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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4:12-16)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본성과 성품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빛'이라는 단어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만약 이 땅에 빛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우리 눈이 쓸모없어집니다. 아름다움도, 푸른 하늘도, 너와 나도 아무 것도 모르고 살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절에 보면 사도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생명의 빛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 빛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자기를 이 빛이신 예수를 증거하러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9절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다고 하며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춰지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 빛을 미워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고 하는 말은 어둠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9절 이하에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무언가 꺼리는 것이 있으면 빛 앞에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자꾸 사람을 피하고 어두운 구석에 들어가려고 하고 모든 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위가 어두움 가운데 있으므로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두렵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스스로 자신이 빛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에서 배우는 그런 뜻의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차원 더 높은 생명의 빛이요 죽음에서 살리는 빛이요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빛입니다. 구약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빛이 있으라"입니다. 그리고 곧 "빛이 있었고"(창1: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빛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성품을 보여주는 빛이요 곧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것은 존귀와 위엄의 광채입니다. 사람들이 괜히 하나님을 거부하고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달리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또 빛이 있으라 하신 그분 앞에 어두움이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렵다는 말을 쓰기 싫으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빛이 특별히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얼굴에서 발견된 이 빛은 모든 어두움에 있는 백성들에게 비치는 빛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였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빛입니다. 이 생명의 빛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구원과 참된 소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구약에 보면 이 빛을 체험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는 80세 때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목격했습니다. 또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헤매일 때 어느 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시내산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40일을 금식한 후 하나님의 돌판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내려온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강렬한 하나님의 빛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빛을 두려워하므로 그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우리의 눈과 얼굴은 빛이 안납니다. 죄로 물든 눈, 분노하는 눈, 시기하는 눈, 살인하는 눈, 간음하는 눈. 우리 얼굴엔 아무리 찾아보아도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서 눈이 부셔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도 이 빛이 있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순식간에 변형됐을 때,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더라(마 17: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또 한 사람이 이 빛을 보았습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중에 강력한 하나님의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까" 묻는 바울의 물음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는 이 강력한 빛에 의해 눈이 멀어 3일 동안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비한 상상할 수 없는 빛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빛이 비춰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빛이 여러분 모두에게 더욱 더 강렬하게 비춰지길 원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얼굴, 어두운 마음, 죄악을 얼룩진 더러워진 마음, 여러 가지 가시로 상처받은 마음에 이 빛이 비추어져서 치료되고 기쁨이 있고 자유가 있어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1. 예수님은 요한이 잡혔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12절)
12절,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때를 설명합니다. 세례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공생애가 시작된 겁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과 같이, 곧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한 그대로 세례요한은 사라지고 이 땅을 구원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 달과 별들이 사라지듯,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가 되니 흔연히 떠나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이 땅에 와서 자신의 영예를 버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사명은 그 사람이 이 땅에 보내어진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어진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돈 벌어서 잘 살다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바로 깨닫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백의 천사로 불리우는 나이팅게일은 서른살이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가 그의 밋숀을 시작한 날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습니다.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간호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드림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에게 기자가 와서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깨달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사명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거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은 돈버는 것, 사업하는 것,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명은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곡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속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바로 깨닫고 그 사명에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톤은 말하길 "사명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사명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례요한은 의를 위해 생명을 걸고 외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명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불의가 판을 치고 가장 어둠이 가득할 때 빛이신 주님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십니다. 영적으로 볼 때 어둠이 온통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 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어둠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덮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빛의 사자들인 성도들이 일어나야 할 때가 된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부족하지만 세상의 빛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생명의 빛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듯이 우리 모두도 이제부터 빛의 사명을 깨닫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빛의 사자의 사명을 다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13-15절).
13-14절,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2절이 때의 문제라면 13절은 장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죽은 후 공생애를 시작하신 장소가 갈릴리 가버나움입니다. 13절에서는 '스볼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이라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라고 했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한 지파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두 지파는 갈릴리 북쪽을 분배받아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의 땅과 접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자연히 이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중심에서 먼 변방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그 두 지파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주류 세력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적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땅은 자연히 소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솔로몬왕 때 성전과 왕궁을 20년에 걸쳐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공사를 마친 후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20개를 대가로 주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 물건 값으로 주어버릴 만큼 갈릴리 땅이 중앙으로부터 소홀하게 여겨졌다는 증거입니다. 그 후에 팔레스타인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에 의해 차례로 정복당하고 갈릴리 지역에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반복되면서 혼혈인종, 혼합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하찮게 생각되던 땅인데, 그나마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 유대인들 보기에 이방인들과 혼혈 족속이 되어버린 갈릴리 사람들은 얼마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겠습니까? 주님은 지리적으로 변방이었고 사회적으로 비주류에 속했던 갈릴리에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가장 약한 자를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신 7:7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강한 민족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고전 1:26-29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세상에서 약하고 미련한 사람들, 세상의 변방인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중심 세상의 주류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화시키실 때 백향목이나 포도나무, 감람나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열매도 없고 기름도 없고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하찮은 떨기나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찮은 떨기나무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니 위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비록 떨기나무처럼 하찮은 존재하더라도, 스볼론과 납달리처럼 변방이요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가치는 나 자신으로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으로 오신 그분으로 인하여 내 가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토기그릇처럼 시훤치 않더라도 보배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게 들어온 순간 나의 가치는 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치가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고후 4:7에서 이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 너무 자학하지 마십시오. 우리안에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들어와 생명의 빛의 사자로 우리를 삼아 주신 것입니다. 우리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가 보배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가 우리 자신을 보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들어와 계신 주님을 보고 담대하게 빛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흑암을 몰아내는 빛이십니다(16절).
16절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흑암에 빛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둠이 물러갑니다. 요 8:12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2:46에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물리치시는 분입니다. 어둠은 죄악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요 3:20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둠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빛을 비추면 됩니다. 빛만 임하면 자연스럽게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빛되신 주님을 만나면 어둠에서 해방됩니다.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사람도 빛 되신 주님을 만나면 전혀 어렵지 않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디언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캄캄한 굴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고, 별은 해에게 흑암을 보여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빛 되신 주님이 계신 곳에는 어둠이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났을 때 믿지 않는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믿는 예수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알아?, 몰라. 예수님이 설교한 것이 몇 편이나 되는지 알아? 몰라, 자네는 도대체 예수님에 대해 무얼 아는가? "잘 몰라. 그러나 내게 나타나는 일이 많아.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술주정꾼이었잖아. 월급을 모조리 술값으로 쓰느라 빚만 졌잖아. 또 내가 퇴근할 때가 되면 우리 가족들이 나를 피해 여기저기 숨는다고 뿔뿔이 흩어졌잖아. 내가 얼마나 나쁜 남편이었고 나쁜 아빠였는지는 자네도 알았잖아. 그러나 지금의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빚도 다 갚았다네. 또 내가 아내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퇴근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네. 지금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다네. 이것이 증거가 아니겠나."
이분 속에 주님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이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흑암을 몰아내는 빛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빛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빛입니다. 어둠이 온 세상을 덥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다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하셔서 어둠을 몰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빛의 근원은 예수님이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지하며, 죄와 허물로 죽어 가는 자가 바로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세상의 빛이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이방인의 빛으로 불리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명인 것입니다.
이 빛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의 나라를 세우고 빛의 나라인 하나님나라를 확장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