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피아
남서태평양의 고립된 작은 열대섬 티코피아는 하의 상달식 접근 방법의 또 다른 성공 사례이다.
1.8평방마일의 총면적에 인구는 총 1,200명이지만 농경이 가능한 면적은 1평방 마일정도이므로
실제로는 더 좁은 지역에 1.200명이 몰려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인구밀도는 현대 농경 기술이 부재한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다소 높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코피아 주민들은 거의 3,000년 동안 문제 없이 삶을 지속해오고 있다.
티코피아 섬에서 가장 가까운 당은 티코피아보다 더 작은 면적(7분의 ㅂ평방마일)을 가진 아누타 섬으로
13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불과 170명만이 살고 있다.
가까이 있는 큰 섬으로는 바누아투 군도의 바누아라바 섬과 솔로문 제도의 바니코로 섬이 있는데
둘 모두 2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면적도 100평방마일 정도이다.
1928년 부터 1929년까지 거의 1년 동안
티코피아 섬에서 살았던 고고학자 에이머드 퍼스(Ramond Firth)는 이렇게 말헸다.
"실제 그 섬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티코피아가 세계 다른 곳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
너무 작은 곳이라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거나 바닷소리가 들이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섬 중심에서 해안까지의 최대거리가 1.2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의 공간 개념도 이런 지리적 특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즉 실제 거대한한 대륙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한번은 그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진구여,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는 땅이 이 세상에 있는가?'
상황이 이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현상이 생겼다.
즉 공간을 나타내는 온갖 표현들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안쪽(inlad)' 과 "바다 쪽(seaward)'이란 표현으로 족한 것이다.
집 마루에 올려져 있는 도끼의 위치를 나타낼 때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한번은 한 사람이 상대방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바다 쪽 볼에 진흙이 묻어 있어.'
날이 계속 지나가고, 달이 계속 지나가도 수평선 파도는 잔잔한 그대로였고
외지의 존재를 알려줄 만한 그 어떤 희미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티코피아의 전통적인 카누를 타고
사이클론이 자주 발생하는 남서태평양을 넘어 가장 가까운 섬으로 가는 일은,
티코피아 사람들은 멋진 모험이라 여겼지만,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카누의 크기가 작었던 데다 항해도 잦은 편이 아니어서 섬에 들여올 수 있는 물품의 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도구를 만들때 쓰는 돌과
결혼을 위해 아누터타섬에서 건너오는 젊은 사람뿐이었다.
티코피아 바위는 도구를 만들기에는 질이 떨어졌으므로
바누아라바, 바니포로 섬에서 흑요석, 화산 유리, 현무암, 구질암들을 수입했는데
그중 몇몇은 원래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비스마르크 제도, 솔로먼 제도, 사모아 제도에 있던 것들이었다.
기타 수입되는 다른 사치품으로는 장식에 쓰이는 조개, 활과 화살, 그리고 예전 시대의 도기 등이 있었다.
티코피아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수입되지 않았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티코피아인들은 건기인 5월과 6월 동안에,
또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찾아와 밭을 파괴하는 사이클론이
(티코피아는 태평양의 주된 사이클론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10년에 평균 20개의 사이클론이 발생한다.)
지나간 후의 기간 동안 기근을 면하기 위해서
비축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식량을 생산해내야 했다.
따라서 거의 3,000년 동안 티코피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다.
어떻게하면 1,200명의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것인가?
또 생존이 지속 불가능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 인구 증가를 막을 것인가?
티코피아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에 대한 주된정보는
고전적인 인류학 연구 중 하나인 퍼스의 관찰에 의지하고 있다.
비록 유럽인들이 티코피아를 발견한 것은 1606년의 일이지만
섬의 고립성으로 인해 1800년대까지는 유럽인들의 영향이 극히 미미했다.
선교사가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때도 1857년이었고
1900년 이후에야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원주민들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당시에도 이미 변화가 시작된 상태였지만, 1928년에도 1929년까지 이곳에 살았던 퍼스는
그때가지도 전통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던 그들의 문화를 관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티코피아에서의 지속적인 식량 생산은 제 2장에서 언급한 환경적 요인에 힘입은 바 컸다.
다른 섬과는 달리 태평양에 있는 섬들은 환경의 악화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아
상대적으로 지속 가능한 조건에 있었다.
티코피아를 지속 가능하게 한 요인들을 꼽아보자면
높은 강수량, 적절한 위도,(다른 섬들의 환산 폭발로 발생한 ) 화산재와 먼지가 떨어질 수 있는 지역적 조건들이다.
이런 지리적 요소들은 티코피아인들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한 유리한 조건이었다.
나머지 행운을 들라면 바로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행했던 행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티코피아 섬 전체는 일시적인 경작을 위해 나무를 벌채하고 태웠던 다른 많은 태평양 섬들과는 달리
수세기 동안 지속적인 식량 생산을 위해 세세하게 관리되었다.
티코피아에 있는 거의 모든 식물 종들이 한 가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심지어 풀까지 밭을 덮은 덮개로 활용했는가 하면
야생 나무는 기근이 닥칠 때 식량 자원으로 이용되었다.
바다에서 접근하면서 티코피아 섬을 보면 다른 무인도 태평양 섬들과 마찬가지로
키 크고 울창한 전형적인 열대우림이 티코피아 섬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섬에 도착해서 직접 숲이 있는 곳으로 가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열대우림은 얼마 안 되는 가파른 암벽 부근에서만 보일 뿐
섬의 나머지 지역은 식량 생산에 활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섬 대부분은 과수원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 과수원에 있는 키 큰 나무들은
이곳이 원산지이거나 아니면 식용 견과 열매나 과일, 혹은 코코넛, 빵나무 열매,
녹말 고갱이를 함유한 사고(SAGO) 야자 등 기타 유용한 열매를 생산하는 수입 수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401 - 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