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 구룡령 25km, 내재성, 카프카의 편지 외

[우선하]

 "일반적으로 작가에게서 몸과 뼈 속에 우러나오는 번민과 고뇌가 느껴지는 가운데, 독자는 그 작가와 작품에 공감과 감동을 하는 것이지, 그런데 작품이 논리와 설명, 해설과 설교로 평가가 이루어지지는 것은 아니리라."

                                           카프카(Kafka, 1883-1924), 변신(Die Verwandlung, 1915) - 류종렬의 '마실에서 천사흘밤 이야기' 06.23.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상훈 형과 류종렬 선생님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은 강원도 홍천에 걸으러 갔습니다.  두 사람이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기 전부터 지금까지, 서울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길입니다. 하루 동안 걷고 버스로 서울로 돌아옵니다. 다음에는 지난 번 종점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다시 걷습니다. 두 사람과 두 번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오후 늦게 홍천에서 합류해 서울로 돌아왔고, 그 다음에는 아침 일곱 시에 동서울 터미널에서 만나 하루 일정을 모두 함께 했습니다. 걷기도 걷지만, 걷기 위해 대중 교통으로 오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이쯤되면 트래킹과 드라이브, 혹은 여행의 개념이 모호하게 중첩되지요. 더구나 말이 많습니다. 걷는 토론회인가요, 음식, 농사, 개마고원, 술 따위, 주저리주저리 떠들면서 가다보면 어느새 꽤 먼 거리를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배치를 변경해야 했습니다. 홍천에서 양양으로 가려면 해발고도 1,013m의 구룡령을 넘어야 하는데 정상을 기준으로 전후 약 이십여 킬로미터 구간에는 버스도 다니지 않고 민박은 커녕 슈퍼 하나 없는 그야말로 오지더군요.

   강원도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 경계에 위치한 고개이다.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마치 용이 구불구불 기어오르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56번국도 상에 있다. 『강원도 땅이름』에 의하면 "높은 고도 때문에 맑은 날에도 옅은 안개가 끼어 있으며, 비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정상 부근에 짙은 안개로 시야를 가리는 일이 많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룡령 [九龍嶺, Guryongnyeong]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그래서 저는 차로 두 분을 출발 지점에 내려드린 후 숙소를 찾아 들어가 홀로 청산과 안개, 그리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둘러쌓여 카프카의 소송을 침대로 재구성할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했죠. 이것이 제가 이번에 '연재'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입니다만, 어떨 것 같습니까? 시골 산 속에 틀어박힌다고 글 안 나오던데요. 잡 생각만 납디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 왔을까, 오늘 술 뭐 먹지, 비는 왜 이렇게 와, 샤워를 할까 말까, 닭도리탕이 오 만원이라는데 이거 바가지 아냐, 여기서 혹시 살인 사건이나 자살 같은 거 없었을까(산길 끝 집이었습니다) 등등. 이것이 그날 여행을 구성한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였습니다.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죠.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이튿날 두 사람은 아침 식사 후에 다시 양양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저는 또 혼자가 되었죠. 다행히 날이 개었습니다. 여전히 책 같은 건 잡히지 않았죠. 저는 그냥 산책이나 할 겸 식당(식당은 민박보다 더 위, '진짜' 길 끝, 산 중에 있습니다)으로 올라갔는데 멀리서부터 노래방 반주가 신명나게 들려오더군요. 아줌마가 혼자 식당에서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클리셰입니다. 특별할 건 없지만, '이런 미친... 흐흐흐' 하고 웃고 있는데 어제의 잡 생각과 오늘의 이 여행, 이 민박집, 계곡, 풀숲, 식당 주위에 닥치는 대로 조성한 밭들, 거기 심어놓은 작물들, 걷기, 카프카, 글쓰기 따위가 잠시나마 모두 짬뽕이 되어 뒤죽박죽되면서 기냥 다 우스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소꿉놀이 같다고 말이죠. 뭐 하나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겁니다. 나는 혼자 겁내고, 그래서 두 어깨에 잔뜩 힘만 들어가 있던 거였죠. 물론 과장이고, 한참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것을 '내재성에 접근했다'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엄청나게 중요한 약속이 있는 사람이 밤 새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친 채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상대방이 오지 않아 애만 태우다가 마침내 전화를 걸었을 때, "어, 그 약속은 다음주인데요" 하는 대답을 들었다고 해 봅시다. 또 하나 어떤 여자가, 시골에서 상경해서(그녀는 정말 구룡령 같은 깡촌에서 서울에 대해서는 그저 티브이와 그 비슷한 매체를 통해서만 접하면서 막연한 동경만 가지고 있었다고 칩시다) 마침내 여의도의 고층 빌딩 숲 어느 빌딩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직장이 지하철에서 바로 연결이 되어 있던 터라 집-지하철-회사-지하철-집의 패턴으로만 여의도를 알고 있다가 어느날 상사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려 처음으로 여의도의 거리로 나가 햇살에 반짝이는 고층 빌딩들의 유리 숲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저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이 여자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고층 건물로 되는 엽편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추상적인 차원으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저는 카프카의 글쓰기가 '이 과정을 계속하기'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코드화된 사회 시스템의 내용과 표현 속으로 침투한(침투라고 하지만 실은 이미 거기 와 있던) 비의미적 질료에 의해 그것이 분해되면서 다시 조립되고 또 미끄러지는 실험적 쓰기의 반복.

 시골의사에서 일상생활의 전도(顚倒)라는 것은 논리적 전복의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사에서 엉뚱하게 다른 사건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두 계열 사이에 우연의 결합인 셈인데, 그것은 단지 우연만이 아니다. 작동자에게 자기의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주변의 계열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또한 변형되고 있다. 사건은 발생하면서 다른 계열들이 주변에 널려있음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작품에서 시골의사는 자기 마굿간에 들락날락하는 부랑자(노마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많이 와서 진료를 떠날 수 없을 때 부랑자는 표면으로 등장한 것이다. 다른 말을 준비해 준다.  <나지막한 칸막이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 하나가 파란 눈을 반짝이며 낯짝을 드러냈다. 남자가 네발로 기어 나오면서 물었다. “마차를 준비할까요?” (128)>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 1932-2016)의 장미의 이름(1980)에서 주인공 윌리엄의 젊은 제자인 ‘멜크의 아드소’가 의문의 죽음이 계속되는 수도원의 식당에서 장미 향기를 지닌 여인을 만났다. 표면의 겉면에서 윌리엄이 사인을 찾는 것과 달리 아드소는 수도원 생활의 이면(안면)을 만난다. 윌리엄의 수사 활동에 비해 아드소의 계열의 접속이 수도원 내의 음모의 다른 측면을 제시할 뿐이지만, 상층의 추상과 논리에 대해, 현실에서 계열들의 절단과 분절들의 접속들은 무제한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석의 승리는 추상에서이며 삶에서는 한계선을 계속 밀고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리라. 

 의사의 의무감과 고결함이 사회의 일부를 이루고 또 성취하려는 욕망이 있는 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리좀들의 움직임에는 정념과 욕망이 있다. 둘은 열정의 양면성일 수 있다. 사회는 두 바퀴가 같이 굴러 갈 것이다. 제도기에는 침실의 모든 용법이 들어 있으나 기계는 고장나면서 밖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구 시대의 것이 되었다. 모든 정해진 것은 삶의 우연 즉 시간에 침식당하면서 새로운 욕망의 배치에 따라 고장나면서 재배치된다. 그 욕망들은 이미 곁에서 함께 진행되고 있던 것들이다. 다만 특별한 때가 아니면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을 뿐. 

       카프카(Kafka, 1883-1924): 시골 의사((Ein Landarzt, 1920) - 류종렬의 '마실에서 천사흘밤 이야기' 07.09.

 쉽게 말하면 '낯설게 하기'입니다. 그러나 낯설게 하려면, 앉은 자리에서 세상과 더불어 탈주하려면, 집요하고도 세심한 진단과 과감하고 냉철한 비평(사실 둘은 완전히 구분될 수 없겠지만)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욕망의 배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카프카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처음으로 고개를 쳐들 수 있을까'입니다. 거기에는 우연이, 어떤 실패가, 어떤 폭발이, 어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훈 형 식으로 말하면, "선생님은 중이병에 감응할 수 있어, 어떤 계기로. 선하 씨는 아냐." 내게는 그것은 생활의 변화(나는 내가 무엇과 더불어 탈주하는지 알고 있지만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ㅋㅋ 다만 생활의 큰 변화라고 해두죠), 촛불, 류종렬 선생님에 대한 어떤 감정의 변화, 두호 씨의 글들, 쓰기에 대한 욕망 따위의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일단의 사건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쓰면, 그전에는 우연으로 보였던 사건들이 필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더군요. 일단의 우연들과 더불어 일종의 '무언극'을 상연하는 배우로 되는 거죠.

 다음 번에 이야기하겠지만, [유형지에서]는 카프카의 이런 욕망 기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답은 없습니다, 여러 차원으로 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문제는 우리가 카프카의 어느 측면에 '위치'할 것이냐, 그래서 그로부터 어떤 것을 '훔쳐낼 것이냐' 겠지요. 그것은 고장나면서, 폭발하면서 새로운 배치를 그립니다. 칸트의 미적 판단에서 '숭고' 즉 능력들의 불일치의 일치라고 할까요. 마찬가지로 여러 차원으로 논의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요한 건 '좋다, 그래서 그거 어떠 써먹을 거냐'겠죠.

 저는 연재를 이어가겠지만, 미리 어디에 써 놓고 검토한 다음 마실가에 옮겨적는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때그때 충동적으로, 그러나 지속적인 연구와 병행해 여러 강렬도를 통과하는 글쓰기들의 모자이크로 만들고 싶지만, 그것도 계획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소송 일 장에 나타난 침대를 '무엇'처럼 작동한다, 혹은 '무엇'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텐데, 거기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맨 위에 인용한 류종렬 선생님의 글은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들뢰즈의 말을 따르면 '경험의 교환'으로서, 제가 단지 저만의 오독을 펼쳐 놓을 거라는 예고로서 작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침대를 구성하면 될 겁니다. 중요한 건 카프카를 읽고, '직접 느끼고', 한 측면에 위치시키거나  자신이 그 기계의 질료로 되면서 고장나고 폭발하면서 자신 만의 카프카를 생성-작동시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프카가, 아마도 소송의 집필을 거의 마치고, 파혼 사건 이후 처음으로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몇몇 '경험의 교환'에 도움이 될 만한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직접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지는, 소설가 카프카와는 또다른,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잠재적 카프카를 구성하는(즉 인접한!), 그러한 카프카를 드러냅니다.

 "...그대가 나로 인해 이 년 동안이나 아무 죄도 없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알았지요. 이것은 죄인들이 괴로워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한 그대가 내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좋았을까요? 내가 실제로 행한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가서 침묵하거나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우스꽝스러운 합승마차 마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감정으로 그대를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 내면에서는 두 자아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한 자아는 그대가 원했던 것과 거의 같습니다. 그  자아는 그대의 소원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한 것을 계속적인 발전을 통해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아스카니셔  호프에서 그대가  비난한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이 자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한편  또 다른  자아는  작업(편지  교환 즉  글쓰기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작업은 이 자아의 유일한  걱정거리지요.  작업은 가장 비열한 상상조차도  이 자아에게는  낯설지 않게 만듭니다.  즉  가장 절친한  친구의 죽음조차도  그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작업의 방해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비열함을  상쇄하는  길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좋아하는  데  있습니다.  이 두 자아가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두 손으로 마구 때리며 덤비는 실제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첫번째 자아는 두번째 자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자아는 결코 내적인 이유에서 두번째 자아를 내동댕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번째 자아가 행복해하면 그 자신도 행복해하지요. 두번째  자아가 짐작컨대 상실감에 빠져 있으면 첫번째 자아는 옆에 무릎을 꿇고서 그를 쳐다보기를 원할 뿐입니다. 펠리체, 사정은 이렇습니다. 하지만 서로 싸우고 있는 그 둘 다 그대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두 자아를 박살내는 것 외에는 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시나요. 바로 아래 누이동생의 집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매제가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누이동생은 부모님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일들, 특히 공장 일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 한 나의 시간 배분은 이렇습니다. 나의 하루는 세시 반까지 사무실 근무, 집에 와서 점심 식사, 한두 시간 동안 신문을 읽고 편지를 쓰거나 사무실 일, 집으로 돌아감(그대는 그 집을 알고 있습니다), 잠을 자거나 잠들지 못한 채 침대에 그냥 누워 있음, 아홉시에 부모님 집에서 저녁 식사(훌륭한 산책), 열시에 전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감, 기력이 남아 있거나 다음 날 오전 사무실에서의 두통에 대한 걱정이 문제되지 않는 한 잠자지 않고 버티기 등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펠리체, 그대는 아마도... ...평상시의 내 생활은 용인할 수 없고, 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마지못해 용인했습니다. 나는 내 낮 시간에 방 세 개짜리 조용한 집에서 혼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 스스로 인정하듯이 내게 어울리는 생활입니다. 친구들을 포함하여 아무도 집에 데려오지 않습니다...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는 없지만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면서 내 의무를 다하는 것에 때때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생활 방식을 항상 옹호해왔습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항상 질문과 시험의 연속이었지요. 그대는 이러한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대의 긍정은 한 번도 질문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대답의 틈새에 해당하는 부분을 펠리체 그대는 증오, 또는 이 단어가 과하다면 혐오감으로 채워 넣었지요... ...그대가 명확한 대답을 줄 수 없었던 것도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불안은 수시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나는 혐오감 대신에 불안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감정은 뒤섞여 있습니다... ...그대의 불안은 작업에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인식은 나를 두렵게 만들었습니다(훨씬 더 참을 수 없는 불안과 함께). 그 상황은 그대가 편지에 쓴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녹초가 되었어요. 기력이 다한 듯해요"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지요...

 ...가장 명백한 예들 가운데 집 문제로 인한 불화가 있습니다... ...그대는 자명한 어떤 것, 즉 그대와 나와 같은 계층의 다른 가정들처럼 아담한 세간을 갖춘 조용하고 가정적인 집을 원했습니다. 그대는 단지 이 사람들이 지닌 것만을 원했지요(그대의 오늘 편지에도 이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들은 "꿈속에 우연히 굴러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집에 대한 그대의 생각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들과는 합의를 이룰 수 있어도 나와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경우에 집이 의미하는 바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거의 포만 상태에 빠집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마지막으로 크게 한 입 음식을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다릅니다... ...나는 축 늘어질 정도로 내 작업에 허기를 느낍니다. 여기에서 나의 사정은 작업과 상반됩니다. 만약 내가 이런 사정 속에서 그대의 소원에 걸맞는 집을 얻는다면 그것은ㅡ현실 속에서가 아니더라도 기호 속에서ㅡ내가 이러한 사정을 평생 달고 다녀야 한다는 것, 즉 나에 관한 한 최악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작업에 가장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선택은 물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프라하가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오 층 이상에 위치한 집을 구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대는 스스로 선택한 궁상 속에 살기는 부적당하며, 나 또한 그렇습니다. 아마도 차라리 내가 그대보다 더 부적당하지요.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시험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그대에게 이런 제안을 기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가 제안을 해온다면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겠지만,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중도적인 길이 있었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분명히 그런 길이 있었습니다. 만약 나와 우리들의 공동 생활을 위해서 무조건 필수적인 것에서 그대를 멀리 떼어놓는 불안이나 혐오감이 없었더라면, 그대는 그 길을 물론 애써 찾지는 않았겠지만 발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나는 여전히 이러한 합의에 이를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에 불과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의 징후가 보였습니다. 따라서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대가 살아 있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했던 나로서는 저항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대의 현실적 존재를 사랑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내 작업에 적대적으로 다가올 때만 그것을 두려워했지요. 하지만 그대를 사랑하기에 그대를 돕고 단지 그대를 지키는 일만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대의 말은 완전한 진실은 아닙니다. 그대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고 했지요. 혹시 그대는 위험에 처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닌가요? 한번도? 전혀요? (ㅋㅋㅋㅋㅋ 미친...)"

                2002년 솔 출판사, 변난수-권세훈 옮김, 카프카의 편지(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p. 695-706 중 발췌

[소나깅]

햐. 부슬부슬 비 맞은 것이 제대로 느껴지네요. 두 분과 동행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였나요? 그랬다 해도 낯선 산중에서 클리셰와 책들과의 대면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