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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사진속 건축물의 이름은 '이멜리(IMELI)'다.
하지만 이멜리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라면 더더욱 아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부러 1950년대 트롤리가 지나가는 흑백 사진으로 (펌)해 온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 당장 트빌리시 장미혁명 광장 인근에 가면 사진속의 똑 같은 건물이 라임스톤의 옅은 황금색을 띠며 웅장하고 번듯하게 그대로 서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의 이름과 용도가 바뀐 전혀 다른 건물로 변신해 있다. 그래서 굳이 아주 옛날 사진을 가져온 것이다.
내가 '루스타밸리 애비뉴'를 빠져 나가면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이멜리를 다시 쳐다보았던 것은........ 마치 일부러 되돌아 앉은것 같은 '푸쉬킨 동상' 때문이다. 리버티 광장 한 구석을 차지하는 푸쉬킨 공원에서 '왜 지금 푸쉬킨이 저렇게 구석진 자리에서 막혀진 공사장 담벼락의 낙서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이 여기 '이멜리'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나는 생리적인 이유를 핑계로 이멜리 건물 안으로 보부도 당당하게 실제로 들어가 보았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의 위용을 또다시 절실하게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아침 식전댓바람에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산책을 하던 중에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에 당당하게 안내까지 받으며 들어갈 수 있는 대힌민국의 위상을 또한번 여실히 절감해 본다.
여기는 정장을 입고 와도 행동거지가 변변치 못하면 현지인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알. 럽. 대. 한. 민. 국.
'이멜리(막스.레닌주의 연구소,Marx, Engels, and Lenin Institute )'는 1938년 완공 되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최고의 건축가였던 '알렉세이 슈세프(Alexey Shchusev)'의 작품이다. 슈세프는 여기 이멜리 건축에 애착을 느껴 건물의 설계뿐만이 아니라 직접 시공함과 동시에 내부 인테리어까지를 모두 손수 맡아서 했다. 혼신의 힘을 모두 쏟아부었던 건물이다. 전등이며 문의 손잡이며 방마다 가구까지 직접 디자인을 했다. 그만큼 20세기 소련의 건축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이멜리는 다분히 교과서적인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1991년 독립 이후에는 조지아 헌법재판소가 사용해 왔다.
2007년 조지아 정부가 이멜리를 외국의 거대 호텔 자본에게 슬쩍 팔아 넘겨버렸다.
조지아 문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비록 소련이라는 아픈 구시대가 남겨놓은 유산이지만, 역사적 가치를 넘어서 위대한 건축물로의 가치를 생각해서라도 이멜리는 결코 사라져서는 안되는 문화재라는 주장이었다. 트빌리시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몇발자국 떨어진 인근의 광장에서 장미꽃을 들고 시위를 벌여 부패한 독재자 세바르드나제 정권을 퇴진 시켰던 2003년의 '장미 혁명'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 띠를 만들어 공사장 출입을 저지했고 공사벽마다 스프레이로 철거를 중단하라는 구호를 써나갔다.
경제적 자주독립과 개방적 시장경제를 부르짖는 정치가들이 국유재산을 함부로 외국 기업에 팔아 넘기고, 그 과정에서 일부 재벌과 특혜를 나누어 가지면서 또 하나의 신흥 지배계급으로 도약하는 온갖 부조리에 국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는 중단 되었다.
문화계와 국민들의 새로운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국가와 외국 자본간에 이미 체결된 계약까지 되돌리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약간의 타협이 이루어 졌다.
건물의 전면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외형은 그대로 되살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20세기의 위대했던(?) 건물은 현재 장미혁명 광장에서 므츠바리 강변쪽으로 태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푸른색 호텔건물의 부속건물로 재건축 되었다. 이 부속건물의 용도는 '카지노'다. 조지아를 통털어 최고로 치는 '** 카지노'가 바로 이멜리 건물에 들어서서 영업을 하고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가 본 카지노는 정말로 정말로 화려하고 모두가 최고급 이었다. 정말로 어마무시 했다.
내가 알고 기억하는 이멜리의 모습은 건물 전면의 모습 뿐이다. 그래서 아주 옆면에서 삐끔 보이는 사진 외에는 별도로 찍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허상을 바라다 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푸쉬킨이 가로막힌 공사벽을 바라보는 건물에 대해서도 그런 이유로 관심을 가져 보았다. 어마어마한 부지에 어마어마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는 현장이다. 2년 전에는 완전히 공사가 중단되어서 사방에 철골 구조물이 녹이 슬고 자재가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한창 공사를 재개하고 있다. 바라보자니 그 건물 또한 거대자본에 의한 호텔과 카지노가 들어서는 것으로 보여진다. 공사 중단의 구호와 낙서가 사방에 즐비하다.
올드 시티의 한복판인 리버티 스퀘어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땅값이 가장 비쌀만큼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대단히 가치있던 건물이 놓여있던 자리였을 것이다. 주변 자료와 과거 사진과 지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번 외에는 알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
혹시나, 스탈린이 털어갔던 '트빌리시 은행'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신흥 독립국가로서 시장 경제를 급속하게 도입해야만 하고 자본을 축척해야만 생존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미 그런 시대를 경험한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하나의 교훈을 준다면......... 급속 성장은 그만큼 부정. 부패도 가속도를 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공익을 가장한 하이에나들이 머지않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우려를 미연에 방지해야만 할것이다. 한국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혁명이라는 것에도 '정당한 혁명'과 '그릇된 혁명'이 있다고 흔히들 말을 하지만........... 모든 혁명의 본질은 별반 다르지 않더라는 사실만은 꼭 명심해 주길 나는 간곡하게 바라고 싶다.
이곳에서 내가 가고자했던 다음 코스인 벼룩시장을 찾아가자면 당연히 우측 언덕길을 내려가서 강변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옳겠으나, 나는 좀더 가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필하모니 스퀘어(Philharmony S quare) 까지는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뮤즈(Muse)'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상하게도 이 아름다운 뮤즈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에게 누군가가 '굳이 조지아를 와야만 하는 이유' '트빌리시를 꼭 들려야만 하는 이유'를 꼽으라 한다면....... '뮤즈'를 만나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겠다.
'뮤즈(Muse)'라고 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이다. 춤과 노래·음악·연극·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이다.
나는 지금 그 뮤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녀는 트빌리시 콘서트 홀(오페라 하우스) 옆에 살고 있다.
내가 트빌리시의 뮤즈를 떠올릴때마다 항상 나와 똑 같았을 심정의 한 사람이 항상 생각이 난다.
그는 프랑스 사람으로 '20세기의 지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인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다. '인간의 조건'이란 대표작을 소장한 소설가 이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런 훌륭한 품성을 소유한 소위 지식인의 대표주자인 말로에게 치명적인 과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절도 전과였다. 그것도 국제 범죄사범이다. 이 전과 기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의 생애와 업적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그의 일생은 누가뭐래도 지성인 그 자체였으니까.......
20대 후반의 앙드레 말로는 동남아시아를 여행했다. 역사와 미술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였기에 상당히 오랜기간을 캄보디아에 머물면서 프랑스 유적발굴단이 앙코르 유적군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앙드레 말로는 정글 속에서 뮤즈를 만났다. 마치 트빌리시 길거리에서의 나 처럼 말이다.
뮤즈에 이름은 '데바타'였다.
성스러운 탑을 지키는 여자 수문장이었다.
힌두교 신화에 따르자면 문지기는 주로 남자였지만, 남자신 시바와 비슈누가 가끔식 여자신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풍만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유려한 몸동작의 데바타에게 앙드레 말로가 그만 빠져들고 만것이다.
'데바타'는 '캄보디아의 모나리자'로 불려지고 있다.
사흘 낮 동안을 앙드레 말로는 '반띠아이 쓰레이(Banteay Srei)' 사원을 찾아와 '데바타'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한가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상당히 거액의 돈을 마련하여 밀렵꾼에게 '데바타'의 부조상을 훔쳐올 것을 주문한다. 여러날 걸려서 마침내 데바타가 말로의 손에 들어왔다. 데바타를 손에 넣은 말로는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세관에 의해 짐 보따리 속에 숨겨 두었던 데바타가 발각되었다.
캄보디아는 물론 프랑스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앙드레 말로는 젊은 나이에 이미 프랑스 문화계의 찬란하게 떠오른 혜성이었던 때문이다. 이 뉴스는 곧 온 유럽에까지 펴져 나갔다. 프랑스 정계와 문화계는 '국가적 망신' 이라고 말로를 멸시하고 규탄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목말라하던 캄보디아는 약간의 벌금형으로 말로를 풀어주고 프랑스로 송환 시켜버렸다. 데바타는 다시 반띠아이 쓰레이로 돌아가 있던 자리에 복원되었다.
온 유럽이 들고 일어나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앙드레 말로의 절도죄는 사실상 별반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도대체 데바타가 무엇이기에' '데바타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앙드레 말로 정도되는 젊은 지성인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까지 범죄를 저질렀느냐' '데바타가 궁금하다' 로 이어지면서 너도 나도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군으로 서로 먼저 가겠다고 길다란 러시 행렬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꼭 그런 심정이다. 나도.
동남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그동안 수많은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그저 훌륭하고 아름다운 미술작품일 뿐이지 그것을 '갖고 싶다'라는 욕망으로까지 승화시킬만한 작품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런데 2년전 트빌리시를 걸어다니다가 아주 우연히 콘서트 홀 앞에서 (뮤즈)를 보게 되는 순간, 나도 한참 동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또 뮤즈를 찾아갔었다.
'가졌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여기 '뮤즈'라면 어떻게든 집으로 가져가서 크기가 있으니까 내가 매일 드나드는 길목 어딘가에 놓아두고 항상 보고 싶어진다.
이제껏 내가 소유욕을 가지고 바라보는 유일한 미술품이 바로 (The Muse)로 유일하다. 돈이 있다면 실물 크기로 복제라도 했으면 싶다.
이런 심정을 노래로 고백한다면 바로 '닐 세다카'의 노래가 제격이 아닐까?.
적어도 알드레 말로는 이런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 아마도.
'Oh my darling I love you so / You mean everything to me'
전혀 거부감이 없는 멋들어진 육감적인 포즈, 뇌쇄적인 볼륨의 풍만함, 도발적인 요염한 표정의 여신이 그곳에 살고있다.
르노와르의 그림에 들어있는 풍만한 여인상에 더하여 안젤리나 졸리의 요염함을 더하고 애슐리 쥬드의 지적스러운 멋을 더한다면 바로 저런 뮤즈가 탄생할 것 같다.
3D 프린터 기술에 의지해서 모조품을 하나 만들어 볼까?
뮤즈를 만나기 위해 멀리까지 나왔던 관계로 벼룩시장까지 가는 길이 상당히 멀어졌다.
골목길을 구경하면서 일단 장미 광장까지 되돌아 와서는 언덕 아래의 골목길을 다시 내려간다.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지만 어떻게든 낮은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가다보니 강변도로가 나왔다.
인도가 가다가 끊기거나 인도와 차도가 아예 구분이 안되는 곳들이 간간히 있어서 걸어가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열심히 다가오는 차를 향해서 손을 흔든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야 드라이 다리(Dry Bridge)가 저만치 모습을 드러낸다.
트빌리시의 벼룩시장(Dry Bridge Market)에 당도한 것이다.
이곳 벼룩시장은 좀 너저분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반면에 벼룩시장이 들어선 면적이 상당히 넓고 대부분의 상인들이 여유가 넘치며 친절하고, 코카서스 지역의 특색을 가진 상당히 많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고 거래된다. 생전 처음보는 물건들로 넘쳐난다. 현지인은 물론 여행자들로 항상 붐빈다.
내가 트빌리시 벼룩시장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곳은 미술작품을 노천에 전시하며 판매하는 시장을 가장 좋아한다. (No Poto)라는 소리를 전혀 안들어서 가장 좋고, 가끔은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구경 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노인 화가분들과 대화를 나눌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짜짜(손수 담군 보드카)를 얻어 마실수도 있다. 알콜 도수가 60도나 나가는 진짜 보드카 말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많은 인파로 붐빈다.
하긴 그래야 벼룩시장 맛을 제대로 느껼 볼 수 있는것이 아닌가?
--- 2018년의 벼룩시장 할머니. ---- 2016년에 만났던 할머니 모습.
저런 물건들이 실제로 거래가 될까 싶은 것들이 많이 눈에 보인다.
소련 시대의 유물인 군사용품들도 간간히 보인다.
2년 전 여행에서 반지 두개와 팔찌 두개를 샀던 할머니 노점상도 여전하시다. 아는 얼굴을 만나니 은근히 반갑기까지 한다. 2년 전에 비해서 물건이 늘었고 좌판도 더 넓어졌다. 장소도 벼룩시장 한복판으로 진출하셨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성업중이시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벼룩시장은 시간 가는것을 잊게 만들어 준다.
트빌리시에서 가장 무질서한 장소로 느껴지지만 그 속에 독특한 벼룩시장만의 깊은 맛 또한 느껴진다.
이제는 미술품 감상하러 발길을 옮겨야 하는데........
------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한 회분량으로 '트빌리시 도시여행'을 끝마치지 못할것 같다. 이미 너무 길어졌는데..... 아직도 갈곳은 많고.......
부득히 남은 트빌리시 여행은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나가야만 하겠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이어가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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