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현주 작가의 장편소설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푸른사상 소설선 46).
역사적 사건의 간접적 피해자인 심진순 할머니와 불안한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신지수, 세대를 뛰어넘은 두 여성이 참 좋은 시간을 보낸 기록이다. 국가 폭력과 사회 재난이 개인의 삶에 끼치는 문제를 소상히 그려낸 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를 비추며 서로를 위로해주는 두 인물의 교류는 깊은 감동을 준다.
2023년 5월 6일 간행.
■ 작가 소개
2002년 평사리문학대상을 받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지원받아 창작집 『투망』을, 2020년 창작집 『불꽃선인장』을 출간했다. 함께 쓴 창작집으로 『코비드 19의 봄』 『기침소리』 등이 있다. 2016년 장편동화로 법계문학대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와 작가포럼에서 활동하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신지수와 심진순은 헤어질 때면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 마법에 걸려 함께한 시간이 무조건 좋은 시간이 되기라도 하듯……. 이 소설은 서른 살인 신지수와 아흔 살이 넘은 심진순이 자신들의 미래와 과거를 서로에게서 찾아내며 한때를 함께 보낸 시간의 기록이다. (중략)
많은 아픔을 안고 여전히 과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심진순과 현재가 고달프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하는 신지수지만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따뜻하고 즐겁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우정을 나누었고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말 ‘참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나는 작가로서 즐겁고 행복했다. 독자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참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 작품 세계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 각자의 짐을 지고 있다. 그 짐이 부당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일어난 다양한 사건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많았다. 그런 것들이 개인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개인의 잘못보다는 국가의 폭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피해로 불행을 겪는 인물이다.
이 작품 속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부모, 자녀, 약혼자, 친구 등의 많은 죽음이 있다. 사실 그들과 했던 경험과 아직 여기 남아 있는 인물들과의 그 많은 죽음 속에서 현실에 있는지, 또 다른 세상에 있는지 혼란스럽다. 그들의 죽음으로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삶의 환영을 본 듯하다. (중략)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은 나름대로 다 불행하다는 명제를 가지고 작가는 그 불행을 어떻게 극복하고 ‘지금, 여기’를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느냐에 서사의 초점을 맞춘다.
- 이덕화(소설가, 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중에서
■ 작품 속으로
-정말 백합 겉었제. 청순하게 생긴 얼굴에 마음씨는 또 얼매나 고왔다꼬. 인자 저승 가몬 만날란가. 우리가 시누 올케 사이가 될 뿐했제. 그랬더라몬 여러 사람 인생이 바낐…을 낀데. 그눔의 전쟁이 들어 말칵 다 망친 기라. 봄에 약혼하고, 그해 가을에 혼례를 치룰라꼬 했는데 난데없이 육이오가 터지뿌는 바람에……. 그 대여섯 해 전에는 우리 오빠가 학도병에 끌리나가 죽어삐고. 참말로 에리븐 세월을 살았다. 에휴…….
태평양전쟁, 6·25사변. 물론 들어보긴 했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내게 여겨지고 있는, 그 전쟁들로 진순 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둘씩이나 잃고 인생이 바뀌었다니. 진순 씨의 한숨 끝에 묻어나는 삶의 고난과 비애. 숙연해지면서 슬픔이 내게로 전해와 가슴이 먹먹해지려 했다. 나는 애써 분위기를 바꾸어볼 요량으로 약간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구구, 우리 진순 씨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잘 견뎌냈으니 짱이에요.
(29쪽)
나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서 평상시처럼 진순 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진순 씨,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진순 씨도 앵무새처럼 내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지수 씨,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골목길을 걸어 나오며 나는 소망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들이 진순 씨에게도 나에게도 ‘참 좋은 시간’이었다고, 오래오래 기억되길……. (133~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