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4. 태조대왕 구려국 시대ad54~ad146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이름은 궁宮이다. 혹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하였다.
태조대왕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서기 53년 모본왕이 죽고 태조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 당시 부왕인 재사가 살아있었으나 왕위를 사양한 것으로 80년조에 나와있다. 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肖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후한서/동이전>에는 고구려 뿐아니라 구려국도 별개의 나라로서 소개되며 태조대왕은 바로 구려의 왕이었다.
<후한서/ 구려전>에 의하면 구려의 위치는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이므로 소수가 소요수를 의미한다.
<후한서/구려전>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후한서/ 부여전>은 고주몽신화를 적고 있다. 고주몽이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졸본천의 졸본성을 차지한 것이다.
<후한서>의 현도군 고구려라는 이름은 본래 해모수의 차자였던 고구려후 고진에서 비롯된다. <후한서>에서 구려왕추(鄒)가 처음으로 구려의 왕으로 소개되는데 <유리왕기>에는 연비(延飛)라고 하였다.
3년(서기 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4년(서기 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후한서>동옥저편에서 동옥저는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개마대산은 평양왕검성 서쪽이라고 하였다. 태조대왕의 살수는 수중현 강녀분姜女墳 동쪽의 급수하急水河였을 것이다.
7년(서기 59) 여름 4월에 왕은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 잡았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큰 물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10년(서기 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나가 흰 사슴을 잡았다. 나라의 남쪽에 누리가 날아 곡식을 해쳤다.
16년(서기 68) 가을 8월에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여기서 <아리모려 묘지>를 본다. 先祖 隨王錚 於鴨綠水之上源 戰 於[爲]野 압록수 상원 전투는 마자수압록강(현재 유하柳河)와 달리 서요하로 고려되고 그중 신개하(新開河)라는 북쪽 가지와 관련되어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갈사국 도두왕의 항복 기록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 위치는 통료시 북쪽이 될 것이다. 서요하 과이심좌익중기현의 육가자향의 금은 유물이 갈사국 유물일 수도 있는데 이는 <해모수웅심산문화>에 그 유물이 있다.
赦 又庚午 盖馬國東 彈弩攻城 賊見大敗
先祖 隨王 又戰 婆猪江上 沸流小國 再伐 荇人 위에 소개한 아리모려 비문을 보면 태조대왕의 정벌 과정을 알 수가 있는데 68년 서요하 상류 갈사국을 정복하고, 다시 교려하의 개마국을 정벌하였다. 개마국은 현도군 서개마에서 후퇴한 유리왕의 아들 여율의 후손이 항복해서 이어간 구택도로 고려한다. 2차 개마국이다. 뒤이어서 70년에 압록강 상류의 파저강변 백제 비류소국을 깨트린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비류소국은 고구려 홀본성의 비류국과 구별하여 백제 비류왕자의 후손들을 비류소국이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초기에 패대강 사이에 흉년으로 백제인이 고구려로 망명해 가는데 바로 이 지역으로부터 망명해간 것이다.
20년(서기 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22년(서기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주나는 온조 백제의 초기 동쪽 경계였던 주양朱壤과 관련되며, 지금의 압록강 강계군江界郡이다. 고구려 고분 도시인 집안集安의 동편이다.
25년(서기 77) 겨울 10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은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기고 크게 사면하였다. 11월에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46년(서기 98) 봄 3월에 왕은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는데, 책성의 서쪽 계산(~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베풀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은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 50년(102)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책성 백성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 두 자나 되었고 털 색깔이 매우 밝았으나 꼬리가 없었다.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은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의 관리가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자 땅이 벌거숭이가 되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은 사신을 보내 진휼하였다.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59년(111)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兎)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111년 <삼국사기> 기록에 문제가 있다. 부여왕이 낙랑을 치고 고구려왕은 예맥을 거느리고 현도를 쳤다.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은 남해를 순수하였다.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元初元年(114년) 十月戊子朔,日有蝕之 在尾十度
따라서 114년 봄 고구려 일식 기록이 중국에 없다. 또한 현재 천문학 지식으로는 당시의 일식이 마샬군도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에서 관찰할 수가 없다. 일단은 고구려 당시에 사관이 일식을 추산한 것으로 본다. 그러면 한단고기 오성취루 기록도 단군시대 관측지에서 볼 때에 동방 하늘에 오성이 모였다가 아니라, 단군시대 기록지에서 볼 때에 동방 땅에 오성취루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고구려 일식 기록의 의미는 수성왕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의미로 남겨진 것이 된다.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에 누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자 및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69년(121) 봄에 한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대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 용단龍端,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隋書/地理志》北平郡?龍縣下云;“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龍 즉, 하북성 노룡이 본래 요동군 신창新昌이었다. <후한서> 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以遮大軍,而潛遣三千人攻玄?、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龍端、兵馬?公孫?以身?諷,俱沒於陳,死者百餘人
겨울 10월에 왕은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곤궁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숙신肅愼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11월에 왕은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수성왕은 121년 11월에 태조대왕의 정사를 모두 도맡았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통감>에 의하면 선비군이 먼저 현도군을 치고 12월에 수성의 구려군이 마한, 예맥과 더불어 요동군을 쳤으나 부여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태조대왕이 쫓겨나고 수성왕이 즉위했다고 중국에서 기록하였다. 마한은 태조대왕이 정벌한 조나, 주나, 비류소국인들이었을 것이다. [통감 121년] 冬,十一月,鮮卑寇玄?。十二月,高句驪王宮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夫餘王遣子 尉仇台 將二萬餘人與州郡?力討破之。是歲,宮死,子遂成立。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
고구려는 태조대왕의 고구려와 수성왕의 구려 둘로 갈라졌다.
중국은 국경에서 구려왕만 상대하게 되므로 구려왕의 교체를 고구려왕의 교체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 146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살대방령殺帶方領 기사는 중국 <후한서>나 <위지동이전>에서 모두 고구려 백고왕 때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는 태조대왕 94년 때의 일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보면 121년에 수성왕이 나라를 갈라 구려국을 세웠고, 146년에 수성왕이 고구려왕까지 되면서 재통일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132)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86년(138) 봄 3월에 수성은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면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놀고 즐기는데 헤아림이 없었다. 가을 7월에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그 아우 백고伯固가 간하였다.
90년(142)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는데 한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깨물어 잘랐다. 깨어서 그 길흉 여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호랑이는 백수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의 작은 것입니다. 그 뜻은 왕족으로서 대왕의 후손을 끊으려고 음모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은 불쾌하여 우보 고복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었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복장이 대답하였다.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재앙이 거꾸로 복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집처럼 근심하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94년(146)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 밑에서 사냥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대왕이 늙도록 죽지 않고 내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가니 기다릴 수 없다. 주위에서 나를 위하여 꾀를 내어라.” 주위사람들은 모두 “삼가 명을 좇겠습니다.”고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이 홀로 나아와 말하였다. “저번에 왕자께서 상서롭지 못한 말씀을 하실 때, 주위 사람들이 직간하지 못하고 모두 ‘삼가 좇겠습니다.’고 말하니 간사하고 아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직언을 하려고 하는데 높으신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수성은 말하기를 “그대가 직언을 할 수 있다면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니 어찌 의심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지금 대왕께서 어질어서 서울과 지방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은 비록 공이 있으나 무리 중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어진 임금을 폐하려 모의한다면, 이것은 한 가닥 실로 만균萬鈞의 무게를 매어서 거꾸로 끌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왕자께서 의도와 생각을 바꾸어 효성과 순종으로 임금을 섬기면, 대왕께서 왕자의 착함을 깊이 알고 반드시 선양할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수성은 기뻐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 곧음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언하였다. “왕자께서는 대왕이 늙었기 때문에 임금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염려하여, 뒤를 이을 것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언하니 저희들은 비밀이 누설되어 화가 미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죽여 입을 막아야 합니다.” 수성은 그 말을 좇았다.
(146년)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후한서/구려전>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132),置玄?郡屯田六部.質、桓之閒(146년),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
따라서 146년 초에 수성왕이 국내성에서 스스로 차대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태조대왕의 졸본성을 친 것이다. 대신에 국내성의 구려왕 지위는 신대왕 백고에게 양위한 것이다. 겨울 10월에 우보 고복장이 왕에게 말하기를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터이니 청컨대 먼저 죽이십시오.” 하니, 왕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다. 수성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나는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대는 번거롭게 걱정하지 말라.” 고복장이 말하였다. “수성의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오늘 대왕의 선양을 받으면 내일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은 알고, 무고한 자손에게 화가 미칠 것은 알지 못하십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12월에 왕은 수성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왕은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癸巳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으며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김부식은 중국 기록과 고구려 기록이 다른 것을 무조건 <후한서>가 틀린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서부에 구려국이 따로 존재했던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후한서><위지동이전>에 이어서 <북사>에서도 태조대왕이 죽으니 아들 백고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위지동이전>처럼 수성이 빠져 있다. <북사>...號曰高句麗,因以高?氏.其在夫餘妻懷孕,朱蒙逃後,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國王,?與母亡歸之.名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子如栗立.[四]如栗死,子莫來立,乃?夫餘...至?、安之間,莫來裔孫宮,數寇遼東...宮死,子伯固立, 伯固死,子伊夷摸立.伊夷摸自伯固時,已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降胡亦叛.伊夷摸更作新國.伊夷摸死,子位宮立.始位宮曾祖宮,生而目開能視,國人惡之.及長凶虐,國以殘破.位宮玄孫 乙弗利頻寇遼東... 수성왕이 왕이 된 것은 <후한서>와 <통감>에 나오는데 그 시기가 121년이고, 백고가 왕이 된 것은 <후한서>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데 146년 이전이다. 모두 구려왕이 된 것이다. 대신에 고구려왕은 각각 태조대왕과 수성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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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인간/대동아공영 원문보기 글쓴이: 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