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십이월
조미희
산동네를 잘라 색종이를 만들었다
가장 화려한 십이월의 누더기가 천장에서 달이 되어 흔들렸다
세 개의 계절은 늘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겨울에서 오래도록 연체되었다
숫자들의 악랄한 소진 법,
챙긴 것들이 없다고
앙상한 숲의 간격들을 내보이지만
겨울은 챙기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계절
잡목 숲은 오감을 잃은
나목들이 피부로만 숨을 쉬었다
십이월은 나무들만 추운 게 아니다
입김의 계절은 아주 조금씩 무너지지만
영하의 빗방울은 헐벗은 고드름을 선물했다
그것은 투명하다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푹신한 눈이 겨울에는 맞다
숲이 버리고 간 목소리를 주워 밤이면 바람의 흉내를 냈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이 흐느꼈다
함께 흐느낀다는 건 따뜻한 이불 같다
목도리가 알알이 빛나고 있다
일에서 십이까지의 숫자들을 꽁꽁 묶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겨울까지 돈 벌러 온
계절 직종의 위장술
주머니는 다 어디 갔는지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 없는 계절이다
걷어내지 않아도 천장의 색은 바래고
공기는 수요와 공급처럼 약삭빠르게 자리를 바꾼다
최저 임금 상승만큼 살짝 올라가는
1월의 기온을 기다린다
지우개를 사용하세요
지우개 사용법을 터득한 날 아침
먹구름을 지우기로 했다
고시원 사각의 벽면도 나도
지우개같이 변하는 내일은 공갈빵이야
한껏 용기를 주잖아
몰려다니는 축제들이 어디서 새고 있나
저기 풀죽은 사람 좀 봐
면접시간도 꽃피지 못한 이력서도 다
자유롭게 지워지길 바랄게
머뭇거림은 세 정거장의 길이와
버스 배차시간 사이의 혼란
모든 일들은 견디지 못한 바로 몇 초 전의
시차 속에서 탄생했다
닭 머리를 달고 살아보는 중이라고
조금 전 일조차 금방 잊어먹는다는 대답
작년에 퇴짜 맞은 이력서를 두 번 더 접어서
회사대행업체에 들이밀며
그날과 똑같은 두근거림으로 면접을 보고 돌아서는
잘 접히지 않는 등짝은 데자뷰
법과 위법의 방정식들은 손가락의 운동법
24시 뜬눈의 사각도시
몇 줄의 이력을 찢듯 단호한 대답은
펜을 쥐고 페이지를 넘는 비만한 달들의
실패담이 즐비한 보름날의 예고편이지
검정이라는 가난한 날들은 빽빽하기도 하지
지워도 얼룩을 남기는 저 단어
얼룩도 꽃이 되기를—
한 번도 맑은 구름을 밟아보지 않았거나
이제부터 먹구름만 밟아야 하는 당신을 위해
지우개 사용법을 권할게
이상한 교실
우리는 당신들의 불편한 주간을 보호하기로 해 간혹 귀신도 안 물어가는 애물단지들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주간이 되기도 하지 어쩌면 엇박자 걸음을 보호하는지도 모르지 우리들은 원래 둥글지 않잖아 모서리가 많아 여기에 모였잖아 가지런한 이빨처럼 공기는 의연하고 질서정연하지만 당신들의 눈엣가시들은 뒤죽박죽 연주를 좋아해 봐, 나의 손뼉 나의 혓바닥과 자유로운 침의 착지 아무도 모를걸 나의 행동은 매일 초침을 빠져나가려는 의식 같은 거라고 당신들의 뒤통수를 확실하게 내리친다는 걸 피아노의 높은음자리가 뛰어다니는 교실, 아니 아주 느리게 기어 다니는 주간들, 야간을 보호받지 못한 눈동자는 간혹 하품을 하기도 해 이 교실의 모양은 별 무늬 당신들은 자주 찔려 피나는 심장을 보호하려 어른 모양의 아이를 교실로 보내는 거야 천진난만한 괴성 우리는 지치지 않아 우리들은 모르기로 약속된 거야 우리들의 보호목록은 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라고 당신들을 향해 실실 웃지 둥근 것에 익숙한 세상을 보며 우리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느리게 혹은 거칠게 들쭉날쭉한 당신들의 주간을 야간으로 돌려보내지
조언들은 다 죽었다
왜 인간의 일을 인간에게 묻고 있나
명사 앞에 붙이는 이 부정사들
어리석고 무지하고 덜떨어진
내가 잘 살고 있나 독백에게 묻는다
누군가 나에게 잘 살고 있다고 믿는 믿음으로부터
허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말言의 빈곤자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쓰고 남은 말들이 많나
고양이의 수 억만 개 털 같은 눈발들이 날리고
너의 인내가 키우지 못한 식물들
눈 위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며 떠나지
집에 도착하니 집이 없다
지붕이 없고 방구들이 없고 가족이 없다
투명하다
길은 분해되고 쪼개져 점차 사라져 간다
누가 길을 지운 걸까
사는 것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
조언은 다 죽었다고
중심이 되지 않으려는 소리,
조언들은 기우뚱거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녁의 창문을 왜
한낮의 햇빛에게 묻나
장롱
가령, 오늘의 날씨는 장롱 속 같다고 느낄 때
주머니마다 안개가 가득 들어 있다
검은 악어는 눈알에 녹이 슨 채로 삼 년 동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
버리기에 서운한 애착이 뱃속에 가득 차 있으므로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습성이 생겼다
네 곳의 모서리를 삼킨 뒤부터 버티는 중력이 생겼다
별,
이사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네 개의 별을 폐허에 두고 간다고
폐허를 남기는 별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되뇌이지만
인부들이 번쩍 든 곳마다
먼지 층이 가득한 별
악어의 눈물에선 쇠 냄새가 난다
다시 커다란 문 두 짝이 달린 곳
좀벌레들은 폐허의 중력
위험한 순간은 대부분 꼬리에 있고
꼬리를 자르는 저 별의 학명은 도마뱀행성
빛과 그늘의 함축으로 유영하는 별들의 야반도주
별의 표면을 둘둘 말아 버린다
탐사선이 계속해서 보내는 별의 자료에는
움푹한 구덩이의 흔적들이 많다
가난한 별은 쉬 부서지거나 잘라낸 흔적이 있다
헐떡거리는 경사를 자르고 검은 웅덩이를 탈출하는
오늘은 별의 표면을 펼쳐놓고 폐허가 됐지만
한때는 어떤 힘이 있어 한 집안의 전부를 담았었다
모서리가 삭고 문짝이 떨어지는 힘으로 폐허는 사라진다
장롱은 목성(木性)으로 떠났다
조미희
심사위원 : 문혜원, 최현식, 김병호
장롱 속 지우개의 십이월은 어둡다, 아니 투명하다
삶의 고통을 더욱 배가하는 환란의 지속적 발생은 시(인)에게 과연 행운일까. 서사적 충동보다 서정의 감각이 현실성찰을 향한 언어적 격발에 시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시적 언어의 격발은 잘 준비된 총기와 유연한 자세가 동반되지 않는 한 대상의 심장을 꿰뚫기 어렵다. 일상을 향한 날카로운 눈빛만큼이나 언어와 형식에 대한 집요한 단련이 없다면 시는 방향 없는 감정의 폭발로 산탄散彈되기 마련이다.
조미희의 시는 현실과 언어, 감각의 탄착점 형성에 의미 있는 솜씨를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상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 번쯤은 뒤돌아보게 만드는 감각의 운용이 돋보인달까. 궁핍한 자들의 12월을 “산동네를 잘라 색종이를 만들었다”(「십이월」)는 표현은 어떤가. 이 ‘색종이’는 화려한 색상 뒤에서 한 번도 꺼내지지 않았을 침묵의 파편들이겠다. 그러나 이 침묵의 모나드들은 우울하지 않고 현실을 향해 늘 투명하려고 분주하다. 새 시인의 “지우개 사용법”과 대상이 지워진 자리에 탄생하는 빈 공간에 자주 눈길이 머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맑은 구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거나 이제 “먹구름” 밟을 일만 남은 “당신을 위해 지우개 사용법을 권”(「지우개를 사용하세요」)한다고 적었던가. 그 실례로 「이상한 교실」과 「조언들은 다 죽었다」, 그리고 「장롱」을 들어보면 어떨까. 이것을 꿰뚫는 “폐허의 별”에 대한 상상력은 그러니까 우리들은 내남없이 ‘폐허’를 남기는 자들이라는 것, 아니 스스로 폐허로 전락하나 그것을 외면하는 비참한 실패자라는 것을 조곤조곤 암시한다. 그러나 끝내 “장롱은 목성木性으로 떠났다”고 썼던가. 그렇다면 ‘폐허’가 됨으로써 오히려 ‘인간성’으로 회귀하는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신인 조미희가 시라는 “이상한 교실”에 놓인 언어의 “장롱”을 헤적여 우리에게 들려줄 “조언”의 한 방향일 것이다.
어려운 시업을 향한 당선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아무리 뒤져도 일밖에(물론 시의 일!) 없는 계절”을 명랑하게 통과하기를 바란다.
(최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