을 주장했다. 수많은 현존 언어들이 겉으로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그것들은 모두 보편 적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말하는 보편언어란 현상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자연 언어에 공통된 특성들의 집합을 뜻한다. 그의 주저인 '지배와 결속 이론 강의'(1981)는 언어의 보편원리와 매개변항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한국어와 영어는 공동의 보편원리와 함께 서로 다른 매개변항을 가지고 있어서, 각각 후치사와 전치사, 목적어-동사 순서와 동사-목적어 순서, 절-접속사와 접속사-절의 순서를 가진다.
언어생득설은 인간이 언어능력을 타고 났다는 가설이다. 언어는 자극과 반응, 즉 훈련에 따른 행위일 뿐이라는 왓슨-스키너 등 행동주의 실험심리학자들의 주장을 촘스키는 단호히 배격한다. 그는 성인과 어린아이의 언어습득을 예로 든다. 성인은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도 잘 안되는데, 어린아이는 의식적 노력이나 훈련없이 주어진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게다가 어린이가 접하는 언어자료가 말더듬이 부모와 같이 열악한 경우라 하더라도, 정상적 부모에게서 자라난 아이와 언어습득상의 차이가 없다.
'플라톤의 문제'라 불리는 이러한 현상을 통해 촘스키는 언어생득설을 확신하게 된다. 두뇌 속에 장치된 언어습득 장치에 하나의 촉발장치로서 언어자료를 투여해 주면, 주어진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충분한 영양과 조건이 주어지면 팔 다리가 성장하다가 일정 시기에 이르면 정지되는 것처럼, 언어능력도 일정한 조건만 충족되면 성장하다가 소위 한계시기(critical age)에 이르면 성장을 멈춘다.
촘스키 학문의 백미는 과학적 엄밀성에 있다. 명료성,단순성,대칭성, 엄밀성 등은 이미 '통사구조'(1955)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 논문은 당시 출판계의 이해를 얻지 못해 20년 후에야 출판됐다. 물론 촘스키는 이런 자산들에 대한 지적 소유권을 플라톤, 데카르트, 에스페르센 등 이성주의 선배들에게로 돌린다. 엄밀성을 담보하기 위해 촘스키와 그의 동료들이 고안한 성분 통어, 변형, 생성, 심층구조와 표층구조 등은 이제 소쉬르의 랑그와 빠롤, 기표와 기의 등과 더불어 언어학의 기초이자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촘스키 언어학은 오늘날 다분히 추상화로 치달았고, 최근의 저서 '최소주의 프로그램'(1995)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그의 이론이 명료성과 엄밀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고도로 추상화된 이유는 그의 스타일이라기보다 그가 추구하는 주제의 속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1990년대 이전 촘스키 언어학이 언어습득과 보편언어의 증명을 추구했다면, 그 이후에는 인간 언어가 필수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생물학적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셈이다. 자연과학과 달리 두뇌 연구는 직접적인 접근이 불가능하므로, 그 방법론은 간접적이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촘스키 언어학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우리가 배울 것은 사물을 보는 그의 자세이다. 그는 가장 명백한 사실에도 놀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질 것을 권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당연시했다면, 뉴턴의 만유인력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살바기 어린아이가 짧은 시간에 의식적 노력도 없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을 당연시했다면, 촘스키 언어학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감수성을 언어 뿐 아니라 우리의 주변, 즉 언론매체, 정부정책, 사회현상에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우리 모두가 깨어서 예리한 감수성을 작동시킬 때 좋은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 중앙대 교수·영어학 ).
촘스키 언어학에는 언어학자가 아닌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꼽힌다.촘스키는 펜실베니아대학 대학원 재학시절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부하다가 연역법을 언어학에 도입할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까지의 언어학은 각각의 개별언어 차이를 도출해내고 그것을 기술하는데 주력하는 경험주의적 방법론이었다. 이에 반해 촘 스키는 원리를 먼저 도출해놓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케이스를 모으는 방법을 택했다. 언어학계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300년전 철학자의 방법론을 언어학에 도입함으로써 언어학 연구방법을 바꿨다는 점이 그의 탁월한 업적. 촘스키가 자신의 1966년 저서에 '커티지언 링귀스틱스'(데카르트언어학)이란 이름붙인 것에서도 데카르트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또 개별언어를 관통하는 언어의 본질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플라톤 철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것으로 꼽힌다. 기존 언어학 방법론을 일거에 뒤집은 그의 변형생성문법은 그후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 언어학계를 석권했으며 하워드 라스닉(코네티컷대), 리처드 케인(뉴욕대), 제임스 히긴보삼 (런던대) 스티븐 핑커 교수(MIT) 등 제자군을 배출했다.
한편 촘스키의 끝없는 사회-정치비판과 사회운동에는 마르크스와 조지 오웰의 영향이 거론된다. 그러나 촘스키는 마르크스에게 비판정신과 사회분석 틀 정도만 제공받았을뿐,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지는 않았다. 소련식 독재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또 국가 권력과 억압적 제도에 대해 저항한다는 점에서는 조지 오웰의 무정부주의적 영향을받았지만 정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일반적 의미의 무정부주의자도 아니다. 이러한 독특한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으로 그는 사회운동 과정에서 늘 외톨이로 남았다.
국내에는 촘스키의 양면적인 삶 중에서 주로 언어학연구 업적이 집중 조명돼 온 편이다. '지배·결속이론:피사강좌'(이홍배 옮김·한신문화사) '언어에 대한 지식'(이선우 옮김·민음사) '영어의 음성체계'(전상범 옮김·한신문화사) '최소주의 문법이론'(이종민 옮김·한국문화사) '언어와 지식의 문제:마나구아 강연'(이통진 옮김·한신문화사) 등이 번역됐다.그 의 사회-정치비판서로는 '미국의 제3세계 침략정책'(임채정 옮김·일월서 각)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김보경 옮김·한울) 등이 번역됐으며 최근 그의 평전 '촘스키, 끝없는 도전'이 번역돼 나왔다.
[촘스키] 다양한 분야 1000여편 논문 지식인의 책임 강조...미국 등 다수의 폭력 비난 .
스물 아홉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부교수, 서른 둘에 정교수, 서른 일곱엔 석좌교수, 마흔일곱에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노암 촘스키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화려한 경력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어학 뿐 아니라 정치학, 철학, 인지과학, 심리학 등 온갖 분야에서 70여권의 저서와 10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한 정력적인 학자다.
1928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태계 러시아 이민 2세로 태어난 촘스키의 인생은 학자로서의 삶과 지식인으로서의 현실비판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언어학자로서의 삶은 히브리 언어학자였던 부모에서 비롯된다.히브리어의 복구에 헌신한 부모로부터 생활속에서 유태 문화와 시온 주의 뿐 아니라 언어학 연구의 기본적인 태도를 배웠던 것. 또 유년 시절엔 학년이나 성적의 구분이 없는 진보적인 대안학교를 다니며 자유주의 정신을 체득했으며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소수자일 수 밖에 없는 유태인이란 입장에서 다수의 폭력에 민감했다. 공산주의자였던 외삼촌 숙모 등의 영향으로 일찌기 비판정신에 눈뜬 그는 MIT 교수로 있던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반대를 시작으로 현실비판에 뛰어들었다. 결정적으로 촘스키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각인시킨것은 1966년의 뉴욕타임스 기고문. 그는 '지식인의 책임'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 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들을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그는 자신의 글을 실은 뉴욕타임스 편집진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바람에 미국 주요언론으로부터 기피인물로낙인찍혔다. 촘스키는 1967년엔 국방성과 국무성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그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엔 엄청난 관심을 쏟으면서 정작 더많은 살육이 일어나는 인도네시아 티모르 사태에는 무관심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등 지금도 다양한 형태의 저술을 통해 쓴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김한수기자 : hansu@chosun.com)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 그는 서재에 안주하지 않고서 현실에 적극 참여, 발언하고 행동하는 비판적 지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마루야마는 현실 참여와 비판은 일종의 부업'야점'이었노라고 토로했다. 본업'본점'은 어디까지나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라는 것이었다. 파시즘과 군국주의가 발호하던 1930년대 후반, 그는 당시 국책과목이던 일본 사상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일본사상의 위상은 바뀌게 되었다.
사진설명 : 히로히토 천황이 맨앞에 서서 일본군 장교들을 거느리고 있다. 자유롭고 보편적인 정신의 담지자로서 마루야마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보편 언어를 구사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 P. Sartre, 1905-80) 역시, 마루야마의 그런 점을 인정했다. '실감 신앙'과 '이론 신앙'을 경계하면서,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이론 사이의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의 마루야마는 에도(강호)시대 유학자들의 저작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 일본 근대성(Modernity)의 뿌리를 밝혀내고자 했다. 그 무렵 유행하던 '근대의 초극'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도 담았다. 서구의 '근대'를 너무 많이 수용했으므로 '과잉 근대'를 걷어내고 일본 고유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일본사에서도 보편적인 발전의 계기를 확인할 수 있지만, 현실의 일본은 아직 충분히 근대화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정작 필요한 것은 '근대의 긍정(완성)'이라 보 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마루야마는 '초국가주의'의 구성과 작동원리 그리고 심리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나섰다. 그와 동시대인들에게 절대적인 가치체였던 텐노(천황)를 정점으로 한 피라밋형 국가질서, 텐노와의 거리에 비례하는 권력의 존재 양태, '억압 이양'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 만세일계 황통을 잇는 상징으로서의 텐노,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는, 따라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의 구조 등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곧 천황제라는 주술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관점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아울러 역사의 진보를 자유로운 내면적 주체의식의 획득으로 보는 헤겔류의 역사철학이 깔려 있었다. '자유의 영구혁명자'로 불리듯이, 마루야마는 개인의 주체적 자유를 내면화하는 것,다시 말해 개인의 주체성 확립에 중점을 두었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책임을 지는 인간 유형의 창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이는 에도시대 유학사에서의 근대성 탐구와는 다른 맥락에서 이어 지고 있다.
이같은 마루야마의 주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그가 근대주의자, 서구의 근대와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이상화시킨 '결여론자'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그리고 재일한국인 문제 등에 대해 그가 무감각(혹은 침묵)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 자신, 중국의 정체성을 그대로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 부분과 근대화의 단일적 경 로등에 대해서 오류를 시인했다.
그러나 더 바란다면, 역시 본령을 찌르는 비판이 나와야 한다. 변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서구의 근대 체험을 절대화하기 보다는 방법 내 지 잣대로 택했다고 본다. 그는'전근대'와 '초근대'의 중첩 혹은 '비근 대'와 '과근대'의 동시적 존재야말로 일본 사회의 특성이라 간파했다. 이른바 주변부적인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나아가, 마루야마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문화의 형태를 규정해 가는 이른바 '집요저음'(basso ostinato)이라는 범주를 설정, 일본사상사에 고유한 구조와 계기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독특한 개념들, 예컨대 '잇달아 일이 되어가는 추세', '부챗살과 문어항아리', '이다'와 '하다', '되다'와 '이루다' 등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해서, 여전히 마루야마는 열려 있다. 하지만 그를 읽는것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의 사상적 고투에 대한 답사를 넘어서, 역시 우리 입장에서 의미있는 '다시 읽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루야마는 '서양의 사회과학 방법론을 이용해 일본사상을 분석해 낸 학자'로 평가된다. 그리고 여기서 서양은 일본이 메이지 시기 근대화 과정에서 압도적으로 영향받은 독일이었다. 고교 시절 유행하던 신칸트학파를 접하며 독일 철학에 눈뜬 마루 야마는 대학 입학 후 그의 은사인 난바라시게루(남원번:동경대총장- 학술원원장 역임)의 세미나에서 헤겔을 읽으며 매혹됐다. 또 1920년 대 이후 일본 지식인 사회를 휩쓸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도 짙게 받았다.그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될 수도 없었다" 고 밝혔지만 사상사 연구에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이 안겨준 충격을 인정했다.
이처럼 사상사를 사상의 논리적 발전으로 '안으로부터 파악하는 헤겔적 시각과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능에 착안해 '바깥으로부터'접근하는 마르크스적 시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마루야 마가 해답을 찾은 것은 만하임과 베버를 통해서였다. '의식의 존재 구속성'에서 출발하면서도 양자가 상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파악하는 만하임의 지식사회학과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에서 사용한 사회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관관계 분석은 마루야마의 일본사상 연구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마루야마가 일본사상을 근대적 학문방법으로 연구한 첫번째 학자는 아니었다. 그에 앞서 여러 학자들이 서로 다른 입장과 방법론을 갖고 일본사상사를 정리했다.그중에서 마루야마가 학문적 가치를 인정한 것은 무라오카 쯔네쯔구의 '모토오리 노리나가'(1911), 쯔다 소오키지의 '문학에 나타난 우리 국민사상의 연구'(1916∼1921),나가타 히로시의 '일본철학사상사'(1938) 등이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후기에서 "(자신의 연구가) 솔직히 말해서 어두운 밤에 이리저리 더듬어가면서 걸어가는 것과도 같았다"고 적음으로써 이들 선학들의 연구가 흡족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한국에서 마루야마의 사상사 연구를 처음 본격적으로 접한 사람은 이화여대 박충석(정치학) 교수이다. 박 교수는 동경대에서 마루야마 의 지도로 그의 방법론을 한국정치사상사 연구에 적용시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들어 마루야마의 저서들이 잇달아 번역됨으로써 그에 대한 관심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선민기자)
.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지성계의 `천황'
일본 학계와 지성계에서 '마루야마 텐노오(천황)'로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1912∼1996)는 오오사카에서 저명한 정치평론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제일중학교-제일고등학교-동경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라는 일본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동경제대 연구실에 남아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정치사상을 전공한 마루야마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것은 법학부 조교로 있던 1940년 '근세 유교의 발전에서 소라 이학의 특질 및 국학과의 관련'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이다.도 쿠가와 시대의 사상가 오규우 소라이(1666∼1728)의 저작 분석을 통해 일본에서 주자학적 세계관의 해체 과정을 밝힌 이 논문은 이어 발표한 두 편의 관련 논문과 함께 '일본정치사상사 연구'(1952년:김석근 옮김, 통나무)로 출간됐다.마루야마의 대표작인 이 저서는 사상사 연구자로서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 주었으며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동양정치사상사 분야의 명저로 꼽힌다.
동경대 교수 마루야마가 학계를 넘어 일본 지성계 전체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은 1946년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논설을 통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일본 지성인들은 천황제를 중심으로 일본 파시즘의 메카니즘을 날카롭게 파헤친 이길지 않은 글을 통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혼돈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루야마는 이후로도 계속적인 논설 발표와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해 일본사회를 감싸고 있는 군국주의의 분석과 비판에 몰두했으며 이는 그의 또 하나의 주저인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7년:김석근 옮김, 한길사)으로 묶어졌다.
마루야마는 평생 폐결핵과 간기능 장애 등 병마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한창 나이인 1971년(57세) 동경대 교수직을 떠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꾸준히 논문을 발표했으며 '전중과 전후의 사이'(1976), '후위의 위치에서'(1982), '충성과 반역'(1992)' 등의 저서를 펴냈다. 마루야마는 또 양대 저서가 영어로 번역 됐고 영국 옥스포드대, 미국 하버드대-버클리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영국 학술원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는 등 서양학계에도 널리 알려졌다.(이선민기자 : smlee@chosun.com)
. 15. 프란츠 파농의 정치철 "검은 피부여, 하얀 가면을 벗어라"...흑인-제3세계 대변 .
제2세계가 몰락하고 제1세계가 경제적,문화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제3세계'라는 개념은 아직 유효한 것인가. '제3세계'는 아시아,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을 지칭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선보인 프란츠 파농의 논리가 아직 그 힘을 잃지 않은 것처럼. 제3세계를 향해 인간성 타락의 주범인 식민 지배자들에게 대항할 것을 호소하던 파농, 그들을 모방하거나 따라잡으려하지 말것을 외치던 파농의 음성은 아직도 그 무게를 잃지 않고있다 . 사진설명 : 파농은 31살이던 1956년 병원을 뛰쳐나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몸을 담고 무장 항쟁을 벌이다, 1961년 알제리 독립을 몇달 안 남기고 세상을 떴다. 탈식민 운동의 바이블로 불리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이 기간의 경험을 담고 있다. 사진은 영국의 흑인 감독 아이작 줄리앙이 1996년 제작한 파농의 전기 영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장면들이다. 파농은 제3세계가 해방을 쟁취하던 20세기 중엽, 역사와 민중 속에 온 몸을 투신했던 지식인이자 정치가,혁명가이자 전사, 심리학자이자 사상가이다. 이 같은 파농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주저 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으로,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언어를빼앗긴 채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받게 된 피지배자들의 심리에 주목한다. 백인들은 자비로운 조력자를 가장한 채 야만인을 계몽한다는 미명 아래 흑 인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강압적으로 부과했던 것이다.
문제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언어에 정통함으로써 지배자와 동일한 지위가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갖게 된 데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지배자들은 더 이상 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할 필요가 없게 된다. 백인들의 노예가 된 다음 흑인들은 스스로를 노예화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노예화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흑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존재한 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려고 필사적 노력을한다. 그러나 파농은 '신비로운 과거를 들먹이며 현재와 미래를 부정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과 거는 어떤형태로든 현재의 순간을 사는 나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없기때문"이다.
파농이 과거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그는 말한다. "아직 백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 이상 검둥이도 아니라는 저주가 나에게 내린 것이다." 파농이 느꼈던 저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검둥이로서의 자기 삶을 살 방도가 없다는 데 있다. 다만 백인의 언어만이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수단이 되고있지 않은가. 파농 자신이 프랑스어라는 백인의 가면으로 자신의 검은 피부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검은 피부,하얀 가면'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모순일 수 있다.
파농의 비판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느껴지거나 그가 제시한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소박한 구호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이 때문이 아닐까? 파농은 이렇게 외친다. "검둥이들에게는 다만 하나의 해결책이 있으니,이는 싸우는 일이다." 그와 같은 외침을 파농은 또 하나의 주저인 '지상의 저주받은 자들'을 통해 열정적 어조로 전개하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는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무산자들에게 폭력에 호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문제는 폭력은 다만 새로운 폭력을 낳을 뿐이며, 폭력자체는 인간성의 지표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러한 논리는 물론 백인이 이제까지 흑인에게 가했던 폭력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폭력 앞에서 모든 진화, 증진, 진보,발견의 기회를 빼앗겼던 피지배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마치 파농이 언어의 문제를 놓고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듯이, 우리 역시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파농의 예지와 고뇌에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갈색 피부'를 가린 하얀 가면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파농이 문제삼았던 상황이 약탈자들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면,우리의 상황은 자발적인 것이어서 더욱 심각하다. 우리는 지금 자신도 모르게 보다 더 교묘한 약탈과 지배에 희생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 하나의 파농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장경렬/성루대교수-영문학".
<장경렬교수 약력> ▲1952년생 ▲서울대 영문과-동 대학원 졸업, 미국오스틴 소재 텍사스대학교 영문학박사 ▲인하대 영문과 부교수 역임 ▲저서 '본질지향적 비평 이론의 한계'(영문판, 1990), '미로에서 길 찾기'(1997) 등.
[파농의 사상경향] 사르트르-라캉 영향받은 좌파
파농은 흑인 정체성 회복운동(네그리튀드 운동)의 시발격인 에메 세 제르를 인용하며 자신의 책 '검은 피부 하dis 가면'을 시작한다. 세제르는 식민지 흑인들의 곤경을 무산계급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보았던 좌파 마르크스주의자다. 세제르에게 백인과 흑인의 관계는 부르주아와 프롤레 타리아 관계와 유사했고, 파농의 사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세제르의 고향이 파농과 같은 마르티니크 섬이란 것도 두 이론가의 연관성을 뒷받침해준다.
또다른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을 쓴 사람은 사르트르다. 프랑스에서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는 동안 파농은 직간접적으로 사르트르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참가 당시 파농의 사상은 사르트르의 폭력적 혁명노선과 궤적을 같이 한다. 그러나, 파농의 사상은 단순히 계급 타파와 폭력혁명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지극히 언어학적, 심리학적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에 걸맞게 자크 라캉, 메를로 퐁티등이 활발하게 인용된다.
파농은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후기 식민주의 이론의 한 지침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60년대의 흑인 인권운동을 미국에 국한시켜, 흑인 근본주의를 표방한 말콤 X 계열과,흑백 공존의 논리를 펼친 마틴 루터 킹 계열로 구분한다면,파농의 사상은 말콤 X 쪽에 더 가깝다고 얘기할 수 있다. 자메이카의 레게 뮤지션 밥 말리는 "정신적 노예상태로부 자신을 해방하라, 우리 자신만이 우리들의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노래했다. 식민을 겪은 흑인들의 마음 속에 깊게 새겨진 프란츠 파농의 모습이다. (이지형기자 : jihyung@chosun.com)
[파농] 정신병리학자 출신, 알제리 민족해방전사
사르트르는 파농을 두고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라고 했다. 정신병리 학자이면서 반식민주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파농은, 36년간의 짧은 삶을 통해, 자신의'검은 피부'에서 '하얀 가면'을 벗겨냈다. 그리고 억압받는 식민지 민중들의 '하dis 가면'을 벗겨주기 위해 전사로 살았다. 1925년 카리브해 프랑스 땅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파농은 전통적인 식민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나자 '조국 프랑스'를 위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다. 이때까지 파농은 명백히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 남아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면서, 파농은 자신을 백인과 동일시하던 환상을 깨뜨린다. 거리에선 야릇한 눈총이 건네져 오고, 환자들은 검은 피부의 의사에게, 응당 건네야할 존경을 내보이지 않았다. 1952년 출간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 기간 개인적인 좌절을 기초로 한 책이다. 원제가 '흑인들의 소외에 관한 에세이'다. 식민주의의 본질을 흑인들의 심리학적인 측면을 파고들어 풀어낸 책이다. 53년 파농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건너가 한 병원에선 정신 병리학 과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곧 알제리 독립전쟁이 터진다. 56년 직장을 그만두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전업 전사로 나서게 된다. 이 기간 '탈식민 운동의 바이블'로 평가받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써낸다.
전쟁 기간 중 프랑스 식민당국의 지하조직에 의해 몇번의 암살 위기를 넘기기도 했던 파농은 1961년, 알제리 독립을 몇달 안 남기고 백혈병으로 죽는다. 뉴욕타임스와 르몽드는 그의 죽음을 단 한줄의 부음 기사로 다루었다. (이지형기자 : jihyung@chosun.com)
16. 질 들뢰즈의 철학.....박성수
욕망-이미지등 모호한 대상 연구...현대의 스콜라 철학자 .
사상의 지형이라는 것이 상당히 유동적인 시대라서 지금은 어떤 지 알 수 없지만, 인터넷상에 가장 많은 연관 사이트를 가진 철학자가 들뢰즈라는 말이 한때 있었다. 중심을 갖지 않고 편재하는 형태로 퍼져나가는 네트워크의 형상이 그의 사상내용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다루었던 주제들 중에 큼직한 몇 가지만 들어도 그와 같은 유사성은 쉽게 확인된다. '반 오이디푸스' 에서는 욕망을 다루었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유목민적 사유에 대한 실험적인 설명이 높은 빈도로 이루어졌으며, '영화'에서의 철학적 대상은 이미지였다. 욕망은 단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유동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성격을 갖는다. 욕망은 흐름이다. 유목민적 사유란 말 그대로 정주민적 사고 방식과는 달리 어떤 중심과 좌표에 준하여 위치하지 않고 그러한 준거점들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사유를 뜻한다. 이미지는 그 모호함과 다의성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철학에서는 개념이라는 주먹 사이로 빠져 나가는 물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말하자면 들뢰즈는 지배적인 전통적 사유가 모호한 대상으로 여기던 것을 자신의 주요한 사고 영역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철학의 커다란 분류에 따라 비합리주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개념적 합리성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의 영역을 향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들뢰즈는 모호한 영역에 대한 진지하고도 치밀한 사고를 쉴 새 없이 진행시켰던 것이다. 커다란 그물코를 가진 전통적 개념이 포착하지 못하기에 모호하다고 불리우는 대상들에 가서 닿기 위하여, 그는 미세하면서도 움직이는 그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들뢰즈는 '현대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말은 여러 측면을 함축할 수 있지만 스콜라 철학에 대한 한가지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뚜렷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머리카락 끝에 천사가 몇 명 앉을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했다는 것은 꽤 익숙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그들의 소모적인 사변을 비웃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논쟁이 진정 무의미했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의 사상적 맥락 안에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어쨌든 들뢰즈가 일반적으로 말해 명확하지 않고 쓸데없고 무시되는 영역들에 집착했던 점에서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비견될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철학사에 선배를 가지고 있었다.
들뢰즈가 모호함의 영역을 탐색한 것은 바꾸어 말한다면 구체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 갖는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는 니체가 말했던 감각적인 개념을 원했던 것이다. 무딘 개념의 손끝에 감각을 되살리면서 포착한 구체적인 것을 그는 '특이성'이라고 불렀다. 특이성은 고정된 개념의 틀을 벗어나는 계기들이다. 이성적 동물로서의 사람이라는 규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규정을 위반하고 거절하고 비껴가고 전복시키는 특성과 순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에 대한 예외들이다.특이성은 개념의 예외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이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개념의 외부로 나가려는 지향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하는 일" 이라고 부른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이다.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실험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은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반오이디푸스'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에도 계속해서 탐구영역을 바꾸어 가면서 스스로의 사유에 변이를 가했다.그는 정지되어 경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지배적인 기존의 철학에 대한 일봉의 아방가르드적인 실험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것"이라는 푸코의 진술은 누구의 말처럼, 서로 아는 사이에 웃자고 한 말로 듣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국 해양대교수)
<박성수 교수 약력>57년 서울 출생 ▲고려대 철학과, 동대학원 졸업. 서양철학전 공. 철학박사. ▲ 논문 '미적 판단력 비판에관한 연구' 등 ▲문화 과학 편집 위원 ▲저서 '들뢰즈와 영화' '영화 이미지의 미학'(공 저) ▲역서 '정신분석운동'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회과학의 논리'.
16. 질 들뢰즈의 철학.....박성수
욕망-이미지등 모호한 대상 연구...현대의 스콜라 철학자 .
사상의 지형이라는 것이 상당히 유동적인 시대라서 지금은 어떤 지 알 수 없지만, 인터넷상에 가장 많은 연관 사이트를 가진 철학자가 들뢰즈라는 말이 한때 있었다. 중심을 갖지 않고 편재하는 형태로 퍼져나가는 네트워크의 형상이 그의 사상내용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다루었던 주제들 중에 큼직한 몇 가지만 들어도 그와 같은 유사성은 쉽게 확인된다. '반 오이디푸스' 에서는 욕망을 다루었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유목민적 사유에 대한 실험적인 설명이 높은 빈도로 이루어졌으며, '영화'에서의 철학적 대상은 이미지였다. 욕망은 단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유동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성격을 갖는다. 욕망은 흐름이다. 유목민적 사유란 말 그대로 정주민적 사고 방식과는 달리 어떤 중심과 좌표에 준하여 위치하지 않고 그러한 준거점들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사유를 뜻한다. 이미지는 그 모호함과 다의성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철학에서는 개념이라는 주먹 사이로 빠져 나가는 물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말하자면 들뢰즈는 지배적인 전통적 사유가 모호한 대상으로 여기던 것을 자신의 주요한 사고 영역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철학의 커다란 분류에 따라 비합리주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개념적 합리성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의 영역을 향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들뢰즈는 모호한 영역에 대한 진지하고도 치밀한 사고를 쉴 새 없이 진행시켰던 것이다. 커다란 그물코를 가진 전통적 개념이 포착하지 못하기에 모호하다고 불리우는 대상들에 가서 닿기 위하여, 그는 미세하면서도 움직이는 그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들뢰즈는 '현대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말은 여러 측면을 함축할 수 있지만 스콜라 철학에 대한 한가지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뚜렷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머리카락 끝에 천사가 몇 명 앉을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했다는 것은 꽤 익숙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그들의 소모적인 사변을 비웃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논쟁이 진정 무의미했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의 사상적 맥락 안에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어쨌든 들뢰즈가 일반적으로 말해 명확하지 않고 쓸데없고 무시되는 영역들에 집착했던 점에서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비견될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철학사에 선배를 가지고 있었다.
들뢰즈가 모호함의 영역을 탐색한 것은 바꾸어 말한다면 구체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 갖는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는 니체가 말했던 감각적인 개념을 원했던 것이다. 무딘 개념의 손끝에 감각을 되살리면서 포착한 구체적인 것을 그는 '특이성'이라고 불렀다. 특이성은 고정된 개념의 틀을 벗어나는 계기들이다. 이성적 동물로서의 사람이라는 규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규정을 위반하고 거절하고 비껴가고 전복시키는 특성과 순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에 대한 예외들이다.특이성은 개념의 예외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이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개념의 외부로 나가려는 지향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하는 일" 이라고 부른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이다.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실험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은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반오이디푸스'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에도 계속해서 탐구영역을 바꾸어 가면서 스스로의 사유에 변이를 가했다.그는 정지되어 경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지배적인 기존의 철학에 대한 일봉의 아방가르드적인 실험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것"이라는 푸코의 진술은 누구의 말처럼, 서로 아는 사이에 웃자고 한 말로 듣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국 해양대교수)
[질 들뢰즈] 서양철학의 기존개념 뒤집어
프랑스 사상가 질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는 '가로지르기'의 철학자다. 들뢰즈는 서양 철학사의 전통과 계보를 가로질렀다. 들뢰즈 철학은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의 기존 개념들을 뒤집고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횡으로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말년에 호흡기 질환을 앓았던 그가 지난 95년 파리의 아파트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운명에 대한 가로지르기가 아니었을까? '포스트 모던의 조건'이란 책으로 유명한 사상가 장-프랑스와 리오타르는 '르 몽드'지에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썼다. "들뢰즈는 세기말 사상의 전장에서 탁월한 저격수다. 그는 탈주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그의 탈주는 전진 혹은 후진이 아니라 가로 지르기다."
파리에서 태어난 들뢰즈는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는 파리 8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왕성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들뢰즈의 가로지르기는 '이데아'를 유일한 본질로 간주하면서 실재하는 사물과 사건들을 홀대한 플라톤 철학의 편협함을 비판했다. 그는 또 서양 이성의 정수인 헤겔의 변증법을 이어받지 않고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가 보기에 정 반 합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은 부정해야 할 대상을 설정하고 다시 그것을 부정하고 또다시 부정해야 하는, 순환하는 한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 들뢰즈는 "변증법이란 새로운 생각이나 느낌의 방식을 창조하지 못한다"고 단언하면서 변증법적 사유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20세기 서양 지성의 양대 기둥으로 꼽히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도 뒤흔들었다. 그는 원시공동체, 봉건제,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로 진행한다는 마르크스의 역사단계론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저서 '반오이디푸스'를 통 해 인류 역사를 미개 시대, 군주제 시대,자본주의 시대로 나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시대란 모든 욕망의 분출기라는 점이다.들뢰즈는 욕망을 한없이 조장하는 자본주의를 가리켜 '탈코드'의 시대라고 불렀다. 자본의 힘이 끊임없이 기존 체계와 가치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는 구조가 바로 탈코드의 현상이라는 것.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도 다르다.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동원해 억압된 욕망의 양상을 가족 내부 차원에서 분석했다면, 들뢰즈는 욕망의 창조력을 강조했고, 그 욕망을 사회적 차원에서 조명했다.들뢰즈는 욕망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에너지로 봤는데,문제는 자본주의가 적당하게 결핍을 만들고 욕망을 조종하면서 그 구성원들을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 철학사의 전통을 가로지른 들뢰즈였지만, 그에게도 스승이 있었다. 특히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통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고, 니체를 통해 변증법을 넘어서려고했다. 그래서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 '니체와 철학'이란 저서들을 남겼다. (박해현기자 : hhpark@chosun.com)
[들뢰즈 저서] 자본주의에 숨은 파시즘적 욕망 들춰
프랑스 사상가 미셸 푸코는 지난 70년 일찌기 "언젠가 들뢰즈의 세기가 될것"이라고 예언했다. 90년대말 한국지식인 사회야말로 들뢰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들뢰즈 철학이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된 파시즘적 욕망 구조를 날카롭게 들춰냄으로써 대항 문화의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80년대엔 마르크스, 90년대엔 푸코였다면, 이제 세기말의 한국 지식인들 상당수가 들뢰즈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들뢰즈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앙띠 오이디푸스' '감각의 논리'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 '니체와 철학' '스피노자의 철학' '베르그송주의' '영화' '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들뢰즈의 푸코' 등이다. 이처럼 들뢰즈의 저서들이 최근 잇달아 번역된 것은 철학전공자들 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 영화이론가들 사이에 들뢰즈에 대한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저서 중 '프루스트와 기호들'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는 각각 20세기 현대 소설의 새 문법을 창시한 프루스트와 카프카를 다뤘다. '감각의 논리'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정교하게 분석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영화가제시한 새로운 사유 방식을 다뤘다. 들뢰즈 철학을 풀이한 책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낸 철학자 이 정우씨는 들뢰즈를 가리켜 "21세기 우리 사유를 시도하기 위해 건너야 할 바다"라고 강조했다.(박해현기자 : hhpark@chosun.com)
17.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 김희영
8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현대의 모든 전위적- 문학적 움직임의 중 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롤랑 바르트. 그는 신화·기호·텍스트·소설적인 것으로의 그 '현기증 나는 이동작업'을 통해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와 세계에서 가장 활력적인 사유체계의 개 척자로 손꼽힌다. 바르트는 7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취임 강연에서 "어떤 야만적인 것에 의해 우리 교육에서 단 하나의 학문만을 남기고 모두 추방돼야 한다면 구제되어야 하는것은 바로 문학이다" 는 말로 문학에 대한 애정을 토로했다. 그는 비록 문학의 지배가 끝 나고 작가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문학적인 기념비 안에는 모든 학문이 자리하기 때문에', 문학만이 과학의 닫힌 체계에 열림을 창출해 낼 수 있다고 했다. 또 문학만이 삶의 실재를 재현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을, 불가능한 꿈을 구현 할 수 있다고 외치던 바르트의 목소리는 아직도 그 울림을 간직하고 있다.
바르트의 문학적 편력을 특징짓는 '다양성'(문학비평가이며 기호 학자, 작가였다)과 '유동성'(마르크스주의자이며 구조주의자, 후기 구조주의자 등)은 때로는 지나치게 시류에 편승하는 스타일리스트 혹은 타인의 이론을 이용할줄 아는 에세이스트라는 부정적인 평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대중문화의 소비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문학이 카프카가 말하는 '유희와 절망'의 열린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지극한 성찰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크리스테바는 이런 바르트를 현대적 인 문학연구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그녀에 따르면 바르트는 글쓰기의 개념을 통하여 문학연구에 최초로 주체와 역사를 도입하였으며,부정성으로서의 언어, 글쓰기에서의 주체의 욕망과 육체의 영향을 통하여 담론의 일반 체계 안에서 문학에 핵심적인 자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초기 저술 '영도의 글쓰기'(1953) 이후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글쓰기란 개념은 사회적이고도 문법적인 언어와 개별적이고도 생리학적인 문체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목적에 의해 변형된 문학언어" 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그가 영향을 받고 있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문학을 하나의 가치로 파악하고 메시지의 교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의 작업은 글쓰기의 역사, 그 형식에 관한 물음으로 모아진다. 그 이유는"작가가 사회에 연루되는 것은 그가 그 사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보다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와 형태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은 기호학을 현대 사회의 상징 체계를 드러내 줄 새로운 틀로 제시하게 한다. 기호학은 분절된 언어를 넘어서서 의복이나 음식 영화 광고 사진 등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뿌리박고 있는 요소들의 분석에 유효한 도구로 사용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기호학이 이론적이고도 방법론적인 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하며, 또 그것이 인문학의 진정한 메타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끊임없이 의문시하고 부정하고 해체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부정적인 그러나 능동적인 기호학을 '기호지향론'이라고 부른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데리다, 라캉, 니체 등의 보호체계하에 또 한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텍스트' 그리고 '소설적인 것'이라 고 불리는 바르트의 후기 저술은 욕망, 즐거움, 육체 등 개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우리는 여기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론과 결별하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실천가로서의 바르트와 만나게 된다. 언어는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이기 때문에, 이런 언어에 저항하기 위해 욕망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복수적인 글쓰기, 하나의 언어가 권력에 의해 수렴되면 곧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동작업, 총체성의 괴물을 깨부수는 단편적인 글쓰기/단상, 대립항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통합이 아닌 전혀 엉뚱한 제3의 항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립항의 빗금을 들어올리는 중성의 언어 등. 이 모든 전략과 실천작업은 삶과 유리되지 않은 문학, 타자의 언어와 텍스트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지평을 개조해 나가야 한다는 '실존의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한 조망이다.
또한 '저자의 죽음'은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인 독자를 부각시킨 다. 왜냐하면 글쓰기/글읽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한 소비자로서의 독자가 아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작품을 다시 쓰는 아마추어를 생산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언어에 대한 역사적 관심의 흔적"이라고 불렀던 바르트. 비록 언어의 폭력성에 대한 그의 제안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유토피아적인 제안처럼 보일지언정 결코 경직된 사유나 형태에 안주함이 없이 일련의 극단적인 모순된 태도 속에 언어의 흔들림을 실천하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불가능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때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그의 외침은 여전히 우리 곁에남아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불문학)
바르트는 문학평론가,문화비평가,마르크스주의자,구조주의자, 후기구조주의자,에세이스트 등 다양한 명함을 가졌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같은 자신의 '주의'를 갖진 않았다. 그는 학사 학위 하나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까지 지냈지만 어떤 학파에 얽매이지도,자신의 학파를 만들지도 않았다. 이는 그의 학문세계가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를 꾀하며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하다. 사진설명 : 1978년 영화 '브론테 자매들'에서 여배우 마리-프랑스 피지에와 함께 출연한 롤랑 바르트. 바르트의 학문인생은 흔히 세 단계로 구분된다. 초기는 '현대의 신화' '글쓰기의 영도'를 써낸 1950년대. 이 시기 그는 마르크시즘과 사르트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문학의 역사성과 사회성에 주목한다. 특히 1945년 스위스 요양중에 접한 마르크시즘에 심취해 1955 년 카뮈의 '페스트'를 놓고 논쟁이 붙었을 때 "나는 역사적 유물론 관점에서 말한다"고 선언해 한동안 '바르트=마르크스주의자'라는 딱지가 따라다니기도 했다. 바르트는 그러나 학문인생에서 중기로 분류할 수 있는 60년대 들어 기호학적 방법론에 빠져든다. 1940년 대 후반 루마니아 부쿠레시티대 교수시절 동료였던 리투아니아 출신의 언어학자 그레마스와의 인연으로 구조주의에 눈뜬 그는 60년대 본격적으로 소쉬르의 기호학을 자신의 분석틀로 응용했다.
이 분석틀은 그가 현대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의 다양한 면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됐다. 1970년대들어 바르트는 푸코, 데 리다, 라캉, 솔레르스, 크리스테바 등 후기구조주의자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현대사회를 읽는 틀을 제공했다. 바르트의 폭넓은 사상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70년대부터 주요저작이 번역되면서 시작되었다. 90년대들어 바르트는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문선 출판사가 97년부터 프랑스 쇠이유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바르트 전집을 발간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기호의 제국' (김주환-한은경 옮김) '카메라 루시다'(조광희 옮김· 열화당간)를 비롯, '사랑의 단상'(김희영 옮김·문학과 지성사간) '이미지와 글쓰기'(김인환 옮김·세계사간) '롤랑 바르트가 쓴 롤 랑 바르트'(이상빈 옮김·강간) 등 다양한 저작이 번역돼 있다. (김한수기자)
[바르트는?] 미테랑과 회식후 귀가중 차에 치여 휴유증 사망
소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현대문학과 이론의 전위적 움직임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바르트(1915∼1980)는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에서 태어났다.바르트는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다양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체득했다. 그가 한살때 사망한 아버지의 몫까지 맡았던 어머니는 프랑스와 독일이 번갈아 차지했던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 고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남부 바욘은 프랑스와 스페인, 바스크 문화가 혼재된 곳이었다.
청년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바르트는 소르본느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후 젊은 시절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프랑스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3년 '글쓰기의 영도'와 1957년 '현대의 신화'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현대의 신화'에서 이미 바르트는 프로레슬링, 그레타 가르보, 포도주와 우유 등을 통해 현대사회 대중문화 속에 내포된 기호를 분석했다.문학비평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1970년에 발간된 '텍스트의 즐거움'. 이 책에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다. 그 이전까지의 독서와 문학비평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던져놓은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문학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 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저자가 아닌 '필사자(scripteur)'라는 용어를 썼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70년대 그의 관심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외국문화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데까지 뻗어 '기호의 제국'(1970)에서스모, 파친코, 가부키, 사시미 등의 이미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아울러 "덴푸라 요리에서 밀가루는 흐트러진 꽃송이같은 진수를 되찾으며…"('기호의 제국' 중).
"이데올로기는 텍스트와 그 독서 위를 마치 얼굴에 띤 홍조처럼 스쳐간 다"('텍스트의 즐거움' 중)는 식의 현란하고 독특한 문체는 난해하고 무거운 주제를 풀어주며 그에게 대중적 인기도 안겨줬다. 영화, 만화, 사진, 패션등 현대 부르주아사회를 둘러싼 신화를 읽어내고 그 베일을 벗겨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1980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사망했다. (김한수기자 : hansu@chosun.com)
18.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당신 행위는 유전자의 명령이다"...개미생물학 1인자
생명의 주체는 누구인가? 에드워드 윌슨은 서슴지 않고 유전자라 답한다. "닭은 달걀(유전자)이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개체란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고 자손 대대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전자뿐이다. 유전자로 하여금 더 많은 복사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형질, 즉 생명체의 특성은 성공적으로 살아 남아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이 지극히 간단한 논리가 윌슨으로 하여금 생명의 다양성은 물론 인간의 특성 모두가 필연적으로 진화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고 결론짓게 만든다.
윌슨의 이 같은 사고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140년 전 '종의 기원'(1859)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다윈의 이론은 그 때까지 서양의 사상체계를 지배해 온 플라톤의 '본질주의'의 경직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고 기독교적인 이원론과 인본주의의 허구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준 혁명적인 사상이다. 사회생물학은 다윈의 이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윌슨은 무엇보다 우선 개미생물학의 세계 제1의 권위자다.그러나 그는 '곤충의 사회들'(1971) 과 '사회생물학'(1975)에서 벌, 개미, 흰개미 등 이른바 사회성 곤충들의 행동과 그들이 구성하여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가 원숭이나 심지어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일깨움으로써 생물학은 물론 다른 많은 학문에 자극을 주었다. 특히 '사회생물학'은 무려 607페이지에 50만 단어 이상을 담고 있고 참고문헌이2000개가 넘는 방대한 저서로서 사회생물학이라는 새 학문을 여는 기초가 됐다.
'사회생물학'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서 윌슨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사회생물학적 방법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성 동물을 조사하러 다른 행성으로부터 날아온 동물학자에게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인간이라는 한 영장류에 관한 사회생물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문사회과학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의 소분야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윌슨의 학문적 야망은 그의 최근 저서 '학문의 대통일'(Conscilience, 1998)에서 절정을 이룬다. 우주의 기원에서 인간의 본성에 이르기까지 자연계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에 의해 움직이며 오로지 자연과학적 방법론만이 그 비밀을 캐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윌슨의 이같은 주장은 지난 몇 세기 간 자연과학이 이룩한 엄청난 발전에 비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정체를 면치 못했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아직도 정치학이나 철학 또는 윤리학 분야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발견하겠지만 과학에 관한 한 웬만한 고등학생을 상대하기도 힘들 것이다.
과학이 이처럼 놀라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연계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과학의 환원주의적 특성에 있다. 윌슨에게 있어서 삶이란 결국 하나의 물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모든 주제들은 인지과학 내지는 신경과학으로 분석이 가능하고 또 그 같은 두뇌 반응은 유전자의 작동원리(메카니즘)로 풀이된 후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윌슨이 과학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류가 가장 엄청난 생명의 파괴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윌슨은 또 자연과학만이 우리를 이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 최재천/ 서울대교수·생물학 ).
◇최교수 약력 ▲1954년생 ▲서울대 동물학과 학사,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석사, 하버드대 박사 ▲하버드대 전임강사, 미시 건대학 조교수 역임 ▲현재 서울대생물학과 부교수 ▲저서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1999) '곤충과 거미류의 사회행동의 진화'(영문,케임브리지대출판부,1997) '곤충과 거미류의 짝짓기 체제의 진화'(영문, 케임브리지 대출 판부,1997) 역서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사이언 스북스, 1999).
[에드워드 윌슨] 친구 못사귀어 자연관찰
지난 6월로 만 70세를 넘긴 에드워드 윌슨은 '살아있는 최고의 생물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평생 애정을 쏟은 개미를 비롯한 동물의 집단생물학, 동물행동학,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 등 20세기 생물학 곳곳에서 물꼬를 바꾸고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왔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하버드대학 펠레그리노 석좌교수이다.
1926년 미국 앨라배마주의 버밍햄에서 태어난 윌슨은 어린 시절을 다소 불우하게 지냈다. 부모가 7살때 이혼한데다, 함께 살던 아버지 마저 이사가 잦았기 때문. 형제도 없었고, 친구도 사귀기 어려웠고, 주로 자연을 벗삼아 늪을 뒤지고 곤충 뱀 개구리를 관찰하고 채집하며 지냈다고 한다. 1946년 앨라배마대학에 진학할 무렵에는 곤충에 대한 상당한 조예가 이미 쌓여 학교에선 1학년 신입생인 그에게 실험실 한켠과 전용 현미경을 마련해 줄 정도였다.
앨라배마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그는 당시 개미 연구의 본거지인 하버드대학으로 옮겨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윌슨의 책들은 모두 10여권. 각 책마다 출간될 때 상당한 화제와 영향을 뿌렸다. '인간본성에 관하여'(1978) 와 '개미'(1990)로 권위의 상징인 퓰리처상을 두번이나 받았다. '개미'는 홀도블러와의 20여년간 공동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거의 백과사전을 방불케하는 대작이다. 최근에는 환경문제와 생물 다양성 문제에 관심이깊어, '생물의 경향성'(1984)'생물의 다양성'(1988) '생명의 다양성'(1992) 등 다양한 저술활동과 대중강연, 의회 로비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77년 미국 국가과학훈장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이 비노벨상 분야에 주는 크라푸드상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윌슨의 글은 전문적인 지식을 누구보다 쉽고 간단명료하게 서술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으로 유명해, 교수가 된 뒤에도 수학 공부를 학부생들과 함께 했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작문 개인수업을 받기도 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윌슨에게 직 접 배운 서울대 최재천 교수는 "엄청나게 꼼꼼하고 내면적으로는 치밀하지만 외적으로는 따뜻하고 단정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사람"이라 고 말했다. (모태준기자 : taimo@chosun.com)
19.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 "오가는 말속에 진리가 있다"...행위는 늘 인간관계 동반
시장에는 소비품이 넘치고 힘이 부치는 인간의 생계는 거의 국가가 책임져 주는 부유한 사회를 누군가 비판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과연 온당한 일인가? 역사에 유례없는 고도복지사회를 이룬 독일에서 비판이론이 나왔다는 것은 라인강의 경제기적 못지 않은 사상기적이다. 그 사상적 역정의 초기에 하버마스는 인간이 누려야 할 <좋은 삶>의 이념 에 의거하여 서유럽 복지사회의 <부유한 삶>이 어떤 취약점을 가졌는지 분석 해 냈다. 서유럽 사회의 복지는 발전된 산업과 시장을 통한 엄청난 물질적 부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고도로 합리화된 국가관료기구의 정책능력에 기초 를 두고 있다. 배만 부르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상 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의 비판작업 이 시작된다.
산업 발전의 기초인 자연과학은 그것이 인식하고자 하는 자연을 <대상>으 로 놓고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관심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즉 아는 것이 힘이다. 현대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합리적 방법을 인간 사회에 적용함으로써 그 구성원에게 부유한 삶을 선사할 여러 가지 정책수단 을 개발하여 적어도 서구에서는 자연과학에 버금가는 성과를 올렸다. 문제는 이런 성공 안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행정과 경영의 <정책적 대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조건 안에서 각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좋은 삶은 행정과 경영이 전략적으로 의도하는 범위를크게 벗어날 수 없다. 이 범위를 벗어나 는 삶의 양식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벗어나려는 그 순간부터 사회적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부유하다는 것은 더 이상의 좋은 삶을 조장하기보다는 저해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복지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삶의 실현을 방해하는 새로운 차원의 억압조건에 맞부딪친다. 이 조건 안에서 인간은 가난하지는 않지만<성숙>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60년대 반체제 학생운동과 그 이후의 시민운동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저 유명한 <지배로부터--자유로운구역!>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등장한다.
하지만 대학교수직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즉각적인 체제전복을 요구하는 행동파 학생들의 급진적 압력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신념축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좋은 삶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올바른 행위>를 담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행위자 혼자 아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직접 함께 하거나 아니면 그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되는 다른 인간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올 바르게 되려면 적어도 우선 그 행위의 뜻, 즉 행위자의 의사가 다른 인간, 나아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통해야 한다. 이런 것이 가능한 근거는 인간이 말을 통해 이런 뜻을 전달하거나 거부하면서 행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면에서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런 통찰이 하버마 스의 그 복잡한 의사소통행위론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인간의 말이 단지 인간관계형성의 수단적 매체가 아니라 말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인간 행위의 척도를 <언제나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규범체계라는 철학적 통찰이다. 어떤 말이든 말이려면 우선 그 말을 이 해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내용은 참이라야 한다. 나아가 말해진 말은 말 하는 이가 성실하게 지키겠다는 태도를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 로 그 말을 하는 가운데 말이 오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 어야 한다. 이런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말은 단지 말일 뿐 진정한 말이 아니 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과 거기에 따라나오는 논변윤리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말 속에 <언제나 이미> 초월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올바른 삶의 모습을 자각시키는 이론이다. 이런 근본적 견지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권력을 규제하는 형식적 논리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오가는 말에 뿌리 를 두고 거기에서 합의되어 나온 시민의 정당한 보편적 요구를 전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실체적 절차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홍윤기/동국대교수-철학) ▲1957년생 ▲서울대 철학과 학사 및 석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철학과 교수 ▲저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학위논문), '철학의 개혁을 향하여'(공저), 논문 '사회질서와 사회능력'및 역서 '이론과 실천'(하버마스) 외 다수
[논쟁가 하버마스] 현대사상 주요논쟁 참여
현대사상의 흐름에서 주요 고비마다 일어난 논쟁에 하버마스는 있었다. 그 런데 흔히 논쟁을 하면 상대방을 격파하는데 골몰하는 일반적 경우와 달리 하버마스의 경우 상대방의 장점은 미련없이 흡수하는 독특한 사상가다. 종종 그의 사상체계를 놓고 '종합적인가' '절충적인가'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그의 이같은 열린태도에서 비롯된다.
그가 관계한 첫 논쟁은 60년대말 독일에서 일어난 '실증주의 논쟁'이었다. 소위 칼 포퍼와 한스 알베르트로 대표되는 비판적 합리주의 진영과 아도르노 하버마스가 주도한 비판이론의 본산 프랑크푸르트학파 진영 간의 이론적 싸 움이었다. 포퍼진영은 "비판이론은 실질적으로 탐구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말 장난"이라고 비판했고 하버마스는 포퍼에 대해 "실증에 매몰돼 비판정신을 상실했다"고 맞섰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후 실증적 연구의 중요성은 받아 들였다.
이후 70년대에는 가다머와 '전통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모든 것은 전통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에 대해 하버마스는 "전통에 담 겨있는 이데올로기까지 인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역사주의 와 이성주의의 대립이 20세기에 재현된 셈인데 이 와중에 하버마스는 가다머 의 철학적 해석학의 강점은 수용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70년대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자 이 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사상가들을 몰아서 비판하는 책 '현 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간)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니체에서 출 발해 하이데거를 거쳐 데리다, 바타이유, 푸코 등으로 확산돼간 포스트모더 니즘의 형성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 해부하며 "지금의 과제는 현대의 극복 이 아니라 현대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현대성' 은 미완의 기획"의 뜻이다.
현실사회주의와 하버마스의 사상도 직접 부딪치지 않았지만 논쟁적 관계 였다. 60년대말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대학교수직을 버리면서까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비판한 것은 상징적이다. 그밖에도 80년대에는 '독일의 탈코트 파슨즈'로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사 회학자 니콜라스 루만과 논쟁을 벌이며 루만의 '체계'이론을 수용했다. 어떻 게 보면 그는 자신이 수용하고 싶은 사상을 가진 이론가들하고 논쟁을 벌였 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가 겪었던 논쟁들을 통해 그의 사상의 전선을 살피는 것도 하버마스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 중 하나다. (이한우기자 : hwlee@chosun.com)
[하버마스 누구?] 급진학생운동 비판
"나는 한국방문기간 내내 서구인들에게 완전히 열린 자세로 유보없이 배우고자 하면서도 자긍심과 한데 어우러져 전적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경험 과 전통의 지평으로부터 문화의 수용을 재음미하고 그로부터 다른 어떤 것 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96년4월 한국을 2주간 방문했던 위르겐 하버마스의 소감이다. 특히 그는 해인사를 방문하고나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 같은 대장경판을 만들어낸 한국인의 정신적 저력은 대단하다"고 했다.
사진설명 : 96년 4월 해인사 입구 서낭당을 찾은 하버마스 부부.
29년 6월18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55년 셸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61년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공공성의 구조변동'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이때부터 이미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 되고자 했으나 아도르노교 수의 '비토권'행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그를 불러준 사람이 하이 델베르크대학의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였다. 현재 100살인 가다머는 지난 6월18일 칠순을 맞은 하버마스를 기념해 독일의 신문 쥐트도이체자이퉁에 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아직 교수자격논문을 쓰지 않았던 하버 마스를 교수진에 포함시키기 위해 철학학부와 교육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 다. 이로써 철학과에서 특정한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우리들 모두의 진정한 학문적 공통점을 형성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버마스는 너무 일찍 우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대학 에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으로 부임해갔다."
61년부터 64년까지 하이델베르크대에 있다가 프랑크푸르트대로 옮겨 철 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던 그는 학생운동의 급진화를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운동권과 긴장이 조성되자 71년 교수직을 던졌다. 이후 10년동안 막스 플 랑크연구소를 만들어 독자적 학문세계를 구축하다가 83년 프랑크푸르트대 로 복귀했다. 그리고 94년 정년퇴임했다. 지금은 스타른베르크의 사저에 머물면서 저술작업과 강연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여전히 민주주의 인권 법치 등의 문제와 관련한 논문들을 내고 있다. 그의 저서는 10여권이 국내에 번역돼 있고 그에 관한 국내학자들의 관심도 대단히 크다. 특히 사회학과 철학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사회학에서는 한 상진정신문화연구원장을 비롯해 송호근(서울대) 박영도(서울대강사) 이홍 균(연세대), 철학에서는 이진우(계명대) 이상화(이화여대) 윤평중(한신대) 정호근(목포대) 이기현(방송개발원) 장춘익(한림대) 김재현(경남대) 권용 혁(울산대) 그리고 정치학에서는 이신행(연세대) 황태연(동국대) 등이 하버마스로 직간접적 영향을 받고 있는 학자군이다. (이한우기자 : hwlee@chosun.com)
20.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정수복 인간에게 '자유'를 선고하다...결정론적 역사관 거부
프랑스는 지식인이 가장 자유롭게 활동하는 나라이고그곳에서 사르트르는 그누구보다도 비판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한 사회의 주어진 질서를... 프랑스는 지식인이 가장 자유롭게 활동하는 나라이고 그곳에서 사르트르는 그 누구보다도 비판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한 사회의 주어진 질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더욱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읽고 생 각하고 쓰고 토론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사르트르보다 더 잘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는 철학자, 소설가, 희곡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이론가, 잡지 출판인, 논쟁가, 사회운동가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집합명사였다.
사르트르는 일생에 거쳐 수많은 감동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 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하였다. 그러기에 사르트르라는 이름 뒤에는 실존주의란 말이 따라오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 과 융합하며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대전 상황 속에서 쓰여진 '존재와 무'로 대표되는 초기의 사르트르가 순수한 의미에서의 실존주의자라면 냉전 상황 속에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쓴 후기의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적 실존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고 또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선포하였다. 그가 볼 때 인간 은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에 대한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공산당의 비판에 대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로 응수하였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고 자유 롭게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생성의 존재로서의 인간 모습을 사르트르는 스스 로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어느 곳에 정착하지 않는 보헤미안적인 삶, 그리 고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의 특별한 관계는 부르조아적인 안정과 삶에 대한 하 나의 도전이자 비판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냉전 상황 속에서 사르트르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신 의 존재론을 사회적 분석 차원으로 발전시켜야 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마르크 스주의와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넘어서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교조화되고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그 냥 아무 내부적 관계없이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 의 집합이 아니라 집합적인 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융합된 집단' 의 모습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소외와 착취의 관계를 벗어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1956년 소련의 부다페스트 침공 이후 사르트르는 공산당과의 동반자적 관계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의 독립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을 통해 폭력의 피해자인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사용하는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청년들에게 식민지 유지를 위한 비열한 전쟁에 징집을 거부하라는 내용의 '121인 선언'을 주도하였다.
1968년 5월 운 동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50년만에 민중과 지식인이 다시 손을 잡았다'라고 말했고 '우리들의 저항은 옳은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다니엘 콘벤디트와의 대 담록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후 사르트르는 마오이스트로서의 입장을 취하며 프랑스 좌파 집단의 옹호자 역할을 하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 고전적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던 사르트르의 선택과 참여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역사적 결정론을 거 부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서 행위자의 실존적 선택과 자유를 옹호한 사르 트르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많은 지식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그래서 마르쿠 제는 사르트르를 가리켜 '세계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항상 기득 권의 수호보다는 보다 정의로운 방식으로 기존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참여 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결정론과 환원론을 거부하고 인간 이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그의 실존주의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 이었다. (사회운동연구소소장·사회학) <박소장 약력> 1955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사, 사회학과 석사,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사회학박사. 현재 사회운동연 구소 소장. 저서: '의미세계와 사회운동' '녹색대안 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 및 역서 '현대 프랑스 사회학' 외 다수.
[사르트르의 문학] 철학적 주제... 실존주의 상화
사르트르의 첫 소설 '구토'(1949)에서 주인공 로캉텡은 사물과 의식의 대립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존재와 무'(1943)에서 철학 적으로 분석됐던 문제다. 사르트르는 소설을 내기 6년전 펴냈던 '존재와 무'를 통해 의식/비사물성(무)을 객관적 사물성(존재)에 대비시켰다.
문학은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를 형상화하는 하나의 장이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방법을 종합하려 했던 플로베르에 관한 전 기 정도가 예외랄 수 있겠다. 1945년부터 4년에 걸쳐 나왔던 3권 짜리 '자유에의 길' 연작을 통해서 사르트르가 제기한 것은 행동, 특히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할 때 맞닥뜨리는 윤리적 딜레마였다.
사르트르는 '자유에의 길' 연작 3부에 해당하는 '영혼의 죽음' 을 완성한 뒤 소설보다는 희곡 창작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사 르트르의 말을 옮기자면, "작가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하고 행위하는 인간이 가장 참다운 인간인데, 희곡이 바 로 그것을 그린다"는 생각이었다. 장르는 바꾸었지만, 실존주의의 형상화는 계속됐다.
'더러운 손'(1948), '알토나의 유폐자'(1959)에 등장하는 인물 들의 자살도 비슷하게 '행동'과 관련된 딜레마 때문으로 해석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로 유한 '닫힌 방'(1944) 역시 인간 관계의 불가능성이라는 실존주의의 주제를 다뤘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8)를 통해 '문학은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직접 창간했던 '현대'지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 력했다. 샤를르 보들레르(1946), 장 주네(1952)에 관한 글은 실존 주의적인 정신분석 테크닉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지형기자 : jihyung@chosun.com)
[사르트르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사르트르는 메를로 퐁티와 '절교'했는데 '한국전쟁'이 이유였다. 1953년 6월쯤 사르트르는 퐁티에게 "당신이 한국전쟁에 대해 입장 취하기를 거부했을 때 '현대'지의 독자들이 노여워했던 것을 아느냐"고 편지를 보냈다. 퐁티는 "한국전쟁으로 좌파의 대의가 공산주의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에 글을 쓰지 않았다" 고 답했다.
사진설명 : 1960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굳이 사상을 논하지 않더라도 사르트르는 역사의 흐름에 시시콜 콜히 간섭하고 참여하며 실천적 지식인, 행동하는 양심의 모범을 제 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저 지른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 침공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 을 할 정도로 자립적 지성의 면모를 보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 죄 심사를 위해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창안한 국제법정의 발 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마오이스트계열의 기관지인 '인민의 기치'를 손에 들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사르트 르였다.
1905년 6월 파리에서 해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고등사범학 교를 졸업하고 1933∼1936년 독일에 유학했다. 이 때 접한 후설의 현상학을 독자적으로 수용해 펴낸 책이 '존재와 무'다.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됐지만 '부르주아들의 상'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절 했고,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 역시, '부르주아적 결혼' 에 대한 저항이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평생 동반자 관계를 유 지했고, 1980년 4월 17일 2만5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장례식에 서 세상을 떠난 사르트르에게 장미 한송이를 건넸다. (이지형기자 : jihyung@chosun.com)
21. 호적의 자유주의.....조병한 "이념 대신 민주-과학 중심으로"...혁명시대에 고립된 실패자
현대 중국의 대표적 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이며 자유주의 정치개혁론자인 호적은 서구, 특히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우선 중국 공산당의 대륙 장악으로 끝난 20세기의 격렬한 혁명 물결 속에서도 서구 근대의 법치-인권 사상과 제도의 수용을 위한 일관된 노력을 견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설명 : 1925년 1월 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호적의 특별기고. 당시 중국 사상계의 동향을 정리한 글과 함께 '경축 신조선의 진보'라는 휘호도 보내왔다.
아울러 서구 근대문명의 압력 아래 중국문명을 개조해 현대 세계문명 속에 부흥시킬 방법을 모색해 중서문명을 비평하고 서구 학문의 방법을 적용해 중국 고전을 정리, 근대적인 철학-역사-문학 연구를 성립시킨 학자로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19세기 이래 세계를 휩쓴 서구문명의 제국주의적 정치-문화 영향 앞에서 후진 지역의 문화전통과 서구문화 간의 관계, 바람직한 후진국의 정치변혁-문화변용 문제를 깊이 연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도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호적 누구인가]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
제국주의 타도를 절대 명제로 삼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혁명의 높은 파고 속에서, 정도차는 있지만 기존질서의 전면적 부정이 대중적 감성을 사로잡았다. 이런 급진적, 폭력적 시대사조를 고려할 때 호적의 점진적, 평화적 정치개혁 주장은 당시로서는 비현실적이었다. 따라서 그 생전에 자유주의적 정치주장은 실패할 운명이었을 뿐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 문제에 소홀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번도 원칙을 굽히거나 절충적 입장으로 후퇴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는 그에게 이상주의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생전에는 시대조류에서 고립된 실패자였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를 지나 1970년대 말 이후 중국의 개방과 대만 민주화의 시대적 전환기에 이르러 그는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보듯이 지금껏 가느다란 지류에 지나지 않던 민주화 문제가 이제 정면으로 다루어야 할 과제로 접근해 오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호적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호적의 시대는 문화면에서도 수천년의 중국 전통문화가 서구 근대문명의 파괴에 직면한 심각한 문명 위기의 시대였다. 이는 과거 인도 불교문화의 도전을 신유교 즉 성리학의 중흥으로 극복한 문화 체험보다도 더욱 심각한 위기로서, 호적의 말에 따르면 중국문화의 역사에서 가장 엄중한 역량의 시험이며 생존능력의 시험 이었던 것이다. 이 중서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19세기 후반 이래 유교 등 중국문화의 장점을 보존하면서 서구문명의 필요한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한다는 절충적 논리가 독재정권의 정치적 권위주의와 결합해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호적도 물론 중국 고전문화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의 고전연구'국고학:국고학'는 고전문화의 민족주의적 과장이나 정치적 권위주의와는 무관하며, 문화의 세계화 속에 살아남을 경쟁력있는 전통문화 요소를 과학적 방법으로 발굴, 정리해 미래의 중국문화 개조에 기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편적 세계문화로 인정한 서구문화의 정신과 방법, 즉 인본주의, 주지주의, 실증적 과학방법 등의 요소를 전통문화 속에서 탐색했고 이를 위해 원시유교, 제자백가, 고증학, 고전 통속소설 연구에 서구 인문학의 방법론을 적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호적의 사상과 활동의 배경에는 미국 철학자 존 듀이 문하에서 공부한 '프라그마티즘'을 토대로 형성된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있었다. 호적은 프라그마티즘을 '실용주의'가 아니라 '실험주의'로 번역하고 그 방법을 중국의 정치개혁과 문화개조에 적용하려 했다. 5·4운동 이래 중국의 민족적 과제로 제기된 `민주'와 `과학'이란 과제에 대해, 호적은 전반적 해결을 시도하는 신념체계로서의 혁명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연구를 강조했으며 이데올로기마저 문제연구의 가설로만 다루도록 권고했다. 민주도 과학도 방법이 아니라 이념으로 변질하는 중국적, 동아시아적 지식풍토에서 호적의 주장은 가장 비중국적인 사고의 진귀한 사례로 남아 있다. ( 서강대 교수·동양사 ) ------------ <조병한교수 약력> ▲1946년생 ▲서울대 사학과 학사-석사-박사 ▲동의대, 계명대 사학과 교수 역임 ▲현재 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서 `5·4운동―근대중국의 지식혁명', 논문 `강유위의 초기 유토피아 관념과 중서문화 인식', `태평천국의 종교공동체와 관료체제'
[호적/평가와 논란] 좌우 양측서 맹렬한 비판
혁명적 상황의 연속이었던 중국현대사 속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던 호적의 입지는 넓지 않았다. 그가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이 컸던 만큼 호적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첫번째 논란은 귀국 직후인 1919년 7월 발표한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는 적게 말하자'다연구문제 소담주의''는 평론에서 비롯됐다. 이 글은 어떤 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국 공산주의 초기 지도자 이대조는 '문제와 주의를 다시 논함'을 발표하여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미성숙이 문제이지 주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제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내건 5.4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나온 호적의 주장은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많은 중국인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호적을 둘러싼 최대 논란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공산정권이 1954년 대대적인 '호적 사상 비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어났다. 이 운동은 중국 지식인들의 사상적 개조를 겨냥하여 1년여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그 결과는 국배판 크기의 책 8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간행됐다. 호적은 이같은 비판운동이 오히려 자신의 영향력을 말해준다며 언젠가 중국 대륙에서 자유주의 사상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응수했다.
호적을 둘러싼 논란은 그가 만년에 정착한 대만에서도 일어났다. 죽기 얼마전 한 세미나에서 호적이 지론인 전통문화 비판을 되풀이한 것을 도화선으로 '중서문화논전'이 벌어졌다. 당시 대만 사회를 지배하던 보수주의자들은 전면적인 서양화를 주장하는 호적을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그를 옹호하는 젊은 지식인들은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고독한 소수자'였던 호적은 1980년대 이후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는 그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대하여 많은 연구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중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실험-호적의 사상과 활동'(지식산업사)를 펴낸 민두기 서울대명예교수는 이같은 '호적 르네상스'에 대해 "민주와 과학이라는 현대사의 기본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중국에서 호적은 오늘의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선민기자)
[호적 누구인가]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
호적은 청왕조 말기인 1891년 중국 안휘성 적계현에서 중하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전통적인 서당 교육을 받은 그는 10대 중반 상해로 가서 근대교육을 접했으며 1910년 의화단 사건 배상금으로 운영되는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 도미했다. 처음에는코넬대학에서 농학을 배웠지만 곧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1915년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평생의 스승이 되는 존 듀이의 지도를 받았다.
호적은 미국에 있던 1917년 1월 진독수가 발행하는 잡지 '신청년'에 문학의 내용-형식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를 주장한 '문학개량추의'를 발표함으로써 일약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같은해 8월 북경대 교수로 부임했다. 호적은 문학혁명의 구체적 형태로 백화문 운동을 선도했으며 뒤이어 많은 사회-정치평론을 발표하면서 중국에 자유주의를 도입하기 위해 맹활약했다. 또 근대적 학문방법을 적용하여 중국 전통문화를 정리하는데도 몰두하여 중국사상사 연구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중국철학사대강 상'(1919년)과 홍루몽 연구 등을 발표했다.
호적은 평생 정치적 발언을 하면서도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당과 공산당을 모두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는 "상대적으로 자유의 가능성을 더 갖고 있는" 국민당 편을 선택했다. 호적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주미대사로 부임, 미국의 중국 지원을 유도하는 활동을 펼쳤다. 1941년 주미대사를 사임한 후 하바드대 등에서 강의하며 미국에 머물던 그는 1946년 북경대 총장으로 중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국-공 내전의 결과로 중국 공산당에 의해 북경이 포위되자 1948년 12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이후 호적은 서방사회에서의 지명도를 바탕으로 국제연합과 유네스코 등에서 대만을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프린스턴대 등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하던 호적은 1957년 대만의 최고 학술기관인 중앙연구원 원장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1961년 세상을 떠났다. (이선민기자 : smlee@chosun.com)
22.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 원리」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뉴턴이 완성한고전물리학에 의하면 이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하늘에 던져진 공이 낙하법칙에 따라...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순 없다"...결정론적 세계관에 타격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뉴턴이 완성한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이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하늘에 던져진 공이 낙하법칙에 따라 떨어지듯이,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물체의 운동 과정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아무리 정확한 물리법칙이라 하더라도 어떤 한계 내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20세기 사상의 커다란 흐름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통계적이고 비결정론적인 세계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뉴턴 역학을 바탕으로 해서 완성된 라플라스(프랑스 물리-천체학자)의 세계는 완벽한 결정론의 세계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뉴턴과 라플라스에 의해 제창된 결정론적 세계관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그 대신 물리 세계에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고 단지 통계적으로만 기술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인 새로운 세계관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20세기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형성에 있어서 핵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였다. 그는 1925년 '행렬역학'이라는 새로운 개념틀을 제안하여 고전역학과는 다른 새로운 현대물리학 체계인 양자역학을 창안한 사람이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창안한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고 하면 그만큼 더 짧은 파장의 빛으로 관찰해야 하다. 하지만 빛의 파장이 짧아질수록 컴프턴의 효과로 전자의 유동성이 커져 그 전자의 운동량에 대해서 그만큼 부정확한 값을 얻게 된다. 결국 위치와 운동량은 아주 작은 범위에서는 서로 불확실한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불확정성 원리는 곧이어 등장하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합쳐져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인 소위 코펜하겐 해석으로 구체화됐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야기했던 가장 커다란 논란은 사람의 관찰, 혹은 측정 행위가 측정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 전문 분야에서의 공헌뿐만 아니라 '물리학과 철학'(1959), 자서전인 '부분과 전체'(1969) 등의 책을 통해 20세기 일반 과학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관찰자의 측정 행위가 대상을 결정한다는 내용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객관주의와 실재론적 전통이 강한 물리학에서 주관주의와 관념론적인 측면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파울리는 양자역학이 지니는 비결정론적 성격을 종교에서 연금술적 상징들이 표출되는 집단 무의식을 다룬 칼 융의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다. 관찰자의 주관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치 소우주인 인간이 정신적으로 만다라(mandala·만다라)에 '들어가서' 우주 생성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리적 개별 현상은 우주 전체 과정과 연결되어 있고, 부분은 전체와 상호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개별 측정행위에 의해 세계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는 사실은 무한히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다수 세계 해석'(many-world interpretation), 혹은 정반대로 '다수 정신해석'(many-mind interpretation)을 제안하는 철학자들도 등장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집권 이후 많은 과학자들이 외국으로 떠날 때 독일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핵개발에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 독일 과학계를 대변했고, 원자력 이용을 포함한 전후 독일의 과학 정책의 향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이젠베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쿼크가 물질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소립자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했다. 그는 만약 자연에 궁극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질 입자가 아니라 물질에 내재된 기본 대칭성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한 근본 물질에 대한 논쟁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최고의 지성들 사이에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 임경순/ 포항공대교수·과학사 )
<임교수 약력> ▲1958년생 ▲서울대 물리학과-동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졸업,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 연구원 ▲현재 포항공대 과학사 교수 ▲저서 '20세기 과학의 쟁점'(민음사, 1995) '100년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사이언스북스, 1997) 역서 '과학과 인간의 미래'(대원사, 1997)
[불확정성 원리] 석학들과 논쟁...서로 영향주며 완성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어떻게 창안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사학자들은 대략 3가지 방향에서 그 영향 관계를 찾고 있다. 우선 현미경의 분해능 문제는 하이젠베르크의 박사 학위 심사 구두시험에 출제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빌헬름 빈이 물어본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서 아주 나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경험으로 분해능 문제가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하이젠베르크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료 물리학자인 파울리가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하기 직전의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이 편지에서 파울리는 "우리는 운동량이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위치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운동량과 위치의 눈을 동시에 뜨면 틀리게 된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내용에 불확정성 원리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는 하이젠베르크 자신의 주장으로, 아인슈타인의 영향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에서 아인슈타인이 "관찰이란 것은 관찰하려는 현상과 감각의 연관성을 정해주는 자연법칙을 알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바로 이론"이라고 말해주었다고 쓰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바로 이 말을 듣고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의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지닌 비결정론적인 성격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 보어와 양자역학의 유효성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쟁에서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세상을 비결정적 혹은 확률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뜻)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임경순 교수는 "양자역학의 탄생이나 불확정성 원리는 20세기초, 물리학 거장들의 집단 창작품에 가까왔다"며 "이들은 물질의 아주 극미한 세상에서 예전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생기자, 편지왕래와 격렬한 토론을 거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해결해 나갔다"고 말했다. (모태준기자)
[하이젠베르크] 독일 핵개발에 참여
베르너 칼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12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0살때 왕립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 그리스 철학과 과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철학과 과학, 고전, 음악에 관한 그의 흥미는 일생 계속된다.
1차대전 중에 농장 노동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던 그는 전쟁후 청년 운동의 지도자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구세대는 이미 부서졌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계와 독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극우적 공동체 운동이었다.
1920년 괴팅겐대학에 입학,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곧 물리학에 빠져들었다. 그는 1923년 뮌헨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고 이듬해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양자역학과 이의 철학적 해석은 그가 1924년 당시 고전양자론의 본산이었던 닐스 보어의 네덜란드 코펜하겐 연구소에 합류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25년 양자역학의 또 다른 기술법인 행렬역학을 알아냈고, 1927년 그의 최대 업적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1927년에는 당시 독일 최연소 나이로 라이프치히대학 정교수가 됐다. 그리고 1933년엔 양자역학을 세운 공로로, 최고 영예인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만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은 모두 유태인의 학문이라며 이를 옹호하는 하이젠베르크를 백색 유태인, 정신적 유태인이라고 몰아부쳤다. 나치로부터 두세차례 감금 등 신체적 위협을 받았음에도, 그는 1939년 미국 강연에서 망명하라는 동료과학자들의 충언을 다음과 같은 말로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에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전쟁 후 훌륭한 과학을 재건할 뜻있는 젊은이를 모으겠다. 내가 지금 이 젊은이들을 버린다면, 그들은 나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2차 세계대전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핵무기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전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8개월간 구금생활을 했다. 이후 20여년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과학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 독일연구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았으며, 훔볼트재단을 설립, 많은 독일 학생들을 지원했다. 1970년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에서 은퇴했으며, 1976년 뮌헨의 자택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