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30
(純祖 5)
外勢의 격랑
老論 僻派의 득세와 時派의 축출, 그리고 다시 그 반대의 상황 등을 지켜 본 純祖는 淸年期를 지나면서 어린 시절의 聰氣와 큰 뜻을 잃게된다. 純祖는 혼탁한 政治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英祖나 正祖처럼 黨派를 밀당하면서 政局을 조절할 湯平策을 펼칠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純祖는 중요한 정치적 판단과 결정을 備邊司(비변사 : 조선시대 軍國 機務를 관장한 文武 合議機構)에 모두 맡기고 정치의 중심에서 한 발 물러나 民生이나 科擧制道의 개혁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朝廷을 손에 쥐지 못하고 벌이는 일들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純祖는 체격이 크고 건장했으나 卽位 10年 때 부터 잔病에 시달렸고, 純祖 20년 즈음부터는 經筵(경연 : 조선시대, 王이 하는 공부 또는 공부하는 자리)도, 臣下들을 불러 일을 보는 것조차 거르다보니, 급기야 領儀政 金載瓚이 다음과 같이 아뢰기에 이른다.
- 한가로이 계실 때가 많지만 臣下를 接見하시는 일이 드물고, 經筵을 여는 날이 적어서 冊을 한 권 읽으셔도 끝맺을 기약이 없으시며, 百官이 나태해져서 한 가지 일도 진작시키지 못하고 各地에 일이 山積해있으나 諮問하시는 것을 볼 수 없사옵고, 벼슬을 위해 勢道家를 찾아가는 일들이 茶飯事인데도 단속하는 바가 없사옵니다.-
이러한 純祖에게도 하나의 즐거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 아들 孝明世子다. 純祖는 효명세자의 배필로 豊陽 趙氏 집안의 女息(副司直 趙萬永의 딸, 나중에 神貞王后로 책봉되어 82세까지 장수하면서 高宗에게 王位를 승계시키고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는 等, 뛰어난 정치적 자취를 남김)을 선택했는데, 그 이후 安東 金氏와 풍양 趙氏가 정치적 권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政局은 혼란스러워지고 民生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한편 病弱한 純祖(순조 27년)는 열 아홉살된 효명세자에게 代理聽政을 시키고 뒤로 물러나 나름으로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孝明世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진 人材를 등용하고 刑獄(형옥: 형벌로 감옥에 가두는 일)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현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본 純祖는 기쁘기 짝이 없었다. (權力이 世子에게 쏠리는 것을 宣祖처럼 전혀 부담스러워하거나 嫉視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孝明世子가 代理聽政 4년 만인 弱冠을 넘긴 스물 두살에 夭折(요절)하니 純祖의 슬픔은 표현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病弱한 몸이 子息을 잃은 슬픔에 持病(지병 : 순수 우리말은 '宿疾'인데 임진왜란 후 전래되었으니 차후에는 자제해야 할 것임)이 악화되어 1834년(순조 34년) 45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孝明世子는 死後 翼宗으로, 다시 文祖翼皇帝로 追尊되었다.
******************************
※ 조용한 아침의 나라 朝鮮!
朝鮮 沿海에 어느 때 부터인가 낯선 배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때 조선인들은 모양이 다른 이 배들을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이 異樣船은 일찍이 産業革命을 일으켜 富國强兵을 이룬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西歐 列强의 軍艦이거나 무장한 商船이었는데, 이양선의 조선 연해 출현은 이른바 西勢東漸(서세동점: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점차 세력을 넓혀 진출해 옴)현상이었던 것이다.
朝鮮은 손놓고 無對策인 상태에서 巨大한 外勢의 派高에 직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