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 외 4편
송승안
호두를 굴립니다
굴곡지고 둥근 것이 손안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깰 수 없는 소리들
부딪히면서도 거슬리지 않으니 신기합니다
이번 설에는 찾아오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해외 사는 독신 아들 전화는 받았으나
지척에 사는 자식들은 전화도 문자도
손주들 사진 한 장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내 죄가 크다고 쓴 웃음을 지었고
세뱃돈 봉투는 며칠 가슴에 품고 있다가
돈은 빼서 본당 수녀님께 드리고
봉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렸습니다
여행 중에 휴게소에 잠깐 들르는 일행처럼
자식도 한 때 일행이었을 뿐이라며
고속도로에선 차가 너무 빨리 달린다며
일방통행이라 되돌아오기 어렵다며
기다림도 욕심인가
내 잘못 네 잘못을 따져보다가
하릴없이 호두를 돌려 봅니다
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
깊게 파인 내부에는 말 못할 어둠도 있겠으나
던져도 깨지지 않을 심지, 서러움의 굴곡을 다지며
모난 데 없이 여문 것이 손 안에서 구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 송승안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어머니는 올라가셨다
그 말로 모두들 한시름 놓았다
가신 곳이 중환자실이고
스스로 올라가신 것도 아니지만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신 것은 분명하다
왜 분명한지는 모두 생각이 달랐지만
한 숨 돌리고 밥이나 먹자고 했다
올라갔다는 말은
내려갔다는 말보다 잘한 일처럼 들린다
희망을 가져보자고 누군가 말했다
기다려보자고 또 누군가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
기다려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무심한 인공호흡기가 지키고 있는
저 단호한 분당 18회의 리듬
지난한 삶 날아갈까
간신히, 간신히 붙잡은 몇 가닥 줄
무력한 가슴에 흐트러지고
떨림 잃은 눈꺼풀
고름 눈물이 새는 줄도 모르고
희망과 기다림이
같은 의미인지 아닌지는 서로 묻지 않은 채
방문객 명찰을 건네받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환자실의 문을 드나들며
지금은 올 필요 없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삼삼오오 모여
숨어 있던 돌들은 또 얼마나 나올까요
- 송승안
농사짓는 오빠는 자꾸 쌀을 부쳐옵니다 낡은 가정용 정미기가 거르지 못한 티끌과 돌들도 섞여 옵니다 쌀을 씻을 때마다 수없이 물을 갈아 티끌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무수히 떠오르는 티끌을 보는 일이 버거운 앙금 같습니다 그것들이 내 깊은 곳의 혈관을 훑으며 곳곳에서 엉겨 붙기 때문입니다 목 멘 혈관이 터지면 전신이 내 피로 멍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밥을 짓는다는 것이 내가 사는 방식입니다 먹어야 산다는 불변의 변명 말고 아는 것이 없어서 입니다 무심히 씹다가 끝내는 깨무는 돌까지 삼키고 마는 까닭입니다 세상에는 쌀 말고도 먹을 것이 많고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라지만 쌀과 삶을 떼놓을 깨달음은 어디로 도망갔을까요 이번에는 오빠에게 쌀값을 부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속 좁은 혈관이 풀리거나 통증이 가시는 건 아니라서 요즘은 터질 것 같은 가슴에 철망을 심는 일이 흔하다나요 혀 밑에 묻은 니트로글리세린만으로는 부질없는 날것들이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어금니가 깨질 것 같은 충격을 견뎌내기 어려우니까요 아직도 쌀을 씻는데 아직도 티끌이 떠오릅니다 조리질로 일게 되면 숨어 있던 돌들은 또 얼마나 나올까요 그런데도.
죽
- 송승안
내가 나를 한 톨의 쌀알로 규정한 것은
껍질로부터 독립해서가 아니야
씨앗의 삶이 끝났기에
쌀알로서라도 의미를 가지고 싶었던 거야
쌀알로서 나는 변색되지 않고
고스란히 내 모습을 지켜내기로 다짐했어
누군가의 말랑말랑한 밥으로 죽기까지
밥이 되는 희생은 얼마나 희열이냐고
스스로 세뇌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어
그러므로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야
무언가가 나를 휘젓기 시작한 것은, 아니
내가 나를 휘젓기 시작한 것은
비상하는 텅 빈 박새의 날갯짓처럼
차갑던 것들이 뜨겁게 부풀어 올랐어
끓어오른 심장이 소용돌이처럼 돌다
마침내 터지고야 말았어
이상한 일이야
아무리해도 채워지지 않던 그 많던 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한 톨 쌀알로의 형체를 버리고 나니
모든 완고한 힘들도 사라지고 말았어
바람 때문에
- 송승안
손으로 움켜잡아도
나부끼는 머리칼을 모두 붙잡지는 못했어요
몇 가닥 머리칼은 흩날리기 마련이죠
그것들로 종일 정신이 어지러운 날이에요
엄마는 왜 그 바닷가에 나가냐고
파도에 쓸려나갈라 아서라 하지만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가 없잖아요
바다를 향해 가슴을 펴보고 싶거든요
너무 오래 웅크려있었잖아요
몸이 더 굳어지면 안 되잖아요
머리칼이 좀 휘날리기야 하겠지만
바닷가엔 바닷바람이 불기 마련이니까요
바람에도 텃세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짜고 날 선 것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내 머리칼로 회초리를 삼을 줄은 몰랐어요
내 머리칼이 내 뺨을 때리고 있어요
아무리 굵은 소금이 들러붙어도
내 머리칼이 쇠창살이 되는 일은 없겠지만
내 머리칼이 쇠창살이 아니라서
더욱 거세지는 바람의 기세
집요하게 눈꺼풀 속을 뒤집어요
아프도록 귓속을 후벼 파요
바람 때문에 걸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건물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내 눈동자로 커다란 유리창을 내고
내 머리칼에 맞아 내 뼈가 드러나면
하얀 뼈로 기둥을 삼아도 좋아요
으르렁대는 파도의 포말에 숨은
갈피 잃은 머리칼들의 그 끝을 잡으려면!
당선소감
송승안
삶을 들여다보는 작업으로 저는 글을 씁니다. 그러면 여러 모습의 내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주로 억압되었거나 비뚤어졌거나 잘 몰랐던 마음입니다. 그것들이 틈새로 흘러나오는 물처럼 새어나와 글이 되면 잃었던 말문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글은 서툴고 어눌한 발음과 같습니다. 그런 것을 감히 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글을 시라고 여겨 주시고 뽑아주신 분들과 ‘애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큰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점점 성숙해져 제 삶이 나름의 자리를 찾는 것과, 제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바람으로 제 글을 유심히 보아주신 분들의 수고와 정성을 시의 의미에 쏟는 거름으로 삼겠습니다.
약력: 경남 하동 출생. 보건교사로 은퇴.
주소: 경기도 화성시 꽃내음3길 16-8
이메일주소: sousan60@naver.com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