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11강 12강
벩송: 원인관념(L’idée de cause),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0-1901)
-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벩송 강의 수강자. 그의 필기 노트.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부록 pp.213-221(P. 256).
11과에서는 플로티노스의 생성관점에 대해 변죽만 울린다. 왜일까? 9과, 10과에서 고대철학에서 생성(형성)에 대해 메모크리코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럼에도 제논 같은 이가 등장하여 불변의 존재, 전체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고대 원자론과 달리 근대 원자론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아니라 관계들만이 있기에 우주가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인다고 해도 관계의 법칙에 의해 현상[현실 사태들]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부동의 존재와 움직이는 아페이론(질료) 사이의 이항적 대립에서 여전히 부동이 있어야 그리고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상식에 머문다. 이 상식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토대로 한다.
고대의 상식은 부동과 부동 사이에 움직임이 있는지, 부동에서 운동으로 그리고 부동인지에 대한 구별을 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식은 부동이 먼저, 또는 원인이라는 것을 토대로해서, 세 철학자들이 모두, 운동을 설명하려 하였다. 생성과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외적 원인이든 내적 원인이든 운동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부동(정지)에서 부족한 점을 찾기보다, 운동의 설명에서 부족한점 결점을 찾는 쪽이 상식에 부합한다. 결국 0과 10사이에 과정은 부정적이거나 모자라는 것이고 완전(10)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0에 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하지 않는 순수가능성으로 질료를 설정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다양한 형태들의 만든다고 하면 아데아들은 0(질료)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 되니 부당하다고 여기고, 완전(10) 즉 사유의 사유(형상들의 형상)이 원인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며, 크리스트교인이 될 것이다. 이에 비해 고대 스토아주의에서 우주에는 형상들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니, 원인은 질료가 되어야 하며, 현대철학에서 질료인 자연이 자발성을 갖는 쪽으로 사유하게 될 것이다. 자연의 자발성에는 사유의 사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유일신 등이 선전제로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의 관념은 허구 또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아편이라고 한 것은 정치경제학에서 탐모치에 빠진 주구들을 비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인성은 두 갈래이다. 질료를 순수 자발성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형상의 파괴의 원리 즉 부정성으로 볼 것인가.
이렇게 자발성의 사유로서 생성, 발전, 진화의 길을 가게 되는 플로티노스의 사유를 언급만 하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12과로 넘어갔다. 원인, 고대철학자들의 상식에서 원인과 다른 원인이 있다는 암시로 끝난다. 그 원인은 여기서는 자유를 암시한다. (55SLB)
12과에서 상식을 넘어서는 것은 우주의 요소들로서 또는 질료(흐름)으로서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인간의 지성(오성)으로는 부담이 크다. 그 안에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상대성의 길을 택하게 되다. 왜냐하면 요소들 자체가 운동성을 가지지 않고, 또는 존재도 전체로서는 운동을 가지지 않고 있는데, 현상에서 부분들의 변화와 과정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식을 넘어 양식은 부동성도 존재도 뒤로 두고, 상대적 움직임의 관계들을 논하면서 대상을 점 또는 수학적 기호화로 바꾸어 설명하기에 이른다. 양식에서는 세상의 사물들은 현존에서 변화고 운동과정을 설명할 수 있으며, 그 바탕으로서 우주 전체는 불변이고 존재로서 하나의 통일성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여전히 상식처럼 인식의 양식이 주어져 있고, 그리고 세계는 하나의 존재로서 통일성이 먼저 있고 그 속에 변화와 운동의 다수성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선전제는 자연의 제일성과 이것을 파악할 지성(이성)이 먼저 있다는 가정을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이 완전 공리이듯이 인정하고 있는 시대를 250여년을 지나서야 열역학과 전자기학의 발달로, 고등양식이 도래하면서, 형이상학에 대해 형이심(深)학의 견해가 도래하면서 움직임이 먼저이며 운동이 변화와 생성, 형성과 발전의 원인이라 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두 전제의 설정 가능에는 무한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 벩송은 흥미롭게도 무한소급에서 두 개의 선전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하나는 길이에서 다른 하나는 추론에서 이다. 이 두 가지는 근세철학의 이원성, 길이실체와 사유실체를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다른 무한이 있을까? 고대의 상식적 논의에서는 두 종류 이상의 무한을 사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근세에서는 무한이라는 것이 양도 성질도 아니고 관계로 바꾸어 생각하게 되면서, 관계의 무한에는 부정성들(p, q, x, y, z)이 무한 속에서도 부정성으로서 지위와 양이 있을까? 양식(bon sens)을 통한 적분은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상식(sens commun)을 기반으로 하는 표상의 세계에서는 무한을 δx,δy,δz 등에서 무한소처럼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톰이 주어지듯이 형상이 주어진다고 상식이 인정하면서 철학이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세에서 무한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의 무한과도 전혀 다른 의미의 계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생명은 다른 무한계열이며 영혼은 또다른 무한 계열이다. 물론 이 후자의 계열은 전자의 두 무한 실체(또는 속성)처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과 질에 따는 규정작업(길이와 추론에 따른)과 달리 관계들로서 운동과 시간의 파악에서 이상하게도 생명과 영혼의 문제가 제대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분할에서 오는 미분의 차이화와 계열의 생성에서 나오는 세분화를 구별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55SLC)
****
#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11강(213-215), 12강(215-221)
* 11강(213-215) - [원인성의 기원: 질료의 두 측면(순수가능성과 붕괴의 원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성질적인 생성에서 출발한다(자연학 1권). 그는 또한 생각하기를, 만일 사람들이 감각적 성질들을 분리하거나 해체한다면, 사람들은 난점들을 회피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런 해체가 이루어지면 성질은 일반적인 것으로 향해 방향을 잡게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운동을 완성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런 성질에 그는 단순한 긴장(une tension)을 – 아무것도 긴장을 말리지 않으면 류가 되고 이데아가 될 것이라 긴장 - 첨가한다. 그러나 긴장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더 멀리가지 않아야만 한다. 이런 긴장은 순수 관념에 대한 일종의 축소이며 긍정적인 것이라기보다 부정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면] 성질이라는 것을 마치 사물들 속에 있는 것처럼 표상해야 한다. 그러나 성질들은 불완전한 어떤 것이고, 원인성에 대한 변화의 원리라는 것은 이런 불완전이다. 감각적 세계와 과학의 세계 사이에, 틈(un écart)이 있다. 이 틈은 힘을 측정하는데, 이 힘을 가지고 사물들은 근거와 과학이 가르쳐주는 것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일종의 축소 또는 일종의 압축이다. 과학은 변화, 행동의 원리, 원인성의 원리이다.
예를 들어 원의 과학적 관념을 다루어보자 그리고 불완전한 하고 물질적 원을 다루어보자. 물질적 원은 기하학적 원의 축소이다. 그 물질적 원은 자기 본질을 보다 완전하게 실하려는 경향이[의도가] 있다. 이로부터 변화와 원인성이 나온다. 이제 원인성에 관한 관점들이 있는데, 원인의 네 가지 전형이 있다. (213-214)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기에 머문다면, 이론에 반대하여 커다란 난점들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물들이 작용들과 상호작용들을, 즉 사람들이 사물 속에서 주목하는 불안을, 사물들이 복종하고 또는 복종하는 경향이 있는 질서를, 설명하는가? 어떻게 물질과 형상을 설명하는가? (214) [물질에 불안, 형상에 질서... -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체에서 불안과 고통을, 영혼에서 질서와 안녕을 찾았던 것 같다.]
원인성의 문제는 사람들이 존재들 또는 사물들 속에서 발견하는 규정성들과 성질들의 출현의 문제이다.실재성의 모든 규정작용들을 하나하나 잘라내면서(retrancher 해결하면서) 우리는 물질이라는 순수 가능성에 이른다.모든 사물들에서는, 공통기반인 동일한 질료[물질]가 있다. 그것은 무(le néant)가 아니고, 오히려 순수 비결정이며, 성질들에 대한 일종의 기대(attente, 예상)이다. [이런 사유는 플라톤일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어 논리적으로 추상화의 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얻은 첫째 항목이다. 이런 가능성으로부터 실재성이 어떻게 태어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플라톤의 모든 형상들을 다루는 것이었고, 형상들을 하나의 강도를 향해 수렴하는 것이었다. 그 강도성[내포성]은, 가지적인 형상들의 거대한 다양성을 포함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강도성은], 사유의 사유이며, 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형상들 중의 형상”이며, 이는 그의 불가분의 통일성 속에 모든 가지적 형상들(노에시스 노에세오스, νοήσις νοήσεως)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히테(Fichte, 1762-1814)의 자아가 아니며, 그것은 거의 반대이다[비아(非我)].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사유의 단순한 작동(l’acte)이 아니라, 순수 사유이다. 그 신은 형상들을 짐지고 있고, 그 신은 의식의 형식[형상]들 하에서 표상되지 않아야 한다.이 의식의 형상은 최소한의 관념이며 관념의 축소이다(플로티노스). 노에시스 노에세오스(νοήσις νοήσεως)는, 자기 자체에게 그리고 자기로부터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에게, 소개된 형상 전체이며, 불가분의 점으로 집중화된 실재적인 것의 충만이다.
물질과 신을 앞에 두어 보세요. 당신은 원인성을 그리고 생성의 개발(l’exploitation)을 갖는다.그러한 것이 어떻게? 과정을 표현하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물질[질료]를, 순수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것과, 즉 형상을 열망하고 형상으로 향하고, 사랑에 의해 신에게 매료된 것과 같다. 그러한 것이 제1 개념작업일 것이다.
2) 다른 관점으로 물질은 나쁜 원리, 즉 붕괴의 원리일 것이고, 실재성의 무한정한 다수성을 일으키려는(causerait) 잘못 접촉일 것이다. (214)
이 두 국면들 중에 이것도 저것도 설명이 아니다. 물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물질은 무차별적이다. 셋째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제일 운동자(un premier moteur)의 필연성에 의해서 그것을 신의 현존의 증명에서 발견할 것이다. (215)
이런 증명이 어떤 것인가? 증명은 세계 속에서 운동의 영속성 위에 근거하고 있다. 운동의 영속성은 운동이 본질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요청한다 그 본질 속에는 영속성이 포함되어 있고, 동등한 형식[형태]으로 압축되어 있으나, 비시간적이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속에 본질적인 것이 있고 내밀한 것이 있다.
그러나 왜, 우리가 한편으로 신을, 다른 한편으로 물질 즉 아무것도 아닌 것(un rien)을 갖는 것에 대해여, 왜 실재성의 형상들의 다양성이 결과하는가? 만일 우리가 10과 0가지고 얻는다면, 우리는 하나의 간격을 제시하고, 따라서 0과 10 사이의 공간의 가능한 분할을 제시한다. 신과 물질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형상들의 다양성을 이해하게 해 준다. (215) [55SLB]
*
205 플로티누스(Plotin, Πλωτῖνος, Plotinus, 205-270)(65살) 이집트에서 태어난 그리스철학자. 그의 철학은 아랍-이슬람 사상의 근원을 이루고 서양 중세 철학에도 깊은 영감을 불어넣었다.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관념론 철학자
**
* 12강(215-221)
[근대과학에서 원인성: 관계, 갈릴레이.]
우리는 어떻게 근대인들이 하나의 관념과 다른 관념을 발전시키면서 또한 그것들을 정확히 하면서 이것들을 다시 다루었는지를 찾아갈 것이다. [하나는] 기계적 원인성이고 [다른 하나는] 관념의 원인성이다.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용어표기법을 따라 갈 것이다. 이 두 표기법들은 극단에까지 밀고감에 따라 이것들은 순환과정에 의해서[순환논법상] 서로 더욱 가까이 결합될 것 같다. (215)
고대인들에게서 운동은 일종의 추문(scandale 난제)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태들에서 상태들로 이전들들 보다 더 안정된 상태들에 더 많이 전념하였다. 근대인들에게서 중요한 것은 운동의 형식이며,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성 속에서 실재성의 전형을 본다. 그는 자연적 운동과 강요된 운동을 구별한다. 과학에 중요한 것, 그것은 순서, 사물들의 자리, 안정이다. 이 단어들은, 이 단어들이 도달한 안정된 유지[안정된 지위]에 의해서 그에게 관심이었다.
데모크리토스와 원자들론자들에게서 운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원자들의 운동이 아니라, 원자들의 다양한 조합이다. 또한 이것들을 다루는 것은 정태적인 것(le statique)이다. (215-216) [정역학(la statique)이다.]
만일 우리가 엘레아학파의 관념론에로, 그리고 이 철학자들의 미묘한 정신에 의해 일으킨 난점들에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는 엘레아학자들에게서 부동성이 모든 것보다 우월하고, 운동의 토대에 속한다는 것을 본다. 소위 말하는 정신은 운동의 외부 국면에, 움직이지 않는 정신의 공간적 측면에 매여 있으며, [따라서] 정신의 공간적 측면은 운동의 고유성이 아니다. 이로부터 변화도 운동도 부정하는 엘레아학파 제논의 유명한 논증이 나온다. 나는 화살의 예처럼, 모순을 함축하는 것 같다. 만일 사람들이 오로지 공간에만 매였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이 논증들은 진실이다. 공간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운동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은 물질적으로 불가분적이다. 운동의 본질, 그것은 도약(le saut)이며, 경향성이다. 마치 운동 밑에 깔려있는 공간을 내가 떼어내듯이, 나는 이 운동을 [분절로] 떼어내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엘레아학자들은 분명하게 말해서 운동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운동에 유기적인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착각은 운동에 관해서 마치 운동이 부동적인 어떤 것과 일치 하는 것처럼 추론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운동을 제거한다.
이런 착각의 기원은 정당한 관념 속에 있다. 우리의 사유는 고정되어 있고 불변하는 것만을 분명하게 생각한다. 과학은 일반적인 것만을 전념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것만이 안정되고 부동적이다(아리스토텔레스). 이것은 깊이 있는 진실이다. 단지 고대인들은, 이로부터 모든 것이 부동적인 측면에서만 가치있다는 결론을 내면서, 그것을 이용했다. 근대인들은, 과학의 목적은 부동성이지만, 근대인들은 그와 다른 해석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형이상학, 마지막에서ad finem), 수학은 가지적 형상들에서만 적용되고, 실재적인 것에 적용되지 않는다. 즉 우리들의 개념작용들과는 매우 다르다.그럼에도, 고대의 말기에, 중세에도 또한 르네상스에서도 – 비에트(Viète, 1540-1603)에서도 – 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경향성이 그려진다. 이 운동은 대수학(l’agèbre)의 구성에 이른다. 이와 동시에 수학들의 진실한 성격이 구별된다. 이 특성은 관계들을 제시하는 것이고 크기의 변수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수학(la mathématique)은 점점더 함수[기능]들의 과학이 된다. 또한 법칙은 정확하게 되고, 변화되고 따라서 과학의 대상이 된다. 안다는 것, 그것은 운동자를 불변자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운동을 운동의 전형에게, 운동의 이상적 형식[이데아]에게, 연관시키지 못하였다. 운동을 다른 운동에게 연관시키고, 그것들의 변수들과 그것들의 종속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기원은 갈릴레이(Galilei, 1564-1642) 속에 있다. 운동을 그 속에서부터(du dedans) 연구해야 하고, 운동을 살아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운동의 행실, 운동의 의도, 운동의 영혼을 규정해야한다. 갈릴레이의 생각이 그러하다. 그는 운동의 도약(l’élan, impeto), 운동의 내부 변화이다.어떻게 그는 물체 낙하의 개념작업에 이르렀는가? 속도들을 고려함으로써, 예를 들어 속도들의 변수들을 법칙을 검토하면서 이르렀다. 그 수학의 진보는 점점 더 내부를, 즉 운동의 의향[내포]를 주목하는 데 있었다. 또한 갈릴레이의 학설은 과학의 출발점이었고 근대인들의 철학의 출발점이었다. (216-217)
우리는 어떻게 갈릴레이가 물리학 법칙의 정식에 도달했었는지를 제시했고, 어떻게 이런 법칙이 물리학자들에게 또 뒤따르는 과학자들에게 모델로 사용되었는지를 제시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이 고대과학과 근대과학을 구별하는 지를 제시했다.
반면에 고대인들에게서 과학은 가지적인 것들에 근거하고 간접적으로만 감각적인 것 실재적인 것에 도달한다. 반대로 근대 과학은 소위 말해서 모든 실재성을 감싸 안는다.
고대 과학은 변화를 무시하고 또 한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이행을 무시하였는데 비해, 근대인들의 과학은 무엇보다 변화와 운동에 근거한다.
만일 과학이 직접적으로 운동에 도달하기를 애쓴다면, 마치 과학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은 적어도 불변하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한다면, 과학은 이런 운동성 속에서 비운동성을 근거로 해서 관계들(des relations)을 찾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움직이는 항들 사이에 항상적(상수적) 관계들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런 과학은, 만일 움직이는 사물들 사이에 확립된 관계들이 수학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면, 과학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 과학이 연구하는 변수[변이]들은 크기이며, 크기로서 표현될 수 있다.이로부터 근대 과학이 나온다. 근대과학은:
1) 수학적 연관들(les rapports)을 그 자체로 연구한다. 즉 변하는 크기들 사이의 이 불변하는 관계들, 즉 함수(les fonctions)을 다룬다. 그리고,
2) 실재성에 적용할 수 있는 이 함수들의 관계들이 어떤 것인지를 규정하고자 애쓴다. 또는 실재적인 것 속에서 불안정된 크기들 사이에서 안정된 관계들을 찾는다. 안정된 관계들을 근거로 해서 수학적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실재적인 것의 번역을 한다. 그 번역을 근거로 해서 모든 지성적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갈릴레이는 사물 속으로 이런 관념[생각]을 – 고대인들이 지성적 세계에서 비행하던 생각을- 내려오게 했다. (217-218)
우리는 이제 과학의 개념작업에서 함축되어 잇는 철학적 개념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야 한다. 갈릴레이에 의해, 그의 물리학에 의해, 발견된 운동의 법칙들은, 법칙들에 내속해 있는 철학을 감추고 있다.
사람들이 다음처럼 정식화할 수 있는 일반 법칙이 있다. 즉 과념들의 세계에서 안정은 불안정으로 자리 바꾸고, 정확한 것은 부정확한 것으로 이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은 항상 어떤 부정확성을 함축하고 있다.반대로 갈릴레이와 더불어 나는 그기의 관점에서 변화의 한 순서를 변화의 다른 순서와 비교한다. 거기에 가능한 해결이 있다. 게다가, 과학이 어떤 특별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할지라도, 과학은 특히 실천적이고 조작적[실험적] 가치를 갖는다. 그 과학은 고대과학보다 더욱 유용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제한된 정확성과 약간 우유부단을 허용한다.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법칙은, 만일 그것[법칙]이 진실이라면, 예측불가에게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일단 갈릴레이에 의해 열려진 길에 들어서게 되면, 사람들은 끝까지 가야만 했다. 진실한 기원적 관념(Une idée originelle vraie)은, 관념 그 자체를 제한하는 권능을 관념 자체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다. 기원적 관념은 반대 관념에 의해서만 제할 될 수 있다. 그 관념은 그 자체의 비판을 포함하지 못한다. 한 관념을 비판하기 위하여정신은 다른 관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정신(l’esprit)이 비판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나는 순수하게 비판적 철학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 이유의 비판이 다른 형이상학에 비추어서 어떤 형이상학의 비판이라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가능한 “비판을 위한 비판”은 없다. [아포칼립스의 최후의 심판은 허구이며 착각이다. 인류가 살아가는 한 최후의 심판은 아직 없다.]
이렇게 설명되면, 갈릴레이에 의해 열려진 길에서, 사람들은 매우 멀리 가서 끝가지 갔다는 것이다. 갈릴레이에서 하나의 원문이 있고, 그 원문에서 그는 우주 속에 전체는 척도로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다른 구절에서 갈릴레이는 말하기를, 자연은 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언어이며,수학적 언어이라 한다.우리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것(수학)이 될 수학이 싹트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를 것인가? 우선 자연 세계 안에서 보편적 필연성의 관념에 이른다. 이 관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의 관념들 사이에서 필연적인 관계들을, 관계들의 내밀한 구조를 유지하면서, 확립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마치 필연성에 근거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218-219)
단지 과학의 대상과 실재성 사이에 틈이 있다. 플라톤은 실재적 사물들을 마치 그런 지성적인 것들이 재생산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과학적 세계와 실재성 사이에 틈이 있고, 그 틈은 “우발성(l’accident)”을 측정한다. 인간적 사실 속에서처럼 자연속에서 우연을, 즉 임의적 자유를 도입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에 속하는 아프로디지에우스(Alexandre d’Aphrodise, 150경-250경)가 이용한 것은 이 틈이다. 목적인들속에서처럼 효과인들속에서 법칙에 주어진 위반들(des entorses, 타격들)이 있다. (219)
반대로 근대인들을 있는 것과 과학이 연구하는 것 사이에 틈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필연성의 관념은 과학의 개념 작업 속에서 필수불가결하다. 이런 생각[관념]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이런 생각은 공간 속에서 또 시간 속에서 모든 현상들을 또한 모든 변화들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공간은 무한히 다수적인 어떤 것이 어떤 것이고, 이것의 모든 부분들은 서로 서로 외적이다. 그럼에도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의 연결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서 계기들(les moments 순간들)은 서로 서로 외재화되어 있다. 어떻게 연결이 확립되는가? 그것은, 만일 내가 한정되지 않는 공간과 한정되지 않은 시간을 마치 하나(일자)이자 불가분인 어떤 것의 무한정한 전개(풀림)인 것으로서 고려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 일자의 불가분적 통일성[단위]은 무한정한 전개를 표현한다. 손목시계에서 모든 부속 조각들이 서로 유지된다. 내가 하나의 연결을 가정해야만 하는데, 그 연결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유일한 항일 뿐, 즉 발명가의 정신일 뿐이다.마찬가지로 한다. 자연에서도 통일성이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통일성, 이것을 사람들은 무한(l’infini)이라고 부른다. 적분적 과학의 관념은 우리를 보편적 적분 필연성의 관념으로 인도한다. 이 적분적 필연성이 무한의 관념이다. 이 무한은 무엇일 것이며,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표상하는가?
우리는 무한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전체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에[전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무한은 한정된 모든 항들의 필연성을 기초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데, 나는 그 무한에게 필연성을 거부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보편적 필연을 중단하게 할 우연적인 어떤 것에 속하는가? 정신은 거기서 체념할 수 없고, 적어도 근대과학의 초기에 거기에서 체념할 수 없었다. 정신은 칸트(Kant, 1724-1804)와 더불어 거기에 늦게야 왔다: 존재론적 논증의 비판: 무한은 자체로서 필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그러나 초기에 살마들은 무한을 마치 필연처럼 생각한다. 어떻게 무한이 필연적일 수 있을까?과학에서 나오지 않고서, 어떻게 자기 자체에 자족적인 어떤 것이 표상되는가? (219-220)
여기서, 단어, 즉 현존(existence)의 두 의미 사이에서 행해야할 구별이 있다. 사람들은 자연적[물리적] 현존을 또는 수학적현존을 표상할 수 있다. 자연적 현존은 가능성으로부터 구별된다. 그것은 거기에 덧붙여지는 어떤 것이 있다.수학적 현존은 가능성과 혼동되어 있다.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사람들은 현존을 제시한다.
무한을 위해서, 만일 내가 자연적 현존을 표상한다면, 무한은 우연적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수학적 현존을 현존의 전형으로서 간주한다면, 그러면, 무한이 가능하다는 그런 점에서 무한이 실재적인 것이라는 방식대로 나는 이런 무한을 정의할 수 없는가? 나는 이런 무한이 가능적인 것 전체 합을 포함하고 또 ‘있다’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만일 내가 그것[무한]을 가능적인 것 전체 합으로서 정의한다면, 그것은 그것[무한]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이런 무한, 이렇게 생각된 무한은 무엇을 포함할(comprendrea) 것인가? 길이 있는 사물의 무한성, 또한 사유의 무한성 그리고 다른 무한성을 포함할 것인가? 따라서 적어도 사물들의 두 질서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멈 출 권리가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그 중에서 적어도 둘 만을 인식한다. 그러면, 여기, 근본적 필연성의 관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나는 여기에 도달한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너무 멀리 갈 수 없다. 내가 수많은 무한자들을 제기하는 대로 오게 되었다. 즉 이 무한자들이 스스로 제한되게 것인가? 그러면 이런 무한들은 둘 사이에 가능한 접촉 없이 있다는 것을, 또한 서로서로 잠식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한 것은 왜냐하면 이것들은 동일한 것을 다른 [언어의] 번역들로 표현하기 때문이다.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마치 이들 사이에 서로 상응하면서 또한 서로 제한되지 않는 것처럼, 너비의 무한과 사고의 무한을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무한을 가질 것이고 또한 그 언어 속에서 중심적 무한을 각각 표현할 수 있는 무한들을 가질 것이다. (220)
이러한 것이 사람들이 도달한 결론이다. 사람들은 근대과학에 내속하는(inhérent) 관념을 끝까지 밀고 나갈 때 그 결론에 도달한다. 당신들은 스피노자주의의 일반적 특성들은 재인식했다.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원인성의 개념작업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갈릴레이(Galilei, 1564-1642)의 관념과 유비적이며, 그리고 이런 관념을 극단에 까지 밀고 나가서, 과학의 근대 개념작업의 진수를 추출하였다. (220-221)
(11:06, 55SLC)
*
490 제논(Zénon, Ζήνων ὁ Ἐλεάτης 전 490경-전430) 엘레아 출신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제자. 소크라테스보다 약 20살 더 많다.
O
150 아프로디지에우스(Alexandre d’Aphrodise, Ἀλέξανδρος ὁ Ἀφροδισιεύς, 150경-250경), 카이로 출신, 소요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Du destin (Περὶ εἱμαρμένης, De fato)(μοίρα에서 나왔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오리게네스나 클레멘스보다 크리스트교의 논리를 구축하는데 아프로디지에우스의 역할이 더 컸을 것이다.]
1540 비에뜨(François Viète, en latin Franciscus Vieta, 1540-1603) 프랑스 수학자.
1564 갈릴레오(Galileo Galilei, dit Galilée 1564-1642) 이탈리아 물리학자, 1590년 그가 물체의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을 반박하는 책을 De motu, 1590 발간하다.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1598 카발리에리(Bonaventura Francesco Cavalieri, 1598-1647) 이탈리아의 수학자, 갈릴레이 제자. 수도사가 된 뒤 수학을 공부하였고 1629년 볼로냐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계 유대인, 네델란드 철학자. 오성개선론(1661), 윤리학(1677)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11:26, 55SLC)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13, 14강
벩송: 원인관념(L’idée de cause),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0-1901)
-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벩송 강의 수강자. 그의 필기 노트.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부록 pp.221-228(P. 256).
13강은 고대에서 어떻게 정립되었던지 간에 동일율이 성립한다고 한다. 그 동일율의 필연적 전개를 스피노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 동일율의 발생론적 과정은 고대의 추론적 과정과 반대방향이며, 이런 고대의 반대방향인 스피노자의 자연의 자기 원인에서 발생적 과정이 알렉산드리아의 플로티노스(여기서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의 것이라는 점이다.
14강. 13강에서 데카르트에서는 원인을 다룰 것이 없었다. 두 실체의 각각이 따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사유상 실재상 즉 권리상 사실상 불합리하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하나로 통합하는 인식론이 필요한데 칸트의 선천적 종합판단이다. 원인은 우리 속에 인식능력의 틀로 있다.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철학적 사유에서 계보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인식론에서 현존론을 해석하려고 했고, 그 결과 인식론의 비판으로 칸트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자연의 자기발생론에서 인식도 발생도 같은 계열인데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칸트는 원인상으로 보아 스피노자의 반대 방향의 인식일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원인은 하나이며 둘 또는 여럿을 발생시키고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이라, 자연 권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인식은 원인을 찾으러 올라갔다가, 그 원인의 무한성에 놀라서 그저 인정하고 거꾸로 내려오면서 그 원인성에 맞는 세계라는 틀을 구성 또는 구축하려고 한다. 칸트는 그 구성의 방식을 범주라는 틀을 만들었다. 칸트는 바깥의 원인과 결과의 한계를 믿을 수 없어서, 원인성을 우주보다 작은 자아의 머리속으로 구겨 넣으려 한다. 그 구겨 넣어진 틀이 12범주이고, 신칸트주의는 이 틀들이 머릿속에 있을 것이라고하여 통일과학을 성립시키려 한다. 벩송은 우주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속에 머리(두뇌)가 있고, 머리를 통한 인식에서 시간 지속으로 보아 인식의 원인은 과거의 기억(유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기억과 유전의 학문은 20세기의 실증과학이다.
신칸트의 네오스콜라주의는 유전의 내용이 두뇌 속에 이미 주어져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두뇌의 현존은 기억의 총체로서 축적과 압축이지만, 과거의 흐름은 과거의 긴 기간 내내 흐름 속에 있다. 현존은 지금 여기의 마지막 현상이 있다. 기억은 흐름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이며, 흐름의 지속과 실재성은 현존의 표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과정의 총체성으로 설명된다. 45년 지구 상에서 35억년을 살아온 과정이 실재성이다. 현존의 표상으로서 과거 35년과 동일성이라고 주장하려는 인공지능(AI) 인식은 표상의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원인(35억년)이 결과로서 현존을 표출할 뿐이다. 35억 과정의 이해는 아직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어찌 현존의 두뇌 속에서 과정과 결과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며 망상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탐만치(貪慢癡)를 버려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결과론의 징후이며, 목적론의 결말이며, 최후의 심판론의 극치이다. 최후, 결과, 결말은 오만의 극치이며, 광기로서 항상 전쟁(la guerre)을 품고 있다.
***
한계 속에서 또는 페라스(한계, 제한) 속에서 원인은 시초이든 목적이든 정지에서 찾아져야 한다. 상식에 기반 한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지는 필수적이다. 이런 정지에서 정지에로 페라스에서는 결정론(즉 필연성)이 변화를 설명하는 도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이란 이런 결정성에 종속된 필연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이런 필연성을 벗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는 있기는 한가? 상식에서는 플라톤처럼 이 필연성의 완전성을 이용하여 불완전성을 조작하고 사는 것이 임의자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필연성의 꼭두각시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벗어나려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고의 추론과 사물의 완성효과 사이에 틈(우연성)에서, 인간이 사물의 완성처럼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나가는 쪽이 자유라고 보았다. 이런 자유는 필연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논리상, 또는 권리상, 전체의 필연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으며 순수한 자유는 없고, 불완전 또는 우연의 대체로서 임의자유 정도를 인간이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그렇다고 신을 불러들이는 것은 또 다른 신화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일 뿐이다. 그러면 인간의 지성은 무엇을 통하여 또는 스스로 자유의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원인의 자발성, 자주성, 자족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자발성은 자연에 찾을 때 또다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근세 사회가 새로운 관점을 열 것이다. 루소의 인민 주권을 거쳐서 대혁명과 프루동을 거쳐서 인민의 자발성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정부가 등장할 것이다. 이 두 인민의 관심자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독학하였다. 스스로 자주, 자치를 말하는 자는 스스로 노력한 자들에게 있다. 하늘은 인민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품앗이와 상부상조가 새로운 인식과 사회 건설의 기초이다. 상부상조, 교감과 공감에서 다양체의 단위를 성립시킬 수 있을 때, 자기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 일반의지를 세울 수 있다.(55SLD)
****
# <원인관념(1900-1901 강의록, 2019)> 13강(221-225), 14강(225-228)
* 13강 (221-225) [스피노자의 자기원인(causa sui)]
근대 수학은 아마도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를 제외하고, 하나의 세계라는 필연성의 관념에 관한 반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도 또한 이런 관념[생각]이 첫째 도면에 속한다. 그러나 칸트 자신은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인식 속에서 즉 과학 속에서, 연구했다. 거기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다. 또는 형이상학적 발전은 완성되었다. 또는 어떤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면, 그것은 필연성이 자연에서나 과학에서나 과거에 의해서보다 덜 엄격하게 생각되었다는 조건에서 일 것이다. (221)
오늘은 마지막으로 [플리지 않고] 매달려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되돌아 가고자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근대과학의 토대에 속하는 필연성의 관념을 다룬다면,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같은 철학에 이른다. 이런 학설을 우리는 오늘 곧 제시 할 것이다.
이 학설에서 원인의 개념작업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실체, 속성들, 양태들의 관계를 표상해야 한다.
A = A (1)
이런 동일성은 다양한 언어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응용될 수 있다.
하나의 수(un nombre) = 이 수(ce nombre) (2)
하나의 직선(une droite) = 이 직선(cette droite)
나는 첫째 동일성을 잡고서, 나는 그것을 쓸 수 있다. (221)
1 = 1
또는 2 = 2 (3)
또는 3 = 3 등 무한히
둘째 동등성에서도 동일하다. 나는 이것을 전개할 수 있는 일련의 동등성 선형을 가질 수 있다. 이 동등성의 각각의 전개[풀림]은, un nombre = ce nombre, une droite = cette droite (등등등 으로) 무한하다.
게다가 수적인 동등성의 계열과 선적인 동등성의 계열에서 - 두 계열이 서로 물샐틈없이 완전 방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 우리는 이 항들 사이에서 둘 대 둘로 상응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것이 스피노자의 실체, 속성들, 양태들의 연관이다. 이 추상 도식은 데카르트에서 나온 학설을, 즉 기하학과 대수학의 상응에 기초한 철학의 학설을 충분히 잘 표현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의 연관은 어떠한 것인가? 속성에서 속성으로 원인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구해야할 원인성의 네 가지 양태들만을 가져야만 한다.
1) 실체의 원인성, 자기 원인(causa sui), 말하자면, 이것의 가능성은 실체를 현존과 하나가 되게 한다. 어떤 온존재의 공간과 시간 밖에서 필연적인 현존이 확실하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가능적인 모든 것을 가두고 있고, 또 확실하게 현존하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그것의 가능성은 마치 가능성이 현존을 함축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관념, 고대인들의 감성적[미학적] 수학에 낯선 관념, 적어도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거의 발전되지 않은 관념이다. 사람들은 이런 관념에 도달하는데, 사람들이 보편적 필연성의 개념작업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이런 경우에 의해서 이다.
2) 실체와 실체의 속성들의 연관들(rapports): 마찬가지로 가능성으로부터 현존으로 자기원인이라는 관계는 동등한 것에서 동등한 것으로 관계였으며, 실체로부터 실체들의 속성들의 관계는 동등성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속성들은 실체 전체를 표현하고(exprimer) 있기 때문이다.
3) 속성들과 양태들의 연관들(rapports): 이것도 또한 동등성의 연관이다. 단지 우리는 속성들로부터 양태들이 흘러나오게 하는 필연성을 또한 잘 보지 못한다. 사실상, 셋째 연관은 처음에 제기된 필연성의 관념이 부여한 도약(l’élan)의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비판해야하는 것은 이런 관념 자체이다. 이런 관점에서부터 사람들은 스피노자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 (222-223)
4) 양태로부터 양태로 관계(la relation)는 생각하기에 가장 어렵다. 스피노자는 시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한 양태는 다른 양태에 의해 결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양태에서 양태로 이런 원인성을 생각하는가?
이[이런 원인성]를 설명하기 위하여, 본질과 현존 사이에 스피노자가 확립한 구별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현존, 그것은 시간 속에서 자연적[신체적] 현존이다. 반대로 본질은 시간 바깥에 있다. 양태들 사이에 원인성은 절대자 속에 사라진다. 진실한 관계는 양태와 속성 사이에 현존한다. 사람들이 본질에서 현존으로 이행할 때, 어떤 것을 딱 잘라 해결해야만 한다. 즉 본질은 진실한 설명이며, 그러나 현존은 또한 필연적이고, 절대적으로 덜 실재적이라 할지라도 본질 속에 잠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재적 관계 전체를 수학적 관계로 이끌어가기 위한 노력이다. 그 철학은 수학적 방법을 위한, 즉 종합적 방법을 위한, 배타적[독점적] 감탄을 증거한다. 만일 우리가 거기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원인의 관념은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단지 그의 학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윤리학의 강독에서 체험할 것에는 두 가지 난점들이 있다.
1) 존재의 이론. 사람들은 내가 제시했던 도식에 의해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 [벩송은 현존이라 하지 않고 존재라고 하였고, 위에서 설명은 본질과 현존으로 구별되어 있다.]
2) 인식의 이론. 스피노자를 제외하고 철학자들에게서 인식은 일반적으로 생산작용으로부터 반대이다.유물론의 철학에서 ‘사유하다’는 존재들의 생산의 반대 질서에서 존재들의 모든 계열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리라. 알렉산드리아인들의 범신론적 철학에서, 온일자(l’Un)가 있고, 그리고 온일자의 다양한 표현들이, 즉 타 노에타(τὰ νοητά)가 있으며 각각은 다른 모든 표현들의 대리자이며, 결국에는 “행렬(procession, 발현)”의 마지막 항으로서 개별 영혼들이 있다.따라서 그것은 온일자에서 온가지성으로 향한 하강, “과정”이고, 온가지성으로부터 감각성으로 하강이다. 알렉산드리아 인들에게서 ‘인식하다’, 그것은 반대의 질서이다. 영혼은 온이데아로, 즉 완전한 인식의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거기서부터 영혼은 상위가지성인 온통일성[환희]에로 이행할 수 있고, 스스로 단순화할 수 있다. (223-224)
바로 이런 점이 스피노자 학설의 지배적인 생각이며, 이것[학설]을 다른 모든 학설들과 구별, 이것은 진실하고 완전한 인식은 “전향(conversion, 개종)[ἐπιστροφή]”이 아니라 “행렬(procession, 발현)[πρόοδος]”이라는 것이다.두 절차(deux processus, 과정) 사이에, 즉 생산작업과 인식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다[없다]는 것이다. 또는 오히려 유일하고 하나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생산하다’과 ‘인식하다’는 유일하고 동일한 것이다(신의 지적 사랑, 윤리학, V, 명제 36, 부명제. 영혼을 위한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위한 영혼의 지적 사랑과 동일하다). 전향은 행렬과 동일시된다. 이에 따라 진리에 상대적인 모든 학설들이 밝혀진다(윤리학, II, 명제 43, 명제주석). 사람들은 명백한 진리의 진실한 진리를 무엇으로 재인식하는가? 소위 사람들이 진리의 바깥에 있다거나 또한 진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철학에 극복할 수 없는 반대가 있다.그러나 스피노자에게서 사람들은, 만일 사람들이 그[진리] 속에 자리 잡을 경우에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완전하게 인식한다. 진리의 인식은 표출과 즉 진리의 생산과 뒤섞여[혼동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근본적으로 의심의 부재와 확실함을 구별한다. ‘확실하다’, 이것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진리 속에 위치하는 것이며, 신의 본질과 일치하는 것이다.오류의 가능은 없다. 사람들은 거짓의 어떤 것에 대해 분명할 수 없다.
만일 인식이 진리가 이루어지는 운동을 규정하기 위하여 “전향(conversion, 개종)[ἐπιστροφή]”이 아니라 “행렬(procession, 발현)[πρόοδος]”이라면, 완전한 인식 속에서 태도가 어떤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만일 그때 진해하는 것, 생산하는 것은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수학적 형식 하에 생산을 표상해야만 한다. 스피노자의 학설은 사물들의 총체성과 사물들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다.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들의 학설에 비슷한(유비적) 학설이 있다. 갈릴레이는 세계가 신적 언어의 수학적 표현이라고 말하듯이, 뉴턴은 세계를 신의 감각기관(sensoriumde Dieu, 신의 의식)처럼 정의 한다. 그러나 훨씬 더 정합적인 학설이 있다. 스피노자는 과학을 기초하고자 애쓰는 과학자가 아니나, 그러나 지복과 진리를 찾는 인간이다. 그러한 것이 윤리학의 중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나온 관념들의 질서와 우리가 스피노자에게 잠재적으로 부여했던 관념의 질서는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224-225)
세계의 보편적 필연성이 주어지며, 지유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자유는 필연성 자체의 받아들임이다. 자유롭다, 그것은 필연과 일치, 즉 신과 일치이다. [자연(신)이 원인이고 원인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유롭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해결책, 즉 매우 깊은 해결책이며, 이는 원인성의, 인식의, 생산의 개념작업으로부터 결과한다.다른 해결책이 있다. 칸트이다. 사람들은 필연성을 현상의 어떤 것으로, 자유가 주어지는 어떤 구경거리(spectacle)로, 고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해결책은 서로 서로 사물들의 질서에서 보편적 필연성을 요청한다(postuler, 전제한다). 두 해결책 사이에서, 보편적 필연성을 인정하는지 또는 그럼에도 자유를 유지하기를 원하는지, 채택해야만 한다.
- [왜 전자(스피노자)가 무신론이고, 후자(칸트)가 유신론일까? 전자에게는 사실상 신이 필요없다. 그러나 후자에게 돌연변이 또는 우연을 통해 임의자유를 실행하는 것을 신(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연의 일들을 행하는 임의 자유가 모두 실수, 잘못, 오류, 악이 된다. 왜냐하면 신의 완전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발성의 임의 자유에 신성시하려면 원인에서 오류(우연이니까, 신은 우연이 없다)임에도 신의 의지을 부여하는 것이 신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악순환(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이다. 인식론적 해결은 파라독스 또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고리를 없애기 위해 원을 해체하고 세상을 한계 없이 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진정한 아페이론의 등장이며, 노마드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55SKD)]
단지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필연성이 사유에 의해 요청되는가? 이런 필연성은 불가피한가? 다른 해결책은 이런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그것이 형이상학의 방향정립을 찾을 수 있고 있어야 하는 방향인지라고 자문할 수 있으리라. 도처에 결정 작용이 있고, 어떤 곳에는 비결정작용이 있다. 그러한 것이 끌어낼 독단적 결론이다.
첫째 해결, 스피노자
둘째 해결, 칸트
[이 둘은] 심지어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필연성의 요청이다.
셋째 해결: 근본적 메카니즘의 부정, 부분적이고 혼합된 메카니즘의 관념.
데카르트에게서, 원인 관념은 훨씬 덜 분명하다. 정신은 스피노자의 것보다 실재적인 것에 더 가깝고, 더 다양하다. 그 정신은 변화된 방향들을 따르고, 결코 끝까지 아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훨씬 더 풍부하지만, 그러나 도식화하기에 더욱 어렵고, 덜 정합적이다.
데카르트가 출발한 이중 원리에 관하여 강조해야 한다. 두 가지 진리들 중에서 하나는 사실상 첫째로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권리상 첫째로 신의 현존이다. 우리 사유로부터우리는 신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며, 신으로부터우리는 우리 사유로 내려갈 것이다.두 진리의 상호 반작용이 있다. 거기에서부터 스피노자의 수학적 개념작업의 약화가 나온다. (225) (55SLD)
*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Aristoteles, 384-322 av. J.-C.)(62살) 플라톤의 제자, 마케도니아 출신 철학자. 사물의 탐구를 위한 네 가지 방식을 형상인, 목적인, 효과인, 질료인으로 구분한다.
O
1564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 천문학자.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계 유대인, 네델란드 철학자. 오성개선론(1661), 윤리학(1677)
1642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잉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 *** *** ***
* 14강 (225-228)
칸트가 행하고자 원했던 것은 아무 투명(net, 말끔)하다. 만일 우리가 순수 이유(근거)의 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을 펼쳐 본다면, 우리는 수학과 물리학이 동일한 방식으로부터구성되어 있다는 관념과 동일한 원리로부터태어났다는 관념이 표현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보편 수학의 관념에 관한 한, 그 관념은 [실재성의] 어떤 부분도 지적하지 않지만,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도처에서 발견한다. 관념은 비판의 영혼 자체이다. 칸트는 이들의 메카니즘의 비판에서 버클리와 흄을 이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칸트는 하나의 과학이자 보편 과학의 가능성을, 즉 순수 물리학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고(비판론, 프로레고메나), 말하자면 과학의 틀에 기여하고 실재성 전체를 감싸안는 정신에 의해 구성된자연 과학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226)
그러한 것이 출발점이다. 이것은 그에 선행자들의 형이상학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목표는 어떤 것인가? 목표는 이 형이상학자들에게서와 동일하다.
어디에 차이가 있는가? 칸트에게서 항상적인 선입견 속에서, 이런 메카니즘의 그 위에 자유와 자유가 함축하는 모든 것을 재확립하는 것이다.자유는 칸트주의의 선행자들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데카르트는 의심할바없이 자유를 제거하지 않았다. 임의 자유에 대한 믿음은 그에게서 도처에서 내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서 임의자유의 긍정적 개념작업을 찾지 못하며, 우리에게 신체 속에 정신의 침입(une inrusion)을 생각하도록 허락한다. 이것은 부정적 관념[생각]이며, 메카니즘에 대한 부정작용이다. 그러나 부정작용은 그자체로 힘있는 것이 아니다. 부정작용은 마치 어떤 생각의 제한 작용으로서만이 또한 마치 긍정적 관념의 준비 작업으로서만이, 가치를 가질 뿐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심지어 라이프니츠에게서처럼, 필연성은 첫째 도식[평면]이다. (라이프니츠에게서는 모나드들의 관계들, 온이유[온근거]라는 원리가 있으며, 스피노자에게서는 극한에서 그 [이유] 원리를 동일성의 원리와 혼동한다.)
자유를 데카르트가 꿈꾼 보편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칸트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그는, 사물들의 어떤 질서에서 과학이 보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또한 신앙[믿음]의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고 보여주고자 원했다. 칸트는 자유를 메커니즘의 가능한 도달범위 바깥에 두기를 원했다. 어떻게 그것[바깥에 두기]을 행하는가?
칸트는 말하기를, 자신을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 그것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원인성의 이론이라고 한다. 원인 연관의 종합적 개념작업은 옛 형이상학자들의 분석적 개념작업을 대체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러한 것이 혁신이다. 옛 형이상학자들에게서 원인 연관은 동등한 연관(un rapport équivalent)이다(스피노자).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게서 원인성은 분석적이고 수학적인 연관과 무한히 접근되어 있다. 반대로 결과를 원인에 이질적(hétérogène)이라고 가정해보자,그러면 두 가설들에게 여지[자리]가 있다. (226-227)
1) 데이비드 흄의 가설: 규칙성은 행복한 우발사건이다.
2) 그러나 칸트는 이런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 가설이 남아있다. 현상의 통일성은, 즉 현상들을 무한하게 법칙들에게 복종시킬 가능성은, 인간 정신이 이렇게 행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렇게 행한다는 것이란, 정신이 종합한다고 하고, 또한 정신이 필연적 법칙들에 의해 특히 원인성의 법칙에 의해 현상들을 현상들에게 연결한다고 하는 것이다.
차이는 이러하다. 칸트의 선행자들은 하나의 존재 위에 통일성과 연속성을 기초하고자 원했었다. 칸트는 이것들을 [인식능력의] 작동(un acte) 위에, 즉 운동 위에 기초하고자 한다. 즉 하나의 지성이 있고, 고유한 운동과 더불어 근본적인 요청들이 있다. 과학의 통일성(단위)는 존재의 부동성으로부터 유래하지 않고, 오히려 규정된 방향으로 끊임없이[상수로] 방향으로부터 유래한다. 칸트는 심리학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 인식의 기초에 속하는, 즉 개체적 의식들이 중첩되는 “의식 일반”의 기초에 속하는 어떤 비인격적 인식을 걱정하였다. 잠재적인 과학(une science en puissance), 즉 자연(la nature)이 있고, 그리고 개체적 인식이 있다.
과학과 자연의 일치는 과학과 자연이 동일한 사물이라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통일성의 요청을 가져 오는 오성 일반(l‘entendement en general)이 있다; 이런 요청을 표현하는 오성(l‘entendement)의 범주들(카테고리)도 있다; 대상들이 파악되는 감성의 형식들이 있다. 혼재된 자연, 여러 다양성, - 사물자체에 의해 생산된 겉모습들이 있다.따라서 모든 인식은 우리의 정신에 상대적이다. 우리 정신에 독립적인 사물자체 만이 있다. 자 이것이 과학이 해결했던 문제이다. 자유의 영역은 어떤 것인가? 사물들 자체(des choses en soi)[Ding an sich]의 영역이다.
이런 비판이 일으킨 대체적 난점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엄밀한 과학을 기초하고자 원한다.우리는 오성이 통일성이란 자기 요청을 갖는 다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칸트(Kant, 1724-1804)는 이 원리를 가지고 그가 이런 귀결을 얻을 수 있다고, 그리고 다양성은 오성의 통일성에 필연적으로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227-228)
- [칸트는 순진하게도 물질(질료)로부터 규정된 통일성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들로 지식(인식)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플라톤에서 이데아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의 형상(신)’의 개입 같은 것을 상정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결국 칸트는 아페이론(필연)을 정복하지 못하고 타협될 수 있는 것만을 수용하는 지식(인식)을 만들었다. 벩송의 설명으로는 피히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자아가 절대자가 되어 모든 것을 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즉 무한 침입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인식(지식)은 무한 침입으로 절대적 통일성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쪽이 신칸트학파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좋게 해석하여 모든 질료, 또는 다양체를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얼나마 좋겠는가 마는, 19세기말은 그런 수학의 적용성의 상실로서 확률성의 시대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정치 경제학 뿐이겠는가? 기상학이라고, 21세기의 바이러스의 창궐은 수학적 도식이 없고, 최대한 경험적 영역으로 한계를 정하려 했던 문재인 정부의 정은경 질병청장의 방식이 최선의 과학적 방식이다. 수학적 논리적 지성적 방식이라 하는 과학적인 원리와 법칙은 없다. 경험을 통한 가우스 곡선을 통하여 범위를 한정지을 뿐이다. (55SLD)]
그러나 사람들은, 물질이 매우 다양하여 규정된 통일성에 굴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립하고 증명할 수 없다. 그것[굴복시킴]을 증명하기 위하여, 피히테(Fichte, 1762-1814)가, 자아를 절대자로서 세우는 “전환된” 스피노자주의에 의해, 어떤 형식으로부터 물질을 끌어내야만 할 것이다.
비판의 목적은 데카르트의 메카니즘과 동일한 메카니즘을 기초하는 것이었으며, 그러나 모든 비판의 권리들 속에 자유를 재확립하면서 이다. 이 개념작업 전체는 종합적 원인성의 이론 위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이 수학적 형식들에 젖어있던 데카르트주의가 개념작업을 수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가 행한] 인간적 사유의 비판이다. (228)
- [칸트는 뉴턴의 과학을 거의 절대적으로 믿었던 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인간이 과학의 통일성을 파악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 오성이 물리학에 대해 완벽하다고 느끼면서도, 도덕에 관한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도덕 형이상학의 토대들(Fondements de la métaphysique des mœurs (1785) 도덕형이상학(Métaphysique des mœurs (1796-1797)을 썼다. 그러나 그가, 과학이 수학(언어)과 물리학을 토대로 하는 것과 달리, 생물학과 심리학의 연관에서 사유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시간적으로 50여년을 더 필요로 했을 것이다. (55QLG))
(10:28, 55SLD)
*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계 유대인, 네델란드 철학자. 오성개선론(1661), 윤리학(1677)
1646 라이프니쯔 (Gottfrid Leibniz, 1646-1716) 이 다재 다능한 철학자는 프랑스에 거주한 시간이 많아서 많은 작품을 프랑스어로 썼다. 그리고 그는 뉴턴과 서로 따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새로운 논리계산(명제계산)을 발명하고자 했다.
1685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 영국계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철학자, 과학자. 『시각신설론(視覺新說論, An Essay Towords a New Theory of Vision, 1709』,
1711 흄(David Hume, 1711-1776) 영국 에딘버러 출신으로, 프랑스 여행으로 또는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지냈으며, 루소와 친밀함과 서로 불화로 유명하다. 그의 회의론이 칸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현재로는 폴란드보다 더 동쪽에 있는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프러시아 공화국의 철학자이다. 인간의 표상적 인식의 조건을 규정하고, 도덕적 이성의 신에게 종속을 요청하고, 미적으로 신의 작업의 숭고함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듯이 긍정한 프로테스탄트 철학을 구성하였다. 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 ; 2de éd. 1787), Critique de la raison pratique (1788),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1790), 도덕 형이상학의 토대들(Fondements de la métaphysique des mœurs (1785) 도덕형이상학(Métaphysique des mœurs (1796-1797)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관념론 철학자
(11:07, 55S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