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름은 중세국어에서 '일홈' 또는 '일훔'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동사 '일
다'에 선어말어미 '-오-/-우-'가 결합하고 여기에 다시 명사형어미가 결합한 형태다. 그러나 '이름'의 연원을 더 이전 시기의 동사 '닐다(謂)'로 소급하려는 주장도 있다. 이 동사는 '이르다' 또는 '말하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닐홈>일홈>이름'으로 변천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되려면 'ㅎ'을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름'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이르는 것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이미지의 배반' 1953년, 그림의 글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이름이 3자의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러한 역사는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처럼 한자어로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10년 민적부 작성 이후의 일이라고 하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1910년 민적부를 작성할 무렵, 여성들은 약 80%가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남존여비, 남아선호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여성은 태어나자마자 임시로 불린 젖이름[兒名]이 있을 뿐이었다. '곱단이, 삼월이, 광주리, 자근년, 섭서이, 서운이, 이쁜이, 언년이, 끝단이' 등이 바로 그런 이름이다. 여성들이 출가해서도 '과천댁, 남산댁', '개똥이엄마, 돌쇠엄마'와 같은 식의 간접적인 이름이 붙었으니 자신의 이름이 필요 없는 사회 속에서 산 셈이다.
<위창 오세창의 서예작품 '文化保國' 1952년 새해 첫날에 쓴 작품(오른쪽). 왼쪽은 자신의 이름과 호(위창)를 나무의 양쪽 면에 새긴 전각작품.>
우리 선조들은 평생 두서너 개의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다. 어려서는 젖이름[兒名]이 있고, 부모가 지어 준 본명과 함께 성인이 되어 자(字)를 가진다. 벼슬길에 나서면 관명이 따라 붙고 사회적인 지위나 교분에 따라 아호(雅號)가 생겨 본명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를 보면 이(珥)는 관명이고, 아명은 현룡(見龍)이다.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 외에도 석담(石潭)·우재(愚齋) 등이 있다. 관명은 장성해서 그 집안의 항렬에 따라 짓는 이름이고, 자는 대체로 혼인한 후에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어른 아닌 사람들이 이 자를 불렀다. 호는 자 이외에 쓰는 아명(雅名)으로 학자 ·문인 ·서화가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었고, 시호는 경상(卿相)이나 유현(儒賢) 등이 죽은 뒤 임금이 그 행적을 칭송하면서 추증하는 이름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중에서 아명 등은 거의 없어지고 관명 ·호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아명은 대체로 무병장수를 염원하면서 천하게 짓는 경향이 있어 개똥이 ·쇠똥이 ·말똥이 등의 이름도 흔했다. 관명이 '熙'였던 고종 황제의 아명이 개똥이였고, 황희 정승의 아명은 도야지(都耶只)였음이 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