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36:1-26) 여자 아나운서의 웃음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여자 아나운서의 웃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9시 뉴스의 앵커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남자가 그 아나운서의 웃음을 보면서 ‘어! 저 여자가 왜 나를 보고 웃지?’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매일 저녁 9시에 여자 아나운서가 웃으면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시 뉴스를 시작합니다.’라고 웃을 때의 모습을 계속 자기를 향한 모습으로 생각을 해서 방송국에 찾아갔어요. 기다리다가 그 아나운서를 만났습니다. ‘1년 동안 자기의 사랑고백을 내가 너무 많이 받게 되어서 오늘은 드디어 결심하고 찾아왔다.’라고 한다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까?
제가 만든 이야기인데 있을 수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하냐면 '관계망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설교를 합니다. 이 말씀을 목사가 자기한테 사랑고백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요. 이게 관계망상이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그동안 잘 지내지 않았느냐?’라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또 어떤 경험도 있었느냐면,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집에 갈 때에 현관 앞에서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정장을 잘 차려입은 여자 분이 제 옆에 와서 섭니다. 분명히 저희 집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모라는 거예요. 제가 인사하면 같이 인사를 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진짜 목사님 사모님이었는데, 목사님이 돌아가신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되셨대요. 제가 당신의 남편 목사님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제 옆에 와서 같이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희 집사람을 아는 교인들이 ‘저 여자가 누군데 저렇게 태 목사님 옆에서 인사를 하나?’라고 이상하게 여기지요. 이게 관계망상입니다.
관계망상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자기와 관계된 일처럼 생각을 하고 자기와 연관 된 일로서 의미부여를 해나가는 겁니다. 이 기초적인 관계망상에 근거해서 피해망상이 생기고, 또 주시망상으로 누가 늘 자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자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나?’라고 하는 거예요. 아가씨들 중에 얼굴이 예쁘신 분은 지나가다가 그냥 얼굴이 마주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 남자가 나를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게 관계망상이고 주시망상입니다.
그리고 우두커니 창문 밖을 보고 있었는데, 창문 옆에 있던 아가씨가 ‘왜 저 남자가 자꾸 나를 쳐다볼까? 내가 그렇게 예뻐?’라고 하는 것이 주시망상 비슷한 것이고, 이 정도 나가면 ‘왜 나를 감시하느냐’고 느끼는 추적망상이 됩니다. 누가 자기를 늘 미행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관계망상 중에 자기체험이라는 게 있어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한다고 여겨서 하고보니 내 생각과 행동이 아닌 거예요. 딴 사람에 의해서 내가 조작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걸 자기체험이라고 합니다. 이게 다 관계망상이라고 하는 심리학적 병리현상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증상들입니다. 피해망상, 주시망상, 자기체험 같은 것들이.
신앙도 이런 관계망상과 비슷한 흔적이 있다는 것이에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계체험입니다. 망상과 반대되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제 생각에는 체험입니다. 망상은 실제가 아닌 것을 내가 그렇게 사실로 믿는 것을 말하고 체험은 실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망상의 반대어는 관계체험입니다. 신앙이 관계체험인데 외부인이 볼 때는 관계망상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여자 아나운서가 웃는 것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이상자가 있는 반면에,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해봅시다. 진짜 여자운서가 방금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복귀해서 첫 번째 방송을 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웃는데 자꾸 신랑 생각이 나는 거예요. 집에서 자기가 하는 뉴스를 보고 있을 신랑을 생각하면서 웃음이 나와 버린 거예요. 말은 전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지만, 그 웃음은 신랑에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와서 말합니다. ‘자꾸 자기가 생각나 웃음이 나서 죽을 뻔 했어. / 왜 웃어? / 좋아서!’라고 하는 것은 이 남편이 경험한 것은 관계망상이 아니라 관계체험이 되는 것이에요. 대한민국 국민이 다 보고 있는 공개적이고 공적인 뉴스 시간에, 나 개인을 생각하며 그 여자 아나운서가 웃었다는 것은 관계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례적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서 웃음을 지은 것을 나를 향해서 웃었다고 여기는 것은 관계망상이 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 시편을 보면 특이한 것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이 계속 반복해서 모든 절에 붙어있습니다.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는 말과 ‘감사하라’라는 이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게 바로 관계체험에 근거된 이야기라는 것이에요.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라는 말씀도 하늘 밑에는 대한민국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일본 사람 중국 사람도 살고 있지요. 중국에 13억, 인도에 8억, 미국에 2억, 캐나다에 4천 5백만 명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들어본 적도 없는 전 세계 사람들이 그 하늘 밑에 살고 있습니다. 머리가 노란 사람, 눈이 파란 사람, 피부가 까만 모든 사람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나를 향하여 웃음을 띠시고 사랑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현재 지구의 60억 인구를 다 관장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향해서 웃음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외부인이 볼 때에는 관계망상이라는 거예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모기에서부터 사자까지 모든 삼라만상을 다 지으시고, 그 하나하나를 다 공적으로 관여하시는 하나님께서, 나 개인을 향해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 할 수 있을 만큼, 나 개인을 향하신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이 신앙이라는 거예요.
이 노래가 전부 다 그런 노래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가지가지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과 마찬가지예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국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국민건강보험의 계획을 새로이 추구하고 있다면 감사는 하지만, 대한민국 서초동에 살고 있는 제가 진심으로 감사하기에는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여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에 대해서 감사를 합니다. 이 시편도 시대가 천 년 가까이 지난 시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신라의 김춘추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했다. 너무 감사하다.’라고 감사를 해도 되기는 하지만 그걸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관계망상 아닙니까?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저한테 전화를 걸었다면, 관계체험으로 바뀌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외부인이 볼 때, 오바마 대통령이 사적으로 태승철에게 전화를 했다면 믿지도 않고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합니다. 바로 이게 관계체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거예요. 딴 사람들이 볼 때에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할 일이 없어서 나 개인을 관장하고 나 개인을 사랑하시고 개인의 문제에 콩 나라 팥 나라 신경 쓰시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겁니다. 내가 경험을 한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계망상일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이 나 개인을 사랑하신다고 관계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관계체험 위에서 신앙적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삼라만상을 운행하시고 출애굽을 시키고 선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고 홍해바다를 갈랐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가게 하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관계하고 계신다는 관계체험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신앙적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됐기 때문에 그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까 여자 아나운서가 갓 결혼한 새색시라고 예를 들었습니다. 신랑이 뭘 해줘서가 아니라 신랑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겁니다.
신랑이 결혼할 때 집을 마련한 신랑에게 감사한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은 예를 들어 신랑이 대통령, 갑부라고 하면 대통령이고 갑부라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내게 개인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고 하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이 내게 사랑을 고백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는 일이 어떻게 되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 선민을 택하시고 출애굽을 시키시고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그 하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실에 감사의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관계를 체험케 하신 그 사랑 위에서, 이제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일들을 감사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체험 한 뒤에는 감사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심리학적 용어들은 잘 보면 신앙과 일치할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서 관계망상의 증상 중에서 주시망상이라는 말을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에요. 망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뭡니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항상 함께합니다. 이건 추적망상으로도 보일 수 있어요. 누가 계속 나를 미행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보고 계시네’하고 살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거 완전히 주시망상에 걸렸구먼!’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체험이 뭐예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고 내가 말했는데 알고 봤더니, 내 생각이 아니고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던 거예요. 이게 기독교 아닙니까?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러므로 주시망상이 아니라 주시체험이고 자기체험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리스도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말이 나를 통해 나타난다. 이런 실질적인 관계체험을 통하여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고, 드디어 행복의 복지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것은 피해망상이라는 것이 있어요. 지금 136편 전체가 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이유가 관계체험에 근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어떤 일이 잘 돼서가 아니라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방송국의 여자 아나운서의 웃음이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생각한 웃음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분이신데, 모든 삼라만상에 뜻을 두고 이끌어 가시면서 그 분이 나 개인을 향하여 당신의 사랑을 허락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느껴져야 된다는 거예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제 이게 느껴지면 불사신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절대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 사람 속에서 행복이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셔서 내가 관계를 체험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피해망상이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험하고 나면 왜 행복할 수밖에 없느냐? 왜 불행해질 수가 없느냐? 피해망상이 극복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달리시기 전에 요한복음 14:30절에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 임금이 예수님을 잡으러 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속에도 여러 가지 심리학적 용어에 해당되는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보세요.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한다'는 것이 뭐예요? 내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자기체험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몸을 잡아가는 것은 세상 임금이 잡아갑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관계할 것이 없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아내가 나에게 기분 나쁘게 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피해망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아버지와의 관계를 체험하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상이 아니라, 체험적인 관계로 들어갑니다. 아내가 바가지를 긁었어도 주님처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는 것이고 내 자식 놈이 내 앞에서 말썽을 부려도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면서 나는 오직 아버지가 명하신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자식 상황에 대해서 내가 판단한 대로 움직일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나는 관계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어제 말했듯이 방관자가 되는 겁니다. 방관자적 입장에 섰을 때 아버지가 명하시는 것만 행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사람 그 누구도 피해를 줄 수 없어요.
주님은 바보 같으세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분이 잘못한 것이 없어요. 세상에서 정한 십자가 형벌에 해당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이분만큼 피해를 본 분이 이 지구 역사상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분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격차를 볼 때에는 피해가 어마어마한 것이에요. 천문학적인 수치로도 계산 할 수 없는 피해를 본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그가 나를 잡아서 십자가에 걸어도 그는 나와 관계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대체 이분을 누가 세상에서 불행하게 만들 수 있어요? 십자가에 달려 갈기갈기 찢겨 돌아가시고 가시면류관 쓰고 돌아가신 양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직접적인 사람들과 자기가 관계될 것이 없다고 믿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해야 돼요? 관계망상도 아니고.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관계상실증입니까? 그래요. 아내와의 관계 상실하세요. 아내는 나를 바가지 긁을 수가 없어요. 내가 아내에게 긁혀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체험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피해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친구가 내 돈을 떼어먹었다고 내가 불행해집니까? 주님은 재산을 떼어먹은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하나 뿐인 몸을 그 사람들이 죽여 버렸는데도 피해망상을 갖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러므로 오늘 이 시편 136편은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관계망상인 것처럼이나 하나님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는 겁니다. 이건 뭐 외부 사람이 볼 때에는 백화점에서 인사하는 아가씨가 나한테 사랑을 고백한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관계체험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십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으신 몸과 연합해서,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손에 못이 박히고, 발에 못이 박히고, 배에 창이 들어오고,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져 죽은 것처럼, 주님과 연합해서 생각하는 동안에 드디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고 나는 천하무적인 감사의 사람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여자 아나운서의 웃음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관계로 들어가듯이, 천하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 개인을 향해 웃고 계시는 그 분의 사랑을 보내고 계시는 그 분의 손길을 체험하시기 위해서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세요. 바로 십자가를 붙잡는 자에게,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사랑의 체험이 가능해 질 것이고, 그는 누구도 불행하게 할 수 없는 천하무적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불행할 수 없는 천하무적의 사람이 된 뒤에 장사도 하시고 사업도 하시고 구걸하시는 분이시라면 구걸도 하세요.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마음에 기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다 망상일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서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관계체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지구 끝에 있는 사람들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 나 개인을 향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관계체험을 하루의 시작으로 삼고 출발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