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의 명산 황매산 아래에 자리잡은 가회면. 산청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이 고장은 예로부터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자리잡은 재실, 유허비 등이 선비 고장임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창주(滄洲) 허돈(許燉). 이 고장 출신의 대표적 선비이다. 면소재지인 덕촌리(德村里)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 김해 허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창주의 8세조 기(麒)가 고려 공민왕 때 벼슬을 하다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을 배척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자 이를 변호하려다 고성으로 귀양을 와서 자손들이 정착을 했으며, 창주의 증조부 순(珣)이 다시 삼가로 이주해 비로소 가회에 살게 되었다.
창주의 조부 팽령(彭齡)은 남명 선생의 제자로 덕망이 있었으며, 부친 홍재(洪在)는 그의 외삼촌 입재(立齋) 노흠(盧欽)에게서 학문을 배운 효성이 지극한 선비였다.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찰방 벼슬을 받기도 했다.
입재 노흠은 1527년 삼가에서 태어난 선비로 19세 때 남명 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었으며, 임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창주가 어릴 때부터 많은 가르침을 준 할머니 노씨가 바로 입재의 손위 누이가 된다.
창주의 조부가 남명 선생의 제자인 것을 비롯해 부친이 남명 선생의 제자에게 학문을 익힌 것을 볼 때, 창주의 학문 역시 남명의 학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창주는 1586년(선조 19년) 현재의 합천 가회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져 다른 아이들과 함부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연보에 기록돼 있다.
11세 때 입재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이때 임곡 임진부도 함께 배웠다. 임곡은 입재의 외손자로 학문이 뛰어나 뒷날 왕자사부를 지낸 인물이다.
창주가 입재에게 글을 배울 때, 당시 도체찰사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악견산성의 형세를 시찰하러 와서 장단촌에 있는 입재 노흠을 방문을 했다. 이때 오리가 노흠에게 “공은 비록 자손은 없지만 이 두사람의 자질은 옥과 같다.”며 창주와 임곡을 칭찬했다고 한다.
13세 때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했다. 노파는 창주의 부친 덕암공의 친구로 남명의 학문을 사숙한 합천의 대표적 선비이다.
노파는 창주를 가르치면서 “뒷날 큰 선비는 바로 이 아이일 것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남들에게 “허돈은 남보다 뛰어난 일등의 높음이 있다.”라고 하기도 했다.
21세 때 덕천서원에서 한강 정구를 만나 의문나는 것을 질정했다. 24세 때 향시에 합격을 하고, 31세 때 비로소 문과에 급제를 했다.
조정에서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성균관 박사 등의 벼슬을 제수했다. 창주가 성균관에 있을 때, 성품이 조용해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았지만, 용주(龍洲) 조경(趙絅)은 창주의 자질을 알아보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용주는 남명의 신도비문을 지은 선비이다.
예조정랑으로 조정에 있다가 이이첨 등 간신들이 전권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이때 창주 나이 32세였다.
이듬해 부지암(不知巖)으로 여헌 장현광을 만나러 가서 간송 조임도 등과 학문에 대해 질정을 했으며, 34세때는 노파를 모시고 17명의 선비들과 두류산을 유람했다. 돌아오는 길에 진주의 약포 정훤을 방문했으며, 김해로 가서 선릉(先陵)을 참배했다.
38세 때 인조반정으로 인해 전라도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근에 있던 선비들이 다시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했으나, 창주는 “지금 벼슬길에 나가 무엇하리오. 내 좋아하는 것을 좇아 살리라.”하며 더 이상 벼슬에 뜻이 없음을 표명했다.
42세 때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지었다. 창주정사를 짓고 본격적으로 학문을 정진하고자 했는데. 곧이어 부모상을 당해 예를 지키려다 자신의 몸이 상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때 창주의 나이 47세.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창주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선비들이 거창의 용원(龍院)에 모였는데, 이때 동계 정온이 “허덕휘(德輝:창주의 자)가 죽었다니 참말인가. 이 자리에 있지 않으니 사실인가 보구나. 아 온화하고 깨끗한 자태를 다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으니 안타깝구나.”하면서 슬퍼했다.
창주의 후손들은 가회면 오도리(吾道里)에 살고 있었다. 마을 입구의 ‘오도지향(吾道之鄕)’이란 돌 표지석이 유풍이 흐르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찍이 공자가 증자에게 ‘충(忠)’과 ‘서(恕)’를 일러 우리 도(吾道) 가 한 곳으로 통한다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마을 뒤편에 창주를 모신 재실 도산서당(道山書堂) 있었다. 한말 강우지역의 대표적 선비인 회봉 하겸진이 지은 기문이 걸려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창주의 13세손인 허광영(56세)씨는 “창주선조는 기조가 곧은 분입니다. 평생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학문에 정진한 분입니다. 애석하게도 수를 못하셔서 후세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창주가 오래 살았으면, 많은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창주가 세상을 떠난 후, 1856년 이지역 유림들은 창주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가회에 덕림서원(德林書院)을 세웠다. 하지만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지금껏 다시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후손의 안내로 덕림서원이 있었던 곳으로 가 보았다. 서원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과수원으로 변해 있었다. 서원 터에 유허비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강동욱 기자
*일찍이 삼가현은 참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고향으로 그 저항정신이 면면히 이어온 고장입니다. 삼가현이었던 가회에는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의병장 구산 윤탁(龜山 尹鐸)과 광해군 때 정2품 우참찬을 지낸 추담 윤선(秋潭 尹銑)의 후손들이 구평마을에, 거유(巨儒) 창주 허돈(滄洲 許燉, 1586~1632)의 후손들이 덕촌리에 거주하는 등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등 남명 조식의 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고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623년 소위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인 내암이 억울하게 처형되고, 그 여파 등으로 집권세력인 노론으로부터 심대한 차별을 받고 있던 합천 등 경상우도에서 무력(武力)으로 저항한 1728년 3월 정희량의 난으로 남명학파가 몰락하고, 중앙정부로부터 반역향으로 매도되어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으나, 불의를 용납 못하는 경의사상(敬義思想)은 실천철학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창주(滄洲) 허돈(許燉) 선생은 우리 매촌공(德龍) 할아버지의 묘지명을 지으신 분이시다.
임계공의 사위인 윤우벽공께서 매촌공의 履歷을 서술하여 창주 허돈선생에게 부탁하여 매촌공의 묘지銘을 지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