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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 주권을 쟁취하여야 될 혁명시기에 있는 것이요, 혁명이란 약한 힘으로써 강한 힘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니 만큼 난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혁명자란 인류사회의 정의와 철석 같은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 투쟁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혁명자는 언제나 낙관적인 태도와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다.' 〈백범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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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이역만리 중경에서의 백범
1921년, 파란만장 70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절...
부인 최준례 여사와 놀이시설 같은 장난감을 탄
아들 인의 모습속에서 따듯한 남편과 아버지를 느낀다.
회포를 돕는 비석 / 동아일보. 1924. 2. 18. 월 이 사진은 항자 보도한 바와 가치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맛나서 남이 격지 못한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녀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잇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상히 녁이여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여러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대 조선어학자 김두봉(朝鮮語學者 金枓奉) 씨의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짓고 이 빗돌 위에 잇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싀어머니 곽 씨(郭 氏.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 아들 김인(金仁.5)이요, 왼편에 잇는 아해는 그 두째 아들 김신(金信.2)이다. 늙은 싀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엇지 참아 감기엇스랴 !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히 누은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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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ㄹㄴㄴㄴ해'는 단기 4222년 의미... 서기로 1889년이다.
'ㄷ달 ㅊㅈ날 남'은 3월 ** 일에 출생하였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5년'이란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원을 따져보면 1924년 1월 1일에 돌아가셨다.
35세의 나이로 두 아들 남기고, 큰 일 해야 되는 남편 두고,
대쪽같은 지조를 키워주신 시어머니보다 먼저 세상 떠난...
한 여인의 그 아픔...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삶...
고단한 임시정부의 뒷바라지...
사실 당신이야 그래도 훌훌 떠나버리면 그만이나,
아들과 남편의 가슴 쓸어내리는 아픔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도 없고 그 상실감 또한 어떠했으랴?
1934년 중국 남경. 인, 백범, 모친 곽낙원, 신(왼쪽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 중 가장 으뜸 됨이 인(仁)이요,
그 다음이 신(信)이다. 그래서 첫째를 인(仁), 둘째를 신(信)으로 지었다.
장남, 백범 선생, 차남(왼쪽부터)...
중경에서 부자간의 기념 촬영 사진(1940년대 전반)
그러므로 이처럼 화목한 부자간의 사진은 정말 정겨움을 던져준다.
그러나 아래의 김신 회장 인터뷰처럼 형 김인은 광복을 앞두고
그만 생명을 잃었다. 페니실린을 사용하면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내아들에게만 특별하게 대우할 수 없다는 백범의 쓰라린 고백을 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백범은 아내 죽음,
세 딸의 죽음(1907 장녀, 1915 차녀 화경, 1917 삼녀 은경),
어머니 죽음 등의 뼈아픈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대의실현에 애쓰신
모습이었다. 정말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받기 마땅하다.
김신 백범 기념사업협회 회장
2000년 6월 26일 맞이하면서 조선일보에 게재된 인터뷰 스크랩.
"할머니가 삯바느질로 날 키워, 어려서 얼마나 원망했는지… 오늘의 대한민국 보시면 지하에서도 흐뭇해하실 것"
"얼굴이 크고, 마마 자국이 있는 남자 어른이 건장한 청년 둘과 함께 오더니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다'며 할머니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할머니는 '신(信)아, 네 아버지다' 하셨다. 아버지는 '많이 컸구나' 하면서 내 머리를 어루만지셨다." 김신(金信·87)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열두 살이던 1934년 4월 아버지를 처음 만나던 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고향인 황해도 안악에서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절강성 가흥(嘉興)에서였다. 당시 백범 선생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이후 거액의 현상금을 내건 일본 제국주의에 쫓겨 다닐 때였다. 김신 회장은 "그후에도 중국에 있는 동안 아버지와 같은 집에서 산 적은 없다"고 했다. 일제를 피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아버지는 늘 주변을 조심해야 했고 독립운동에 바빴기 때문이다. "남경에 살 때도 할머니가 아버지를 만나려면 나를 시켜서 안중근 의사 사촌인 안경근에게 연락했어요. 몇 단계 경로를 거쳐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뵐 수 있었지요." 26일은 일평생 독립과 건국을 위해 싸운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져 서거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서거일을 하루 앞둔 25일 낮 백범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김신 회장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6·25 전쟁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출격하는 등 오랫동안 공군에 복무한 탓에 한쪽 귀가 어두운 것 말고는 정정한 목소리로 '아버지 백범'을 기억해냈다. 김신 회장은 빛바랜 사진 몇장을 넘기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찍은 사진"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924년 어머니 최준례 여사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네 살 위의 형(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백범 선생은 두 살배기 아들 김신이 위태해 보였던지 등을 받쳐주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통사람 같은 부자간의 정(情)을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도 없고, 할머니가 나를 삯바느질까지 하며 키우셨으니까요.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 아버지이기 이전에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1939년 중경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엉엉 울거나 그러지 않으셨어요." 김 회장은 백범을 있게 한 데는 할머니 곽낙원 여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1938년 백범은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환의 총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 김신 회장은 아버지가 저격당한 사실도 몰랐다고 했다. 한달 동안 입원했다가 회복한 백범이 곽낙원 여사를 찾아왔다. "동족에게 맞아 죽으면 말이 되는가. 일본 놈 총에 맞아 죽으면 모를까." 할머니는 도리어 백범을 따끔하게 몰아세웠다. 김신 회장의 형 김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로 상해에 잠입해 비밀공작을 벌였고, 1939년 한국 광복진선(陣線) 청년공작대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3월 중경에서 폐병으로 숨졌다. 김신 회장은 "페니실린만 맞으면 회복될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다른 동지들도 맞지 못한 비싼 주사를 내 아들이라고 해서 맞힐 수는 없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옮겨온 중경에는 연료로 쓰는 석탄 매연과 습한 날씨 때문에 폐병으로 죽어간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많았다. 김신 회장은 인도령(領) 라호르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1944년 곤명의 중국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중국이 인도에 임대한 비행기지에서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서울시민들이 해방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나와요. 아버지를 모시고 귀국하겠다고 편지를 썼지요. 아버지는 거절했습니다. '대장부가 군인의 길로 나섰으면 마음먹은 것을 끝내고 와야지... 군인이든 독립운동이든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데, 도중에 돌아올 수 있는가. 나라를 세우게 되면 그런 인재가 필요할 것이다'. 얼마나 섭섭했던지..." 김신 회장은 미국까지 건너가 비행훈련을 끝낸 뒤인 1947년 7월 귀국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 아, 이런 세상이 다 오는구나. 기쁘고, 또 슬펐다"고 했다. 김 회장은 1948년 여름 중국에 건너가 할머니와 어머니, 형님 그리고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이동녕 선생과 차이석 국무위원 등의 유해를 수습해 귀국했다. 그 해 9월 공군 중위로 임관한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했을 때 옹진 전투지구 유엔위원단 환영회장에 있었다. 서거 소식을 듣고 비행기로 달려오는 순간 불효라는 두 글자가 번개같이 스쳐가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김 회장은 당시 잡지 '민성(民聲)'에 실은 '불효참'(不孝懺)이라는 기고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아들을 몰라야 했고, 아들이 아버지를 모르면서 살아온 가정이 바로 저희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조국은 아직 슬프니라. 불행하니라. 너는 이 애비의 아들이기보다 먼저 조국의 아들, 사회의 일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김신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에 들어가 유품을 수습해보니 윤봉길 의사와 상해 의거 때 바꾼 회중시계와 도장 이외에는 변변한 물건이 없었다"고 했다. "하와이 동포들이 금시계를 보내왔는데, 며칠 뒤에 보니 없어졌어요. 누가 뭘 갖다 줘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와서 생활이 어렵다고 하면 다 내주셨습니다. 가족에게 남겨주신 것은 하나도 없어요." ― 백범 선생 같은 분이 아버지였기 때문에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도 받고, 중국에 건너가서 온갖 어려운 일을 겪은 분입니다. 그 분이 겪으신 일은 제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경계하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고, 백범 서거 60주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을 교과서에 나오는 먼 옛날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우리 선배 세대들이 독립과 건국을 위해 어떤 난관을 헤치고 여기까지 왔는지 젊은 사람들이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백범일지'를 군(軍) 장병이나 어린 학생들에게 읽히기 위해 독후감 공모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씨를 뿌리고, 산에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하는 일이지요."(백범김구선생기념 사업협회는 몇 년 전부터 '백범일지'를 무료로 보급하고 독후감을 공모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백범 선생이 만약 지금 살아계신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에 어떤 점수를 주실까요. "그야 불문가지(不問可知)지요.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도로는 쭉쭉 뻗어 있고... 해방 이후 이만큼 성장했고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습니다. 지하에서도 흐뭇해하실 겁니다. 다만 동족 간에 전쟁까지 치렀는데 60년이 다 되도록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하실 겁니다." 김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1922년 9월 아버지 김구 선생이 망명 중이던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최준례 여사는 그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1924년 1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그 후 그를 키운 건 할머니 곽낙원 여사였다. 김 회장은 "배고프면 할머니 젖을 물고 컸다"고 했다. 1925년 생활이 어려워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가서 소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1934년 다시 중국에 건너왔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와 함께 장사·광주·유주를 거쳐 1939년 중경에 들어왔다. 그해 할머니가 타계한 뒤 중앙대 부속중학교에 들어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방학 때는 중경(重慶) 오사야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1층에서 책상을 이어 붙여 잠자리를 만들었다. 1943년 곤명에 있던 서남연합대학을 다니다 중국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해방 이후 미국에 건너가 랜돌프 공군비행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했다. 1948년 9월 공군 중위로 임관, 공군본부 작전국장·제10전투비행단장 등을 거쳐 6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주 대만 대사와 교통부 장관, 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백범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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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아버님 아래 훌륭한 아들 이네요! 조국의 아버님 , 조국의 아들로 대의명분을 앞세운... 12살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첫대면 하게되는 ... 시대 상황에 가슴이 애려옵니다 트레이드 마크- 동그란 뿔테 안경- 만인들의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기억 됩니다 어둡고 암울한 (일본 치하) 시대에 오로지 조국 대한민국의 주권적 독립을 위하여 큰 뜻을 품고 실천하신 크나큰 거목! 어이없는 정치판의 희생물이 되셨으니... 예나 지금이나 성숙한 정치는 기대일랑 말아야지...ㅉㅉ 이런 큰 가슴 품은 진정한 열혈남아^^ 어디 없나요? 진정으로 나라사랑에 잠 못이루는... 모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