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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현 권력자들의 목적이 최선이고 가장 순수하다고 한들, 그들은 상황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부르주아지를 배제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불가피하게, 그리고 단시일 내에 볼셰비키의 테러로 이어질 것이다.
- 후고 프로이스, 1919년
1.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1918년 11월 3일 킬 군항에서 시작되어 엘베 강 서쪽의 대부분 도시지역을 휩쓴 불복종과 항명의 행렬은 카이저 빌헬름 2세의 통치가 확실히 끝장났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충정부대로 반역자들을 몽땅 쓸어버려야 한다”던 카이저를 더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육군최고사령부(OHL)의 참모들은 민정국장 발터 라인하르트 대령과 부국장 오스카 에렌코펜 중령을 베를린으로 보냈고, 에렌코펜은 그동안 공화국 건설을 위해 모은 5명의 ‘친구’들을 대동했습니다.
그 ‘친구’들이라 함은 전시 선전부서에서 프로파간다 영화를 제작하다 불온한 혐의에 연루되어 최근 궁지에 몰린 [도리나 리하르츠슐러], 동프로이센 지주(융커) 출신이지만 에렌코펜과 마찬가지로 좌익적 성향을 드러낸 탓에 군조직에서 고립된 [구스타프 폰 뵐러], 브란덴부르크 출신 보병장교로 서부전선의 지옥에서 직접 구른 끝에 제정과 헤어질 결심을 한 보수주의자 [막시밀리안 폰 프렌츨라우], 직업외교관으로서 정치적 이념을 떠나 “독일 국가”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자 하는 [빌헬름 슈타틀러], 그리고 중세의 목가적 상호부조를 이상으로 삼는 괴짜같은 라인란트 가톨릭교도이자 자그마한 자동차 공장의 소유주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을 뜻했습니다.
이들이 제국의 마지막 국가수상(Reichskanzler) 막스 폰 바덴 공을 찾아갔을 때, 그는 예상치 못하게도 사회민주당(SPD)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함께였습니다. 자유주의적 귀족인 바덴 공으로서는 혁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에, 인민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다고 ‘여겨지던’ SPD에게 모든 대권을 넘겨주고 임시정부를 꾸리게 할 작정이었죠. 그러나 일행들은 곧바로 아주 중요한 지점을 지적했습니다. 국가의 그 어느 법제도도, 수상이 다른 어떤 이에게 ‘개인적으로’ 대권을 넘겨주는 것을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최소한의 제도적 정당성도 없이 급조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 어떤 말로를 맞았는지는 페트로그라드 겨울궁전에서 즉결처형된 러시아 2월 정부의 수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잘 보여준 차였습니다.
결국 [제국의회 임시본회의를 긴급히 소집해 과도정부를 선출케 한다]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자유주의 세력은 자유민주당(FDP)이라는 이름으로 뭉쳤고, 절호의 기회를 놓친 SPD 역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비롯하여, 그보다 더 좌측에 있는 이들이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설립된 평의회(Rat)들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죠. “공화주의를 천명하는 과도정부가 군과 프로이센 경찰대를 굳게 신임하여 평의회를 강경진압해야 한다”는 자유보수당(FKP)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극언에 펄쩍 뛴 에베르트는 “그런 짓을 했다가는 독일 자체가 곧바로 붕괴할 것”이라며, 좌익세력의 준동을 조금이라도 예방하려면 자신들이 내치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SPD 내에서 가장 우익적이고 찬전적이었던 중진 에두아르트 다비트를 임시내각 수상으로 하는 타협안이 도출되어, SPD, FDP, 가톨릭중앙당(Z), FKP의 중도 4당 연정이 구성되었습니다. 제헌의회 총선거 일자는 “좌익세력이 평의회를 사회주의화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근시일내인 1919년 1월로 설정되었습니다. 또한 도리나와 빌헬름은 아직 정치적 견해가 무르익지 않은 각지 평의회들을 대상으로 “러시아 체제(평의회공화국)를 비판하고 자유민주적 공화국을 옹호하는” 선전영상을 배포함으로써 독립사민당 지도부의 계획을 박살냈습니다. 이 일련의 상황들은 좌익과 우익이 다소 주변화되고 중도의 자유주의 지지층이 두터워지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2. 민족적 민주주의(Endecja)
총선거와 공화정 이행이 한창 논의되고 있던 1918년 12월, 독일의 패전을 틈탄 동부의 폴란드계 주민들은 신생 폴란드 공화국 편입을 목표로 하는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발터 라인하르트 ‘소장’을 주도로 체계적인 비무장화 및 동원 해제 과정에 있던 독일군은 이 움직임에 충분히 빠르게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라인하르트, 제17군단장 오토 폰 벨로 보병대장, 동부 문제 전권공사 아우구스트 비니히 등은 “이 기회에 폴란드를 끝장내버릴” 계획을 입안해둔 상태였기에, 이 자리는 사실상 과도정부의 초기 설계자들이자 핵심실무자인 일행들을 공범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이들의 계획이란, 오데르 강 동쪽에 국제법으로부터 일정부분 자유로운 반독립적 자치주 [동부주Oststaat]를 수립해 폴란드도 때려잡고, 기세를 몰아 러시아의 ‘빨갱이’들과도 맞서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공화국 군부의 수장인 라인하르트는 이 계획을 두고 “어차피 공화국을 지지할 리 없는 골칫거리 우익들을 동부주에 때려넣고 반공 방벽으로 써먹는 것이 뭐가 문제되느냐”며 일부 일행들을 놀라게 했죠.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폴란드계 봉기를 주도하는 세력이 바르샤바의 폴란드 공화임시정부의 주도세력과는 이질적인 우익 ‘민족민주주의(엔데차)’ 세력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또한 바르샤바는 동쪽의 공산주의자들과 건곤일척의 대전투를 벌이고 있었기에, 서쪽으로까지 전선을 넓히고 싶지 않아했습니다.
오랜 토론 끝에, 에렌코펜과 5인방은 “일단 바르샤바와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도리나와 빌헬름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협상 테이블로 보내 발트 독일인 문제도 함께 논의해보자는 안도 가결되었죠. 협상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부활을 우선시했던 피우수트스키 원수는 독일령 폴란드인 거주지(그로스폴렌)의 귀속을 ‘독일에게 유리한’ 주민투표로 결정케 하는 안에 흔쾌히 동의했고, 포젠 지역을 제외한 오버슐레지엔,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 등은 문제없이 독일로 귀속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추가소득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밀담에서 나왔습니다.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의 간부인 알렉세이 바레츠노프는 “독일이 발트를 포기한다면 독일 내에서 모험주의적 혁명노선을 추동하는 이들의 계획을 전부 알려주겠다”는 제안을 건넸고, 이는 즉시 받아들여졌습니다. 파울 프뢸리히를 위시하여 독일에도 러시아식 유혈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모험주의자들이 총선 날짜를 노려 동시다발적 테러공격을 통해 정변을 일으킨다는 계획이 알려졌고, 당국은 제때 이들을 체포할 수 있었죠. 이는 ‘사고뭉치’들을 미리 제거해두려는 모스크바의 공작이었지만, 아무튼 독일의 신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부주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주민투표 결과 포젠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독일령으로 확정되었고, 퇴역군인 출신의 독일 극우파들이 반공의용군 ‘자유군단’으로 차출되어 역설적으로 독일 내부는 잠시동안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발트에서 철수한 까닭에 붉은 군대는 보다 효과적으로 폴란드를 공략했고, 스뱌토폴크 크라피엘이 이끄는 북서부집단군은 빌뉴스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며 바르샤바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모두가 실리를 추구하는 와중에 제각기 이상을 쫓는 이들은 조금 더 막무가내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 정도 위험은 항상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3. 바바리안(Bavarian)
제헌의회 총선거에서 무려 제1당을 거머쥔 FDP는 SPD, 기독인민당(CVP, 중앙당의 후신)과 삼당연정을 구성하며 과감하게 독일 공화국(Republik Deutschland)을 선포했습니다. 민족인민당(DNVP) 등 반동주의 우익 세력이 (망명하지 않고) 상수시 궁에 틀어박힌 ‘전 카이저’ 빌헬름 2세를 옹위하는 가운데, 신생 공화국의 체제를 위협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비텔스바흐 왕가를 몰아내고 좌익 공화정부를 세운 바이에른 주총리이자 독립사민당원 쿠르트 아이스너가 극우 음모론 조직 툴레 협회(Thule-Gesellschaft) 회원 안톤 폰 아르코팔레 백작에게 암살당한 것이었습니다. 직전에 열린 바이에른 주 총선에서는 CVP의 우당이자 우익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BVP)이 압승했는데, 좌익에서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주장하는 상황이었죠. 새로 들어선 우익정부는 고의적으로 수사를 지연하고 사법부가 이에 협조하면서, 좌익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행정개혁청장으로서 도리나와 빌헬름을 대동하고 바이에른 주 실사를 떠난 에렌코펜이 뮌헨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이에른 주정부가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무명 극작가 에른스트 톨러와 일군의 노동자들이 공산당(KPD)-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양 좌익세력 지도부의 엄금에도 불구하고 자체적 폭동을 일으켜 우익 주정부를 무너뜨리고 평의회공화국을 선언한 것이었죠. 바이에른 평의회공화국은 정신불안자를 주 외무장관에 임명하고 ‘깡패’를 경찰청장에 앉히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정책을 펼쳤고, 몹시 분노한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 휘하 우익정부는 베를린의 중앙정부가 자신들을 굳게 신임하여 바이에른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일행들은 폰 카르의 강경책이 일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도, 민주주의의 태동기에 군대가 동원된 폭동적 진압이 일어나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고 봐야겠다는 일념 하에 공산당 간부 파울 레비를 만났습니다. 반동주의와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만큼이나 좌익 맹동주의를 혐오하던 레비는 “공산당의 주도로 평의회 정부를 선제적으로 무너뜨리자”는 과감한 제안을 건넸죠. 필요하다면 이후 폰 카르와의 협상을 통해 민주적 총선을 재실시하건, 거국정부를 꾸리건 한다는 후속계획도 마련된 상태였습니다. “어차피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최선이 폰 카르의 독재정부이며 그렇지 않으면 툴레 협회 류의 극우파들이 2차 쿠데타를 통해 뮌헨을 장악할 것]”이라는 레비의 말에, 이 계획은 비밀리에 승인되었죠.
도리나의 엄청난 선전능력과 빌헬름의 적절한 방해공작이 시너지를 내어, 예상치 못한 성과가 도출되었습니다. KPD, SAPD, SPD, FDP를 포괄하는 인민전선이 결성된 것입니다. 바이에른 주경찰마저 지지하는 좌파 연합정부가 탄생하면서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집권한” 폰 카르와 우익 세력은 극히 분노했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최악의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쿠데타마저 실패하면서 바이에른의 기성 우익세력은 그야말로 붕괴해버렸고, 극우세력 역시 지하로 숨어들며 더더욱 극단적으로 변했습니다. 살 길을 찾던 이들은 프뢸리히 내란음모 사건으로 악에 받힌 극좌와 손잡고 [민족사회주의]라는 새 분파를 형성했죠.
1919년의 [바이에른 위기]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간의 갈등을 상징했습니다. 혁명의 열기가 빠지기 전이라 조금은 덜 심각하게 다루어졌으나, 이 일련의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바로, 독일의 신생 민주주의는 제도의 성숙보다는 인민의 열망을 더 우선시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4. 프로이센 문제
바이에른 위기와 그 ‘해결’ 과정은 베를린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헌법 초안이 거의 완성된 1919년 4월말, 모두가 한번씩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 누구도 앞장서 주장하고 싶지 않던 주제인 [프로이센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 주제는 “공화국을 반공화국 세력으로부터 굳건히 수호할 수단”의 문제로 흘러갔습니다. CVP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법무장관은 사법부의 일부였던 예심부를 행정부(법무부)로 이관해 기소를 독점하는 검찰을 만들자는 제안을 던지며, 각 주가 아닌 중앙정부에 귀속되는 국가경찰을 창설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겸사겸사 프로이센 자유주 역시 해체하자는 의견이었죠.
공화국 수립을 지지했으나 모든 의제에서 소외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던 FKP가 각 지방(주)의 권리를 중앙정부가 짓밟는다면 그런 공화국은 지지할 수 없다며 뻗대는 동안, 논의에 참여했던 세 명의 일행들(쿠노, 구스타프, 막스)의 의견은 크게 갈렸습니다. 우선 중세적 유토피아를 이상향으로 삼던 쿠노는 프로이센 해체를 막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과감하게 좌익 3당(SPD, SAPD, KPD)과 연합한 그는 “중앙의 수사당국을 넘어서 아예 공화국에 충성하는 내부 무력을 수립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닌 척 하지만 원래부터 좌익 사상과 쿵짝이 잘 맞았던 구스타프는 공산당원 클라라 체트킨의 “사법부의 수구성이 문제이므로 아예 사법부를 해체하고 직선으로 뽑자”는 급진적 의견에 푹 빠졌습니다. 현직 내무차관이자 전직 베를린 경찰서장이던 이가 사법부를 해체하고 주경찰 인력을 몽땅 중앙으로 이관시키자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내뱉자 중도층에서는 오히려 쿠노의 주장이 합리적인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마지막으로 막스 폰 프렌츨라우는 자신이 속한 FKP가 DNVP와 함께 반공화국 세력으로 빠지는 것을 매우 우려했습니다. 검찰청 및 국가경찰 창설, 프로이센 해체에 “개인적으로는” 모두 그럭저럭 동의할 수 있었던 막스는 우익을 어떻게든 의회에 붙어있게 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결국 “대규모 국가경찰 창설까지는 받아들이겠지만 사법부에 칼을 들이대는 것만은 결사반대”라는 타협안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FKP가 공화국 지지를 철회하는 건 나머지 세력들에게도 재앙같은 일이었기에, 결국 사법부는 그 어떤 개혁도 거치지 않고 존속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 자유주는 쿠노와 사민당의 야합 끝에 “사민당의 아성으로” 유지되었습니다. 프로이센 경찰대 역시 인원은 감축되었지만 유지되었고, 주 사법부와 최고법원 역시 수구적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내무행정 분야에서 있었습니다. [공화국 보안본부(Republikssicherheitshauptamt, RSHA)]는 우익세력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창설되었고, RSHA는 공안국, 형사국, 국내정보국(방첩)을 거느리는 거대한 권력집단이 되었습니다. SPD 당원이자 전 러시아 멘셰비키였던 블라디미르 보이틴스키가 “독일판 체카”라며 우익세력의 비판을 주워섬겼지만, 이미 결정된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죠.
비상대권 행사가 가능한 직선제 대통령과 의원내각제 체제가 공존하는 공화국 헌법은 최종 통과되었습니다. 흑적금의 공화국이 공식 출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화국 내부의 반공화국적 요소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군은 자신의 ‘독립성’을 굳건히 지키며 공화국군이 아닌 국군(Reichswehr)이라는 명칭을 유지했고, 사법부 역시 카이저가 임명한 그대로의 형태였으며, 폴란드에서는 10만명이 넘는 극우주의자들이 반공 성전을 핑계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죠..
목표
1. 대의제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고 수호할 것.
2. 공화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유지할 것.
주요 정파 설명
공산당(KPD) - 평의회 공산주의(좌파공산주의)
1919년 수립된 자유민주주의 독일공화국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합법적 의회정치를 혁명의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는 있다고 믿는 정당입니다. 휘하 준군사조직으로 붉은전선전사동맹(RFB)가 있습니다. (주요 인물 :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파울 레비)
사회주의노동자당(SAPD) - 평의회주의, 노동자 자주관리, 인민민주주의
독립사민당의 직접적 후신을 자처하는 정당입니다. 일단은 공화국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지만, 공화국을 지지하는 우익세력 역시 청산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휘하 준군사조직으로 적기단(Die Roterbanner)이 있습니다. (주요 인물 : 후고 하세, 아르투르 크리스핀, 에른스트 도이믹, 에밀 바르트)
사회민주당(SPD) - 중도마르크스주의(주류), 좌파 개량주의(일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의 좌파정당입니다. 무산계급의 세상을 궁극적 목표로 하지만 혁명을 일으키자는 급진적 주장에는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화국을 철저히 수호하자는 입장이며, 더 나아가 공화국이 노동자의 권익에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주요 인물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필립 샤이데만, 카를 카우츠키, 루돌프 힐퍼딩 등)
자유민주당(FDP) - 경제적 자유주의, 문화적 진보주의
좌파 자유주의 세력인 진보인민당과 우파 자유주의 세력인 민족자유당이 합당해 만든 정당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알기 쉬운 자유주의 세력입니다. (주요 인물 : 카를 페터젠, 후고 프로이스, 테오도어 호이스, 발터 라테나우)
기독교인민당(CVP) - 기독교 민주주의, 기독교 사회주의(일부)
가톨릭중앙당의 후신으로서 문화적으로는 보수적 경향을 보이나 경제적으로는 계획경제 도입과 복지 확충에도 전향적인 정당입니다. 일부 세력의 경우 기독교적 이상이 사회주의의 지향과도 맞닿아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칩니다. (주요 인물 : 콘스탄틴 페렌바흐, 아담 슈테거발트, 콘라트 아데나워,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자유보수당(FKP) - 가부장적 보수주의, (시민적)민족주의
옛 비스마르크의 지지자들을 모태로 한 정당입니다. 입헌군주제를 이상으로 삼았으나 현재로서는 공화국 지지 입장을 보이며, 경제적으로는 자유민주당, 사회문화적으로는 기독인민당과 유사한 성향을 보입니다. (주요 인물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얄마르 샤흐트, 테오도어 볼프, 에른스트 숄츠)
민족인민당(DNVP) - 왕당파, 푈키셔 민족주의
제정 결사옹위를 외치며 공화국에 굳건히 반대하는 세력입니다. 독일보수당, 조국당, 기타 보수우익 세력을 모두 규합한 일종의 빅텐트 정당이지만, 최근 급진민족주의 성향의 젊은 당원들이 이탈하는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자유군단(Freikorps)의 지지를 받습니다. (주요 인물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카를 헬페리히, 볼프강 카프)
민족사회주의자들(National Sozialismus) - 푈키셔 민족주의, 인종주의, 사회주의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민족사회주의자유당(NSFP), 조국노동자당(VAP) 등등 수많은 정파들이 난립 중인, 한 마디로 요즘 뜨기 시작하는 정파입니다. 기본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좌익같은 우익이자 우익같은 좌익입니다. 당연히 공화국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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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어쨌든 화끈하고 재미있는 이름이니까 된거 아닐까요(?)
근데 아래 이벤트의 FDP 우파도 카를이 정의한 '신보수주의'에 해당되나요? 아니면 카를 혼자만 '신보수주의'를 추구하고 있는건가요?
@로콘 아직 없는 용어지만 질서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중 '어느 쪽을 더 지지'하느냐의 차이는 있을듯합니다. 현대로치면 자민당이 전자 기민련이 후자(에르하르트는 기민련 소속도 아니었으니)일테고요
@로콘 사실 뭘 추구하는 지 정확히 나온 바가 없어서 불명입니다. 전통적 기독교적 가치와 시장질서 확립을 융합했다는 게 그래서 뭔지 전혀 설명이 없어서요(…)
@E.E.샤츠슈나이더 현실로 비유하자면 CDU의 이념이긴 한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오네요...
@E.E.샤츠슈나이더 흠...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서 부를 분배하고 복지정책을 실시하자는걸까요?
@차들어 홍차야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틀 안에서 기독교의 이웃사랑과 시혜를 실시하도록.
@로콘 예를 들어, 사회복지의 목적이 “공정한 경쟁 보장”이면 질서자유주의에 가깝고, “하한선의 보장“이면 사회적 시장경제에 가깝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일단 하한선의 보장이 카를이 사회복지를 주장하는 주된 목적이니까 사회적 시장경제에 가깝긴 합니다.
@로콘 그럼 CSVP 내에서 그렇게 우익도 아닐 것 같네요. 아예 기독교사회주의 하자는 당내좌파랑은 선을 긋겠지만..
@E.E.샤츠슈나이더 그러면 카를은 CSVP 우파의 뉴페이스인건가요?
@로콘 CSVP 좌파: 기독교 사회주의자
CSVP 중도파: 기독교 민주주의자(사회복지를 곁들인 자본주의)
CSVP 우파: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란 곧 시장경제다!”
대강 이렇습니다(…)
즉 카를도, 게오르크도 중도파로 분류됩니다.
+ 물론 우파 상당수가 라인당으로 나가버리면서 중도파가 우파 역할을 하고 있긴 합니다. 딕시 나간 미국 민주당에서 바이든이 우파인 것처럼…
@E.E.샤츠슈나이더 어차피 이쪽은 아예 다른 당이니까 논외긴 한데, 저 트레잇의 정파의 범위는, 동일 정당원인가요? 아니면 중도파만 해당될까요?
🦅반더포겔(Wandervogel, 철새) 운동
19세기 말 중산층 집안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자연주의적 스카우트 활동인 반더포겔 운동은 대전쟁 직전의 낭만주의적 분위기와 겹쳐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 운동은 전쟁이 유럽을 박살낸 뒤 한동안 주춤했지만, 범독연맹 폭동과 극우 테러리즘에 따른 서슬퍼런 공안정국 이후 ‘눈치’라는 걸 보게 된 우익 민족주의자 청년들의 대안으로서 다시 각광을 받았습니다.
독일적 전통의 보존을 외치면서도 자유지상주의적 내부문화를 가진 [청년 독일인 기사단(Jungdeutscher Orden)]은 특유의 마초주의적 동성애 경향성 탓에 오히려 보수우파나 기독교 정치세력으로부터 지탄을 받았고, 결국 이들은 알음알음 FDP의 지지세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한스 루터, 빌헬름 퀼츠 등 FDP 내 우파 인사들은 이 조직을 “건전한 독일 민족주의의 본보기”라며 매우 좋아하는듯 합니다…
국민자유주의 부흥의 각이..
👑카이저의 선택.
왕당파 우익의 백색테러와 수 차례에 걸친 당국의 철저한 진압은 전 카이저 빌헬름 폰 호엔촐레른의 활로를 차근차근 막아나갔습니다. 이대로면 언제 “공화주의 역도들의 병력”에게 체포당할 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크게 상심했고, DNVP가 사실상 몰락한 1921년 6월 총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결정타였습니다. 그는…
3: 탕-
4-5: 소수 지지자들을 규합해 내란선동을 하다 체포됨.
6-7: 외국으로 도피하다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됨.
8-9: 중립국 대사관으로 도피했으나 거절당하고 다시 상수시 궁으로 복귀함.
10-11: 상수시 궁에서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냄.
12-14: 해외 도피에 성공함.
15-17: 퇴위를 선언하고 시민 빌헬름 호엔촐레른의 명의로 재산권 투쟁에 나섬.
18: 민주주의 만세!
Roll : 3d6 : 2, 6, 5, TOTAL: 13
공산당의 전사동맹, 사민당의 적기단을 이은 자민당의 기사단이군요 ㅋㅋ 얼마나 더 늘어날까(...)
@E.E.샤츠슈나이더 지크마링겐 연금하려 그랬는데(?
@E.E.샤츠슈나이더 와! 합법적 재산 몰수 각 떴다(?)
@E.E.샤츠슈나이더 동양의 모 국왕들처럼 런 하나는 잘하는구만.
…수염을 깎고 변장한 뒤 덴마크 국경을 넘어 도피, 스웨덴의 한 시골 마을에 은거합니다. SPD는 이를 독일판 바렌 배신사건이라고 맹비난하며, 황가 재산의 무조건적 몰수를 규정한 [호엔촐레른법]의 초안을 마련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네덜란드가 아니라?
@E.E.샤츠슈나이더 근데 지 자식들도 모두 데리고 갔나요 아님 혼자만 튄건가요?
@차들어 홍차야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가 1921년에 죽어서, 아마 극소수 최측근 시종들만 데리고 튀었을듯 합니다(…)
아마 나무꾼으로 여생을 보내지 않을지(?)
@E.E.샤츠슈나이더 독일에 버려진 빌헬름 황태자랑 빅토리아 루이제 황녀 등은 뭔 죄냐?
@차들어 홍차야 핍궁사건 가야죠(??)
@차들어 홍차야 죄가 없다기에는 너무 적극적으로 왕당파 운동에 가담하고, 철모단같은 극우 준군사조직 활동도 열심히 했어서 ㅎㅎ..
@E.E.샤츠슈나이더 OTL에서는 나치랑 적극적으로 붙어먹더니...
@E.E.샤츠슈나이더 오... 그렇게까지 핍궁을 원한다면야 해줘야죠 ㅎㅎㅎ
2화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