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왕양명(王陽明) 환생시(還生詩)
오십년전왕수인(五十年前王守仁)
개문인시폐문인(開門人是閉門人)
정령박락환부귀(精靈剝落還復歸)
시신선문불괴신(始信禪門不壞身)
금산대사<金山大師>
오십년전 왕수인이여!
문을 여는 사람이 문을 닫는 사람일세!
정령이 바뀌어 다시 돌아오니
비로소 선문에 무너지지 않는
문 열고 들어선 사람이 문 닫는 사람이로구나!
영혼(精靈)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니
비로소 선문(禪門)에서 무너지지 않는 몸이 있음을 믿겠네,
중국의 명나라 때의 "왕양명(王陽明)이 이름은 수인(守仁)이고, 스스로 양명자(陽明子)라 했다. 그에 얽힌 전생(前生) 환생(還生) 선화(禪話)다. 절강성(浙江省) 금산사(金山寺)에 금산대사(金山大師)가 평생 참선(參禪)을 하다가 선정(禪定)에 들어서 좌탈입망(坐脫立亡)을 하셨는데 하루는 금산대사(金山大師)가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입고 법당(法堂)에 들어가면서 대중(大衆)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대중이 문을 열어보아도 열리지 않아서 50년간을 문을 열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후에 왕양명(王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제자(弟子)들과 함께 금산사(金山寺)에 왔다가 절 전각(殿閣)마다 다 참배(參拜)를 하고 금산대사가 들어간 법당문(法堂門)을 열어달라고 하자, 열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왕양명(王陽明)이 법당문을 잡아당기다 잠겼던 법당문이 열렸다. 50년만에 법당문이 열렸다는 소리를 듣고 금산사 대중스님들이 다 모여들어서 법당에 들어가 보니, 금산대사는 앉은 채로 선정에 들어 육신은 썪지도 않고 미라가 되어 좌탈입망(坐脫立亡) 한 채로 입적(入寂)에 들어있었다. 문을 연 왕양명이 벽상(壁上)에 써 붙여놓은 게송(偈頌)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란 게송 내용이 오십년전 왕수인이여! 문을 연 사람이 문을 닫은 사람일세! 정령이 바뀌어 다시 돌아오니, 비로소 선문(禪門)에 무너지지 않는 몸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는 환생시(還生詩)다. 왕양명(王陽明) 전생(前生)의 몸이 금산대사(金山大師)였다는 말이다. 금산대사(金山大師)의 후신(後身)이 왕양명(王陽明)이라는 말이다. 사찰에는 이러한 선화(禪話)가 아주 많다. 허구(虛構)가 아니고 진실(眞實) 실화(實話)다.
왕양명(王陽明)은 유가(儒家) 성리학자(性理學者)다.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에 대비(對比)되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주자(朱子)는 성(性)을 체(體)로 리(理)를 객관적(客觀的)으로 보았으나 왕양명(王陽明)은 리(理)를 주관적 체(體)로 보고 심(心)이 없으면 리(理)도 없다고 보았다. 심(心)이 우주의 근원(根源)이라고 심(心), 성(性), 리(理) 일체(一體)라고 보았다. 리(理)는 마음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심(心)이 곧 리(理)다고 설했다. 심즉리(心卽理)은 우주는 곧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이 곧 우주라는 만물이 모두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양명학설(陽明學說)을 주창(主唱)했다. 그의 사상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지(知)와 행(行)이 모두 마음의 활용으로 하나라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지(知)에 중점을 두어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설하였으나 왕양명은 치량지(致良知)에 의해 실천적으로 결합 된다고 봤다. 즉 우리 마음의 양지(良知)는 천리(天理)이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선악을 직각(直覺)하는 마음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양지로서 이에 의해 '지식을 넓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致知格物)는 실천도덕을 말했다. 왕양명은 다양한 사상을 섭렵한 것으로 나온다. 노장 신선도에도 불교에도 심취한 것으로 나온다. 오늘은 왕수인의 전생이 금산대사이고, 금산대사 후신이 왕수인인 선화(禪話) 게송(偈頌)을 반추 해보았다. 이렇게 전해오는 선화(禪話)를 앞으로 있는 대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여여법당 화옹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