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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오덕호목사/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사랑입니다! (눅 14:12-14)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세상이 할 수 없는 사랑을 하십시오.”
몇 주 전에 사역자학교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시간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모습 중에 하나는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린 시대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인들도 노예를 부렸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한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도들이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을까요?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대답해드렸습니다. 참 부족한 대답이지요.
저는 그 후에 이 문제를 더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만일 노예제도가 한창이던 19세기 초에 미국 남부에서 살았다면 노예를 부렸겠습니까, 안 부렸겠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를 부리고 있습니다. 사회지도자들도 노예를 부립니다. 기독교인들도 노예를 부립니다. 심지어 목사들도 노예를 부립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노예제도를 당연한 것처럼 설교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에서 살았다면 우리도 노예를 부리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노예를 더 많이 부리는 게 우리의 꿈 아니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교회가 사회의 풍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노예를 부리니까 성도들도 노예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교회를 지배하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진리가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게 아니라 세상의 악한 관습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어둡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사회에 워낙 강하게 퍼져 있으니까 교회도 성경을 따르지 않고 사회의 풍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게 바람직한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나부터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나부터 노예를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과거에는 종이 있었지요. 그래서 ‘추노’라는 사극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의 초창기 성도들 중에는 과감히 종문서를 불태우고 종에게 자유를 준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1903년 7월 ‘신학월보’라는 잡지에 강화 잠두교회 김우제 전도사님의 글이 실렸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교회에 김씨 부인이라는 80세 된 과부가 있었는데 가족은 없고 복섬이라는 여종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김씨 부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성경을 읽고 싶어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시고 우리는 모두 형제이기 때문에 종을 두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김씨 부인은 교회 성도들을 집에 초청하고 여종 복섬이를 불러다가 앉힌 후에 마태복음 18:15-20을 읽고는 종문서를 불사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금일부터는 너를 종으로 알지 않고 나의 딸로 아노라.” 그때부터 두 사람은 친모녀처럼 함께 교회에 다니며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이렇게 나부터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 안에서는 사회관습을 따르지 않고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는 종을 종으로 대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당시는 노예제도가 지극히 당연한 시대였지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8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래서 종들도 믿는 상전을 형제로 대했습니다. 심지어 종들에게 주시는 말씀 중에 상전이 믿는 형제라고 해서 세상에 나가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교훈도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2입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셋째, 성도들과 교회가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변화시키는 방법이 선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킬 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이며 합법적인 방법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노예제도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노예제도를 폭력으로 뒤집어엎지는 않은 것입니다.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없앤 것도 합법적인 운동을 통해서였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서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이 전쟁도 노예제도를 없애려는 사람이 먼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노예제도를 지키려던 남부연합이 먼저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사회의 악한 관습을 대하는 모습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사회의 악한 관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회가 노예제도를 인정하면 나도 노예를 부리며 사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악한 관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부터 노예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 안에서는 사회관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노예라고 해도 교회 안에서는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회를 선하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의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 것입니다. 단, 이때 악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선한 방법만 사용해야 합니다.
이 중에 첫 번째 모습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 사회의 악한 관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 모습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부터 사회의 악한 관습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의 악한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한 관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와 말씀과 모범과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의 악한 관습을 폐지하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했지요. 왜 그렇게 말씀드렸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이 노예제도를 좋아한다고 우리도 노예제도를 따른다면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일 것 아닙니까? 세상이 사치를 추구한다면 우리도 사치를 추구할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직분을 얻으려고 서로 경쟁한다면 교회에서도 직분 때문에 서로 경쟁할 것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가 사회의 악한 관습을 따르게 되면 신앙도 잃고 교회의 본질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의 악한 관습을 따를 것이냐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이냐에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웃 사랑의 중요한 모습을 한 가지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많이 강조했을까요? 짐작이 되시지요. 우리가 오늘 배우는 이웃 사랑이 세상의 관습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오늘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전혀 말씀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네 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안식일이라도 어려운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손님들이 잔치의 상석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잔치에 초대받으면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주인에게 잔치를 베풀면 친척이나 부자를 초대하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절대 거부하지 말고 꼭 참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 중에 세 번째 교훈입니다.
이 네 가지 가르침을 보십시오. 전부 사회의 관습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는 교훈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것도 당시의 사회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당장 죽을병이 아니면 안식일에 치료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안식일을 잘못 지키는 악한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관습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관습은 종교적인 관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교회의 잘못된 관습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잔치에서 말석에 앉는 것도 당시 사회의 관습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잔치의 자리에 다 순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베풀었을 때 친척이나 부자는 초대하지 말고 비천한 사람만 초대하라는 것도 사회관습에 완전히 어긋나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습 중에 하나가 바로 상호주의였습니다. 내가 남에게 초대를 받았으면 나도 남을 초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줬으면 나도 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호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관습이지요. 누가 나의 애경사에 부조를 했으면 나도 그 사람의 애경사에 부조해야 하지 않습니까? 또 내가 부조했으면 그 사람이 나에게 부조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부조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대체로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대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관습을 따르지 말고 나에게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는 사람을 대접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살기가 쉽습니까? 교회의 나쁜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게 쉽습니까?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악한 관습을 거부했다가 파문을 당하고 심지어 사형까지 당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예수님도 당시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덤벼든 것 아닙니까? 사회의 관습대로 높은 자리를 찾지 않고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은 쉽습니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데요? 사회의 관습대로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을 대접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어려운 사람들만 도와준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이지요. 이 세상에서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번째 교훈에서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 교훈은 잔치 비유입니다. 잔치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초대했는데 어떤 손님은 밭을 사서 못 오겠다고 거절합니다. 어떤 손님은 소를 사서 못 오겠다고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해서 못 오겠다고 거절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쳐주십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시는데 사람들은 세상 욕심과 쾌락을 따르느라고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막상 하나님이 초대하시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번째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세상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쳐주셨지만 사람들은 세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상 관습만 따르지 하나님의 뜻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교훈은 우리가 구원의 축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세상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조건 세상 관습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세상의 미풍양속은 따라야 합니다. 부모님의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모여 잔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본문은 부모님 생신 잔치에도 가족은 초청하지 않고 불우이웃만 초청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고 가족을 돌봐야 하고 친구들과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 정당한 친교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잔치에 부자 친구도 초청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이웃을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이웃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웃 사랑은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람을 내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 누구를 도와주겠습니까? 여러분은 추운 겨울에 난로가에 가면 몸의 어느 부분을 불에 쬡니까? 손이나 발같이 따뜻한 옷을 입지 못해 추운 부분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부유한 사람을 대접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세상의 관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관습을 따르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대접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물질로 도울 때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만이 이웃 사랑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쓴 물질만 실제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풍족한 사람을 위해서 쓴 돈이 그에게 무슨 물질적인 도움이 되겠습니까? 둘째,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쓴 것만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를 위해 돈을 쓸 때는 아무래도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 이것을 아주 강력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사치스러운 삶을 살면서 날마다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날마다 잔치를 했다면 누구를 대접했겠습니까? 자기 친척, 부자 친구,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을 대접했을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에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를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도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서 좀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뭘 알려주라는 겁니까? 자기처럼 살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몰라서 그렇게 살다가 지옥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나사로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형제들에게 성경이 있으니까 성경만 보면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경만 읽으면 누구나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처음에 소개해드린 김씨 부인 아닙니까? 김씨 부인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성경을 읽으려고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글을 익히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종을 해방시켜줬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대접한 것입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기에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종을 해방시키라고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김씨 부인은 설교가 아니라 성경에서 이것을 배우고 시행했습니다. 왜 목회자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았을까요? 당시 사회에서는 너무나 엄청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시험에 들까봐 그런 것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알려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많은 성도들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부자처럼 지옥에 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웃 사랑의 핵심적인 특징을 한 가지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은 부유한 사람을 대접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습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산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과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부터 이렇게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금년 여름신앙수련회 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온 교회가 새로운 결단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게 우리교회가 소명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도 언젠가는 교인들을 위한 예산은 파격적으로 줄이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예산을 과감하게 늘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아 그렇게 결단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진짜 회개가 아니다.” 또 다른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계부를 보면 신앙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돈을 어디에 쓰느냐가 신앙의 모습입니다. 나와 가족과 부자와 권력자를 위해 쓰는 돈이 많으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는 돈이 많을 때 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관습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우리와 이웃이 함께 하나님의 큰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세상에 나가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세상의 관습을 버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대접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소명을 이루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생과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