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절.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226-244
- 2장 「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이규성(李圭成, 1952-) in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 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pp 209- (P.975)
제2장은 대종교에 관한 설명이며, 그 중에서 5절은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것인데,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의 대종교 창설과 시기가 겹쳐있다. 논자는 이기의 행적에 나철의 행적을 보태어 놓아서, 읽을 때 분간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52TMB)
해학 이기가 유가의 정이천 주자의 이기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의 기론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그 기론은 이론과 기론의 현실태 이전의 기론인 것 같다. 이런 근원적 사상을 독립운동과 연결하여 현시대 이전의 단군 또는 환인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시대의 빛을 현실에서 새로운 빛으로 중광(重光)하려 한다. 이에 나철의 대종교와 연결이 이루어진다. 제5절 제목에 성리(性理)와 지기(志氣, 의지)라는 것은 해학 이기에서 홍암 나철로 글이 이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철에게 특이한 삼법(三法) 수련, 즉 조식(調息), 지감(止感), 금촉(禁觸)이 있다. 나로서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데, 이 조식수련은 원효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즉 전래의 삼선교[유불선]에서 온 방식인지 알 수 없다.
유교가 신유가(주염게, 주희)에서 불교와 대결의식에서 태극-무극의 원리적 하나로 사유를 올라가듯이, 대종교도 한얼대도의 “광대한 하나의 무”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동학에는 무극대도(無極大道)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양철학식으로 보면 존재의 극한에 대한 사유를 하는 것이다. 유가든 도가든 불가는 현실에서 삶을 기준으로 사유한 것으로 보이는 데, 어느 시점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 기원(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가는 것은 국난 또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것인가? - 주자의 경우는 국난에 의한 자의식의 발동을 보는 사람도 있다. 일제의 침탈에서 국난을 겪으면서 기원(아르케)에 대한 사유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52TMB)
제1부 자유와 현실 39
1장│표현과 개벽: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41
2장│저항과 위대한 영혼(한얼): 전병훈, 나철, 이기, 서일 181
1. 공화(共和)와 겸성(兼聖)의 원리 181-197.
2. 연금술적 위생학(衛生學) 197-209
3. 나철(羅喆)과 이기(李沂)의 벽파(劈破) 209-221
4. 민권의 보편적 원리[通義] 221-225
5.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226-244
6. 하나의 무[一無]와 위대한 영혼(한얼)
7. 본연의 성(性)과 씨알 인성론
8. 고요한 무와 움직이는 유[靜無動有]
9. 아(我)와 대동(大同)
**********
# 5.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226-244
해학 이기는 이학의 근본 구조와 주요 개념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그는 송대 정이천(程伊川)의 성즉리(성즉리)가 갖는 자연철학적 의미와 인성론적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 하고 자신의 사상을 논한다. (226)
[논자에 따르면] = 공자(孔子, 전552-전479)의 전통, 배위(裵頠, 263-300)의 숭유론(崇儒論), 정이(程頤, 1033-1107, 伊川, 이천), 회암(晦庵) 주희(朱熹, 朱子, 1130-1200)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226-228)
우주가 가상[환(幻)]이 아니고, 영원히 반복해서 조재한다고 한다면, 무한한 생산력을 가진 원천이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원지기(眞元之氣)이며 용광로[(홍로 洪鑪)]이다. 정자[이천]는 이것을 회남자(淮南子)의 용어를 빌어 ‘조화자(造化者)라고 부르고 “그것이 스스로 기를 생산한다[其造化者 自是生氣, 기조화자 자시생기]고 했다.
= 횡거(橫渠) 장재(張載, 1020-1077),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
회암(晦庵) 주희(朱熹, 朱子, 1130-1200).
이런 의미에서 조셉 니담((Joseph Needham, 1900-1995)처럼 “도(道)란 개념 전체가 힘의 장의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28) [도라는 것을 에너지가 충만한 힘의 장으로 보는 것은 유물론의 시각인데, 과학의 기초 개념으로 설정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유가에서 도(道)란 삶의 기준을 설정하는 선험적 요소처럼 쓰이며, 과학적 의미보다 도덕적 윤리적 의미로 쓰인다.]
장횡거는 태허를 기(氣)로 충만해 있는 본체로 보았다. 이에 비해 기를 도(道)를 통해서만 무한정의 운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 유한한 기[有限之氣, 유한지기]로 파악하려는 정자는 태허가 이(理)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 주희는 바로 이러한 관념을 계승하여 이를 태허실리(太虛實理)로서 이해했다. 정자와 주자의 ‘실리(實理)’란 이런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229)
이런 의미에서 이(理)는 역학적인 힘의 존재에 가까운 것이지, 풍우란(馮友蘭, 1894-1990)이 생각한 ‘추상적인 것(the abstract)’은 아니다. .. 이(理)는 오히려 니담의 지적대로 ‘내재적 힘(immanent)’을 함축하고 있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 이는 동과 정의 원리이다. 고요 조차도 운동이 가능하기 위한 힘의 한 상태이다. (229-230)
해학 이기의 이기론은 이상의 논의를 배경으로 형성 되었다. .. 17세기 중국의 왕부지(王夫之, 1619-1692)와 유종주(劉宗周, 1578-1645), 황종희(黃宗羲, 1610-1695) 등은 이를 기에 종속된 항구적인 법칙적 속성으로 보았다. .. 유종주는 이런 입장에서 주희를 “이가 기를 생산한다(理生氣, 이생기)”는 관점이라고 비판하고 기의 리라는 관점을 고수했다. (230)
해학 이기는 이(理)를 잠재적으로 발생의 추진력을 머금고 있는 무극(無極)의 본체로 보고, 이 본체와 미분 상태에 있던 기(氣)가 작용하여 그 본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成, 성) 것으로 이해한 듯 보인다. 이(理)는 생(生)의 원리이고, 기(氣)는 성(成)의 원리이다. (230) [이 설명으로 보면 해학 이기는 주자의 이론에 경도되어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해학 이기는 그의 「양기론(養氣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성은 내용이고 기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性者盛也 氣者器也(성자성야 기자기야)” (231)
“그 성(性)은 모두 물이며, 기(氣)는 모두 그릇이다. 성인의 그릇은 강과 바다이다. 도도하게 흐르며 드넓게 출렁거리며, 투명하게 사무쳐 맑고 깨끗한 경지[滔洋浩汪 瑩澈澄湜(도양호왕 영철징식)]이다. ...” (232)
“이(理)는 항상 기(氣)의 본체가 되고, 기(氣)는 항상 이(理)의 작용이 된다[理常爲氣之體 氣常爲理之用(이상위기지체 기상위이지용)]” (233)
「留還堂記(류환당기)」에서 그[이기]는 장자(莊子)의 정신에 의거하여 소유[留]와 자연에 되돌리는 무소유[還]를 대립시켜 환의 삶의 양식을 선한 것으로 제시한다. (243)
해학 이기는 환(還)의 덕을 류(留)의 삶을 극복하는 대안적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의지의 힘[지기(志氣)]으로 추구해야 한다. (235) [이 지기의 개념은 5절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소제목이다.]
그의 경제 사상은 당시 토지조사 임무를 지닌 탁지부(度支部) 경제관료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의 부탁을 받아 토지개혁안으로 제출한 「전제망언(田制妄言)」에 실려있다. .. 그가 제시한 공전제(公田制)는 김용섭(金容燮, 1931-)과 김도형(金度亨, 1953-)이 상세히 분석했다. (236)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현실적 대안은 세부적 대안인 ‘치표지술(治標之術)’과 근본적 워칙인 치본지술(治本之術)이다. (236)
그에 의하면 문장에도 기(氣)가 있는데, 한유(韓愈, 768-824년), 유종원(柳宗元, 773-819),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소식(蘇軾, 1037-1101) 등의 기상이 각각 다른 것과 같다. (239)
1908년 나철(羅喆, 1863-1916)과 함께 대종교 중광에 참여하기 전부터 해학 이기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을 저격하는 등 여러 활동을 그와 함께 했다. (240)
김윤식은 명성황후 폐위에 관연 되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종신 유배형에 처해져 1897년 제주도로 귀양 가게 된다. / 나철은 김윤식의 유배지로 동행하여 5년간 토론과 독서로 지내다가 1901년 제주도를 떠난다. (240)
그는 1904년 러일 전쟁까지 입산수도를 하는 야인으로서 지내다가, 1905년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회의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해학 이기 등 동지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일제의 야욕을 호소하고 노력했다. (240)
같은 해(1905) 일본을 통해9 미국으로 가려고 일본에 밀항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미국행은 좌절되었다. / 이후 1908년까지 4차에 걸친 도일(度日)을 통해 외교적 노력을 이어갔다. (241)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루어지자 1906년 12월 을사오적을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귀국하여 다음 해 2월 해학 이기와 함께 ‘자신회(自新會)’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한다. 3월 6명의 동지들과 을사오적을 저격하였으나(45세) 총기 사용 미숙 등의 이유로 실패하고 체포되고 만다. 나철과 해학 이기는 정부 전복죄로 10년 형에 처해졌다가 고종의 특사로 1907년 말에 석방된다. (241)
나철은 해학 이기와 함께 저격 직전에 일종의 처형 허가장인 「참간장(斬奸狀)」을 작성한다. 여기서 그는 ‘2천만 중생의 생사’에 대한 책임과 ‘자유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국내의 병폐를 일소하여 자손이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의를 선언한다. (241)
나철은 이제까지 외교적 방법과 개별적 폭력의 방법으로 저항의지를 표출했다. .. 유배에서 풀려난 후 1908년 그는 다시 일본에 가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생애와 사상의 일대 전환기를 가져올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해 12월 69세의 두일백(杜一白)이 나철 앞에 나타나 자기는 백봉신사(白峯神師)에게 사죄한다고 하면서 단군교 포명서를 놓고 갔다. .. 1908년 나철을 중심으로 대종교[처음에는 단군교라 했음] 중광이 이루어진다. (242-243)
1916년 8월 15일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단군 사당 삼성전(三聖殿)에서 스스로 호흡을 끊고 자결했다. 그가 남긴 유서들 가운데 「교도들에게 삼가 알리는 글(恭告敎徒文공고교도문)」은 그가 보는 세상의 비참상과 구원에 대한 책임의식을 잘 보여준다. (243)
“아! 슬프다. 우리 동포가 누군들 천신단제(天神檀帝, 하나님, 위대한 영혼)가 낳아 키운 영적 존재가 아니랴마는 모두가 본원을 잃어버리고 등져[忘本背源망본배원], 그릇된 길로 치달리고, 진리에 어둡고 허위에 빠져[迷眞沈妄미진침망], 재앙의 바다에 침몰하였으니, 거의 불에 몸을 던지는 약한 나비와 같고, 우물에 떨어지는 어린아이와 같다. 하물며 다시 귀신이 울고 도깨비가 날뛰게 됨에 있어서랴. 천지의 정수의 빛[精光정광]이 어두워지니, 뱀과 돼지들이 잡아먹고 달려들며, 인류의 피와 살이 홍수처럼 흐르고, 산하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모래먼지는 비바람에 흩날리고, 해는 지고 길은 막혔는데 인간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아! 슬프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 / 나는 지금 천하 형제 자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한올의 생명을 결단(決斷)하여 위로는 하느님께 사죄하고 아래로는 동포에 사죄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대종교의 일은 오직 형제자매 분들이 어떻게든 노력하여 이 세상을 복되게 하기 바랍니다. 진중(珍重) 진중(珍重) 늘 건강하기고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243-244)
본원은 한얼대도이다. .. 진리는 ‘생명의 빛[精光정광]’이다. 진정한 빛의 회복[光復(광복)]은 조국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본원의 해방이다. 이 두가지 해방의 결합이, 한국의 역사 연원이 하늘을 열어[開天(개천)] 시작했듯이 이 새로운 개천의 시작인 것이다. 동학적 개념으로 그것은 무극대도(無極大道)가 다시 돌아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완성이다. / 그러면 한얼대도(大道)와 “광대한 하나의 무[一無(일무)]의 의미는 무엇인가? (244)
(5:16, 52TMB)
# 5. 성리(性理)와 의지[志氣] 인명록 ****
1622 유형원(柳馨遠, 1622-1673) 호는 반계(磻溪), 한성 태생, 조선 중기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북인 당원이던 아버지 유흠이 인조반정으로 장살된 이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에 중농학파인 이하진, 이서우, 오상렴, 이익 등에게로 이어진다. 《반계수록》《반계집》
1762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문신이자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835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일) 호는 운양(雲養),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문인, 학자. 유대치의 문하생.
1848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19) 조선말 실학자로 애국개혁사상을 바탕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선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유환당기(留還堂記)
양백규(梁伯圭, s.d.) 해학 이기의 동학도(同學徒). / 서울의 이건창(李建昌), 장지연(張志淵), 호남동향의 황현, 왕색금(王索琴), 왕사찬(王師瓚), 박환래(朴桓來), 박극유(朴克柔), 이정직, 최보열(崔輔烈), 정인기(鄭寅驥), 양백규(梁伯圭), 전남 나주의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영남의 최현달(崔鉉達) 등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뜻을 같이 한 동학(同學)들이었다.
1848 어윤중(魚允中 1848년(헌종14)-1896년(고종33)) 호 일재(一齋). 충북 보은 출신, 개항기 조사시찰단 조사, 동래암행어사, 탁지부대신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동래어사서계(東萊御史書啓)』·『수문록(隨聞錄)』·『서정기(西征記)』·『간독요초(簡牘要抄)』·『종정연표(從政年表)』
1863 나철(羅喆, 1863년 12월 2일 ~ 1916년 음력 8월 15일) 홍암(弘巖)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 대종교 창시자.
1868 김교헌(金敎獻, 개명(改名)은 김헌(金獻), 1868-1923) 대종교(大倧敎)의 제2대 교주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백유(伯猷), 호(號)는 무원(茂園)이다.
1881 윤세복(尹世復, 본명: 윤세린, 尹世麟, 1881-1960) 호 단애(檀崖), 경남 밀양출신,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대종교의 제3세 도사교이며, 초대 총전교(總典敎)이다. 교단에서의 호칭은 단애종사(檀崖宗師).
1931 김용섭(金容燮, 1931-) 연세대 교수, 한국사.『조선후기농업사연구2』(70년),『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하』(75년),『조선후기농학사연구』(88년)『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92년)
1931 박성수(1931-2016)(85세) 전북 무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삼균학회 회장. <[서양사 석사], 1959 고려대, 석사> 『부패의 역사』(모시는사람들 2009), 『조선시대: 왕과 신하』(삼영사 2009),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선도문화연구원, 2006), 『새로운 역사학 -역사는 진실인가』 (삼영사 2006) , 『저상일월-117년에 걸친 한국근대생활사』(개정판) (민속원 2003), 『New History of Korea』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
1953 김도형(金度亨, 1953-) 연세대 사학과, <대한제국말기의 국권회복운동과 그 사상, 1989, 연세대, 김용섭> .
*중국
552 공자(孔子, 전552-전479) 성인(聖人), 유가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전469–전399)]
179 회남왕 유안(淮南王 劉安, 전179-전122) 중국 전한의 학자로, 황족, 제후왕이다. 음모 혐의를 받고 자살했다. 저서로는《회남자淮南子》가 있다.
O
263 배위(裵頠, 263-300) 위진 시대, 숭유(崇儒)론자. [중,위키. 없음] .
768 한유(韓愈, 768-824년)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중국 당대(唐代) 문장가, 정치가, 사상가.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773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당나라 문장가, 시인. 그는 봉건사회 구조를 의문시한 합리주의자였다. 〈봉건론(封建論)〉이 있다.
1007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중국 송나라 정치가, 시인, 문학자, 역사학자. 자는 영숙(永叔)ㆍ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1020 횡거(橫渠) 장재(張載, 1020-1077) 중국 송대 사상가.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자후(子厚). 봉상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라 횡거 선생(橫渠先生)이라고 호칭된다.
1033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 자는 정숙(正叔)이고,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불렀다. 북송北宋시대의 관리이자 이학가(理學家),
1037 소식(蘇軾, 1037-1101) 북송 시대의 시인, 문장가, 학자, 정치가.. 자(字)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흔히 소동파(蘇東坡)라 부른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1130 회암(晦庵) 주희(朱熹, 朱子, 1130-1200).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이 회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으로 이어진다.]
1578 유종주(劉宗周, 1578-1645) 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자는 기동(起東). 명나라가 망할 때 23일 단식한 끝에 순사하였으며, 양명학을 하였다. [양명 우파적 경향] 저서에 ≪도통록(道統錄)≫, ≪양명전신록(陽明傳信錄)≫ 따위가 있다. [[심제(心齋) 왕간(王艮, 1483-1541) 명나라 양명학 좌파.]]
1610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중국 명말 청초의 학자, 사상가. 저장성 위야오 현 출신이며,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이주(梨州)이다. 《宋元学案》
1619 선산(船山)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중국 명말(明末)청초의 사상가, 학자. 자(字)는 이농(而農), 호(號)는 강재(薑齋). 만년(晩年)에 형양(衡陽)의 석선산(石船山)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으므로 선산선생이란 불린다. 그는 주자학의 선험적인 이(理)의 철학을 비판하고, 오히려 장횡거(張橫渠)의 기(氣) 철학을 계승하였다.
1894 펑유란(馮友蘭, 1894-1990)은 현대 중국의 철학자이다. 호는 지생(芝生), 허난 성(河南省) 탕허 현(唐河縣) 사람이다. 1919년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 베르그송, 듀이, 러셀에 경도(傾倒)하면서 중국문화의 독자성을 추구하였다.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1948.
1900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1900-1995)[李约瑟, Lǐ Yuēsè 리약슬]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 박물학, 과학사회학 학자. 중국에서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1954–2008) / Noel 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1900–1995) 영국 생화학자, 역사가, 중국학자.
(7:30, 52T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