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읽어보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서 크게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견고한 성 여리고는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무너뜨리십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중요한 것이 뭐냐, 그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용어가 무엇인지 집중해보는 훈련입니다. 여호수아 6장 전체를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은 일곱, 제사장 그리고 언약궤 세 가지입니다. 열 번 이상씩 나옵니다. 그 중 일곱은 뭔가?
4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데 필요한 작전입니다. 제사장 일곱 명이, 양각나팔 일곱을 들고 여리고를 돌아라, 일곱째 되는 날은 일곱 번을 돌아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숫자입니다.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일컫는 용어예요.
여리고는 왜 무너져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맞서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맞서면 누구든지 멸망합니다. 견고한 성 여리고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일곱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를 일곱 번 돌고 일곱 나팔을 붑니다. 이걸로 여리고는 완전 무너집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집니다.
왜 여리고가 먼저 무너져야 하는가? 여리고는 가나안 첫 성이고 가장 큰 성입니다. 요단강 건너면 곧바로 여리고가 처음 딱 버티고 있습니다. 이 견고한 성 여리고가 무너져야 가나안 모든 성을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 성이 함락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없어요. 약속의 땅은 엄청난 풍성함이 보장되어있다 해도, 첫 성 여리고가 버티고 있다면 승리를 누릴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여리고와의 전쟁이 의미하는 것이 뭘까? 성경 전체를 놓고 여리고 전쟁을 해석해보면 이건 하나님의 백성들이 벌이는 영적 전쟁입니다. 여러분 구약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싸움은 영적 전쟁이라고 풀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전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전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견고한 여리고는 뭐냐? 사실 내 속에서 하나님과 맞서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내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이예요. 하나님과 맞서고 대적하고 거부하는 옛사람, 마치 견고한 성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도 얼마나 끊임없이 하나님과 맞서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는지, 얼마나 성령을 거스르고 내 정욕과 내 욕심으로 사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서 완강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여리고의 모습이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내 자아의 실체를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견고한 성 여리고는 내 안에 있는 옛사람입니다.
다같이 1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리고 성의 모습을 묘사했죠. 어떻게 되어있다구요? 굳게 닫혀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여리고가 타이트하다, 타이트하게 닫혀있었다고 했어요. 굳게 닫힌 성, 절대로 항복하지도 않겠다, 출입하는 사람이 없어요. 문이 완전히 닫혀서 들어가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결사항전이다 이런 태도입니다.
그 성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애굽전차부대를 물에 집어넣으신 하나님을 알아요. 이스라엘을 광야 40년동안 하늘의 양식 만나로 먹이셨다는 것을 들어요. 그리고 요단강을 가르시고 이스라엘이 마른 땅처럼 건넌 사실도 들었습니다. 창녀 라합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하나님께 달려옵니다만 여리고는 안그렇습니다. 문을 굳게 닫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의 마음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굳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돌판같이 딱딱해요. 굳은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과 사상들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생각,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인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했어요. 로마서 8장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만드실 때, 정상적인 영혼의 기능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고 경외하는 기능이예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 속에는 마음에 견고한 진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생각이 무장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뭐냐? 거듭난 신자들 안에도 이 육신의 생각,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종치 않는 견고한 진이 부서지지 않은 채 우뚝 서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을 잘 몰라요. 아니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만 늘 세상에 나가서 패배하고 기가 죽고 무기력한 사람은 이 견고한 진이 자기 속에 얼마나 여리고처럼 버티고 있는지를 몰라요.
고린도 후서 10장이, 로마서 7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이것을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우리 안에는 예수믿은 이후에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이 있다! 우리 안에는 지금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죄성이 있다! 그게 너무 굳게 서 있다! 교회도 다니고 예배도 드리고 기도회도 참석하지만,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이 내 안에 있는지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뼈아픈 고뇌를 들어보실래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은 줄을 아노니, 여기서 육신이란 죄를 짓고자 하는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면 하기 싫어지는가 봤더니, 내 속에 죄가 살고 있어서 죄의 법이 나를 다스리고 내가 거기 복종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요.
바울사도가 깨달은 이것이 이거예요. 아 내가 왜 더 이상 믿음이 자라지 않는지, 왜 더 이상 성숙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그것을 내가 원하는데 왜 이것이 잘 안되고, 나 때문에 자꾸 내 주변사람들은 힘든지 이제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여리고 성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나면,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돌같이 완고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의는 가장 큰 여리고 성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자기 의가 많습니다. 나는 내 앞가름 잘해!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의가 많아져요. 그러고 남을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말로 하는 사람은 더 의가 많구요, 속으로 해도 역시 자기 의입니다. 이것이 그의 여리고 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게으른 사람도 자기 의가 큽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싫은소리 잔소리 안해!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의가 있어요.
교만한 사람은, 성격과 상관없이 순종을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명확히 보여도 그 말씀앞에 자기가 꺾어지지 않아요. 여러분 신앙이 잘 자라지 않고 내가 잘 변화되지 않는 이유를 심각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 깊은 곳에 굉장히 두터운 여리고 성벽이 서 있다!!
둘째, 견고한 성 여리고는 하나님앞에 무너져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 성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그 용사들을 네 손에 붙인다! 본래는 현재완료 형으로 되어있습니다. 내가 여리고를 너의 손에 붙였다! 이 현재완료 형은 뭐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결정으로 보면, 이미 일어난 사건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그 성을 무너뜨리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의 멸망은 운명적입니다.
견고하게, 타이트하게 문이 굳게 닫혀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는 문제로 어려워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을 하나님은 파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같은 모든 이론과 생각과 태도를 파하십니다. 여기서 파한다는 것은 무너뜨린다, 영어로 데몰리쉬한다는 말입니다. 불신앙이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한번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불신앙과 불복종의 태도를 가진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앞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는 사춘기 아이는 결국 뭘 선택할까요? 가출입니다. 아버지와 맞서보겠어! 난 아버지께 숙이기 않겠어! 이겁니다. 결국 권위의 문제 복종의 문제거든요. 우리인간이 하나님과 맞서서, 불신앙을 택할 때 그 태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싫어하는 마귀의 편에 내가 서는 것이예요.
이 전쟁에서 내 옛사람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마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않고 가나안 땅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명처럼 싹처럼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에서 승리와 평강과 담대함을 누려보지 못해요. 늘 무기력한 신앙입니다. 예배드릴 때 힘이 없어요. 기도하자고 말해도, 정작 할 말이 없어요. 기도시간이 지루한 시간이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의무적이 되고,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월요일날 아침에, 아무런 힘없이 지친 월요일을 맞이하면서 그렇게 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로 작정하셨다, 이 말씀을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옛사람의 본성과 그 증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아셔야 하구요, 그리고 난 후에는 정조준하여 마치 표적을 맞춰 넘어뜨리듯이 그것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분이 부서지도록 무너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강력은 견고한 진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사도바울은 완전히 전쟁용어를 사용합니다. 데몰리쉬한다, 파한다 이것은 성을 함락시키고 파괴시킬 때 쓰는 말이구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 라는 말은, 모든 생각을 포로로 사로잡아가지고 사령관앞에 항복하게 만드는 작전을 방불케 합니다.
그러니까 내 안의 옛사람과 싸울 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옹고집, 나쁜 습관, 성질머리, 날카로운 말, 빈정대는 입술, 수군댐 이런 것들은 오랫동안 내 나이만큼이나 내 속에서 성을 쌓고 하나님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성령으로 내 안의 죄를 죽이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그 속이 완전히 여리고 성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가 하나님과 맞섭니다. 말씀에 전혀 복종할 마음이 없죠. 자기 판단으로 결정하고 자기의견이나 생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는 마귀가 자기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세상 신이 ‘그들의 눈을 가리웠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생활은 다 하는데, 하나님과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장님인 거죠.
영적인 사건, 하나님의 창조하심, 예수님의 구속,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 이런 일을 보거나 깨닫지 못하게 영혼의 기능을 정지시켜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마귀가 더 이상 그를 실효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그 영혼이 빛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남은 것은 내 안에 있는 여리고같이 견고한 진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뭔가?
지금 하나님 말씀이 선포될 때 내가 어느 부분을 저항하고 어느 부분에서, 완강한 태도를 보이는지 알아서 그것을 성령으로 부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옛사람, 견고한 진을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자기가 깨어질 때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셋째, 견고한 성, 여리고는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힘없이 무너집니다. 3절을 다같이 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고 견고해보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거듭난 신자의 삶 속에서 어떤 상태인가요? 육체의 소욕상태입니다. 매일 성령을 거스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가지면 성령께서 육체의 소욕을 약화시켜버립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견고한 여리고 성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견고한 여리고 성은 우리 바깥에 있는 어떤 성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오랫동안 내가 내것처럼 아끼고 사용하고 즐겼던 내 습관, 내 고집, 내 성질, 내 중독증세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15절을 볼까요? 일곱이라는 완전숫자를 기억하십니까? 여섯째 날까지 한바퀴씩 돌았고 드디어 이렛날이 됩니다. 이날은 일곱 번을 돕니다.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아요. 왜 일곱 번을 도는가? 그것은 완전숫자, 완전히 순종한다, 완전히 복종한다, 완전히 신뢰한다 이런 자세입니다.
일곱 번 돌면 여리고가 무너진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무너지는데 있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는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는 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면 그냥 무너집니다.
16절,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들에게 외칩니다. 큰 소리로 외쳐라 주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다! 오직 창녀 라합과 그 집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전멸시켜라! 여러분 케렘 전쟁 기억하시나요? 완전히 전멸, 파멸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우리 옛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체입니다. 어떻게든지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고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핑계대면서, 기도 안하겠다, 기도 못해 지금 너무 바빠! 내 성격은 할수 없어, 하나님이 말씀하셨어 그 말은 맞아 그런데 지금은 안돼, 이런 태도들이 바로 무너져야 할 여리고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20절입니다. 이 20절의 사건이 자기 인생에 있었던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성찰하여 자기 죄의 실체를 알고 통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0절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20절 다같이 읽습니다. 제사장이 나팔을 붑니다. 나팔소리와 함께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때 성벽이 무너져내렸습니다. 어떻게 무너졌다구요? 나팔을 불어요. 큰 소리로 외쳐요! 무너져내렸어요. 붕괴되어버렸어요. 생각해보세요. 나팔과 큰 목소리 이것으로 어떤 성이 무너졌다는 전쟁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무슨 전쟁입니까?
오늘 우리가 여리고 성을 보면서, 우리자신을 볼수 있기 바랍니다. 어떤 이는 그 견고한 성이 크게 부서져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아가 깨진 경험이 있고 어떤 이는 아직 없습니다. 자기 안에 거하는 견고한 진을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깨뜨리고 나면 그는 믿음의 큰 승리를 봅니다. 그리고 승리의 전리품을 얻습니다. 이 승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