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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2)
박성배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종교학과 불교학교수)
3. 선문정로의 문제점
<참선의 생명은 깨침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이상 <깨침을 헛짚는 오류나 깨치지도 못했으면서 깨쳤다고 외치는 오류>는 철저히 단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철스님이 <깨침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밝히고 <올바른 깨침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문제삼았다는 것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선종(禪宗)의 역사는 거짓된 깨침을 고발하고 참된 깨침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선문정로가 비록 이와 같이 중용한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출판되었다 할지라도 이 책은 지금 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러가지 수긍할 수 없는 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 학자들간에 큰 논란의 대상이 되어있다. 선문정로의 어떤 점이 학자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가? 첫째는 성철스님의 너무 강한 종파주의적 태도이다. <돈오점수을 주장하면 이단(異端)이고 돈오돈수를 주장하면 정통(正統)>이라든가 또는 <돈오점수설은 교가(敎家)의 주장이고 돈오돈수설은 선문(禪門)의 정설>이라든가 하는 선문정로의 논리는 분명히 선종위주의 종파주의라는 인상을 준다. 요즈음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종파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며 <정통과 이단>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정통과 이단이라는 말은 원래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현장에서 생겨난 의(義)로운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사는 이 좋은 말이 무수히 악이용 당했던 부끄러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많은 경우에 정통과 이단이라는 말은 종파주의자들에 의하여 자기들의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로 악이용되었었다.
지금 성철스님이 정통이라고 내세우는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6)은 원래 반역적인 이단아(異端兒)였다. 반대로, 지금 성철스님이 이단으로 모는 규봉 종밀은 그 당시에 정통대접을 받았었다. 이것이 8-9세기경의 당(唐)나라 실정이었다. 임제가 사회적으로 정통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송(宋)나라 때의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말의 쓰임이 <시대>와 <사회>와 그리고 <관점>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지금 서양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불교의 장점은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줄 알고, 이단적인 주장을 수용할 줄 알고 마침내는 이단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대승적인 포용성>에 있다고. 남들의 평이 무서운게 아니다. 선문정로의 역사적인 사명을 생각하면 불필요한 종파주의적 말투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선문정로에 대한 두번째 논란은 이 책의 주장과 실제의 현실과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 뒤집어 씌운 무서운 죄목들이 과연 사실이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의심한다: <보조스님은 한번도 자기의 깨침을 궁극적인 깨침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깨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의 깨침은 해오(解悟)에 불과하니 자만심 갖지 말고 계속 부지런히 닦으라고 권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悟)를 헛짚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것은 오히려 성철스님쪽이 아니야?>고. 학자들의 이러한 의심을 선문정로는 어떻게 풀어주고 있는가? 성철스님은 돈오돈수설과 돈오점수설을 비교하면서 정사(正邪)라는 기준 이외에 금사불분(金沙不分), 옥석혼동(玉石混同), 천양지판(天壤之判) 등등의 가치우열적인 양분논리(兩分論理)를 가지고 따지지만 과연 누가 금옥(金玉)이며 누가 사석(沙石)인가를 따지는 마당에 가서는 오직 돈오돈수설에 관계되는 글귀만을 경전에서 인용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논리적으로 <돈오돈수는 돈오돈수이기 때문에 옳다>는 식이 되고만다. 만일 불교의 경전에 돈오점수적인 글귀가 하나도 없다면 또 모르겠다. 설사 그런 그런 글귀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경전에 최고절대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선불교(禪佛敎)의 기본정신이라면 성철스님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은 성철스님의 그러한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일에는 돈오점수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사실이다. 현실적인 사실에 역행할 때는 납득할만한 현실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조리있게 설명해야 한다. 돈오돈수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했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글귀를 인용하는 것만으로 현실적인 논증이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선문정로는 불교논리의 기본인 현량(現量)도 없고 비량(比量)도 없고 선불교에서 일찍이 집어던져 버렸던 경량(輕量)과 성언량(聖言量) 뿐이라는 비난을 성철스님은 어떻게 막을지 모르겠다. 공방전의 귀취에 관심이 쏠리는 것이 아니다. 왜 문제의 초점을 우리의 현실로 돌려 여기서 한판 승부를 겨루지 못하고 자꾸만 경전으로 또는 과거로만 치닫는가? 지눌과 종밀을 논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눌의 경우는 지눌이 살았던 12-13세기 고려의 불교사회를 분석해야 할 것이고 종밀의 경우는 8-9세게 당나라의 그것을 문제삼아야 옳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 각각의 주장이 기여한 사회적인 공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지눌과 종밀의 특징은 두분 다 그들의 현실에 입각하여 시대가 요청하는 역사적인 발언을 했다는 데에 있다. 역사적인 발언을 초역사적인 논리로 단죄하는 것은 공평한 처사라고 말할 수 없다.
마지막 논란, 그러나 절대로 하찮지 않은 논란은 선문정로가 지니고 있는 문헌취급상의 문제점에 대한 것이다. 성철스님은 선문정로의 머리말에서 선문에 널리 퍼져있는 이단적인 학설의 폐단을 한탄한 다음 보조스님의 하택 신회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무릇 이설(異說)중의 일례는 돈오점수이다. 선문의 돈오점수 원조는 하택이며 규봉이 계승하고 보조(普照)가 역설한 바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대종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한 그의 절요(節要) 벽두에서 하택은 시지해종사니 비조계적자(荷澤 是知解宗師 非曺溪嫡子)라고 단언(斷言)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고 육조가 수기하고 총림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知解宗徒)이다.
성철스님은 보조스님이 마치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저자가 내린 신회평(神會評)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듯이 <보조도… 단언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보조스님의 절요는 결코 그렇게 읽어서는 안되게 되어있다. 사실 보조스님의 절요는 문자와 언교를 주축으로 하는 지해의 역할이 불교수행상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이것은 절요 벽두에 나오는 보조스님의 해당 문장이 수(雖)---, 연(然)--- 등 두 귀절로 이룩된 한문문법상으로 보아서도 그렇고 보조절요를 일관하는 전체사상으로 보아서도 보조스님의 일생을 일관하는 정신으로 보아서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보조스님의 문장을 정밀하게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보조스님의 절요는 원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라는 이름으로 1209년에 저술되었다. 보조스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 해의 일이다. 절요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어 있다.
牧牛子曰 荷澤神會 是知解宗師 雖未爲曺溪嫡子 然悟解高明決擇了然 密師宗承基旨 故此緣中 伸而明之 豁然可見 鈔出綱要 以爲觀行龜鑑 今爲因敎悟心之者 除去繁詞
나(牧牛子)는 분명히 말하겠다. 하택신회(荷澤神會)는 지해종사로 낙인이 찍혀서 비록 조계의 적자는 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분의 깨침과 깨침에 대한 인식은 투철하고 그 논리는 탁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규봉스님이 그 뜻을 계승하여 그의 법집별행록 중에서 하택스님의 이론을 더욱 전개하고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여 누구나 환히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러한 가르침을 인연으로 자기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번거로운 말들을 제거하고 그 뼈대가 되는 요점만을 간추려 수행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처음의 한문은 보조스님의 원문이고 그 다음은 필자의 해설적인 번역이다. 수(雖)자로 시작하는 귀절과 그 다음의 연(然)자로 시작하는 귀절의 관계는 명료하다. 앞은 양보요, 뒤는 주장이다. 한문에서 이러한 경우 앞의 양보절(讓步節)은 뒤에 따라오는 주절(主節)의 주장을 더욱 강조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러한 구문상의 논리적인 관계를 아예 무시해버렸다. 위 인용문의 첫줄에서는 수(雖)자를 빼버렸을 뿐만 아니라 연(然)자 다음에 따라오는 보조스님의 근본적인 주장도 무시해버린채 단장절구식으로 <보조도… 하택은 시지해종사니 비조계적자라고 단언하였다>고 읽음으로써 마치 보조스님도 하택신회를 대수롭지 않게 본듯이 만들었다. 성철스님은 보조스님의 수미위(雖未爲) 세글자를 비(非)자로 바꾸었고 연(然)자 이하의 문장을 끊어서는 안될 곳에서 끊었다. 여기서 성철스님은 보조스님의 본래 의도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문해석상의 작은 문제라기보다는 보조스님을 어떻게 보아야 제대로 보느냐 하는 <올바른 보조관(普照觀)>의 문제가 걸려있는 큰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보조관을 갖는 것이 선결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여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보조스님의 하택관(荷澤觀)>이다. 하택스님이 지해종사라는 평을 듣건 말건, 조계적자가 되었건 못되었건, 그런 것에 관계없이 보조스님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계속되는 문장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계속되는 절요의 그 다음 문장을 보자.
予觀今時修心人 不依文字指歸 直以密意相傳處爲道 卽溟涬然 徒勞坐睡 或於觀行 失心錯亂故 須依如實言敎 決擇悟修之本末 以鏡自心 卽於時中觀照 不枉用功爾
내가 요즈음의 마음 닦는 이들을 관찰해보니 문자의 가리킴에 의지하지 않고 곧장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만을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정신이 아득하여 앉으면 졸기만 하고 때때로 정신을 차려 자기의 수행을 점검하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반드시 틀림없는 언교에 의지하여 깨닫고 닦아 나가는 수행상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분명히 가릴 줄 알아 이로써 자기의 마음을 비추어보면 공부에 헛됨이 없으리라.
보조스님이 절요를 지은 근본 목적이 여기에 뚜렷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보조스님의 진단에 의하면 그 당시의 병(病)은 수행자들이 <불의문자지귀(不依文字指歸)>하는 것 즉 문자의 가리킴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요, 그에 대한 약(藥)은 <수의여실언교(須依如實言敎)>하는 것, 즉 반드시 틀림없는 언교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틀림없는 언교>란 바로 하택 신회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너무나 분명하다. 이렇거늘 어떻게 보조스님이 하택 신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발언을 바로 앞줄에서 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성철스님은 보조스님을 인용하거나 돈오점수설을 비판할 때 이와 비슷한 오류를 선문정로의 여기저기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는 성철스님에게 현대학자들의 문헌비판적인 엄밀성을 기대하지 않지만 반복되는 이러한 오류는 스님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전달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 보조스님을 보는 시각(視角)
성철스님은 분명히 남다른 시각에서 보조사상을 조명했다. 그것은 조계적자(曹溪嫡子)를 자처하는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시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조스님을 보는 시각은 하나만 일 수 없다. 사실을 왜곡(歪曲)하지 않는 한, 시각은 다양 할수록 좋다. 불교는 도그마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각을 허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보조사상 처럼 여러가지의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들이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복합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상은 다양한 시각으로 부터의 다양한 접근을 허용 할 때만이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구 자세는 오늘날 종교계의 암적요소로 지목되고 있는 가지가지의 파벌주의와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아집, 아만, 배타, 독선 등을 청소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보조사상연구라는 주제를 앞에 놓고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체적 접근(體的 接近)>이며, 다른 하나는 <용적 접근(用的 接近)>이다. <체적 접근>이란 옛날 동양에서 즐겨 썼던 방법이다. 예를 들면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알아볼 수 있다>(唯聖人 能知聖人)이라는 말을 금언으로 믿고 성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스스로 성인이 되려고 애쓰는 유형이다. 이런 경우엔 <보조를 바로 보려면 먼저 보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보조 되는 공부를 먼저 하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접근 방법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인될 때까지 성인 알아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으므로 성급한 현대생활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말하리라. <우리는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성인 알아봄이 더욱 시급하다>고.
보조스님이 되기 전에 보조스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길은 없는가? <용적 접근>이 바로 그 길이다. 이것은 현대인이 즐겨 쓰는 접근방법이다. 이 길은 다양하다. 다양하다 못해 잡다하다. 중생(衆生)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이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용적 접근>은 성철스님이 타기했던 지해(知解)의 힘을 빌려야 가능하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지해의 힘을 빌려 고려시대의 보조스님을 우리의 목전에 부활시키는 것이다. 동양의 옛 성인들이 이를 보면 기가 막힐 것이다. <저 사람들이 될 일을 해야지. 저런 저런, 큰 일 났구먼>하고 혀를 찰 것이 뻔하다. <체적 접근방법>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관찰자의 관찰능력에 혁명적인 변혁이 없는 한, 종교적 성자의 올바른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보조스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체(體)와 용(用) 두가지의 접근방법이 다 필용하다. 한 시대를 이끈 지도자는 대개 체와 용을 겸비한다. 체만 있고 용이 없는 사람은 마치 뿌리만 있고 아직 싹이 나지 않은 나무와 같고 용만 있고 체가 없는 사람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수도자에겐 전자의 경우가 많고 요즈음 학자들에겐 후자의 경우가 많다. 보조스님은 양자를 겸비했었다. 그는 관직을 싫어하고 수도에만 전념하면서도 그 시대의 문제에 예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가 체와 용을 겸전했었다는 좋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조스님의 사람됨을 파악하는 <인물 이해적 접근>과 함께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자는 체적 접근으로, 후자는 용적 접근으로 가능할 것이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도 <보조라는 인물>이 먼저 뚜렷해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다시 더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한 인물의 <인간상(人間像)>을 뚜렷이 하려면 매우 지루한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복합적이고 심층적이고 종합적이며 동시에 직관투시적인 접근방법이라야 한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필연적으로 마지막엔 연구자 자신의 인간변혁(人間變革)을 요청한다. 보조를 제대로 알려면 보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이 모두 시대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조스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조스님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지해의 힘으로 되살려 내야 한다. 보조스님의 사람됨은 그의 평생관심사와 직결되어 있으며 이는 또한 그가 살았던 사회와 역사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분명히 <용적 접근>이다. 우리들이 용적 접근을 무시할 때 주관적 독단과 종파주의적 편견을 날뛰기 마련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해석학이라는 것도 일종의 용적 접근이다. 그들의 무기는 지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분야의 학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기들이야말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이론으로 새롭게 해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에겐 동양 성자들의 체제 접근이 없다. 해석자가 보조의 경지에 이르지 않거나 또는 보조의 경험을 가지지 않는 한, 그러한 해석들은 단편적이거나 파괴적임을 면치 못하고 말 것이다. 자기의 이론적인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남을 비인간화하고 비생명화하는 것은 해석자와 보조스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말 것이다. 몇 가지 공식을 가지고 기계적인 분석만을 일삼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인 짓일 뿐만 아니라 매우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공부 자체보다는 공부하는 자세에 대한 훈련을 철저히 시켰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체적 접근의 중요한 내용이다. 보조사상을 연구하면서도 보조스님의 주장을 모두 자기의 수준권 안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보조스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지상과제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기물인 생명을 무기물화 시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인간 보조를 통해서 보조의 이론을 이해해야지 그것을 거꾸로 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생명은 생명으로>, <인간은 인간으로>라는 말은 <보조는 보조로>라는 말이므로 결국 이 말은 보조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보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적 접근>은 넓게는 <생명에 대한 생명적 접근>이어야 하고 좁게는 <보조에 대한 보조적 접근>이어야 한다. 접근자가 먼저 비인간화를 극복하고 생명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피접근자와 하나 되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은 불교해석학의 기본과제이다.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는 까닭은 그것이 너무 용적 접근이라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철스님은 불조(佛祖)를 이해하는 길은 불조와 하나 되는 구경각의 체험 이외에는 없다고 단언하는데, 그것은 체제 접근의 단적인 표현이다.
5. 지해와 반지해, 그리고 보조스님의 지해
문자(文字), 언어(言語), 교리(敎理), 지해(知解) 이 네가지 것이 불교인에게 전혀 필요없는 것인가? 사실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육체가 과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육체는 필요, 불필요를 따지기 이전에 이미 존재해 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도 가능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자, 언어, 교리, 지해도 필요, 불필요를 따지기 이전에 이미 존재해 있다. 문자, 언어, 교리, 지해가 있기 때문에 필요, 불필요를 몇번 따지든,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문자, 언어, 교리, 지해는 이제까지 불교인들과 함께 있어 왔고 지금도 함께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것이다. 문자, 언어, 교리, 지해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문도, 육조단경도, 임제록도, 성철스님의 선문정로도 존재할 수 있고 또한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문자-언어-교리-지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을 구사하는 사람들쪽에 있다. 이것들의 역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들을 올바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제대로 구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것들에게 속박되어 우리의 생명으로 하여금 생명노릇을 온전히 못하게 한체, 대립과 갈등의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불교 역사상에 흔히 나타난 반문자(反文字), 반언어(反言語), 반교리(反敎理), 반지해(反知解) 운동은 이러한 잘못된 <문자---지해>관(觀)을 바로 잡으려는 개혁운동이었다. 우리의 보조스님이 그것을 모르실리 없다. 보조스님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러한 개혁운동에 앞장섰었다. 보조스님의 사상체계 속에는 경절문(徑截門)이 엄연히 존재하며 이는 또한 수행상의 마지막 손질이라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문제는 약과 병과 환자의 삼각관계에 있다. <문자---지해>가 있기 때문에 <문자---지해>병이 생겼고 <문자---지해>병이 있기 때문에 <반문자---반지해>라는 약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 <반문자---반지해>라는 약이 오히려 병이 되었다. 엉터리 의사들이 약을 잘못 쓴 것이다. <반문자---반지해>운동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불교의 출현을 고대하는 양심세력들의 개혁운동이었지, 불교의 <문자---지해>를 모두 없애 버리자는 <멸문자(滅文字)---멸지해(滅知解)>운동은 아니었다. 보조스님이 <반문자---반지해>를 규탄하고 하택 신회를 높이 평가하면서 까지 다시 <문자---지해>를 살려내는 운동을 전개한 것은 이러한 병과 약의 공방전 속에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환자를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약이 병이 되어버린 마당에 그 약에 충성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 병이나 약의 입장을 취하지 않고 환자의 입장을 취할 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너무나 많다. 먼저 <문자---지해>를 없애는 것으로 약을 삼는 것은 마치 어린이들이 나쁜 짓을 한다 하여 어린이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보조사상에 있어서 <문자---지해>는 병약이원론(病藥二元論)이 벌어지기 이전의 것이었다. 보조스님은 <문자---지해>를 살려내는 일을 곧 불교를 살려내는 일과 마찬가지의 중요한 일로 삼았다. 따라서 보조스님은 <반문자—반지해>라는 약의 치료대상이 되어 있는 병으로서의 <문자---지해>를 붙들고 있는 문자법사(文字法師)들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보조스님은 <문자-지해>병의 부산물인 문자법사도 배격하고 <반문자-반지해>운동의 부산물인 암증선사(暗證禪師)도 똑같이 배격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보조스님이 체와 용을 겸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병약이원을 뛰어넘어 환자의 입장에 서서 환자와 함께 이 세상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6.성철스님과 보조스님
보조스님은 여러가지 점에서 성철스님과는 퍽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첫째, 성철스님은 20세기의 마지막 고비에서 홍수처럼 밀어닥친 반불교적인 것들의 도전 앞에서 불교생존의 원리를 보다 더 정통적인 고불고조(古佛古祖)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보조스님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보조스님은 불교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던 12-13제기의 고려시대에 살았다. 보조스님의 문제는 오직 불교집안의 화합을 도모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불교의 수행이론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둘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철스님이 사시는 시대를 선도 아니고 교도 아닌 뒤죽박죽의 혼란기, 또는 선도 없고 교도 없는 위기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보조스님이 사시던 시대는 선이야 교냐의 갈림길에서 이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론적인 갈등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두 분은 똑같이 혼란기에 사셨지만 두 분이 겪은 혼란의 성격을 서로 판이하다. 따라서 두 분이 내놓은 혼란 극복의 처방이 아주 다르다. 성철스님이 <어느 하나는 버려라>고 가르친 반면, 보조스님은 양자택일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선에서 교를 보고, 교에서 선을 보라고 강조한다. 성철스님이 가르는데 주력했다면, 보조스님은 합치는 데 주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가른다는 말은 정사(正邪)를 가른다는 말이요, 합친다는 말은 싸움을 없앤다는 말이다.
넷째, 성철스님은 불교의 다른 종파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 오직 선종만을 문제삼고 있다. 선종 중에서도 오직 화두선이요, 화두선 중에서도 임제정맥과 조계적자만을 문제삼았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항상 고불고조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표준으로 앞세우고 적서(嫡庶)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보조스님은 딴판이었다. 세상사람들이 하택신회를 어떻게 평하든 그런 것들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았다. 적서의 구별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평하든, 또는 무슨 평을 듣는 사람이 말하든 그런 것은 일체 상관하지 않고 그저 당신 판단에 옳다고 믿어지면 무조건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매우 높은 지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다섯째, 이미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지해(知解)에 대해서도 두 분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성철스님은 간화선의 입장에서 지해를 최대의 금기로 배척하는데 반하여 보조스님은 초교파적인 입장에서 지해가 불교수행상 담당하는 역할을 인정하고 들어갔다. 사실 이 문제에는 몇번 되풀이해서 말해도 여전히 시원치 않을 만큼 언설로 다 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이 걸려있다.
여섯째, 성철스님이 구경각(究竟覺)을 역설한 반면, 보조스님은 모든 수행을 시작하기 이전에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지해적인 해오(解悟)를 더 중요시했다는 사실은 한 분이 엘리트주의 같은 정선주의(精選主義)인 반면, 한 분은 대중과 함께 사는 보살임을 말해준다. 우리들은 두 분이 지닌 이러한 근본적인 스타일의 차이를 항상 염두에 두고 두 주장의 차이를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조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 사항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교리적인 해석만이 아니라 반드시 역사적인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보조스님이 한때 명약으로 각광받던 <반문자---반지해>운동을 <멸문자-멸지해>라는 병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다. 보조스님은 현실적으로 <반문자---반지해>운동이 <멸문자---멸지해>운동으로 변질하여 도처에서 암증선사(暗證禪師)들을 양산하는 폐단을 방관할 수 없었다. 이것은 결코 <반문자---반지해>운동의 맹장들인 마조 일파를 과소평가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오직 약이 병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신음하는 환자들을 살려내기 위한 응급적인 구조작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보조스님이 용적 접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둘째, 우리는 보조스님의 비판정신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비판의 성격과 비판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보조스님 삶 자체는 결코 급진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정통보다는 이단적인 것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보조스님이 당시에 인기있던 염불종을 비판하기도 하고 천하를 휩쓰는 <반문자---반지해>운동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화엄을 공부하면서 청량국사보다는 이통현거사을 더 높이 평가하고 선을 공부하면서도 홍주마조(洪州馬祖)'보다는 하택신회를 따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혹자는 이를 보조스님의 초종파주의 사상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종파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멀게 만들고 시대병(時代病)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게 하는 가장 비불교적인 암적 존재라는 것을 보조스님은 일찍이 간파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 보조스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투철한 비판의식을 갖게 했으며 평생 그토록 의연하게 초종파주의적인 길을 걷게 했던가를 밝히는 일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가 높은 지성의 소유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일찌기 인간생활에서 지해가 담당하는 역할을 투철히 깨달았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우리는 보조스님이 불교교육의 보편성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천하가 체적 접근에 쏠려있을 때에 용적 접근의 중요성을 들고 나온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파주의적인 불교교육이란 오직 어떤 특수한 시기, 특수한 장소, 특수한 사람들의 특수한 상황 아래서만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종파주의적인 불교교육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항상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불교의 보편타당한 일반교육이 될 수 없다. 일반적인 불교교육은 어디까지나 <문자---지해>를 긍정적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넷째, 우리는 보조스님이 불교공부의 마지막 경지를 문제삼기 보다는 초보자들의 입문과정을 더 크게 문제삼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하겠다. <문자---지해>가 아무리 폐단 투성이라 할지라도 초보자를 위한 불교교육의 시작은 역시 <문자---지해>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투철한 인식은 보조스님의 일생을 일관한 정신이었다.
보조스님과 성철스님은 두 분 다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당신들이 사시던 시대의 병을 보신 분들이라 생각된다. 돈오점수설을 두고 생각하는 한, 보조스님이 보신 그 당시의 병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수도하는 사람들이 <반문자---반지해>운동의 영향 아래서 <지해>를 오해한 나머지 수도하기 전에 지해의 장점을 이용하여 생각을 정리할 줄 모르고, 둘째는 소위 깨친 사람들이 자기들의 깨침이 지해로 얻은 깨침이기 때문에 이는 오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깨친 다음에 닦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조스님은 돈오한 다음 사람들이 점수하지 않은 것을 가장 큰 병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철스님이 보신 요즈음 수행자들의 병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해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절대로 깨침이 아니며 만에 하나라도 그런 것을 깨침이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깨침의 길을 스스로 등지는 자살행위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닦지도 않고 돈오했다고 말하고 돈오했기 때문에 교만이 생겨 닦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여하간에 두 분은 다 똑같이 사람들의 닦지않는 병을 바로 잡아 보려고 애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한 분은 <지해>의 힘을 빌리려고 했는데 반하여 또 한 분은 <지해>를 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보조스님과 성철스님은 <수(修):닦음>에 대해서도 현저한 견해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보조스님은 규봉종밀을 이어 해오 이전의 수는 수가 아니라고 하고, 해오 다음의 수는 증오(證悟) 즉 구경각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했다. 따라서 다시 말하면 지해가 가져다 준 틀에 의해서 수는 진행되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공격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목적을 위한 방법이라고는 지해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한, 과거의 업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고 오매일여의 경지를 극복하기는커녕 오매일여에 들어갈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보조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심결(修心訣)에서는 돈오돈수를 돈오점수의 일종으로 보았다.
夫入道多門 以要言之 不出 頓悟漸修兩門耳 雖曰 頓悟頓修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於今生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後修之機也
도에 들어가는 데는 문이 많다. 그러나 이것들을 요약하면 돈오문과 점수문의 둘 밖에 딴 것이 아니다. 비록 <돈오돈수>라고들 말하나 이것은 가장 상근기의 특출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도 만일 그들의 과거를 미루어 볼 것 같으면 이미 그들이 과거의 많은 생을 두고 깨침에 의지하여 오래 오래 닦았기 때문에 그 점수의 훈습이 쌓여 금생에 이르러 한번 듣고는 즉시 깨쳐 일시에 모든 수를 다 끝마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라는 것도 알고 보면 실은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경우와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조스님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를 순전히 근기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문제로 다루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보조스님은 절요에서 당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今刻意 宣揚悟後漸修之門爾 此悟後修門 非唯不汚染 亦有萬行兼修 自他兼濟矣 今時禪者 皆云但明見佛性然後 利他行願 自然成滿 牧牛子 以謂非然也
이제 내 가슴에 새겨 <깨친 다음, 오래 닦는 길>을 선양하겠노라. <깨친 다음, 오래 닦는 길>은 비단 더럽혀지지 않는 공부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만행을 다 함께 닦는 것이니 이는 자기와 남을 함께 제도하는 것이다. 요즈음 참선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오직 불성(佛性)만을 투철하게 보아 버리면 그 가운데에 남을 돕는 보살의 행원이 저절로 다 원만하게 성취된다>고 하나 목우자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노라.
여기서 보조스님은 수(修)의 의미를 만행겸수(萬行兼修)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견성(見性)하면 이타행원(利他行願)이 저절로 성취된다는 선객(禪客)들의 주장을 <안될 말>이라고 단연히 거부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조스님은 성철스님 같은 순수한 선사는 아니었다. 화엄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보현행원사상을 몸에 지니고 살았던 넓은 의미의 부처님 제자였다. 보조스님의 수에는 미오(迷悟)의 문제 이외에 범성(凡聖)의 문제가 들어있었다. 미에서 오로 가는 길은 돈(頓)이나, 범에서 성으로 가는 길은 점(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보조스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따라서 수(修)는 깨치는 일 이외에 성인되는 일을 포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보조스님의 수를 순수 선종의 입장에서 목적과 방법의 틀로 보려는 것은 잘못이다. 보조스님은 요즘 선객들이 흔히 하듯 전미개오(轉迷開悟)의 길만을 수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범성성(轉凡成聖)의 길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분명히 보통 선사와 다른 점이다. 누가 보조스님에게 <남들이 당신을 순수한 선사가 아니라고 평한다>고 귀뜸해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분명히 빙그레 웃으면서 <선사칭호(禪師稱號)는 그것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갖다드려라>고 합장했을 것 같다. 보조스님을 선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결코 그를 깍는 말이 아니고 높이는 말임을 알아야 하겠다. ( 계 속)
1991년 1월.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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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독경에 의하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걸로 되어있는데.
그럼 천지창조 이전에는 뭐했을까
또 천지창조 이후에는 뭐했나?
타 종교가 돈오점수 돈오돈수의 차이점을 기준하는데 도움둴지도.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