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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3월 특강/梅窓 文學/漢文學
매창에 대하여
임화선
우선 이글을 통하여 매창보다 촌은 유희경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어떤 문학단체와 떠난 문학기행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서 ‘촌은집책판’과 함께 대학에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 촌은 유희경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미 유희경을 만나면서 매창과의 만남은 필연이 되어 버렸다 ‘매창에 대하여’는 3월 특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3월과 매화, 그리고 매창과 촌은 유희경으로 이어지는 강의 주제로 삼았다.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기생이며 여류시인이다. 시를 잘 짓는다고 하여 시기(詩妓)라고 불렀다.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촌은(村隱) 유희경( 劉希慶 1545-1636)과 주고받은 연시는 오늘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고 있다.
매창의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號)를 ‘섬초’(蟾初)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매창(梅窓)이라 불렀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계랑(癸桹 또는 계랑桂琅)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매창이 기생으로 살아간 것으로 보아서 매창의 어머니는 부안 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워 시에 뛰어났으며 가무에 소질이 있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이귀(李貴) 등과 교우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은 시조와 한시 58수를 남겼고 『매창집』이 있다.
李梅窓의 墓는 전북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에 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이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 연대가 정확하다.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劉希慶)의 시에는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 편 있다. 『가곡원류』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릴제 울며 쟙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여 있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한다.
계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이 덧붙여 있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시 중에 「추사(秋思)」.「춘원(春園)」.「견회(遣懷)」「증취객(贈醉客)」.「부안회고(扶安懷古)」.「자한(自恨)」 등이 있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 3권이 전하며 그 밖의 저서로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촌은집책판은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 있다. 용문사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유물로는 용문사 석불(높이 약 81cm)과 촌은집책판이 각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 시집(詩集)『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남해에는 금산 보리암, 망운산 화방사, 호구산 용문사 3대 사찰이 있다.
매창 묘 주변에는 매창 관련 시비 詩碑가 여러 개 있다. 매창의 정인(情人) 유희경(1545-1636)이 쓴 시, 매창의 이화우 시조와 소매를 뿌리치며, 가을 등, 허균의 만시, 이병기의 시비 등이 세워져 있다.
유희경의 시비부터 본다.
매창을 생각하며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浪州 낭주는 지금의 부안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1591년 따뜻한 봄날, 46세의 유희경은 18세의 매창을 부안에서 만난다. 당시에 매창은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는 기생으로 서울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매창이 처음 유희경을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서 유희경과 백대붕 중에서 어느 분인지를 물었다. 유희경(劉希慶)과 백대붕(白大鵬)은 시를 잘 지어서 부안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허균의 글 『성수시화(惺叟詩話)』에 나오는 유희경(劉希慶)과 백대붕(白大鵬) 소개를 살펴보자.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 임억령의 별장 식영정에 올라 그 누각에 이전 사람들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竹葉朝傾露/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松梢曉掛星/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라 하니 송천 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본 순간 연정을 느낀다. 그녀가 시도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서 보통 기생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첫인사로 다음 시를 읊는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야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나에게 선약이 있으니
찌푸린 고운 얼굴을 고칠 수 있다네.
깊이깊이 비단 보자기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리운 임에게 주고 싶어라.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서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한껏 정을 주고받는다. 유희경의 문집 『촌은집(村隱集)』에는 그는 예학이 밝았기에 색을 가까이 안 하였으나 그때 처음으로 파계를 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무튼 둘은 진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짧게 끝난다. 곧 이별이 찾아온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이별하기 싫어서' 시를 짓는다.
東風一夜雨
柳與梅爭春
對此最難堪
樽前惜別人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니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 할 건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유희경(劉希慶)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이듬해 1592년 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유희경은 의병 활동을 하게 되었고, 전란은 둘을 상당 기간 갈라놓는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못잊어하고 그리워하나 만나지를 못한다. 매창(梅窓)과 유희경은 그 그리움을 편지로 주고받지도 못한 채 각자 시(詩)로 남긴다. 이미 언급한바 같이 유희경(劉希慶)은 ‘매창(梅窓)을 생각하며’ 시를 짓고, 매창도 이화우(梨花雨) 시조 등 여러 시를 지어 유희경을 그리워한다.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梨花雨))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詩는 매창의 여러 詩 가운데 유일한 한글 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바라보고 이를 『이화우 梨花雨』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한시 한편이 더 있다. '이별하기 싫어서'이다.
매창은 유희경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는 등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워 벼슬이 당상관까지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궁궐 바로 근처에 문화 사랑방 침류대를 짓고 오리 이원익, 이수광, 신흠, 김상헌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잘 지내고 있다는 소문도 함께 들었다.
또한 매창이 쓴 ‘임 생각’이란 시에도 그리움이 배어 있다.
애끓는 情 말로는 할 갈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나마 세였구나.
생각나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원래 이 시는 두 수인데 매창공원의 시비에는 둘째 수가 적혀 있다.
여기에서 첫 수도 함께 살펴보자.
헤어진 슬픔이 너무 서러워
문 닫고 앉았노라니
비단옷 소매에는 임의 몸내 없고
눈물자욱만 얼룩졌네.
홀로 지내는 깊은 규방을 찾는 이 없어 고즈넉한데
저녁놀에 잠긴 뜨락 가득 가랑비가 내리네.
비 오는 저녁. 홀로 있으니 처량하고 쓸쓸하다. 임의 체취도 없고 눈물만 자욱하다. 그리워서 밤새 시름으로 뒤척이니 손가락도 헐거워졌다.
1수와 2수가 시간 적으로 그리고 외로움과 그리움의 강도가 점점 진하여지면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매창은 유희경을 못잊어 한다. 그리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어쩌면 열여덟 순정을 처음 바친 이가 유희경이었으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생이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뭇 남성들에게 웃음과 재주 그리고 소위 수청을 들어야 하는 것이 조선기생의 본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조를 지킨다. 아무에게나 몸을 주지는 않는다. 뭇 남성들이 매창의 인기에 매료되어 술 한잔하고 잠자기를 원하였으나 매창은 그때마다 잘 뿌리친 것이다.
취한 손님에게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어 찢어지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질까 그게 두려울 뿐이네
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매창이 절개를 지킨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선비가 매창을 유혹하여 보려고 戀詩를 보냈다. 그런데 매창은 이렇게 시를 써서 정중히 거절을 하였더니 그 선비가 떠나갔다.
평생 동쪽 집에서 밥 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것을 배우지 않았네요.
매화 창문에 달그림자 비낌을 사랑할 뿐
글깨나 하시는 분께서 나의 그윽하고 한가한 뜻을 미처 알지 못하여
지나가는 구름을 잘 못 가리키는 일이 부질없이 많답니다.
1, 2구는 매창은 그렇게 동가식서가숙, 헤프게 정 주지 않는 여인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매화 창문은 바로 그녀의 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달그림자에 비껴있는 것을 사랑할 뿐이다. 3.4구는 글깨나 하시는 분이 저의 절개와 지조를 잘못 알아서 지나가는 구름을 가리키며 비가 들어 있는 줄 잘못 짚어서 운우지정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부질 없음을 넌지시 일러 준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 16년이 흘렀다. 1607년에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당상관이 된 유희경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잠깐 내려왔던 모양이다. 이때 매창의 나이 34세 유희경은 62세이었다.
너무 늦게야 매창을 다시 만나고는
옛날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했는데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던가.
내 온 것은 임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라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요.
다시 만났을 때 쓴 유희경은 이렇게 읊는다.
매창도 ‘옛일을 더듬으며’ 화답한다.
임진 계사 두 해 동안 왜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이야 그 누구에게 호소하리까.
거문고 옆에 끼고 외로운 난세의 노래를 뜯으며
삼청동에 계실 그대를 서글피 그리워했지요.
매창의 시에서 삼청동은 유희경(劉希慶)이 사는 동네이다. 지금의 청와대 근처이다. 유희경은 궁궐 가까이에 침류대를 지어 놓고 당시의 저명인사들과 사교를 하였다.
다시 만난 당상관인 유희경(劉希慶)은 매창과 내소사, 직소폭포, 개암사, 채석강, 곰소등 변산반도를 다 다녔으리라. 유희경이 쓴 사랑 시가 그 정황을 뒷받침하여 준다.
계랑을 놀리며
버들꽃 붉은 몸매도 잠시동안만 봄이라서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이 참겠소.
무산에 운우의 정 자주 내리세
무산의 운우지정 雲雨之情은 구름도 되고 비가 되기도 하는 무산의 선녀가 초나라 왕과 동침을 하여 황홀경에 이르는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유희경(劉希慶)이 옛 정인을 만나서 사랑을 하나 이런 사랑도 열흘 만에 끝난다. 유희경(劉希慶)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별하는 날 매창(梅窓)은 정말 이별하기가 싫었다. 첫 이별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이별은 만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30대 중반의, 지는 매화꽃 매창이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別恨
明宵雖短短
今夜願長長
鷄聲聽欲曉
雙瞼淚千行
이별하기 싫어서
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지더라도
임 모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지소서.
닭 울음소리 들리고 날은 곧 새려는 데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매창은 유희경이 자기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 주기를 바랬으리라. 그러나 유희경은 예를 지키는 인물인지라 기생을 서울로 데리고 가지는 못하였다. 다정이 병이고, 이별이 병이 되었을까. 매창은 병들어 몸져눕는다.
병들고 시름겨워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에게
굶고 추워 떨며 사십 년 길기도 하여라.
인생은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가슴속에 시름 맺혀 수건 적시지 않는 날 없네.
당시 梅窓은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디 는 뜻, 妓生을 意味함)랄 수 있는 기생 신분이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 시 한 편이다.
相思都在不裡
一夜心懷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圍
말은 못 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어ㅆ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를 좀 보시구려
매창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유희경과 헤어진 3년 뒤인 1610년 여름에 그녀는 쓸쓸히 타계한다. 유희경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그녀는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이후로 그녀를 아끼던 사람들은 그곳을 ‘매창이뜸’ 또는 ‘봉두메’라고 부른다.
매창의 묘는 지방기념물 제 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뒤늦게 매창의 죽음을 안 유희경은 조용히 슬퍼하며 그의 문집에만 詩를 남긴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 계랑아
홀연히 뜬구름 따라 너의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정미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구나.
그녀가 이 땅을 떠난 지 45년 만인 1655년, 그녀의 무덤 앞에 작은 돌비석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668년, 그녀의 작품집을 개암사(開岩寺)에서『매창집(梅窓集)』을 발간하였다. 이 작품집에는 그녀가 지은 몇백 편의 시 중에서 고을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58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부안 고을 아전들이 이 시를 모아서 개암사로 보냈고, 개암사에서는 이 작품을 목판에 새겨서 시집을 간행하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매창집』은 현재 3권이 남아 있는데 서울 간송미술관에 두 권,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한 권이 보존되어 있다. 1956년 고향이 부안인 시인 신석정이 최초로 대역한 『매창집』이 있다.
이 글은 2018년 부산여류시인협회 3월 특강으로 매창문학을 주제로 강의하였다. 그리고 영남여성문학회 『모시올』 제37집에 게재된 글이다. 이 글을 청안문인협회 cafe에 올리면서 일부 수정 보완하였다.
참고문헌
-『촌은집(村隱潗)』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지봉유설(芝峯類說)』
-『수촌만록(水村漫錄)』
-「조선역대여류시선(朝鮮歷代女流詩選)」(신구현,『조선문고』1-5, 학예사, 1939) 요약 테이블과 유희경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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