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문화재의 신고와 보상금
(국보127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국보119호 금동여래입상-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칠순 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를 거느리고 막벌이 가장 노릇을 하던 가난한 강갑순 여인(당시 41세)이 18세의 큰아들 전병철 군을 데리고 마을 밖의 도로공사장에 나가 돌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은 야산 비탈이었다. 강여인이 아들과 둘이서 묵묵히 돌무더기를 헤치고 있을 때였다. 곡괭이에 널찍한 잡석하나가 덜컥 걸려 젖혀지면서 무심히 그 밑으로 시선을 보내던 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빛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눕혀져 있는 공간은 폭 30cm, 길이 40cm, 그리고 깊이가 30cm가량이었다. 잡석으로 급히, 그러나 정성껏 꾸며진 작은 석실이었다.
그날의 품일이 끝났을 때 강여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품속에 소중히 품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강여인은 부처님을 집안 깊숙한 곳에 꼭 간직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법에 따라 경찰에 가서 발견경위를 신고하고 물건도 바쳐야 할 것이라고 타일렀다. 가난했으나 그지없이 순박하기만 했던 강여인은 동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의면 지서에 신고된 강여인 발견의 매장문화재 금동불은 곧 경남 도당국에 보내진 후, 즉각 문교부에 보고 되었다. 그리고 수차에 걸친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와 불상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불로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미와 균형을 가진 이 의외의 고구려불은 특히 광배에 새겨진 '연가 7년' 으로 시작되는 4행 47자의 아주 귀중한 명문을 지닌 최대의 국보급이었다. 관계학계는 해방 후 땅 속에서 출현한 불상으로는 가장 큰 발견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다만 출토지가 그런 불상이 나타날 만한 절터도 아니며, 그럴 수 있는 불교 유적지도 아닌 점이 수수께끼로 남았다. 불상은 그해 12월 4일, 서울로 올라와 즉시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된 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동안의 법적 공시기간이 지난 1964년 10월 14일, 발견자인 강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특별히 문교부 장관이 수교하는 보상금 20만원을 받았다. 그때 불상이 출토된 땅의 임자였던 전형진(당시 56세)도 20만 원을 보상받았다. 지하 출토유물인 매장문화재의 국가 귀속과 함께 정부가 책정한 40만 원을 법에 따라 발견자와 반씩 나눈 금액이었다. 그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된 후 최대 액수의 보상이었다. 한편 강여인이 즉각 국보로 지정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연가 7년명'의 고구려 불상을 돌더니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키던 무렵, 같은 의령군의 봉수면 서암리에서도 높이 12.5cm의 '금동여래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다. 서암리에 사는 농부 엄필섭(당시 50세)이 강우술 소유의 논바닥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헤치다가 뜻밖에 발견했던 것인데, 발견자는 마땅히 자기 소유물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불상을 2년 이상 집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자, 경찰이 매장문화재의 불법 점유를 들어 법적으로 압수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2월의 일이었다. 불상은 곧 서울로 보내져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 국가 귀속이었다. 비록 스스로 신고하지 않았던 압수물건이긴 했으나 정부는 법을 몰랐던 발견자와 출토지 임자에게 12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켜 정부로부터 10만 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는 사례가 날로 잦아졌다. 그것은 일반의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반증이었다. 정부 행정망과 매스컴의 계몽도 컸다. 1964년 4월 12일에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향교리의 논에서 고려시대의 청동범종 하나와 기타 청동향로, 쇠솥,고려청자 등 모두 6점을 출토시킨 윤성복, 박광선 등 4명은 발견 유물을 곧장 당국에 신고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같은해 5월 27일엔 대구 시내의 육군 503방첩대 건물의 대장실 마루밑에서 전기 누전방지공사를 하던 전기공 백승원 씨가 8.15때 일본인들이 숨겨두고 갔던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그밖에 고려자기 조선자기 청동자기 등 142점의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여 1년 후에 14만 4천 원의 정부 보상금을 받았다. 백씨가 발견한 물건들은 지난날 대구의 그 건물에 살았던 악명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가 8.15을 전후해서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갖고 가고, 미처 가져갈 수 없었던 나머지를 마루밑에 감쪽같이 감춰두었던 것으로 해방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가지 일본에 살아 있던 오구라(당시 96세)의 반응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예전에 내가 살고 있던 집에서 찾아냈다는 물건들 중 일본 그림을 포함한 59점을 돌려달라"는 수작이었다. 그해 10월에 그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적은 오구라의 편지를 친절하게도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에 전해준 재일 교포가 있었다. 그때 "일본 물건을 돌려받고 싶으면 오구라 자신이 일본에 반출해 간 수천 점의 중요한 한국문화재부터 먼저 돌려 보내야 할 게 아니냐?"고 누가 반문하자 이아무개라는 쓸개 없는 교포는 자기가 답변할 성질이 아니라고 회피하여 빈축을 샀다. 20년 가까이 교묘하게 은닉돼 있던 오구라 수집품의 일부는 그것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과거의 적산문화재로 국가에 귀속되어 경주박물관에서 모두 인수했다. 고철수집상이던 윤태진, 윤석진 형제가 휴전선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의 영농지역에서 높이 약 37cm의 고려동종과 1369년에 만들어 졌다는 44자의 귀중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반자'를 철물탐지기로 출토시킨 것은 1966년 1월 17일이었다. 경기도 파주에 주소를 둔 잡상인이었던 윤씨 형제는 비록 생활은 가난했으나 마음씨가 착했다. 그들은 철물탐지기에 걸려 나온 옛날 유물인 동종과 반자를 들고 자진해서 서울의 덕수궁미술관(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을 찾아갔다. "보통 고철로 팔아넘기기엔 좀 아까운 귀중한 옛날 물건 같아서 갖고 왔으니 중요한 것이면 나라에 바치겠다." 윤씨 형제의 선량하고 소박한 말이었다. 미술관엔 마침 이호관 연구관이 있다가 물건을 인수하고 그들에게 국가 보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1년 후, 그들은 35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윤씨 형제가 고려동종과 반자를 출토시킨 지 8개월 후인 9월 6일에는 또 전남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돌담을 헤치던 정병임이란 사람이 역시 고려시대의 동종 하나를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한 수 1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5월 9일에는 '연가 7년명' 의 고구려 불상과 또 하나의 '금동여래입상' 을 출토시킨 경남 의령지방의 칠곡면 외조리 뒷산에서 조선 중종 23년(1528)에 꾸며졌던 왕자 숭수아지씨의 태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왕실의 백자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을 기록한 태지판이 2장이 나타났다. 발견자는 마을의 전용중 씨였다. 그는 산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태신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고스란히 당국에 신고하여 12만원의 보상금을 탔다. 1964년 10월에 서울의 김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박아무개 등의 도굴꾼을 시켜 전국의 조선 왕실태릉을 계획적으로 도굴, 수십 점의 품질 좋은 백자항아리를 불법적으로 꺼내 암매해 먹다가 적발당해 모두 구속되었던 사건을 상기할 때 잊혀졌던 의령태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법적인 수습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매장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기록적인 보상은 1967년 1월 28일에 서울 성북구 삼양 1동 108번지의 산비탈에서 백제불로 추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었을 때였다. 발견자는 6년 전에 제기동 집을 화재로 잃은 후 삼양동 골짜기의 국유지에 집을 마련하고 살던 박용출 씨(당시 52세)였다. 전날 밤 꿈에 집 뒤의 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식구가 깔려 죽는 일을 당했던 박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도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아 장남과 함께 새삼스럽게 위험이 느껴진 쪽으로 깊게 하수도 공사를 착수했었다. 1m쯤 땅을 파 내려갔을 때였다. 괭이 끝이 금속물에 닿는 예리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출토되자마자 국보 제 127호로 지정되어 120만 원이라는 기록적인 보상금을 책정케 한 삼국시대의 걸작 불상인 높이 20.7cm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던 순간이었다. 박씨가 꿈 때문에 출토시킨 금빛 찬란한 보살상은 괭이로 맞은 옷자락 부분이 약간 부서졌을 뿐 완전한 상태였다. 떨어졌던 부분도 흙속에서 찾아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박씨는 며칠간 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불상전무가인 황수영 교수를 찾아가 평가를 요청했다. 황교수는 그 자리에서, '국보급의 놀라운 불상' 이라고 경탄하고, 속히 법적 절차를 밟아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발견자는 황교수의 말을 따랐다. 2월 7일,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놀라운 삼국시대 불상은 발견자의 자진 신고에 따라 매장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되었고, 이어서 즉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발견자 박씨는 문화재보호법 제 47조(매장문화재) 규정에 의한 1년동안의 유실물 공고기간이 지나자 책정 보상액이었던 120만 원의 절반인 60만 원을 받았다. (나머지 절반은 법적으로 출토지의 땅임자가 받게 돼있다). 1967년엔 100만원대의 보상금을 받은 매장문화재의 발견 신고자가 잇달아 나왔따. 정초에 서울에서 국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데 뒤이어 4월 18일에는 고철수집상 이영주 씨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철물탐지기로 동종 하나와 기타 유물을 출토시켜 당국에 신고하고 1년후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7월 6일에는 충남 대전시 괴정동 244-4에서 밭을 일구던 손용갑 씨가 땅 속에서 뜻밖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발견 신고하여 1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11월 10일엔 또 경북 금릉군 부항면 사등 1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주목할 만한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이때의 발견 신고자인 마을의 이관하 씨와 땅임자에게는 새로운 보상기록인 140만 원이 1년 후에 지급되었다. 문화재 관리국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96년 7월 현재가지의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 건수는 모두 4,304건이고, 보상 총액은 6억 4,850만 8,595원에 이르고 있다. 그중 한 사례로 1970년대 초반에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에서 13세의 어린이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높이 13cm)을 출토시켜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80만 원을 보상받은 일을 들 수 잇다. 행운의 어린이는 임계국민학교 6년생이었던 이춘달군으로 불상을 출토시킨 날짜는 1971년 6월 21일이었다. 이군은 그날 마을 뒷산에서 놀이터를 만드느라 땅을 파다가 불상이 나타나자 소중히 들고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당시 62세)에게 가져다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 불상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하면 정당한 보상금이 나온다는 문화재보호법 상식도 없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우연히 캐 온 불상을 갖고 있다가 엿장수에게 단돈 2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 사실이 강원도 공보실에 뒤늦게 신고되었다. 도 공보실에서는 즉시 불상의 행방을 수배한 끝에 마침내 그것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불상은 곧 서울의 문화재 관리국으로 올라왔고, 평가심의회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불상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발견자인 이군과 땅임자에게는 80만 원의 보상액이 책정되었다
***************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소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이구열) |
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원문보기 글쓴이: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