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또 택시에 올라탄다. 한참 큰길을 지나 굽이진 동네 길로 진입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설레어 온다.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기분 좋은 간지러운 떨림이 꼭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러 가는 느낌이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그 시간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들뜬 마음을 숨기려 헛기침을 몇 번 해본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두근거림을 애써 꾹꾹 눌러가며, 마을의 생김새를 눈에 담아본다. 나는 지금 지도에 닿은 손 끝에서만 보았던 지구 반대편에 도착해 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오랜 벗이 건네준 엽서 한 장이었다. 엽서 속에는 영어로 ‘발음할 수 없는 도시로 여행하라’(Travel to a city that you cannot pronounce)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초록색 바탕에 비스듬히 쓰인 흰 글씨가 하나의 그림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때 막연히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지도에서 지구의 반 바퀴쯤 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페루의 쿠스코.
마을은 마치 구름 속에 가려진 요정들이 사는 곳 같다. 드라마 세트장 같기도 하고 엽서에서 본 사진 같기도 하다. 산언덕 위에 층층이 쌓인 집들과 돌길, 유럽풍의 오래된 성당이 이국적이다.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잠시 넋을 놓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느낌이 이상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점점 박동 수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나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괜찮은 걸까?’ 택시가 멈추고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두 발로 땅에 서서 방향을 가늠해 본다. 숙소는 돌계단을 몇 십 개는 올라가야 하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진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를수록 호흡이 가빠진다. 살짝 현기증도 난다. 서둘러 숙소에 가서 몸을 뉘이고 싶지만 금세 숨이 차올라 빨리 걸을 수가 없다. 그제야 지금 이곳이 해발 3,800m라는 것이 떠오른다. 높은 지대로 올라오며 낮아진 공기 내 산소 농도로 인해 저산소증이 온 것이다. 서울의 해발이 38m이니 서울보다 백 배쯤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는 쉬이 가늠할 수 없는 높이지만 몇 발자국 떼어보면 온몸으로 느껴진다. 한발, 한발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의식의 끝을 단단히 붙잡으려 눈을 몇 번 깜빡인다.
코카 잎을 우려낸 차를 마시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혈액과 뇌로의 산소 공급을 촉진한다는 효능보다는 코카인이라는 마약이 먼저 떠올랐지만 놀랍게도 맛이 좋다. (마약 성분은 없다). 그러나 상태가 나아지기는커녕 산소의 결핍이 몸 속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숨을 연달아 쉬어도 답답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부족함은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다.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실로 괴롭기 그지없다. 숨쉬기처럼 매 순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비자발적 행위에 대한 자각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무한한 고통이 되어 버릴까 봐. 그리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증폭된다.
높은 지대에 올라보지 않고서는 산소가 부족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없다. 사람은 아는 만큼만 이해한다고 했던가. 배고픈 이에게 빵 한 입은, 배부른 이가 남기는 빵 한 봉지보다 더 큰 의미를 가져온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 행위를 반복한다. 몸과 마음이 온통 숨을 쉬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다. 당연한 것에 대한 결핍은 머릿속에서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비워진 존재의 빈자리가 말해주는 지나간 것에 대한 가치를 그제야 온몸으로 깨닫는다.
결핍을 채우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성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 부족함을 채우려는 욕구는 새로운 정신적, 육체적 균형을 필요로 한다. 결핍을 자각하고 직면하는 것이 균형의 중심축을 맞춰 나가는 과정의 시작이다. 때로는 무수한 노력을 통해, 때로는 인고의 시간을 통해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현재의 내가 아등바등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들 호흡에 집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시계바늘의 발걸음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는다. 오차 없이 반복되는 리듬은 묘한 안정감을 준다. 잠시 누웠다 일어나자 정신이 한결 맑아진 것이 느껴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이 상황에 적응하자 평온이 찾아온다. 마치 더운 날 땀을 잔뜩 흘리고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처럼, 부족했던 산소가 차오르는 충만한 기분은 불안했던 느낌을 싹 가시게 해 주었다. 잃어봐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중생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기 시작한다.
무기력함이 무능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느껴질 때, 부족함이 나의 어깨를 짓눌러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할 때, 쿠스코를 떠올린다. 빠른 걸음을 천천히 하고, 5킬로짜리 배낭을 숙소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잠시나마 트이던 숨통을 기억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 속으로 빠져들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음을 깨닫던 그 실낱 같던 희망의 순간들을. 호흡을 가다듬고, 현재에 집중하며 결여된 것들을 하나씩 채워 나가다 보면 열리게 될 인생의 다음 막을 기대해본다.
박새미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