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말하다
제14회 작품상
송보영
무아의 경지에 들었는가. 그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넓은 모래사장에서 맨발인 채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일렁인다. 제 의지가 아닌 어떤 이끌림에 의해 리듬을 타는 듯하면서도 절제된 동작을 통해 빚어지는 수많은 언어의 물결이 백사장에 흩어지고 있다. 발끝에 닿을 듯 말 듯 밀려왔다 부서져 내리는 파도를 타고 넘실거린다.
그녀는 다갈색에 좀 더 붉은색이 혼합된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반 시진이 지나도록 쉬지도 않고 춤을 추고 있다. 그녀의 춤사위에서 생의 터널을 휘도는 환희와 눈물, 고뇌의 곡진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한바탕 춤사위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냈는가. 여인은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고 망토 자락으로 몸을 감싼 채 지켜보는 관객들은 아랑곳없다는 듯 서서히 사라져갔다.
봄의 초입.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날, 추위도 무릅쓰고 온몸으로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되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게 다가와 격렬한 언어로 슬픔의 농도를 더하게 했는가 하면, 여린 몸짓으로 살포시 안아주기도 하며 내 안을 휘돌았다.
때로는 몸으로 하는 말이 통상적인 어떤 말보다 더욱 절실할 때가 있다. 세상을 향해 첫울음을 우는 것으로 존재를 알리는 아기들은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의사표시를 한다. 꼼지락거리는 몸짓만 봐도 엄마는 아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듣는다. 아기가 배가 고픈지를 알기 위해 입 주변에 손가락을 대보고 손가락이 있는 쪽으로 입이 움직이면 배가 고프다는 신호임을 알고 엄마는 젖을 물린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교감이다.
퇴근길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가고 있는 이들을 볼 때면 고뇌하면서도 기대하며 묵묵히 삶의 길을 가고 있을 거라 싶어 숙연해지기도 한다. 저녁 어스름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노인의 굽은 등에서 힘겨웠을지도 모를 삶의 모습이 느껴져 안타깝다.
해거름이 훨씬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옷자락에는 분필 가루가 묻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인지와 중지 사이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굳은살 때문에 두 손가락이 가지런히 모이지 않았다. 그가 평생을 두고 마셨을 분필 가루 분진과 손가락의 굳은살은 그의 제자들의 지적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고, 우리 가족들 밥이 되었다.
길을 가다 악기점 앞을 지날 때면 무심코 들려오는 선율에 걸음을 멈출 때가 있다.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 되어 빚어지는 음률은 생명력이 있어 듣는 이의 가슴에 반향을 일으킨다.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미술관에서 만난 고흐의 일곱켤레 구두가 내 발길을 붙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가 탄생시킨 불후의 명화들은 비난과 질시 속에서도 그가 지향하는 생명력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과 들을 누빈 산물이라고.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엔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고.
미술학자 사피로는 고흐의 구두 속에는 ‘그가 신었던 신발을 그린 것이기에 그의 삶이 담겨 있다.’ 했고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신발의 어두운 틈새에서 들로 일하러 가는 농부의 어기찬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가.’고 했다. 그는 순간순간 화폭 속에서 튀어나와 찾아오는 이들과 교감하는 것이다.
때를 따라 변화하는 계절의 이야기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몽환적이다. 봄의 본질인 싹 틔움과 눈부시게 피어나는 빛깔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빛나는 언어를 탄생시킨다. 여름의 이야기는 성숙의 함성으로 충만하다. 온 산야는 뜨거운 햇살과 모진 비바람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며 몸피를 불려 가느라 토해내는 거친 언어들로 시끄럽다. 가을의 이야기는 옹골차다. 봄여름이 키워 낸 풋것들을 여물게 하느라 분주하다. 겨울의 이야기는 비장하다. 설한풍을 견뎌 내려면 몸 안에 최소한의 수분만 남기고 가벼워져야 하기에 겨울이 토해내는 이야기는 메마르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철 따라 빚어내는 자연의 이야기는 우리네 한 생과 닮아있다.
형체 없이 왔다 가는 바람도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과 부딪느냐에 따라 다르다. 둥지를 보수하고 몸단장을 시작하는 새들을 보면 짝짓기할 때가 되었나보다 알아차린다. 서로 사랑할 때면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옷자락에 이는 바람으로도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가늠한다. 세상에는 말로 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숱한 언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소리에 화답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게 특별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서로 교감했다. 소리 내어 말로 하는 어떤 대화보다 절실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움직임에는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언어가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때로는 그런 이야기들이 더 절실할 수 있음에 감동한다.
그녀가 온몸으로 토해내는 언어의 물결이 1.3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회색빛의 내 뇌를, 그것도 점차 탄력을 잃어가는 뇌를 쉼 없이 건드렸다. 그녀와 더불어 몸이 들려주는 언어의 바다를 유영하며 생각한다. 내 몸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하고 더 하고 싶어 하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