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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시인학교 봄문학기행 초대 특강 / 김상환 시인님
시와 행역行易
1. 시는 어디에 있는가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때마침 내가 사는 아파트 한 컨에도 벚꽃이, 산수유가 피었다. 꽃이 핀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자, 겨울과 봄의 사이 현상이며, 하나의 사건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의 세계와 사물이 비로소 내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다. 나는 노래한다. 노래가 현존재라면 나의새로운 영혼은 말하지 말고 노래했어야(슈테판 게오르게 시,「니체」) 했다. 환력을 지나는 동안 나는 모름지기 시의 외길을 걸어 왔다. 그것도 시를 짓기 보다는, 시를 알고 음미하며 사유하는 저간의 나날들이었다. 시는 앎과 삶에 대한 느낌의 한 방법이다. 그 느낌feeling이야말로 물物의 상관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며, 살아있음의 황홀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는 어디에 있는가. 생명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본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 그것은 신비에서 시작되었고 신비로 끝날 테지만, 그 사이에는 얼마나 거칠고 아름다운 땅이 가로놓여 있는가(다이앤 애커먼,『감각의 박물학』). 그 사이-경계의 점이 지대漸移地帶와 반음영半陰影/penumbra의 느낌에는 실재의 숨은 깊이가 있다. 혼魂이 있다. 언어의 그물이나 체籭에서 빠져 나온 그 무엇으로서 시는 어느모로 상常의 발견이며 생의 감각이다. 존재와 생명에 대한 미적 가치이며 윤리적 태도이다. 서정시의 아름다움과 힘이 여기에 있다.
2. 죽음 혹은 고독과 내면의 응시
내 시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죽음과 실존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고독과 슬픔을 동반하면서도 고요와 신비의 세계로 이어져 있다. 데뷔작을 보자.
달 뜨지 않은 밤에/ 나는 심천 미루나무 숲속에/ 짐승처럼 쭈그리고 앉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타는 음성을 듣는다// 원무圓舞를 그리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간증의 불꽃은 삼경을 지나/ 더욱 간절한 몸부림으로 떤다// 나는 살을 쥐어 뜯으며/ 본향을 생각하다/ 꿈에만 출항하는 영혼의 뱃고동 소리에/ 시선이 멎다// 어차피 모래알처럼 부서질// 너와 나는/ 일어나 숲속을 헤매다,/ 깊이도 모를 바다의 숲속에/ 닻을 내린다
-「영혼의 닻」전문
그 무렵 나는 죽음과 실존의 문제에 탐닉해 있었다. 충북 영동 심천 미루나무 숲에서의 일이다. 전국 대학생 선교회CCC의 일원으로 참가한 나에게 심천의 천막 수련회는 신앙 이전에 한 편의 시로, 아니 시적인 순간으로 다가왔다. 강변 백사장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그믐달을 배경으로 우리는 둥글게 횃불을 켜든 채 저마다의 간증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어둔 밤 짐승처럼 웅크리며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진지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내심 좋았다. 하지만 남 앞에 나설 만큼 신앙이 그리 돈독하지는 못했다. 이후 우연치 않게 접한 구약 히브리서의 한 구절이 나의 뇌리를 때렸다. 영혼의 닻이다. 고독과 내면의 응시는 사실 내 시와 종교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고로 시에 경건성을 도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혼의 닻에서닻은 정박과 출항, 죽음과 생명, 이성과 신앙, 견고한 것과 사라지는 것의 경계와 표지에 속한다. 그 닻의 시학은 물과 불, 모래와 달, 침묵과 말이 뒤섞인 시간을 필요로 하며 본향을 떠올리게 한다. 심천 미루나무 숲에, 아니 안개 낀 숲속의 바다에 나는 혼자인 채로 새벽을 맞이한다. 나는 살을 쥐어 뜯는다.시선의 깊이는 존재의 살le chair이다. 멀리는 더 깊이 나아간다(이종건,『깊은 이미지』). 어둠의 빛과 소리― 시는 어디에 있는가.「어느 동박새의 죽음」도 같은 반열에 놓인다.
눈은 내려 쌓이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동박새가 죽어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온기
새는 주머니 속에 잠든 채
사려니숲으로 간다
마른 꽃들을 모아 그가
새를 묻는다
비자나무 옆이다
그칠 줄 모르는 눈
허공을 맴도는 큰부리까마귀들
눈은 내리고 갈 길은 멀고
-「어느 동박새의 죽음」전문
중앙 일간지에서 우연히 접한 사진 기사 내용을 모티프로 한 이 시는 새의 죽음이 전경화되어 있다. 눈은 내리고 가야할 길은 멀고, 새의 심장은 아직도 남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눈을 감는다. 바람에 눈발이 날린다. 눈 주위의 흰 태가 매화를 닮은 동박새의 검은 죽음과 흰 죽음. 새는그의 주머니 속에 잠든 채 숲으로 간다. 사려니숲이다. 겨울 사려니-숲은 오름과 오름 사이에 있다. 사려니는 화산 분화구가 비스듬하게, 트인 장소의 비밀이다. 그 비자나무 옆이 새의 영원한 안식처다. 그는 마른 꽃들을 주워 모아 무덤을 만들고 새를 묻는다. 새는 물음이다. 작은 새의 죽음에 또 한번의 죽음을 더할 양으로 큰부리까마귀들이 허공을 맴돈다. 그칠 줄 모르는 눈과 그칠 줄 모르는 물음들. 동박새의 죽음으로 봄이 오리라. 꽃은 다시 피리라. 문학은 생의 온기다. 그의 새가 동박이라면, 나의 꽃은 동백이다. 겨울에서 봄 사이 그 꽃이 피어나기 위해 제의와 어린 희생이 필요했다.「꽃, 동백」이란 제하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마침내 꽃이 피고 나는 울었다/ 그 울음의 물방울 같은 아이를/ 차가운 산 땅에 묻고/ 깊이도 모를 땅 끝의 끝에서/ 슬픔의 뿌리는 죽지 않고 되살아나/ 나는 울었다 지금 나의 뜨락은/ 그 꽃으로 화안하다/ 내가 사는 목조 건물은 지금/ 그 가슴 속 지울 수 없는 상처의/ 꽃으로 눈이 부시다이 시는 오래 전 내가 대명동 목조 건물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겨우내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분다. 마침내 마당 한 켠에 핀 동백꽃. 당시 내가 사는 집에는 대학 병원이 가까워서 멀리 사는 친지 여동생이 출산을 위해 미리 와 있었다. 하지만 어린 생명은 태어나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생살을 찢는 아픔도 잠시, 아이의 태胎는 차가운 겨울산에 혼자 잠들어야 했다. 그때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순간, 마침내 꽃이 피고 나는 울었다. 꽃은 어떻게 피어나는가. 피어나기도 전 어떻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가.「당신을 보았습니다」와「빈집」의 경우도 죽음 주제의 연장선에 놓인다.
두충나무 아래/ 어머니를 묻고/ 돌아온 날 밤/ 바람은 좋이 없어도/ 바람의 소리는 방 안 가득/ 떠흘러 알 수 없는 고요와 슬픔/ 삶의 신비가 텅 빈 공간을/ 메우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차오를 즈음/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깊은 산속 두려움에 떨고 있을 당신// 여름과 가을 사이/ 두려움과 떨림 사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전문 ①
빈 집에서 켈트 음악을 듣는다
벽시계와 검붉은 줄이 있는 침대 사이
에드바르트 뭉크가 있다
말할 수 없는 태풍 콩레이의 밤이
지나고 다시 바람이 불어
고요한 백자 속 여뀌 무늬
누군가의 장례 누군가의 혼례
너머로 무엇이 가고 오는가
-「빈집」전문 ②
①의 경우, 어머니를 고향집 뒷산에 묻고 돌아온 어느날 밤이었다. 나는 빈방에 홀로 앉아 향을 사루고 훈塤으로 된〈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물과 불과 공기와 흙이 뒤섞여 마침내 천상으로 화한 소리다.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게 슬픔의 정서라면, 슬픔은 미완의 정념이자 흐름이다. 부재와 상실의 끝에서 나는 운다. 알 수 없는 고요와 슬픔이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차오를 때, 나는 당신을 본다. 계절과 계절 사이, 두려움과 떨림은 인간 실존의 운명이자 상황이며 조건이다. 일찍이 만해 선사가 궁핍한 시대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 당신을 보았다면, 나는 눈물 없는 눈물과 알 수 없는 고요와 생의 신비 속에서 당신을 본다. 시는 당신과의 만남이다. 당신은 죽음의 사랑이며 사랑의 죽음이다. 영원의 순간이며 순간의 영원이다. 그런 당신에게 오늘은 편지를 쓴다.
어머니 당신의 손을 놓은지도 벌써 십 수 년이 지났습니다. 꿈같은 세월이 흘러 이 자식도 이제 이순의 나이가 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세상 이치는 여전히 멀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며칠간 고뿔이 심해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음양이 서로 반인 춘분 지나 오늘은 조심스레 문밖을 나섰습니다 양지바른 언덕엔 잔디가 웃자라고 먼 산을 에돌아 강물이 흐릅니다 저 하늘 두우가 되고 싶어 그 빛의 소리라도 듣고 싶어 지상의 별자리를 돌고 돌아 돌에 새겨진 천부경 여든 한 자를 가만히 입으로 되뇌어 봅니다 그러다가 나무 의자에 걸터 앉아 쉼을 얻고 보니 등허리가 저리도 따사롭습니다 낮과 밤인 어머니 당신의 나라에도 꽃은 피고 봄이 왔는지요 다음 주말에는 좀더 멀리 집을 나설 요량입니다
-「봄편지」전문
한편, ②의 경우는 지난 여름 태풍 콩레이 소식이 들려오던 때의 일이다. 휴일 집에는 혼자 남아 있었다. 제대로 쉴 요량으로 켈트 음악을 듣던 참이다. 책상 위에는 E․뭉크의 그림〈침대와 시계 사이에 서있는 자화상〉이 놓여 있었다. 죽기 바로 직전 그렸다는 자화상에는 화가 자신으로 지목되는 쇠약한 노인이 침대와 벽 시계 사이에 서 있다. 침대 위에는 검고 붉은 줄무늬가 쳐져 있다. 태어난 순간에 이미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뭉크는 자신의 고백처럼 미술이라는 여신에게 충실했고, 여신은 화가에게 충실했다. 창밖은 바람이 불어 고요하다. 언젠가 보았던 백자와 거기 새겨진 여뀌 무늬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사랑을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정녕 가고 오는 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왜 모든 쓸쓸한 것은 집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가.
3. 비非와 현玄의 사유 이미지
비非와 현玄은 단순한 부정이나 모호함이 아니라 부정의 생성과 모순의 일치다. 그것은 무엇과 어떻게 이전에 왜why의 문제에 속한다. 인간에게 말한 또하나의 인간이 시인이라면, 시적인 것은 다른 것에 있다. 타자와 비존재와 비장소 등이 그러하다. 시는 비非라는 존재와 장소를 말한다. 그것은 은현隱現이며 부재하는 현존이다. 경계의 경지다. 그런 사유 이미지는 최근 내 시와 시론의 두드러진 관심사이기도 하다.「흐름」도 그 중 하나이다.
마음이라는 동굴엔
고요와 흐름만이 있다
유리 너머 유리
사이
무지개 다리
끝에는
조약돌의 흰그늘이 있다
바람도 노래도 없이
가늘게 떨리는 나뭇잎
인도에서 만난 장수풍뎅이는
등이 검다
알 수 없는 빛과 소리의
흐름 그리고 몰입
차크라
내 마음의 수레바퀴
-「흐름」전문
「흐름」은 마음의 현상(학)과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힐리언스 선마을에는 선향 동굴이라는 이름의 명상 공간이 있다. 검고 둥근 마음의 외딴 집에는 오로지 흐름과 몰입만이 있다. 가운데 터진 창으로 내다보이는 나뭇잎과 조약돌. 아침 햇빛과 유리의 사이가 만들어 낸 무지개를 보며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한낮의 더위로 인도에서 말라 죽은 장수풍뎅이의 등을 생각한다. 작열하는 태양에 모든 것을 내어준 미완의 생은, 검은-흰 빛이다. 마음이라는 동굴에는 빛과 소리가 산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다. 명상 도구인 주발 싱잉볼에서 울려 퍼지는 옴OM의 소리. 소리의 파문 속에서 나는 빛과 어둠의 경계를 본다. 흰그늘의 아름다움이다. 집을 떠나 길 위에 처해 있는 나는 마음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수온受蘊을 느낀다. 어둠의 빛이다. 나는 없고, 흐름과 흐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시의 참된 현실성Wirklichkeit이 느껴진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것이다. 이어서「비가 아비가 있느냐」를 보기로 하자.
어린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애수
종려나무 가지 흔들며
호산나호산나 외치는 뭇사람의 죄를
공중파로 전해 듣는다
네거리를 지나는 차가
모퉁이를 돌자
분분히 날리는 꽃잎
그의 죽음 그의 부활이 코앞이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물음의 비애는 아비 상실에 있다
그날 그 저녁의 훈(塤)에 있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전문
*구약 욥기서 38:28
부활절 주일을 앞둔 시점이다. 나는 벚꽃이 피었다 진 네거리를 지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도 바로 이 맘때였다. 달리는 차 안의 라디오에서 부활절 강론이 펼쳐진다. 나는 부활의 사건 보다는 죽음과 슬픔의 감정이 앞서 있었다. 어제 같이 만개한 꽃이 간밤의 비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지고 마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과 부활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어머니의 상실로 인한 슬픔과 봄날의 생명. 특히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라는 욥에 대한 여호와의 말은 근원에 대한 앎이자 삶이다. 나귀 탄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소리 높여 외쳤을 때 그 환대 속에는 이미 수난과 죽음이 예비되어 있었다. 상실과 회의가 삶의 경이로 화해지는 순간에는 부활이라는 음성이 있다. 저녁이 있다. 이런 부활의 엘레지에는 사이라는 현이 있다.
배롱나무 근처
그늘에서의 일이다
한여름 오후 하나인 듯 여럿인 듯
매미 울음이 지축을 뒤흔드는 절집 마당
참새는 내려앉다 말고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때아닌 법고가 울린다 개울물이 저리 맑다
어깨 너머로 푸른 나무 푸른 하늘이
예 그대로인 것을 그가 넌지시
일러 준다 꽃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나는 비非 아니
나비가 되어 버린
나반존자의 하늘
구름이 희다
체에 거른 바람이 건듯 분다
운문을 나서니 운문이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
-「운문」전문
어느 해 여름 청도 운문사에서의 일이다. 시가 언어의 사원이라면, 절집 만한 시의 공간도 없다. 정오의 나무는 푸르고 꽃담이 저리 아름답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때마침 법고가 울린다. 등뒤로 들리는 개울물 소리에 하늘이 맑다. 매미 소리가 지축을 뒤흔든다. 참새 몇 마리가 나무 사이를 오가다 이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허공을 나는 나비, 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 득도한 나반존자가 운문에 있다. 운문은 운문이다. 나는 노래한다. 시가, 노래가 되는 것은 사이라는 현이다. 현하고 현한(玄之又玄) 사이 존재야말로 시와 노래가 거처하는 장소다. 현은 단순히 검다는 말이 아니다. 그윽하고 멀고 고요한 것, 신묘한 것이다. 그것은 도道와 마음, 갓난아이처럼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전체로서의 사유 이미지다. 시는 구름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구름 무늬이다. 구름 너머로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세계가 한순간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