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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도립 공원
유네스코 등재
남문
수어장대
서문
북문
남한산성 로타리
남한산성 도립 공원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다.
방문객 280만 명. 단위면적당
방문객으로 따지면 국내에서
최고 수준이다.
남한산성에 탐방객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수도권과 인접한 탓도 있지만
주차장에서 바로 시작되는 성곽길
탐방로가 걷기에 편한 까닭이다.
남한산성 탐방로는
크게 5코스로 나뉜다.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까지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맞춤코스다.
중간 중간 나 있는 샛길을 이용한다면
코스는 입맛대로 더 다양해진다.
거기에 성곽 탐방로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 이야기를 꺼내
곱씹는다면 남한산성은
한나절 나들이만으로도
여행 허기가 단숨에 해결되는
걷기코스가 된다.
남한산성 산행 코스
단대 오거리역ㅡ남한산성 입구역 ㅡ
남한산성 유원지 ㅡ남한산성 남문 ㅡ
수어장대 ㅡ남한산성 서문 ㅡ북문
남한산성 로타리 ㅡ남문 남한산성 유원지
단대오거리역 ㅡ원점 산행
약 14km 약 6시간 산행
‘남한산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치욕의 역사를 떠올린다.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가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 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 일행이 산성에
갇혀 지낸 47일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작가의 해설을 따라
남문부터 서문까지 걸어보았다.
남한산성 남문은
남한산성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진다.
1636년 12월 14일 새벽,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인조의 행렬은
이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에 들어섰다.
그리고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까지 조선의 조정은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어 설전을 펼친다.
김훈 작가는, “결사 항전을
주장한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고 정의한다.
서문까지 걷는 성곽길 중간에서 늠름하게
서 있는 ‘수어장대’를 마주치게 된다.
‘장대’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수어장대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수어장대에
올라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다시 서문까지
다다르는 길은 병자호란의
마지막 장을 열어버린다.
산성행 47일 만에 왕의 대열은
서문 밖을 빠져나와 지금의 송파구
장지동, 문정동, 삼전동을 지나
삼전나루터 수항단
(항복을 받아들이는 제단)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남한산성 치욕의 역사 때문에
비통하게만 느낄 필요는 없다.
서문을 넘어 북문을 돌아 동문까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은
성곽 안쪽에서 걸으면 역사와
나란히 걷는 듯하고 바깥쪽에서
걸으면 자연과 맞닿은 느낌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남한산성의
역사를 돌아보자.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
이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
(晝長城)으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을
다시 축조하기로 했다.
인조 2년(1624년)부터 인조 4년
(1626년)에 걸쳐 수축된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성이었다.
여기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과
9개의 사찰이 성 안에 자리했다
남한산성 지화문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남문(南門)이다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선조 때 남문·동문 등을 수축(修築)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하였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개축하면서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75m·
폭 3.35m·길이 8.6m이며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홍예문 좌우 성벽은 자연석을 수평줄에
맞춰 막돌 쌓기로 축조한 것이다.
1976년 복원된 문루는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이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
축조 10년 만에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사료를 뒤져도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인조는 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 꿇었다.
청은 항복문서에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청나라 군대는 분명 남한산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느꼈다.
실제로 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남한산성을
수축 또는 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 삼았다고 한다.
수어장대
[ 守禦將臺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팔작지붕의
건물. 장대·성곽시설. 시도유형문화재.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면적은 1층 105.08㎡, 2층 43.29㎡이다.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맨 바깥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높게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을 받쳤다.
외진부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진부에는 긴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기둥이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차 끝은 모두 수서[垂舌]이다.
2층 평방 위에만 화반(花盤: 주심도리
밑 장혀를 초새김한 받침)과 운공
(雲工: 화반 상부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창호(窓戶)는 위층에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 판문(板門)을 달았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외부 정면에 ‘수어장대(守禦將臺)’
라고 쓴 현판이 있으며,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은
수어장대 내부에 있었던 것을
보호각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보호관리
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남한산성 우익문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서문(西門)이다.
남한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
(1799)에 개축하여 우익문
(右翼門)이라 부른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항복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서쪽 경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에 물자를
이송하기는 힘들지만 서울 광나루와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연주봉 옹성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하도록 하였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소의
옹성이 있는데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씩 설치되었다.
남쪽에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된 것은
북쪽이나 동쪽과 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므로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4.7m인 검단산 정상을확보
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전승문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의 북문(北門)이다.
남한산성 북쪽 해발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으로,
이 문을 통해 세곡을 운반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한 후 전승문(全勝門)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남한산성 남문을 거쳐
수어장대 에서 인증 사진
서문과 북문을 거쳐 빙
돌고나니 허기가 진다
오늘이 초복이라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우리 늦동이와 합석
오랜만에 보양식을 먹어본다
우리늦동이는 방학을 햇것만
학교 연구실에 다니느라
쉬는 날도 없다 오늘도
컴으로 화상 미팅을 한다
한방 오리백숙
오리는 알칼리성 식품으로 체내에
축적되지 않는 불포화지방산이 매우
풍부해 다이어트에 좋다.
이러한 오리를 주재료로 하여 다양한 한방
약재를 달여 만든 육수와 함께 내는
요리로 각종 독소에 대한 해독작용이
탁월하며 허약 체질인 사람에게 특히 좋다.
대가 식당의 한방오리백숙은 오리
특유의 기름기를 없애고 담백함을
살려 많은 사람들이 보양식으로
찾고 있는 남한산성의 대표 음식이다.
남한산성은 음식 가격이
다른대와 비교해 조금 비싸다
한방 오리 능이백숙 65.000원
소주 2병 맥주 세병 20.000원
도토리묵 12.000 원 합 97.000원 이다
우리늦동 이도 날닮마 술을 엄청 먹는다
후식으로 죽까지 밀끔이 먹어 치우고
또 걷는다
남한산성 로터리=
산간도시의 종로거리
남한산성 성곽을 빙
둘러 다시 로터리로 들어섰다.
허기진 탐방객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 로터리
구석구석 음식점이 성행한다.
하지만 이 로터리는 조선시대에도
사방의 길이 교차하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로터리에 설치된
종각에서 종을 울려 시각을 알렸다.
남한산성은 군사요새일 뿐 아니라
산속에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종로’는 서울에만 있는 지명이 아니라
각 도시 중심가의 공통된 이름이다.
남한산성 로터리는
산간도시의 종로거리였다.
로터리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남한산성
탐방의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은 불에 타
없어져 지난 2003년 왕의 침소였던
행궁이 복원됐다.
일제강점기에는 1907년 일본군이
산성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사찰들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난공불락 요새의 위용과 치욕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성곽 길 안에
포개져 있는 셈이다.
성곽길을 빙돌아 다시 남문도착
우리 늦동이와 인증 사진
다시 남한산성 유원지로 원점 산행
가족 산행 하산길이다
그대로그렇게 ㅡ
이명훈 노래ㅡ
중국 광주역ㅡ
광주 공항 여행 이미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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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도립공원ㅡ
유네스코 등제ㅡ
남한산성 안에 있는ㅡ
조선시대의 행궁ㅡ
수시로 궐밖으로 행차 하시었다ㅡ
조선 시대 행궁은 총 19개 이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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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초복입니다 ㅡ
보양식 많이 드시고 건강하세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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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더위를이기자ㅡ
초복 중복 말복 ㅡ
초복에서 말복까지의 기간은 ㅡ
일년 중 가장 더운 때로ㅡ
이 시기를 삼복(三伏)이라 한다 ㅡ
오늘은 초복 입니다 ㅡ
http://m.cafe.daum.net/rnqdmsekfl/VQoX/972?svc=cafeapp
북한산 국립공원
숨은벽 능선길에 호랑이굴이 있다
가파른 바위 길이며 중급 이상 갈수있다
오랜만에 호랑이굴에
다시갈려 하엿으나 소나기 소식에 ......
북한산 국립공원ㅡ
숨은벽 능선 ㅡ
해골바위 호랑이굴 ㅡ
백운대 정상 도선사 암벽 리찌산행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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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대종주 능선길ㅡ
성삼재.노고단.삼도봉ㅡ
연하천.벽소령세석 대피소.촛대봉ㅡ
천황봉정상. 치밭목 대피소 대원사ㅡ
https://m.cafe.daum.net/rnqdmsekfl/VdLU/25?svc=cafeapp
2021년 7월3일 발인ㅡ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시간ㅡ
사촌 형님이 먼저가는 사촌 동생에게ㅡ
보낸 편지ㅡ
餘恨]
청천날벼락이
순식간에
우리 가문을 한 입에 집어삼킨
21년 6월 30일
변명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검은 부리 흑 발톱으로
북극성을 무지막지 후비고
예순일곱 질곡을 어찌하라고
소리소문 없이 채 갔네
21년 7월 3일 7시 30분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시간
화마가 무섭다 울부짖지 말고
참고 살아온만큼
더디게 더디게
꾹~ 버티며
비탄강을 건느소서
아름다운 천국 그 곳에서
못다한 일 이루다가
혹여~ 시간나면
내 자리 하나 마련하소서
그땐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가슴 가슴 안고
영원히 같이 살게 하소서
동생!
잠시이니 너무 서럽다 말고
편안하게 가시게.
[晟吾/2021.07.03]
지리산 첫산행중
심근경색 으로 사망
지리산 쉼터에서
사진한장 남기고
한시간후 산행중 사망
사촌 손위 처남 에게 위글을 보냅니다
지리산 헤메지 마시고
능선길 편히 넘어 다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