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보배로운 우리 국토다. 화산섬이라 지질환경이 육지와 다르다. ‘물영아리오름’이라는 산정 습지를 둘러본다는 계획에 호기심이 생겨 제주 여행에 합류했다. ‘물영아리’는 ‘물이 담긴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창녕 우포늪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람사르 습지보전법에 따른 습지 보전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정상의 분화구까지 목재 계단을 오른다. 일행 중 제일 연장자라 오르기도 힘들지만, 수령산의 생태계를 살피느라 일행과 점점 뒤처진다. 덧나무를 비롯한 큰천남성 같은 다양한 수종이 시선을 잡아끈다. 습기를 보유하여 습지라 하는데, 흑갈색의 회토(灰土)라 물 빠짐이 좋아 습지가 생성된 것이 특이하다.
웅덩이처럼 생긴 분화구 내부의 습지는 냉기를 품고 있다. 봄바람이 화구를 맴돌아 들어갔다가 나오며 겨우내 움츠렸던 풀들의 새싹이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수중식물과 반 수중식물, 수서동물을 비롯한 파충류들이 먹이사슬로 얽혀 먹이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생존 경쟁과 정글의 법칙이 상호작용하는 생태계로 짐작된다.
수령산 아래 들머리에 습지가 보인다. 산정의 물영아리에 고였던 물이 서서히 스며내려 습지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눈 속에서도 핀다는 복수초의 군락이 눈에 띈다. 봄의 전령사, 복수초를 한두 포기는 보았으나 군락을 보긴 처음이다. 제주를 찾은 보람을 만끽한다. 뱀을 조심하라는 간판을 보니 양서류나 설치류가 공존하는 습지로 짐작된다. 계절은 4월이지만 아직 쌀쌀한 바람이 머물러 생물들의 활동을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데다 아래로 수직에 가까운 경사라 자세히 살필 수 없어 안타깝다.
물영아리는 그들 생물의 터전이다. 하늘은 원으로 보일 것이다. 일조시간이 짧아 양서류, 파충류는 다투어 양지바른 곳을 차지하여 일광욕할 것이다. 태양, 달, 별이 짧게 머물다 떠나고 어둠의 시간이 긴 우주를 이룬다. 습지에 서식하는 원생생물부터 고등동물까지, 물영아리가 그들의 우주라 생각하니 무학문맹으로 생을 마친 선친의 ‘우주’가 떠올랐다. 당신의 인생관이자 우주관이 떠올랐다.
선친께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논이 있고 텃밭이 있는 환경에서 일생을 보냈다. 먼동이 트면 논밭 일을 시작했고 땅거미가 밀려와야 들일을 마쳤다. 밤이면 밀짚 자리를 깔고 관솔불을 등불 삼아 마실 나온 이웃 사람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천문학을 설파했다. 하늘은 땅 위로 둥글게 차일(遮日)을 치고 달을 큰 등불, 별은 작은 등불로 차일에 매달려 있다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달 속에는 토끼 두 마리가 도구통에 공이로 뭔가를 찧고 있다고 했다. 틀렸다 싶어도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 시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학교에 가면 우리말을 쓰지 못했다. 우리말은 금지어였고 수업은 일본 말로만 했다. 일상용어도 일본말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다녔다. 몸통이 둘이면 사다리 비행기, 굉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비행기는 전투기라 했다. 모두 선친이 불렀던 이름이다. 어린 우리는 그대로 듣고 따랐다. 문중 벌초 때 제실(祭室)에서 듣고 익힌 것과 장날 친구들이나 친인척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에서 얻은 견문이 선친의 지식이었다.
아버지의 집념은 남달랐다. 자식들에게는 당신과 같은 무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 했다. 고된 일을 감내하면서도 자식들 교육에 헌신하는 게 한풀이였다. 일은 주야가 없었고 새벽닭 우는 소리가 자명종이었다. 무논의 지심과 밭의 잡초 번식량이 오전 오후가 달랐음에도 적잖은 전답을 남들 먼저 말끔히 제초하셨다. 의문은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물영아리와 다름없는 산간벽지에서 아버지는 생을 다 보내고 기력이 쇠약해졌다. 대처의 형님이 모셨으나 뇌졸증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자식들을 모두 대처로 보내 당신이 살아온 좁은 세상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는 것을 우화등선으로 아셨던 분이다.
제주 물영아리의 비좁은 공간에 매미와 잠자리가 산다. 때가 되면 우화등선(羽化登仙)으로 넓은 하늘과 땅에서 마음껏 노닐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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