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는 처음에도 나중에도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름은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에게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창조된 피조물을 창조하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다. 즉 공의로서는 허용될 수 없는 피조물을 창조함은 그가 그런 피조물을 인내하고 계몽하고 신 자신과 함께 존재가 허용되지 않는 이기적인 피조물을 받아들이어 공의가 피조물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을때, 그 피조물의 허물을 신 자신이 책임을 지고 아파하겠다는 표현이니, 그의 창조행위가 우리에게는 사랑의 표현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영원처럼 그의 사랑이 영원하다.
그가 사랑이듯이 그가 공의이다. 그가 공의이므로 사랑없이는 이기적인 피조물을 창조할 수 가 없었고 그가 사랑없이는 피조물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공의임을 잘 나타낸다.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치 공의의 신과 사랑의 신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 같고 세상에는 많은 신이 존재하지 않나 오해할 수 도 있다. 그렇게 창조주와 구별된 악령들도 영적인 존재로서 신과 같이 치부하여, 질투의 신이란 표현도, 전쟁의 신이란 표현도 만들며, 신을 무에서 존재하는 처음이 아닌, 인간처럼 무의 속성과 유의 속성을 동시에 지닐 수 없는 셀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임이, 우리에게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사랑을 표현함에, 마치 사랑이 곧 신임을 즉 셀 수 있는 사랑의 신이 있을 것이라 착각하듯이, 공의는 우리에게 신이다. 하나님이 공의이고 공의가 하나님이니, 이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을 우리가 공의로서 느끼고, 그 공의를 셀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늘을 빗대어 존재를 인식하려 했음과 같다.
공의는 살아있다. 공의가 우리에게 신으로 실존하니, 마치 실재하여 실천 할 수 밖에 없는 그 공의를 귀신과 같은 급으로 생각하여, 귀신을 의존하여 공의를 망각하고 죄를 짓는 것에 양심에 가책이 없다면, 그 공의가, 하늘을 우리가 보면서 공의를 기억하듯이, 공의를 실천하여 공의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하늘처럼 느껴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