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다수와 소수의 대립, 의견의 충돌에 있어 “죽은 독단”, “구조적 폭력”등의 옛날과 다를 바 없는 뻣뻣한 사고방식의강요는 가장 큰 문제이다. 왜 우리는 아직도 비판을 수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는 것을 꺼리고 자기확신과 무식한 강요에 끝도 없이 빠지는 걸까? 이설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적인 진리만을 고집하며 자제력 잃은 토론을 하는가?
서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직 자유로운 토론에 익숙해지지 않은 듯하다. ‘지적 화평’이라는 달성할 수 없는 오래된 목표를 여전히 쥐고서 자유 없는 가짜규율에 지배 당하던 그 시절 그랬듯이 있지도 않은 진리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류의 지성과 판단력 개발의 발전은 자기의견을 갖는 것에 기반을 둔다. 또한 한국의 큰 발전은 집합의식에 큰 힘을 입어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이제 공동체를 해체하고 개인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또한 자기자신을 포함한 거의 아무에게나 혐오가 향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이는 자기 정체성이 고정되지 못하고 외부에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직접적인 인간관계는 줄고 SNS에서의모습을 서로 비교하는 문화가 성행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등주의적 심성 때문이다. 사회 비교는 성장의 추진력이 되기도 하지만 이제는 차별과 혐오의 원인으로만 남게 된 것 같다. 한국의 비교빈도가 높다는 점이 사회 전반에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이는 오히려 사회발전을 저해하고 사람들을 고립문화로 몰아넣고 있다. 정치적 억압에서 다수의 횡포로 주체만 바꿔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사회적 불관용은 사람들의 생각을 위장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수의 의견에 대해 회의, 비판하는 자세를 가지면서도 존중하고 우리의 의견에 대한 평가도 수용해서 입장을 수정하는 상호작용을 늘려야 한다. 그로써 서로의 생각의 자유에 협력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를 위해서만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현재사회의 죽은 독단과 암묵적인 믿음 따위를 뽑아내기 위해 권력자나 지성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토론하는 자유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양쪽 주장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올바른 비판의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자유토론의 중요성이다. 자유토론을 통해서는 굳이 불행이나 실망으로 인한 고통의 경험없이 말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확정된 결론(죽은 독단), ‘진리 아니면 오류’ 등의 편견을 깨고 통설의 한계를 채워주는 것으로서의이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건강한 사회관계를 가지고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결단력을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