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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집회
신성한 경륜
12.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신성한 경륜(1)
2013. 8. 25.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히2장]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엡1장]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죽으심 안에 있는 신성한 경륜에 대해서 말씀을 했다. ‘사람이 죽으면 허망하다, 죽으면 끝이다.’ 하는 이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셨다. 그러니까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첫째는 죽으심으로 인생의 정체성을 폭로하고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같이 되어서 사람인지 하나님인지 잘 구별이 안 되는 그런 상태의 인간, 어쩌면 하나님 같이 될 것 같고 어쩌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한 쪽에서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같이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잘 하면 사람도 하나님같이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지금 세상이다.
요즘 사랑방에서도 뜨거운 얘기가 오가고 있는데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는 말과 또 하나는 “사람은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내 속에 하나님이 있다. 원래 신성이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개발을 하면 신이 된다.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신이다.”하는 말이 있다.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내용은 두 가지다. 여러분이 잘 들어야 된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야~ 하나님같다.”이렇게 말했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고!”하는 이 말은 ‘저가 신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리고 친히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이렇게 자기 입으로 말씀을 했다. 그래서 ‘사람이지만 하나님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8)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야~ 예수님도 그랬으니까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니냐! 예수님도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개발해서 하나님이 된 것이니까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개발하면 우리가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따로 있냐는 것이다. 참 아주 아름아름한 이야기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 때문에 요한복음이 쓰여졌다.
그런데 또 요한복음을 본 사람 중에는 이 문제를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봐라 예수도 그렇지 않았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또 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했냐는 것이다. 또 왜 그러면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까 물과 피가 나왔다.”고 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참 묘하게 쓰여졌다. 처음부분을 읽으면 아~ 하나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사람 안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안에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능히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가면 ‘야~ 사람은 결국 사람이구나!’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은 ‘사람이 하나님이다. 사람이 하나님 된다.’는 사람들 때문에 썼는데 한편에서는 그 사람들이 요한복음을 더 인용을 했다.
그러면 요한은 그렇게 보라고 썼냐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탁 못을 박아 놓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딱 못 박아 놨다. 그리고 못박힌 상태에 대해서 어느 사람보다 다른 어떤 복음보다 더 리얼하게 생생하게 기록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봐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폭로하고 확립한 것이다. 사람이 이것이다. 이것이 사람이다. 공중을 날아도 사람이고 하나님같이 되어도 사람이다.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체성을 폭로했다고 말씀했다. 폭로한 것은 다른 말로 확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분열의 원인, 바벨의 원리.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론은 바벨로 집결된다. 바벨은 혼잡이라는 말이고 그래서 언어를 혼잡케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분열의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쓴 것이다. 이 분열 이것을 그의 죽음을 통해서 제거했다. 율법 혹은 교리 혹은 전통 혹은 의식 물론 지금은 더 많은 것들이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들로 사람과 사람들이 갈라졌다. 종교와 종교 사이가 갈라질 수도 있고 같은 종교 안에서도 갈라질 수도 있고 하여간 갈라지게 되어있다. 이 갈라진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했다.
자기 몸으로 폐하셨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 율법이나 교리나 교파나 이런 것들이 다 소용없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보니까 그런 담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연히 원인 무효되었다. 그래서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화평은 유태인과 이방인의 원수진 것 그것이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죽음은 저주였다. 인생이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죽으면 끝이니까 저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이 밝히고자 하는 일을 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신 것이다. 죽음도 이렇게 죽는다면 죽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도 죽고 민족을 위해서도 죽는데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겠는가?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죽어서 해결된다면 그 죽음이야 말로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죽음이 저주가 아니고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 죽음보다 가치 있는 죽음은 없다. 죽음, 죽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죽음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죽음이 저주가 된 것이다. 죽음이 가치가 있다면 저주가 되지 않는다.
전쟁터에 죽은 사람들이 물론 강제로 끌려가서 죽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원해서 간 사람도 많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신숭겸도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서 자기가 왕복을 입고 스스로 나가서 화살을 맞고 죽는다는 것은 자기 목숨보다 고려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서 도망쳐 봤자 나라가 없는데 무엇을 하겠냐는 것이다. 도망쳐도 살수도 없는 환경이다. 몇 명의 사람만 남아서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꼼작할 수 없는 상태인데 도망쳐봤자 어디로 가겠는가? 그런데 그 죽음을 오히려 왕을 위해 바쳤기 때문에 그 죽음은 고려가 있는 한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죽음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어떤 가치를 가져올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제 그런 입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죽으면 그만이다고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니까 그렇다.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니까 죽으나 사나 매한가지인 것 아니냐. 생사일여라 함이다 하는 것이 사나 죽으나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사나 죽으나 같은 것이니까 죽음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 없다.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도를 많이 닦다보면 속된 말로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다. 생사일여인데 사나죽으나 같은 것이다. 하는 그것은 일종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도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죽는 것은 죽는 것이다. 내가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것이지 죽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왜 우리가 쓰는가?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쓴다. 왜 땀 흘려 벌어서 그 돈을 쓰는가? 가치가 있으니까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왜 사느냐? 쓸 곳이 있으니까 산다. 쓸 곳이 있으니까 살아야지 쓸데없이 살고 있으니까 죽으면 그만이다, 아니면 생사일여다 라는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생각으로 그냥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통해서 죽음보다 더 큰 것을 가져올 수 있다면 누구라도 과감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음을 통해서 더 큰 것을 가져온다면 말이다. 어차피 죽는 것이니까.... 물론 안 죽는 비결이 있다면 안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어차피 죽을 것을 받쳐서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다면 당연히 그것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은 죽으심, 저주라고 이름 붙여진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셨다. 인생이, 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죽음이 꼭 그렇게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반대로 죽음이 아니면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죽음은 축복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죽음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돈은 돈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돈이 아니라도 될 수 있으면 돈은 중요하지 않다. 돈이 아니면 안 될 때 그 돈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돈이 아니면 안 될 때, 돈이 아니면 못 살게 될 때, 살 수가 없게 될 때, 그때 돈의 가치가 몇 배로 올라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돈을 목숨하고 바꾸겠는가?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돈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못 박아 놓았다. 그 다음에 왜 서로 분열되었는가? 분열의 원인을 제거했다.
a. 죽음을 부활로 바꾸심
하나님같이 되려는 아담에게는 죽음이 단지 육신의 생육을 위해 쓰이고 있을 뿐, 무용하고 저주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고 새 생명으로 사는 영생의 길이 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는 죽음을 부활로 바꾸셨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신성한 경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이 부활은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것이다. 부활은 다른 생명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부활을 우리가 ‘신이 되거나 신처럼 되는가, 무슨 투명인간이 되느냐, 유리 인간이 되느냐’ 하는 이런 문제로 생각하면 안 된다. 부활은 바꾸는 것이다. 그냥 부활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바꾸어서 오는 것이지 그냥 부활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부활 생명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바꾸어진 것을 부활 생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꾸지 않고서는 없는 것이다. 부활이라는 것이 있다면 안 바꿔도 되지만 이 부활은 바꿔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
요즘 백화점에 명품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가방 하나에 1000만 원짜리가 어떤 사람 집에 가 보니까 있다. 그게 어떻게 있겠는가? 자기가 만들었는가? 돈으로 바꾼 것이다.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돈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그 돈만큼 뭉쳐서 들고 다니면 욕한다. ‘저런 미친 놈을 봤다. 왜 돈을 묶어서 돌아다니나?’ 명품 가방으로 사서 들고 돌아다니니까 ‘야! 저거 멋있다.’ 하는 것이다. 명품 가방은 돈으로 바꾼 것이다.
부활은 내가 내 생명을 주고 바꾼 것이다. 죽을 생명을 주고 바꾼 것이다.
하나님같이 되려는 아담에게 ‘생명이나 죽음이 왜 있느냐?’고 물으면 ‘생육하고 번성하려고 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누구는 몇 백 살을 살고 자식을 낳고 죽었다. 다른 게 아무 것도 없다. 공부하고 죽었다는 말도 없고, 숙제하고 죽었다는 말도 없고, 우주선을 타고 가다가 죽었다는 말도 없고 오직 새끼를 낳고 죽었다 이것뿐이다. 창세기 5장의 10명이 다 그렇다. 왜 10명을 열거했느냐 하면 10명이라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이다. 전부가 그렇다는 그런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라고 물으면 사람마다 여러 가지 말이 많을 것이다. 나는 등산하려고 산다. 나는 사진 찍으러 다니려고 산다. 나는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려고 산다. 별별 사람 다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 자기의 취미가 다르니까 그렇겠지만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새끼 낳으려고 사는 것이다. 만물이 다 그렇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까 새끼를 낳는 이게 아니면 무용한 것이다. 그래서 생물들을 보면 새끼를 낳는 데 결사적이다. 연어가 알을 까는 데 보면 대서양에선가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데 결사적으로 자기 모천을 찾아온다. 어떻게 찾아오는지 그것 참 신기한 일이 아닌가! 냄새를 맡는 것인지 뭘 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물이 다 섞어졌으니까 똑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데 아마 이놈들은 후각이 발달해서 자기 모천의 냄새를 맡는지 모르겠다. 물도 하나의 입자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다 용해된다고 할 수 없다. 하나가 되어 버릴 수 없다. 그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돌아다닌다. 바다에 가서 수영을 해 보면 찬 물과 더운 물이 따로 다닌다. 바다에 들어가 보면 차가웠다가 더웠다 한다. 한류와 난류라고 한다. 그래서 바다가 아무리 커도 강원도에 있는 물은 흘러서 어디로 가는가 보다. 그 입자가 있는가 보다. 그러니까 그 냄새를 맡고 올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생물 선생님은 아실 것이다.
하여튼 찾아오는 것이다. 무엇하러 찾아오는가? 알 까러 온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죽는다. 알을 까고 기진맥진해서 죽는다. 그러니까 연어의 일생은 알 까려고 살다가 알을 까고 죽는 것이다. 그놈이 알만 안 깠으면 그대로 살지 모르겠다. 그런데 알이 있으면 괜히, 어떻게 사람도 임신을 하면 냄새를 잘 맡는다. 그놈도 그런가 보다. 그래서 무슨 냄새를 맡고 오는가 보다. 연어나 사람이나 똑 같다. 다를 게 아무 것도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산다. 메뚜기는 알을 깔 때가 돌아오면 꼬리를 땅에다 박고 거기다 알을 까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래서 들판에 가 보면 땅에다 꼬리를 박고 말라 있는 메뚜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모든 생물은 다 사는 목적이 알을 까는 것이다.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살다 보면 좀 억울하다. 아마 옛날 원시인들은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좋은 것이 많으니까 ‘아이고, 내가 알 까려고 났나? 나 이거 할 일 많은 데, 있는 것도 많은 데...’ 이러니까 억울하다. 원시인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없었을 것 같다. 내 생각에 메뚜기나 연어처럼 당연히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좋은 게 많기 때문에, 공부를 그렇게 하라도 해도 이것만(핸드폰) 하고 앉았다. 그런 아이들이 죽으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러니까 세상이 좋아질수록 더 억울하다. 다리 밑에 거지는 죽으나 사나 일반이지만 왕은 죽으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사람은 결국 한다는 것이 생육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까 무용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하게 되었다. 다른 동물들은 다 그렇게 하면, 연어가 행복하게 죽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말을 그렇게 했다. 사람은 ‘아니, 내가 자식 낳고 죽으려고 태어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자식들이 다 나가 버리고 나 몰라라 해 버리면 ‘내가 왜 그렇게 애써서 키웠던고, 잠 안자고 키웠던고, 왜 그렇게 키웠던고...’ 이런 생각이 난단 말이다. 다 행복 하라 는 법은 없다. 그래서 무용하고 저주스럽다. 앞으로 점점 가면 더 할 것이다. 점점 앞으로 더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이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는 것이 되었다. 막혔던 관계가 열어지는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기는 살았는데 하나님과는 막혔었다. 이것을 보고 죽음이라고 한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그 말이다. ‘하나님과 단절되고 막혀서 생명의 교통이 안 된다.’ 그런 말이다. 생명의 교통이 안 되니까 죽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결국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된 줄 알고 살고 있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교통이 되겠는가? 안 된다. 인생이 인생인 줄 알아야 하나님과 교통이 된다. 자기가 하나님인 줄 아는 데 하나님과 교통이 되겠는가? 안 된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당장 내일부터라도 회사에 가서 자기가 사장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사장과 교통이 되겠는가? ‘내가 과장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과장님과 교통이 되겠는가? 안 된다. 둘 사이는 죽은 것이다. 딱 막혀서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직장 생활을 잘 하려면 자기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나는 내가 지금 계장인지 과장인지 국장인지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확실한 사람이라야 윗사람을 윗사람대로 알게 되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알게 된다. 그래야 관계가 제대로 된다. 이것을 모르면 관계가 안 된다. 엉망진창이 되어서 만날 불평불만이 나오고 이렇게 된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주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죽음을 부활로 바꿨다. 이게 다른 점이다. 자기 생각 속에서 죽음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다. 죽음을 부활로 바꾼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기 위해서 바꾼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에게 왜 죽음을 정하셨는가? 이 질문과 원망에 대하여 주님은 확실한 대답이 되셨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한 알의 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음으로 번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으로 번식이 있다. 인간에게 내려진 첫 번째 축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신 것이다(창1:27)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만물에게 왜 죽음을 정해 놓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자비로우신 분이고, 은혜로우신 분이고... 많다. 시편(詩篇)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끝이 없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왜 이 억울한 죽음을 놓아두었는가? 왜 불행한 죽음을 만들어 놓았는가? 그래도 하나님이냐? 이렇게 안 되겠는가? 아무리 다른 것은 잘해서 눈, 코, 입을 똑똑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죽으면 그만인데 왜 마지막에 가서 잘못되도록 해 놨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잘못했냐는 것이다. 죽음만 없게 만들어 놨으면 정말 완벽하고 밤낮 주야로 꿈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텐데! 아니 눈 코 입 다 제대로 만들어 놓고 왜 마지막에 죽게 만들어 놨냐? 이것이다. 그러면 대답하기 어렵다. 이 질문과 이 원망에 대해서 주님은 확실한 대답을 하신 것이다. 대답이 된 것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한의 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안 죽으면 번식이 안 되니까! 우리가 여기서 천사와 인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안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냐! 천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에 천사라는 개념이 없으면, 죽는다 안 죽는다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안 죽는 것이 있기 때문에 비교가 된다. 우리 인간 끼리 있으면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 것이니까!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다 죽는 것이니까!
그런데 다 가난할 때는 가난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 어렸을 때는 다 가난했으니까! 가난한 것이 당연하다. 이상하지 않다. 요즘에는 빈부의 문제! 이런 것 때문에 난리다. 옛날에는 이런 것 자체가 문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 속에 태어나서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까 비교가 안 되면 문제가 안 되지만, 문제는 상대성 빈곤이다.
아니 저 사람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 사는가? 이것 아닙니까! 똑같이 8시간 일했는데 저 사람은 100만원 받는데 난 왜 50만원 밖에 못 받나? 이런 문제다. 천사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른다. 본 일이 없으니까! 사람이 천사와 같은 개념이 있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알고 보면 천사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이상하게 천사는 번식했다는 말이 없다. 천사가 알 깠다는 말이 없다. 천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른다. 하여간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한다. 어디를 가도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한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축복하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이렇게 축복을 했다. 인간과 더불어 있는 생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첫 번째 축복이다. 천사에게는 그것이 없다. 안 죽는 대신에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없다. 생각하면서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신이 된다면 생육하고 번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죽음이 있으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창9:7~13참)
그러니까 만일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데 “야! 신이 되면 얼마나 좋겠냐! 천사가 되면 얼마나 좋겠냐! 왜 인간은 이 모양이냐! 왜 인간은 죽어야 되냐!”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인간이 만일 그토록 원하는 신이 된다면 그러면 생육하고 번성하지 못 한다. 그러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이 없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절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한다. 그런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왔다.
이것이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이라고 말한다. 노아가 홍수에서 나와서 다시 언약을 받을 때 말씀하기를 “너와 더불어 있는 모든 생물에게 내가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이다. 그리고 이 언약의 증표로써 내가 무지개를 두겠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죽는 것은 생육한다. 안 죽는 것은 생육을 못 한다. 이런 말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아주 불공평 한 것은 아니고 공평한 것 같다.
주 예수님은 경륜적인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히2:14참)”하나님의 축복을 확인하셨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죽음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이루셨다. 이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다 같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경륜적인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 오늘 본 성경 말씀이다.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고”죽음의 권세를 잡았다는 말은 마귀가 사람에게 송사하는 결정적인 송사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뭐하냐? 네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뭐하냐? 너는 결국 죽지 않냐? 너는 죽을 것이 뭐 하나님을 위한 다고 위하면 안 죽나? 하나님을 위하면 뭐하냐? 죽으면 그만이지! 그렇지 않냐! 위하면 뭐해 죽으면 그만인데 이것이 마귀의 최후 무기! 마지막 무기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 주려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마귀 앞에 이것 때문에 꼼짝을 못 한다. 그렇구나 하나님이 정말 무심하구나! 저 놈의 말이 맞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다. 죽으면 소용없는데 축복이 무슨 축복이야! “축복 안 해도 안 죽으면 좋겠구먼!”사람 생각이 그렇다. 저도 그런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축복하지 말고 안 죽게 하지 뭐! 뭐 하러 축복하고 죽게 하나!”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매여 있으니까! 하나님의 찬양이 온전하지 못 하다. 찬양을 해도 밑에 깔린 것이 그래도 죽을 텐데! 이것이 깔려 있다.
내가 충만해서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감사를 하는데 밑에 뭐가 깔려 있냐하면 그래도 죽으면 헛일 인데! 이것이 깔려 있다. “내가 음부에 내려가면 주님을 찬양하지 못할 것이다” 항상 사람 밑에는 죽는다는 것이 깔려 있다. 그래서 종교가 생겼다는 사람도 있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종교가 생겼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종교학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멸했다”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멸했다. 쉽게 말하면 이열치열(以熱治熱) 이다.
사람이 사망에 빠졌다는 말은 육신이 죽었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망이라고 번역했다. 물론 영어로는 다 같은 말인데 우리 나라말로는 죽음과 사망을 구별해서 썼다. 사망이라는 말은 정신적인 것 같다. 그러니까 절망하고 비슷한 말이다. 육신이 죽는데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사망이다. 아까 말한 “죽으면 그만 아니냐!” 이 사상이 지배한다. 그러니까 이 문제가 결정적으로 사람이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요소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죽음으로 그 권세를 파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도록 만들어 놓았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자비하니까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니면 기술이 모자라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이것이다. 다 모른다. 내가 모르는 것을 하나님 그러실 것 아니냐 이렇게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분이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자비로우신 분이 은혜로우신 분이 내게 그렇게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이 무자비해서 죽음을 만들어 놓았겠냐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멍청해서 그러냐? 아니면 하나님이 실수해서 그러냐? 그것도 또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죽음은 사망을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사망의 지배를 받으라고 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이 죽음으로 우리를 안 죽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망의 지배에서 해방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만일 죽음이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된다면 사망에 매일 필요가 없다. 죽음은 항상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완전한 해답은 아니다. 이것이 완전한 해답이 되려면 죽음에 대한 대가가 확실할 때 이 문제가 없어진다. 죽음에 대한 대가가 없는 한 이 문제는 항상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반항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 도 없어서 그런 것이지 자기 안에 깨끗하게 해결된 것이 아니다.
여러분도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해결이 안 된 문제가 많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매일 불평하거나 욕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밑에 덮어 놓고 살았다. 싹 씻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많다. 내가 그런 일이 많으니까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대구교회 왔다고 100% 완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시간도 많이 걸린다. 자신이 30%만 되어도 100% 같이 느끼는 사람이 있고 60%만 되어도 100%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100%로 느낀다고 하더라도‘아닌 것은 아닌데’하는 것이 깔려있다. 그래서 조금 미진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연연하고 붙잡지 말고 그냥 놓아야 한다. 긍정적인 것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붙잡고 가면 능히 갈 수가 있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100%해결하고 가는 것은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못 간다. 내가 모르는 세계고 모르는 길인데 어떻게 다 알고 가겠는가? 아무리 내가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를 해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모른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아는 것만 알아가고 좋은 것만 취해가면 된다. 나는 뷔페에 가면 늘 돈이 아깝다. 그 곳에 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가 가자고하면 안 갈 수 없다. 안 가면 그것도 없다. 그러니 가자고 하면 가야된다. 3만 원짜리에 가서 3천원 밖에 못 먹더라도 가면 3천원어치라도 먹는 것이지만 안 가면 아예 3천원어치도 못 먹는다. 그러니까 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3만 원짜리인데 3천원 밖에 못 먹으니 안 가야겠다고 하면 다음에는 천 원짜리도 못 먹는다. 내가 3천원어치 밖에 못 먹어도 감사하게 가면 다음에 또 오라고 할 것이지만 안 간다고 하면 다음에 오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조금 알더라도 내게 행복한 것이면 극대화시켜야 한다. ‘뻥’을 치든지 말든지 극대화시켜야 한다. 좋은 것이니까 그렇다. 나쁜 것은 뻥을 칠 필요가 없다.
사망에 매여 있으면 안 된다. 매여 있으면 속는다. 사망보다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주었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다. 내 생각보다 나은 생각을 가졌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했다. 나는 생각할 때 사망이 없으면 하나님이 100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나보다 못해서 그랬겠는가? 하나님이 나보다 나은 분이라고 믿는다면 나는 몰라도 참아야 된다. 그 분이 나보다 나은 분이니까 내가 왈가불가해도 될 일이 아니다. 기다려 봐야 될 일이다. 그래서 기다려보니까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멸하는 사람이 나왔다. 오래 기다려보니까 이런 사람이 나왔다. 그래도 참고 기다렸다.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있으니까 참고 기다렸다. 그랬더니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어떤 사람이 나왔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이 죽음을 줄 때 무슨 이유로 주었는지를 몰랐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보고 ‘아, 저래서 죽음을 주었구나.’하고 안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우리에게 공개해 준 것이다.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밝혀주었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나타내셨다(요1:18)고 했다. 예수님이 하나님 속에 깊이 들어있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분을 보고‘하나님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속에 있지 않았으면 모를 일인데 그 속에 있었으니 저것을 아는 것이구나 하고 한 것이다. 예수님을 보았을 때 처음부터 독생자고 아버지 품속에 있는 자라고 알았겠는가? 표시가 있었는가, 무엇이 있었는가? 아무 것도 없었다. 뒤로 겪어보고 나서 저 분은 하나님 품속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굴속에 없었던 사람이 굴 속 사정을 알 수 없다. 굴속에 있어야 굴 속 사정을 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고백을 한 것이다. 그것을 써 놓은 것이 성경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품속에 있었던 분이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비밀을 확인해 주었다.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었다. 하나님이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였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확인해 준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죽으면 저주라는 사실이 없어진다. 죽음이 필요한 이유를 알았다. 생물학적으로는 연어가 알을 까고 죽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를 알게 되면 연어가 멍청하다고 생각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을 줄 모르고 죽을 장소에 와 가지고 알 까고 죽는 것을 멍청하다고 본 것이 알을 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면 지혜로운 것으로 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보면 인간은 절망이고, 하나님이 멍청한 것이고, 하나님이 잘 못한 것이고, 하나님이 무자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아! 하나님 지혜로우시구나!’ 그렇게 알게 된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밝혀주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알게 되면 하나님이 참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이 알아지게 된다. 우리가 마귀의 말만 들었을 때는 ‘하나님은 멍청하다. 하나님은 무자비하다.’고 알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나서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다.’라고 알았다. 그래서 그를 독생자라고 한다.
절망적인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이루신 것이다. 누구도 그 죽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 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일은 다 증거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을 증거 하지 못했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한 것,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한 것 등을 다 증거 할 수 있었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증거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무 말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이루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다 필요에 의해서 주신 것이다. 이 필요한 것을 우리가 사용할 줄을 모르니까 그냥 두는 것이지 알기만 하면 다 사용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번에 스마트폰을 하나 샀다. 왜 샀냐하면 지금 스마트폰 시대가 와서 사람들이 전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옛날에는 집에 누가 찾아오면 한번 보면 그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지금은 한번 왔다 가면 잊어버린다. 다음에 오면 저 사람이 누구인가? 이렇게 생각한다. 얼마나 미안한가! 자기는 알고 왔는데.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나 해서 기억력을 향상시켜야 하나 하던 차에 스마트폰을 하나사서 오는 사람마다 사진을 하나 찍어놓으면 기억을 잘 하지 않을까 해서 샀다. 샀는데 사진 찍을 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아직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가 있으니까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할 필요가 없다. 사진도 찍고 다른 다양한 기능도 사용하려고 샀는데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못 배우고 있다. 배워서 처음 온 사람 얼굴을 찍어놓아야 안 잊어버린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것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르는 대로 두어야 한다. 아는 것만 가지고 말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해석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재료를 만든다든지 불평할 재료를 만드는 것은 마귀(魔鬼)와 똑같다.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 마귀의 사업이다. 죽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려고 연구하는 연구소장이 마귀이다. 그래서 내가 만일 그렇게 하고 있으면 마귀연구소 소장 밑에 있는 직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르는 것을 가지고 괜히 아는 척하면 그렇게 된다. 모르는 것은 그냥 덮어놓고 ‘조금 더 크면 알겠지, 다음에 알려주시겠지.’ 해야 한다. 그래서 오래 기다리다 보니 이런 말도 듣는다.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였다.” 라는 말을 어떻게 듣겠는가.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듣고 다 몰라도 이것을 들었다는 것 만해도 대단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언제가 나에게 다 알아질 것이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신성함을 이룰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이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필요하고 인간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저주의 죽음을 부활로 바꾸심으로써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이루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에게 그 생명과 함께 하나님이 정해주신 동일한 축복이다. 자연계를 보면 포식자들에게는 번식을 제한하고, 먹히는 자들에게는 더 많은 번식을 허락하셨다. 죽지 않는 자들(천사)에게는 번식이 불가능하게 하셨으며 죽는 자들(인간)에게는 번식을 축복하셨다.
주님은 저주의 죽음을 부활로 바꾸셨다.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도 이루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에게 그 생명과 함께 하나님이 정해주신 동일한 축복이라는 말이다. 생명은 축복이고 죽음은 축복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생명에는 다 죽음을 주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은 다 죽는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이 축복이라면 죽음도 축복이어야지 하나는 축복인데 하나는 저주라면 아까 말한 대로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잘못 만드실 일이 없다고 믿어야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이 잘못 만드신 것이 없고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다.’고 생각해야 사람다운 것이다. 하나님이 잘못 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보고 당신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하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의 선생님이 많다. 우리 사랑방에도 가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답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질문을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질문 받는 사람의 선생님이다.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와 이리 덥노!” 라고 내가 했으면 왜 덥다고 했겠는가? 더운지 몰라서 여러분에게 말했겠는가. 다 이유가 있어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말한 것보다 그것이 더 재미있으니까 그렇게 말 한 것이다. ‘와 이리 덥노’하니까, ‘가창은 시원할 텐데 왜 덥다고 하노? 아이고 그 집에 가니까 선풍기도 있고 에어콘도 있는데 왜 덥다고 하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숨은 뜻이 있을 텐데 하는 사람도 있어 아주 여러 가지가 나와서 무지 재미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는 것까지는 좋은데, 모르는 것 가지고 얘기하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해서 ‘왜 이래야 되냐, 왜 저래야 되냐?’ 하면 안 된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 모셔야지 제자가 선생님보고 왜 저렇게 가르치느냐고 하면 공부는 못한다. 그런 학생은 틀림없이 공부 못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다.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에게 생명과 함께 모든 것을 주셨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축복을 주신 모든 것이 축복 안에 모든 것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산 것은 축복이고 죽음은 저주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모르니까. 그런데 오늘 말을 들어보니까 ‘죽음도 유용하네! 가치가 있네!’ 이렇게 알아진다. ‘가치가있게 해석을 하니까 가치가 있네!’ 오래 살면 이렇게 된다.
자연계를 보면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포식자들이 있다. 그것도 참 이상하다. 잡아먹는 것을 보면 무자비하다. 산양들이 뛰어놀고 있는데 사자나 호랑이가 가서 목을 물어 죽여서 먹는 것을 보면 무자비하다. 하나님이 왜 저런 것을 만들어 놓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선하신 하나님이 저것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쫌 그렇다. 뭐가 잘못된 것 같다. 아니면 마귀가 저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그 잡혀먹는 것을 보면 불쌍하다. 한번 물어보지도 못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냥 꽥 소리 못하고 잡혀 먹히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왕조에게 그냥 도장 찍으라니까 찍고 (왕보고) 나가라니까 나가는 것과 똑같다. 조선왕조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 비참한 것을 놓고 사람들은 지금 누가 도장을 찍어서 그랬니 안 그랬니 하지만 누가 안 찍으면 다른 사람이 찍게 되어있었다. 나라가 다 망하게 되어 있었는데 안 찍으면 안 망하는가. 그러니까 포식자들을 보면 눈이 무섭게 생겼다. 두루미가 우리 집에 붕어를 잡아먹으러 오는데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날아다닐 때는 아주 신사 같지만 그 두루미가 무지하게 무섭게 생겼다. 포식자들의 눈은 다 무섭다. 그러면 포식자들만 살고 먹히는 놈들은 다 죽을 것 같지만 자연계를 보면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이 포식자들은 새끼를 많이 놓지 못한다. 그리고 낳는다 하더라도 자기 들 끼리 잡아먹어 버린다. 사자 같은 놈들은 자기 새끼를 죽여 버린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자연계에서 포식자들 밖에 안 살아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포식자들은 숫자가 안 늘어나고 먹히는 자들은 계속 늘어난다. 그런 걸로 봐서 하나님은 먹히는 자들에게 더 많은 번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쥐는 일생동안 1년 6개월을 사는데 150마리의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쥐과에 속하는 토끼를 키워보면 달 달이 새끼를 10마리~12마리씩 낳는다. 이것이 참 이상하다.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잘 못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못한 것만은 아니구나! 무슨 이유가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듣다.
죽지 않는 천사들에게는 번식이 불가능하게 했고 죽는 사람에게는 번식하도록 축복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려라” 천사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내가 언제 천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느냐! 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다. 오늘 오신 여러분은 이것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가도 된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에게 무슨 뜻이 있다.” 내 인생에도 해결 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 그렇지만 하나님에게 무슨 뜻이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을 안 믿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엉뚱한 것을 내 놓으면 해결이 안 된다. 하나님이 답을 주셔야 딱 들어맞는 것이지 인간이 만든 답은 답이 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모든 것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엡1:20~23, 행2:32,13:30참)
유대인들은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예수님은 아무 권력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죽였다. 마치 유대인들은 사자나 호랑이 같았고 예수님은 산에 살고 있는 산양 한 마리(어린양 한 마리)와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모든 것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엡1:20~23. 행2:23,13:30참)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반론하기를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 놓고 묵묵히 보고 만 있었다. 이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랬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드는 것 같고, 교리적으로 들어보면 ‘아 그것도 아닐 텐데!’이런 생각이 들고 해답이 안 된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은 무자비 하지 않는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강의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 교리 중에 아들을 주어서 희생제물을 삼아 온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반론을 재기 했다. 그렇다면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죽여 만만을 살릴 아버지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는 무자비한 아버지지 그런 아버지가 자비로운 아버지 겠느냐! 이렇게 공격을 했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된다. 더군다나 유명한 사람이 말을 한 것이니까 함부로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공부를 엄청나게 한 사람이 한 말이니까 그런 사람이 한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말하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말하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한다.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하고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톡톡 털어도 마음이 차지 않고 우리에게 해답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모든 것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엡1:20~23, 행2:32,13:30) 이 말씀은 넉넉하게 대답이 된다. 그분의 죽으심에 대한 풍성하고 놀라운 보답이 생기다. “이 정도면 죽을 만하지 않는가!” 여러분들은 어쩔 런지 모르겠지만 나 같으면 이런 정도면 죽을 것 같다. “모든 것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엡1:20~23, 행2:32,13:30)이 성경구절을 읽어보고 참고하기 바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요 그의 몸이다. 그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한 것이다.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의 재생산이다. 생명의 경륜은 계속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고 있다.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이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으면 교회는 없다. 또한 그의 몸이다. 그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한 것이 교회다. 쉽게 말하면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의 재생산이다. 생명의 경륜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고 있다.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이고 또한 교회의 증거다.
교회는 부활의 증거고, 재생산의 증거며 사망을 삼키고 있는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사망을 몰아내야 한다. 교회 안에 사망이 있게 하면 안 된다. 사람의 죽음만 사망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사망된다. 자기에게 불리하나는 생각이 들어오면 그 때부터 원망하기 시작한다. 내게 유익할 때는 찬양을 하다가 내게 불리하면 원망을 하게 된다. 출애굽 할 때도 보면 그랬다. 그 사람들이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다. 우리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두면 잘되면 좋고, 안되면 나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를 중심으로 하니까 그런 것이다. 나를 위해서 생각 하니까 그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보게 되면 아! 하나님 참 지혜로우시구나! 지혜로운 경륜이 흘러가고 그 지혜로운 그 경륜 안에 내가 있구나! 이렇게 되어야 내가 감사가 된다.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있다. 부활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다 바꾸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죽음에 메여 있을 것이 아니고, 죽음보다 더한 가치를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한다. 내가 새로 찾을 필요가 없다. 새로 찾는다고 더 좋은 것이 찾아 지겠는가! 나는 이미 개발 된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아! 죽음보다 소중한 것이 있구나! 죽음보다 귀한 것이 있구나! 죽음을 댓가로 지불할 만한 것이 있구나!’하는 그것을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나도 나이가 많으니까 죽음이란 문제가 가깝게 온다.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 안 나는데 나이가 드니까 난다. 내가 100살을 산다하더라도 앞으로 23년 밖에 못산다. 좀 크게 잡아놓고 봐야 한다.(ㅎㅎㅎ) 죽음에 대해서 생각 안 한 게 아니다. ‘아! 죽음 다음에 뭐가 있을까? 죽은 후에 뭐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내가 아무것도 없다했지만 그래도 속으로 혹시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본다. 안 해본 것이 아니다. 해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으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지 않느냐! 그렇게 답이 된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분의 경륜 안에 다 예정 된 것이 있고 경륜이 흘러간 속에 내가 있는 것이지 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 알아서 안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어서 안심하고 있다. 내가 도가 터져가지고 ‘그래! 생사일여다.’ 해서 안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후에 뭐가 있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왔다. ‘천당이 어디 있냐? 그런 공간이 어디 있나?’하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李목사 이상하다는 얘기 듣는다. 그래놓고 지금 와서 갑자기 천당이 있다고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이제는 있다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길로 가야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이 ‘나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 있고 없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 교회는 하나님의 중심에 있고 주님이 우리를 불렀을 때 공연히 불렀겠나! 내가 신학교에 갔을 때 그 생각을 했다. 난 언제 목사 되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도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한 번도 안 해봤다. 그런데 나를 불렀다. 그래서 나는 ‘공연한 사람 불렀겠나! 공연히 사람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일이 있으니까 불렀겠지. 일이 있어서 불렀으면 당연히 대책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3년씩이나 기도했다는 친구가 와서 전망이 없으니 모두 앉아서 수군거리는 소릴 들어보니 졸업하면 어디가나! 갈 데도 없는데 하더니 슬슬 다 빠져나갔다. 내가 속으로 생각할 때 3년씩이나 기도할 때 뭘 기도했나! 나는 기도도 안하고 왔는데 나는 나를 부르신 분이 공연히 불렀겠나. 아무 일없이 쓸데없이 불렀겠나! 일이 있어 불렀겠지. 일이 있어 불렀으면 다 대책이 있겠지. 일이 있어 불러놓고 아무대책 없는 사장은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태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제일 먼저 목회 하러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염려했던 사람은 하나도 안 보내고 난 아무 염려 안 해봤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2학년 올라가니까 시내교회가 비었는데 자네가 가게. 그러니까 일이 있으니 불렀지 일없으면 불렀겠나. 딱 내가 아니면 그 교회 갈사람 없도록 만들어 놨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염려할 일이 없고, 모른 것을 안다고 할 것도 없고, 모른 것은 모른다 하고 아는 것은 안다하고 그러면 편하고 좋다. 그러면 모른 것은 어쩔 것인가? 모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 군대 간 사람이 다 총 들었다고 국방부에서 계획한 것을 다 알 수 있겠나! 모른다. 앞으로 가 뒤로 가 그것만 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작전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사단본부에서 하는 일을 모른다. 그래도 전쟁하는 경륜에 있다. 사단본부에서 면밀히 연구해서 승리 할 수 있는 작전을 짜고 있다. 나는 그 경륜 안에 들어 있으니까 졸병이 염려걱정 해 봤자 아무소용이 없다. 이리가면 이길텐데 저리가면 이길텐데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다. 사단본부에서 다 작전을 세우고 있고 작전전문가들이 다 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참 지혜로운 것같다. 얘기를 들어 보니 중국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고 정치하라고 하지 관여를 안 한다. 왜냐하면 정치는 할 사람이 해야 되니까, 안 할 사람이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염려 한다고 뭐가 되는가? 할 사람이 해야 한다. 그러니 저 나라가 보통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열 사람이 돈을 모아서 집을 사면 한 사람의 관리인에게 딱 맡기고 만다. 아무 간섭을 안 한다. 팔아먹든지 말아 먹든지 간섭을 안 한다. 열 명이 다 붙어서 간섭을 하면 어떻게 돈을 모아서 집을 사는가? 아, 정말 대국인답다.
우리 같으면 못 견딘다. 둘이 합해서 사 놓아도 혹시 팔아먹지 않는가 하고 항상 겁이 나서 도저히 못 하는데 열 명이 합해서 사도 염려 안하고 다 맡겨 놓고 있다. 그래서 뉴욕이나 LA에 가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모여서 사는 타운이 있다. 상가들이 있다. 상가들을 다 빼앗기고 있다. 건물을 사 버리니까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 그 경륜 안에서 지금 차근차근 일이 해결되고 있다. 그 경륜 안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니까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니까 정 안 되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또 죽어 주시더라도 하여간 일이 해결될 것 아닌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인데 그냥 하다가 말겠는가?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공사를 하려면서 이 돈이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고 공사를 하겠냐는 것이다. 미리 예산을 세워서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면서 아무 대책 없이 일을 하시겠냐는 것이다. 내가 왜 아무런 대책을 안 세우는가? 하나님이 다 세우니까 안 세운다. 하나님이 다 하시니까, 하나님을 못 믿으면 내가 해야 된다. 하나님을 못 믿으면 내가 나서서 해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니까 대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내가 안 해도 된다. 그래도 잘 된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우리가 있다. 죽음도 이 경륜 안에서 해결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합당한 자리로 부르시고 당신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부르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실지라도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해서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믿음을 갖게 해 주시고 신뢰를 갖게 해 주시고 주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가 모르는 일은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는 일은 찬양하게 해 주시고 모르는 일은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신 주님을 우리가 묵상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