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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북한의 김일성은 남침(북쪽에서 남쪽을 침략함. 남진)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남한의 이승만은 북진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이승만은 일관되게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라고 합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북한이 6·25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한반도에 북한을 중심으로 한 통일된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서 1953년 7월 27일까지의 3년 전쟁이었습니다. 6·25전쟁은, 분명히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입니다. 광복 후 남한과 북한이 양분(둘로 나누거나 가름)되어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북한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수립(1949.10.1. 마오쩌둥)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1949)하였고,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여 태평양의 미국 방어선에서 한반도와 대만(타이완)을 제외함으로써,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중국의 마오쩌둥,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전쟁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어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을 돕던, 조선의용군(독립군) 출신들이 북한군에 편입됨으로써 북한군(인민군)의 군사력이 크게 증강됩니다. 전쟁 직전의 남한은 1949년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국방력이 매우 약해진 반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웠고 승리에 자신감을 크게 갖고 있었습니다. 전쟁 직전, 38선 부근에서 남북한 간의 잦은 소규모 무력 충돌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남침통일. 남진통일)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넘어 침략해 왔습니다.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한 것입니다. 멍청한 지도자는 적보다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허풍(너무 과장하여 믿음성이 적은 말이나 행동)이었고, 거칠게 말해 침략에 대한 대비는 별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1950.6.28)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말)였습니다.
한국 국군은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 잘 싸웠으나, 미리 침략을 준비한 북한군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여,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을 제외한, 나머지 남한 지역은 북한군이 점령하게 됩니다. 이에 국제연합(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연합군(유엔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습니다. 불행 중의 다행으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인 소련이 중국 문제로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불참했기에, 이사국(소련)의 거부권 행사 없이, 유엔군이 참전(전쟁에 참가함)할 수 있었습니다.
유엔군의 대부분은 미군이었습니다. 유엔군사령관은 미군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맡았습니다. 맥아더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3개월 만에 수복(되찾음. 1950.9.28)하고, 이어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습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을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반전(일의 형세가 뒤바뀜)시켰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시키고 1950년 12월 24일 압록강까지 진격합니다.
그러나 중국군(중공군)이 북한군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강 이남까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미군의 흥남철수작전도 중국군의 참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두 번째로 북한군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를 1·4후퇴라고 합니다. 1·4후퇴는 중국군(중공군. 중국공산당에 딸린 군대)의 공세(공격하는 태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을 말합니다. 중국군은 인해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인해전술은 우세한 병력을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투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방어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하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방어지역을 분단·고립시키는 공격 방법을 말합니다. 전쟁은 혼전(두 편이 뒤섞이어 싸움)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전쟁의 장기화로 양측 모두 피해가 급증합니다.
6·25전쟁은 자유진영은 한국군과 유엔군(미군 중심의 16개 국가)이 연합하였고, 공산진영은 북한국과 중국군이 중심이 되어 싸웠습니다. 따라서 6·25전쟁은 내전(국내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국제전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서로의 피해가 늘어나면서 전쟁을 멈춰야 할 필요성을 양측이 인식(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아는 일)합니다.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싸움을 더욱 크게 벌임)될 우려(근심과 걱정)도 있었습니다.
소련이 유엔에 휴전(벌이던 전쟁을 얼마 동안 쉼) 제의(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또한 휴전에 찬성했습니다. 이에 미군과 중국군이 양측의 대표로 휴전회담을 했고, 여기에 북한도 휴전협정에 찬성했기 때문에, 휴전협정에는 미국과 중국·북한이 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휴전협정 반대했습니다. 휴전협정 반대의 의사 표시로, 미국의 승인 없이 거제도에 수용되어있던 반공포로(유엔군에 잡힌 공산군의 포로들 가운데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이승만의 생각은 북진하여 멸공(공산주의·공산주의자를 멸망시킴)으로 통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전쟁 중인 쌍방의 협정에 따라 설정한 군사 활동의 한계선. 군사경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로 휴전 회담이 지연되기도 했지만, 1953년 7월 27일에 어렵게 휴전 협정(협의하여 결정함)이 체결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진영(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공산주의 진영(북한군과 중국군에 약간의 소련군)이 3년 동안 서로를 없애겠다고 미친 듯이 싸웠는데, 휴전협정의 결과는 ‘군사분계선을 협정이 체결되는 날까지의 전선(전쟁터에서 적과 상대하는 맨 앞 지역을 연결한 선)으로 한다.’였기에 양측은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3년을 싸웠는데 서로에게 인적·물적 피해만 남긴 채, 이미 있던 38선과 별로 차이가 없는 휴전선에서 휴전을 한 상태에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사람의 목숨. 사망 및 실종자) 피해는 대략적으로 양측 군인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100만 명 정도 됩니다. 민간인 인명 피해는 300만 정도 됩니다. 전쟁은 항상 군인의 피해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훨씬 더 많은 법입니다. 사망과 실종자만 400만 명 이상이니, 부상자까지 하면 1,000만 명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1950년 당시의 남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이고, 북한의 인구가 1천만 명 정도라고 하면, 3명 가운데 1명이 전쟁으로 인한 육체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3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가 생겼습니다. 군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가족이 흩어져 서로 생사(삶과 죽음)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되었습니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건물·도로·철도·다리 등이 파괴되어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되었답니다.
6·25전쟁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운, 이념(한 사회나 개인이 이상으로 여기는 생각이나 견해) 전쟁이었습니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이, 대리자인 남한과 북한이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6·25전쟁은 승자(승리자)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모두가 패배자였던 전쟁이 6·25전쟁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소중한 목숨을 던져 자유와 자본주의를 지킨 것은 분명하지만, 남한은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겨우 원래 있던 땅(영토)을 지켰을 뿐입니다. 북한은 남침으로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두 번씩이나 빼앗았지만, 남침통일(공산화 통일. 적화통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전쟁의 패배와 동족상잔(같은 겨레끼리 서로 싸우고 죽임)의 최고 책임자는 김일성과 이승만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쟁 패배와 동족상잔의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정적)에게 돌리거나, 이념과 법에 따른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적(정치에서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권력의 독재(권력을 차지해 모든 일을 상의 없이 독단으로 처리함)를 공고히(견고하고 튼튼하다) 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북한의 간첩(빨갱이)으로 몰았고, 김일성 역시 반대 세력을 반동 또는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처단했습니다. 이념과 그에 따른 분단이, 권력 독재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2024년 2월 현재, 남북한은 아직 휴전(정전) 상태입니다. 종전(전쟁이 끝남. 또는 전쟁을 끝냄)이 아니라, 전쟁을 하다가 잠시 쉬는 휴전(정전) 상태가 71년째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휴전 협정은 다른 말로 정전 협정이라고도 합니다. 정전(停戰)은 교전(서로 싸움) 중에 있는 양방(이쪽과 저쪽)이, 합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는 일을 말합니다. 정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유엔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맺은, 한국 군사 정전(잠시 싸움을 중단함)에 관한 협정(조약. 국가 간 또는 국가와 국제기구 사이의 문서에 의한 합의)을 말합니다.
한편 한국과 미국은 6·25전쟁과 같은 공산주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이를 위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3.10.1.)하였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것입니다.
6·25전쟁은 이념전쟁이었습니다. 이념은 생각입니다. 이념은 주의(이즘 ism)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에 싸운 전쟁이, 6·25전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자들을 용인(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정함)하지 못했고, 자본주의자들 역시 공산주의자들을 용인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인 미국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은 서로를 용인하며,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내가 상대를 부정하면 상대도 나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입니다. 6·25전쟁은 전쟁의 참혹(비참하고 끔찍함. 잔인하고 무자비함)함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전쟁이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들입니다. 전쟁영화에서는 군인들이 가장 많이 죽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군인들은 최소한 자신을 지킬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민간인(일반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울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역사는 훌륭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용인하기 어려우면 부정(그렇지 않다고 단정함)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이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국가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은 종교전쟁, 이념전쟁, 민족전쟁입니다. 이들 전쟁의 특징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전쟁은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든지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전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 가지가 뒤섞인 경우에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2천 년 이상 전부터 싸웠고,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상대를 용인하는 것, 그것이 남북한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념을 자극하여 집권만 하고,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무리들이 우리들 주위에 상존(아직 그대로 있음)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로 분장합니다.
6· 25전쟁(한국전쟁) : 1950.6.25~1953.7.27(3년 전쟁)
6 ․ 25전쟁(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정세)을 알아보자. → 광복 후 남한과 북한이 양분(兩分. 둘로 나누어)되어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자본주의 사상을 바탕)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9.9.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 →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10.1. 모택동 = 마오쩌둥) →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1949) → 김일성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전쟁 지원을 약속 받음 → 중국 공산당을 돕던, 조선의용군(독립군) 출신들이 북한군에 편입됨(북한의 군사력 증강) → 군사적으로 남한은 1949년 미군이 전부 철수한 반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웠고 전쟁 수행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 미국의 애치슨 선언 발표(애치슨 라인. 한반도를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함) →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1949∼1953)이 애치슨 선언에서 언급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 그 내용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즉 애치슨 라인으로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킴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비쳐져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켰고 6· 25전쟁 발발(갑자기 일어남)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후 애치슨 선언은 공화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철회되었다 → 38선 부근에서 남북 간의 잦은 소규모 무력 충돌 지속되고 있었음 →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의 군사력 증강. 국군의 경우 전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데 비하여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 15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온 북한군의 전투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넘어 침략해 왔어요(북한군의 기습 남침) → 서울 함락(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1950.6.28) → 우리 국군은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미리 준비한 북한군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여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낙동강 유역을 제외한, 나머지 남한 지역은 북한군이 점령함) → 이에 국제연합(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연합군(유엔군)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였어요(유엔군 참전). 유엔군의 대부분은 미군이었다(유엔군 사령관은 미군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맡음)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후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을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반전시켰다. 서울도 수복되었다(1950.9.28) → 1950년 10월 1일, 38선 돌파(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음) →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시킴 → 1950년 12월 24일 압록강까지 진격함 → 그러나 중국군이 북한군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면서(중국군의 참전. 1950.10.25),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한강 이남까지 밀려나게 되었다(1· 4후퇴, 1951.1.4로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함락 당함) → 중국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사람 바다. 무기나 전술보다 인력의 수적인 우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술. 우세한 인력을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투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방어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하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방어지역을 분단· 고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 전쟁은 혼전 상태로 접어들었다(전쟁의 장기화로 피해 급증) → 한국군 + 유엔군(미군 중심의 16개 국가) ↔ 북한군 + 중국군 + 소련군(부분적 참전) → 6· 25전쟁은 사실상 국제전이었다. →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우려, 소련이 유엔에 휴전(休戰. 교전국이 서로 합의하여, 전쟁을 얼마 동안 멈추는 일) 제의(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임 → 유엔군과 중국군의 휴전 회담 시작 → 이승만 정부의 휴전 협정 반대 →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문제로 휴전 회담이 지연됨 → 휴전 협정 체결(1953.7.27) → 군사분계선은 협정이 체결되는 날까지의 전선(戰線. 최전선)으로 하고(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움), 포로 교환은 포로들의 의사에 따라 하기로 결정 → 반공 포로(남한), 친공 포로(북한), 그 밖의 다른 나라(제 3국)로 구분 됨(거제도 포로수용소) → 오랜 협상 끝에 남과 북은 1953년 7월 휴전을 하였고,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어 남북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어요. → 휴전선(休戰線)은 휴전 협정에 따라서 결정되는 서로의 군사적 경계선이다. 1953년 7월 27일, 6ㆍ25 전쟁의 휴전에 따라서 한반도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설정된 군사 경계선이 휴전선이다. → 3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가 생겼어요. 군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가족이 흩어져 서로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되기도 했지요. 국토는 황폐해졌고, 건물, 도로, 철도, 다리 등이 파괴되어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되었답니다. → 같은 민족이 남(자본주의)과 북(공산주의)으로 나누어, 서로를 불신하며 적대시하고 싸움 → 독재 체제의 강화(남한의 이승만, 북한의 김일성 독재 권력 강화) → 2023년 현재, 남북한은 휴전 상태이다. → 종전(終戰. 전쟁이 끝남. 또는 전쟁을 끝냄)이 아니라, 전쟁을 하다가 잠시 쉬는 휴전(休戰) 상태가 70년째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남북 분단 → 남북한 대립(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대표는 미국, 공산주의 대표는 소련) → 소련군 철수(북한), 미군 철수(남한)와 미국의 애치슨라인 설정(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 → 북한군의 기습 남침 → 서울 함락(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참고) →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되찾음. 탈환) → 38선 돌파(기념으로 국군의 날) → 평양 함락 → 압록강까지 진격 → 중국군(중공군) 참전(공격), 인해전술 → 흥남철수 작전(영화, 국제시장 참고), 1· 4 후퇴 → 서울 다시 함락 → 서울 다시 수복 → 38선을 경계로 전쟁이 교착상태(전선이 상호 대치하여 고정된 상태. 교착 = 아교처럼 아주 단단히 맞붙어서, 조금도 변동이나 진전이 없음)에 빠짐(영화, 고지전 참고) → 소련의 휴전 제안, 미국의 동의로 휴전 협정 시작 (군사적 분계선과 포로 석방 문제) → 휴전 협정 체결(이승만의 휴전 반대와 반공포로 석방) →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 미군의 한반도 주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