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뉴욕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당시 유행했던 주식투자을 했었는데 1029년 10월29일
뉴욕 월가를 강타한 검은 화요일의 주식폭락으로 인해 약국까지 처분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게된다. 어려운 시절 음악공부를 시작한 그는 1937년 그가 14살때 부모가 이혼을 하여
또다른 시련기를 맞는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언니와 함께 그리스로 가 외삼촌인
에프시미오스의 도움을 받아 1938년 그리스 국립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한다.
음악원에서 스페인 출신의 헬비라 데 히다르고에게 성악을 배우는데 히다르고는 칼라스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것을 알고 학비를 면제 받게 하고 과외로 개인지도를 해주며
그녀의 음악적 성장을 돕는다.
Maria Callas with her teacher Elvira de Hidalgo in 1954
칼라스의 아테네 생활은 극도의 궁핍한 생활이었고 어린나이에 아르바이트에서 번
적은 돈과 친언니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겨우 학업을 이어간다.
1944년 7년만에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이듬해인 1945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오페라단에서 단역을 맡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174cm에 91kg 거구의 몸으로 주목 받지 못하자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감량에 성공한다.
1946년 메트로폴리탄의 단장인 에즈워즈 존슨이 칼라스의 노래를 듣고 매료되어
1946/1947년 시즌에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푸치니 나비부인의 주역을 제의했으나 칼라스는
거절한다.피델리오는 영어 번역본으로 영어로 부르는 것이 싫었고 아직 81kg의 거구인
그녀가 15세의 가냘픈 나비부인 역을 하기 싫어서였다고 한다.1947년 이탈리아 베이스 가수
니콜라 로시 레미니가 베로나 오페라축제 예술감독인 조반니 체나텔로를 소개해주어
그의 주선으로 폰켈리의 라 조콘다 주연으로 케스팅되고 베로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공연해 성공적 데뷔를 한다.12월에 베니스에서 이탈리어로 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졸데역과 푸치니 투란도트의 주역으로 대 성공을 거두어 프리마돈나의 칭송을 듣는다.
베로나아레나 공연에서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28년연상 이탈리아의 부호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가고 곧 결혼까지 하게된다.
메네기니는 칼라스가 노래와 오페라에 전념 할수있게 모든 후원을 하고 메니져의 역할을 해
그녀가 세계적인 프리마돈나로 성장에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인
에방겔리아는 방송과 언론매체를 통하여 딸인 칼라스를 "마리아같은 여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며 비난하고 "내딸 칼라스"라는
책까지 써 인신공격하여 칼라스는 친정가족과 의절을 선언하고 연락을 끊어 버린다.
밀라노 라 스칼라좌에서 아이다역을 맡은 레나테 테발디가 갑작스런 병환으로 칼라스가
대역을 맡아 투입되고 그 공연에서 칼라스는 아주 큰 호평을 받으면서 명성을 얻게된다.
그 후 "청교도"의 엘비라 역,"아이다"의 아이다 역, "토스카'의 토스카 역으로 점점 명성을
넓이고 "노르마","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등의 주인공역으로 호평을 받으며 프리마돈나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1951년 라 스칼라좌에서 호평을 이어간 칼라스는 "노르마","메데아",
"안나 볼레나"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고 1952년 코벤트가든
초청으로 노르마,토스카로 영국 오페라에 데뷔를 해 대성공을 이루어낸다.
1954년 시카고 오페라,195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노르마로 미국에서도 명성을 얻어
1957년에는 메트로폴리탄의 주연으로 많은 오페라 공연을 하고 미국에서도 대활약을 한다.
1958년 1월 로마 오페라에서 노르마 공연중 몸이 좋지않아 약을 먹고 공연하였으나
통증과 약기운때문에 공연을 중간에서 그만둔다. 이로인해 이태리 청중들에게 맹비난을
받고, 라 스칼라에서도 피에타 공연중 감독 안토니오 기린겔리와 오랜 갈등으로 크게
다툰후 계약기간은 남겼지만 모든 라 스칼라의 공연을 취소해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의 루돌프 빙 총감독은 1959년 시즌 칼라스를 투입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해고를 통보한다. 남편인 메네기니가 나서서 유럽의 콘서트를 알아보고,
파리 오페라에서 초대를 받아 그곳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파리의 공연이 칼라스의 운명을 바꾼다.
이공연을 보려온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칼라스를 보고 매료되어 그후
남편이 있는 칼라스에 끈질긴 구애로 칼라스에 환심을 사 칼라스는 일생에 은인인
남편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미 사랑에 빠진 칼라스는 파리로
이주를 하고 오나시스와 또 다른 세계의 환경에 빠져 연습을 차차 게을리 하고
몸 관리도 철저하게 하지않은 상태에서 공연 회수를 늘려 많은 공연을 한다.
1965년 시즌에 파리,미국,다시 파리에서 노르마 공연을 다섯번 하였는데 이때 목에 피로를
느꼈으나 공연을 강행하였고 공연을 취소하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7월 연주를 강행하다
성대에 무리가 오게된다.
이는 오나시스와의 결별에서 온 충격과 겹쳐 음악인생에 큰 고비를 맡는다.
남편과 이혼까지 하고 사랑에 빠진 칼라스는 오나시스에게 모든 것을 쏟는다. 그러나
1963년 케네디가 암살 당하자 이전 부터 오나시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재클린 케네디에게 또
집요하게 구애를 하고 칼라스에게는 멀어진다. 그 무렵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아기까지
유산한다. 그 후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고 공연 도중에 또는 공연 사전에 연이은 공연 취소로
인해 비난이 쏟아진다.
1965년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 공연을 끝으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968년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 발표를 듣고 프랑스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1971년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칼라스는 영화 메데아에 출연도 하고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강의도 하는 등 활동을 하고 1973년 오랜 친구이자 옛 연인이던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미국과 유럽 순회 공연도 한다. 1974년 한국과 일본에서 공연을 하고
유럽에서 리사이틀 위주로 연주회를 갖지만 성대의 이상과 돌출 행동으로 또다시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프랑스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은둔에 들어가고 1976년
오나시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고 고독과 공허함 등에 시달린다.
결국 1977년 9월 14일 우울증 약물및 수면제 과다복용 등으로 인한 쇼크성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녀의 나이 54세였다.
한때 자살설이 돌아, 극심한 고독에 의한 자살이라고도 알려진다.
시신은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으나 여러 번 도난을 반복하다가 에게 해에 뿌려졌다.
전후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로 테발디와 함께 프리마돈나로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은
그녀만큼 저널리즘의 주목을 받은 가수도 드물다. 폭넓은 성역과 뛰어난 기교,그리고
훌륭한 무대 연기는 명가수 릴리 레만 이후 명소프라노로 높이 평가됨과 동시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중후한 이졸데 역에서 경한 루치아까지 충분한 역량을 발휘한다.
뛰어난 극적 표현과 완벽한 가창력은 어떤 다른 소프라노보다 앞선다.
수없이 많은 그녀의 음원들은 세계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현대에서도 사랑을 받고있다.
칼라스에 대한 비평은 호,불호가 존재하지만 그녀의 강렬하고 선이 굵은 목소리와
가창력,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카리스마적인 연기능력 등은 모두가 인정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도한 성격과 변덕스런 기질때문에 생전에 악평에 시달리지만,
사후 그녀가 이루어낸 결과물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나쁜 평가를 할수없는 것들이다.
그녀의 54년간의 생은 짧고 굵게 산,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 자체였다.
오페라 주인공처럼 살다 떠난 칼라스, 그녀가 음악인으로써 세상에 남긴 굵은 족적은
프리마돈나로써 가장 깊은 울림일수도 있을 것이다.
Notable recordings
All recordings are in mono unless otherwise indicated. Live performances are typically available on multiple labels. In 2014, Callas' label EMI Classics (now Warner Classics) released the Maria Callas Remastered Edition: her complete studio recordings totaling 39 albums in a boxed set remastered at Abbey Road Studios in 24-bit/96 kHz from her original tapes.
Verdi, Il trovatore, conducted by Guido Picco, live performance, Mexico City, June 20, 1950. In the aria 'D'amor sull'ali rosee', Callas sings Verdi's original high D flat, likewise in her 1951 San Carlo performance.
Wagner, Parsifal, live performance conducted by Vittorio Gui,RAI Rome,1950
Verdi, Il trovatore, live performance conducted by Tullio Serafin, Teatro San Carlo, Naples, 1951
Puccini, La boheme, conducted by Antonino Votto, studio recording for EMI, August–September 1956. Like her later recording of Carmen,this was her only performance of the complete opera, as she never appeared onstage in it.
Cherubini, Medea conducted by Nicola Rescigno, live performance at the Dallas Civic Opera in 1958; considered to be Callas's most notable performance of Cherubini's opera.
Ponchielli, La Gioconda, conducted by Antonino Votto, studio recording for EMI in stereo, September 1959
Bizet, Carmen, conducted by Georges Pretre, studio recording for EMI in stereo, 1964. It is her only performance of the role, and her only performance of the complete opera; she never appeared in it onstage. The recording used the recitatives added after Bizet's death. Callas's performance caused critic Harold C. Schonberg to speculate in his book The Glorious Ones that Callas perhaps should have sung mezzo roles instead of simply soprano ones.
Puccini, Tosca, conducted by Georges Pretre, studio recording for EMI in stereo, December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