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강 세상을 뒤흔들 진리
종교개혁의 시작
지난 번 이미 언급한 대로 구원에는 두 국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사실과,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진행 과정입니다.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마도 로마서의 기자 바울만큼 구원에 대하여 명확하게 제시한 성경의 기자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크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명쾌하게 가르친 이래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수 세기 동안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기 위한 열쇠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장에서는 전에 언급했던 그 시대를 다시 다루려고 합니다.
전에 없던 능력으로 구원에 관한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고 설교했던 그 시대, 곧 종교개혁이라 부르는 중추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가톨릭은 일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종교계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 안에 진리를 추구하는 귀한 영혼들이 제법 있었지만 오류를 가르치는 제도로 인해 세상은 영적 암흑에 빠지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제도가 죄인들이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은혜를 획득하거나 구입할 수 있다는 사상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사제를 통해서 성례전에 참여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도록 전체적인 제도가 확립되었습니다. 당연히 미사성체, 성찬가 가장 중요한 성례전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한 또 다른 방편은 면죄부였습니다. 비용을 지불하면 연옥에서 지내야 할 수천 년의 세월이 줄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해성사 고백성사 역시 은혜를 획득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나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죄를 짓게 되었을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얻어 내기 위하여 참회하거나 회개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이미 그리고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많은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신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흔히 옳은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 잘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나와 친분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다함이 없는 지혜 가운데서 루터라는 사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루터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세련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가톨릭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강직하고 불굴의 정신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인용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 즉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던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루터는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참회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호의를 가지고 그를 다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특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루터는 그 계단을 반쯤 올라가다가 멈춥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서 계단을 기어오르며, 무엇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호감을 받을만한 자격이 내게 있다고 주님을 설득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 길로 루터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경 로마서 1장 17절 옆의 여백에 라틴어 쏠라sola, 곧 오직이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습니다. 의인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영적인 흑암이 드리운지 약 천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루터는 빛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루터는 자신이 기존의 종교 체제에 도전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 계획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루터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고 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 여러분의 모습을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하여 일생 동안 무엇인가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루터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승리의 승천을 제외하고는 루터가 굳센 믿음으로 일어난 그때보다 더 위대한 순간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만 해도 가장 엄숙한 의회, 왕들과 군주들과 주교들과 황제들이 좌정한 보름스 의회 앞에 선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담담하게 진술했습니다.
루터는 요지를 말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달리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이 그분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진다라고 하면 그것은 정말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종교 체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루터와 함께 하셨고, 작센의 선제후가 그를 거의 1년 동안이나 성안에 감추어 주었으므로, 루터는 거기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지도록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루터가 이룬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교회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생겨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신교가 탄생하였고 또한 두 주류의 사상이 흘러 나왔습니다. 하나는 칼뱅주의라고 부르며, 다른 하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느 누구도 구속하지 않으셨고 단지 구원을 위한 준비 Provision 를 마련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구원은 오로지 철저히 선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파멸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림운동은 결국 예정설로 이끌게 되는 칼뱅주의의 가르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편 구제설'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들은 칼뱅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입니다. 2장에 열거된 예를 참조하십시오. 그 이유는 그 성구들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믿는 자들은 숫자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반대편에 있는 아르미니우스 학설은 보다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비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모든 죄인들을 십자가에서 구속하셨다." 당연히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이쪽 편을 더 지지합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명백한 복음과 은혜에 대한 복음의 교훈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는 구원이 자복하고 회개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종교개혁
이제는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라는 탈을 쓰고 일어난 운동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내가 자복하고 회개 할 수 있는 능력만 된다면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된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내가 한 시간 동안이나 열변을 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가르쳤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앉아서 듣고 난 다음에 "그래도 이 모든 과정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의미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은혜로우셨는지 우리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충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무엇을 값없이 주셨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손을 뻗어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제공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또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성장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내가 한 일이라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로 죄인이었을지라도,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상관없이 그분의 은혜를 베푸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매우 진지하게 말씀드립니다. 생애에서 행하는 선한행동이 어느 정도라도 여러분의 공이라고 인정하는 신학을 따르고 있다면 여러분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상에 빠져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근사하게 들리는 이름들, 곧 감리교, 장로교, 루터교, 정교회, 침례교,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가톨릭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사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은혜가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능력 여하에 따라 좌우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루터가 이 성경적 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된 때야말로 역사상 얼마나 엄청난 순간이었습니까! 약 천 년 동안이나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제도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루터는 그가 빠져있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중요한 시점에서도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아야 마땅합니다.
루터가 은혜로 말미암는 값없는 구원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을 때, 당시 종교계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로써 우리도 세상을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
"내용
1. 중세 암흑기 동안 이 세상이 영적인 흑암에 빠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기 위하여 로마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나타내 보이셨습니까?
3. 루터는 그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 앞에서 어떤 입장을 고수했습니까?
4.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거나 구할 수 있다는 거짓 사상에 빠져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5. 여러분이 경험하는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자신의 공로를 조금도 내세우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