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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 앞에선 클레오파트라'
장 레옹 제롬(1824~1904),
클레오파트라의 미색에 빠진 시저
시저가 처음 이집트 땅을 밟았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도망자 신세였다.
남동생이 자신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복귀를 막기 위해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던 아드리아의 선착장에 어느 날 밤 작은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이 배에는 시저에게 전할 선물이 카펫에 둘둘 말린 채 실려 있었다.
시저 앞에 무사히 당도한 선물.
그 안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욕망에 굶주렸던 시저는 클레오파트라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52세의 시저는 21세의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에게 흠뻑 빠졌고, 사랑에 눈이 먼 시저는 클레오파트라를 와의에 앉히기 위해 이집트와의 전쟁을 불사했으며, 후에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러들여 애정 행각을 이어나갔다.
율리우스 시저의 삶은 암살로 막을 내린다.
로마의 권력이 시저에게 집중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던 원로원의 공화정파 브루투스에게 살해당한 것.
이후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클레어파트라는 시저의 부하이자 오른팔 이었던 안토니우스와 다시 결혼을 감행한다.
시저는 근대 유럽이 운명을 디자인한 최고 통치자로 추앙받지만, 미색에 홀려 다른 나라를 간섭하는 바람에 역사를 두 줄기로 나눈 장본인으로 두고두고 낙인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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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친 잘못된 만남
당 현종과 양귀비
*현종(玄宗, 685~762)
*양귀비(楊貴妃, 719~756)
당나라 현종 정권 초기에 혼란스럽던 행정을 바로잡고 부패를 척결했으며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호아제로 이름을 드높였다.
하지만 통치 말기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부정부패와 과소비가 만연하며 왕조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며느리를 첩으로 삼은 현종
양귀비는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의 첩이었다.
어느 날 양귀비가 목욕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현종은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이를 눈치챈 내시의 계획에 의해 환갑의 현종과 10대 소녀 양귀비가 맺어지게 된다.
이후 양귀비에게 빠진 현종은 아들에게서 양귀비를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기에 이른다.
황제의 애첩이 된 양귀비는 자신의 옷을 만드는 사람을 700명이나 고용할 정도로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로 인해 황실의 재정은 고갈되어 갔지만 현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양귀비를 위해 중앙아시아 사라르칸트에서 생산되는 최고의 특산품을 공수했으며, 빨리 운반하기 위해 길을 따로 만들 정도였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업고 사촌 오빠를 비롯한 자신의 친족을 대거 고관대작으로 발탁해 황제의 권력을 나눠 가졌다.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자 지방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 수도까지 진격하는 일이 벌어졌고, 현종은 양귀비의 남편이었던 자신의 열여덟 번째 아들 수왕에게 황위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는다.
결국 당나라는 혼란 정국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다가 몰락했다.
※ 양귀비의 죽음에 얽힌 비밀
공식적인 기록에는 양귀비가 귀양을 떠나 생을 마감했다고 쓰여 있으나 반란군의 종용으로 황제 앞에서 목매 자결한 것이 정설로 통한다.
한편 그녀가 비밀리에 일본의 절로 보내져 비구니로 살았다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그녀의 시체가 무덤에서 사라졌으며, 그 뒤 현종이 죽기 전 마지막 3년 동안 생일 때마다 일본의 비구니절에서 선물을 보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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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와 앤 불린
*헨리 9새, 1491~1547
*엔 볼린, 1507~1536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이야기서리를 남긴 왕은 헨리 8세다.
둘째 왕자로 태어났지만 형이 요절하는 바람에 1509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영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것으로 기록된다.
그는 영국 국교회를 설립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수도원을 해산시켰으며,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게 속에서 몇 차례나 군대를 일으켜 이웃 나라를 제압했다.
하지만 이 모든 업적은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묻히고 말았다.
훗날 세인들은 헨리 8세를 여자에 빠져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호색한으로 기억했다.
재혼을 위해 종교개혁을 단행하다
헨리 8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여자는 앤 불린이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인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던 그녀는 왕비의 시중을 들던 중 헨리 8세의 눈에 들었다.
헨리 8세는 곧 앤 불린의 매력에 사로잡혔으나 그녀는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잠자리를 할 수 없다고 당돌한 선언을 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헨리 8세를 더 애달프게 만들었다.
왕은 이혼을 반대하는 가톨릭과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다.
앤 불린은 결국 헨리 8세와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하면서4 헨리 8세의 마음은 점차 멀어졌고, 왕의 남동생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명으로 단두대 앞에 서는 비운을 맞았다.
앤 불린이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것은 왕비가 되고 참수되기까지 1000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후 헨리 8세가 죽고 앤 불린에게 왕비 자리를 빼앗겼던 캐서린의 딸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 역사는 피로 물든다.
앤 불린과의 결혼에 찬성한 수많은 개신교도를 무자비하게 처형한 것이다.
훗날 '블러드 메리(피의 여왕)'로 불린 메리 1세의 폭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 영국 왕실 최고의 호색한이 된 진실은?
헨리 8세는 재위 기간 중 총 6명의 왕비를 들였고, 이 가운데 2명의 왕비에게는 직접 참수형을 내린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아들을 얻기 위한 헨리 8세의 정치적 목적'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강력한 왕권 확립을 원했던 헨리 8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가 얻은 왕비는 하나같이 딸을 낳거나 아니면 아들을 낳아도 일찍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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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막지 못한 열정
나폴레옹과 조제핀
*나폴레옹, 1769~1821
*조제핀, 1763~1814
'조제핀에게 이벌을 고하는나폴레옹' 라슬렛 존 포트(1837~1898)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불과 15년 만에 유럽의 역사를 바꾼 천하 영웅 나폴레옹.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는 말을 남겼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이자 통치자로 꼽힌다.
하지만 그 역시 남자였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한 범부이기도 했다.
조제핀을 향한 나폴레옹의 일편단심.
나폴레옹은 작은 키를 콜플렉스로 여겼다.
젊은 시절에는 이 때문에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 당당히 나서지도 못하고 차이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필사의 몸부림을 치며 얻은 여자가 바로 여섯 살 연상의 과부 조세핀이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1795년 파리에서 조제핀을 처음 만났다.
다잇 조제핀은 혁명으로 남편이 처형되고 미망인으로 두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낭비벽이 심했으며, 심지어 나폴레옹 상관의 정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녀의 미모와 매력에 홀딱 빠져 청혼을 했고,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지닌 권력과 힘을 선택함으로써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나폴레옹에게 애정이 없던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원정을 떠나자 젊은 기병대 장교와 외도를 하는 등 수없이 바람을 피웠다.
나폴레옹은 이를 눈치챘음에도 그녀를 향한 애정을 멈출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생이 7만5000통에 달하는 많은 편지를 썼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조제핀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와 한창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그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여자 때문에 판단력이 흘졌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조제핀의 냉담한 마음이었다.
절망한 나폴레옹은 결국 조제핀과 이혼하고 만다.
나폴레옹의 일생은 영광과 애욕으로 점철되었다.
백일 천하를 끝내고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죽어가던 나폴레옹이 남긴 마지막 말은
"프랑스, 군대, 군대의 선두에는··· 조제핀···"
이었다.
천하의 영웅도 사랑하는 한 여자의 마음을 얻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 나폴레옹은 키가 얼마나 작았을까?
후대의 많은 사람이 이를 궁금해한다.
나폴레옹이 죽은 후 시신을 부검했는데, 5피트 2인치, 즉 157.5cm였다.
하지만 이를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5피트 2인치를 영국식 피트 단위로 계산하면서 잘못 알려진 것이며, 당시 프랑스의 길이 단위로 계산하면 167cm라는 것.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나폴레옹은 키가 그리 작지 않았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 키는 164c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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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와 제1의 방조자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아돌프 히틀러r, 1889~1945
*에바 브라운, 1912~1945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 그는 600만 명 이상의유대인을 학살했으며, 15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26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의 목숨을 잃는 비극을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다.
이토록 끔찍한 전쟁이 히틀러 단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행해졌을리 없다.
그의 곁에는 이를 방조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도 그중 한 명이다.
결혼식 이틀 후에 자살한 히틀러
히틀러는 살아생전 '조국과 결혼한 남자' 이미지를 만들어 독신을 고집했는데, 이는 독일 여성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방편이었다.
실제로 히틀러의 여성 편력은 호색한에 가까웠고, 이복 누이의 딸을 비롯해 여배우 등과 밀회를 즐긴 것으로 밝혀졌다.
히틀러의 여자 가운데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이가 바로 에바 브라운이다.
그녀는 10대 소녀 시절 스무 살 연상의 히틀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후 히틀러가 다른 여자를 만나 한눈을 팔 때에도 그를 기다렸는데,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히틀러의 마음이 자신에게 굳은 것으로 판단되자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독일 패방 직전 참모들이 히틀러를 베를린에서 탈출시키려 했지만 그가 말을 듣지 않자 그녀에게 히틀러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모른 척했다. 그녀는 소련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가운데[ 피신해 있던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파티를 벌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히틀러의 정치적 판단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에바 브라운은 대부분의 독일인이 그런 것처럼 히틀러의 만행에 무지했고, 방조했으며, 그의 몰락을 방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 지 이틀 후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에바 브라운은 역사를 실망시켰다"라고 평가했다.
※ 히틀러는 왜 자살을 택했나?
히틀러는 소련군에게잡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시신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누구도 자신의 죽은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훗날 히틀러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가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히틀러의 죽음을 확인할 물증이 필요했던 소련군은 가짜 사진을 찍었고, 이를 본 사람들이 히틀러가 아님을 알아차린 후
"히틀러가 어딘가로 탈출해 살아 있다"
라고 믿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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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최악의 선택
마오쩌둥과 장칭
* 모택동(893~1976)
* 장칭(1914~1991)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킨 근대 중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한편 과대망상적이고 급진적 정책을 실시해 나라에 재앙과 혼란을 일으킨 독재자라는 평가도 있다.
마오쩌둥을 비난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그의 네 번째 부인 장치에게서 비롯된다.
문화혁명의 맹주로 위세 떨친 장칭
마오쩌둥은 권력욕만큼이나 여색을 탐했다.
그는 총 네 번 결혼했으며, 말년까지 수많은 내연녀를 결에 두었다.
하지만 장칭만큼 마오쩌둥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여자는 없었다.
상하이 출신으로 미모의 연극배우였던 장칭은 마오쩌둥의 비서로 출발해 세 번째 부인을 쫓아내고 네 번째 아내 자리를 차지했다.
기가 센 장칭은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정치적 마녀'라는 별칭을 얻었다.
1949년 신중국 수립 후 중국의 첫 퍼스트레이디가 된 장칭은 중국 역사의 최대 오점인 '문화혁명'을 주도한 문혁 4인방의 맹주로 위세를 떨쳤다.
그녀는 홍위병을 앞세워 중국 대륙을 광기로 물들게 한 장본인이다.
마오쩌둥은 훗날 "장칭을 만난 것은 내 인생 최대 실수"라고 고백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체포된 장칭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데, 신병 치료 중 병원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중국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피비린내 나는 문화혁명이라는 오점을 남긴 데에는 장칭이 불러온
비극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장칭은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함께한 여인이었으나 한편으로 끝끝내 후회한 생애 최악의 선택이기도 했다.
※ 남편 못지않은 장칭의 남성 편력
장칭의 첫 번째 남편은 연극평론가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곧바로 이혼한다.
이후 두 번째 남편 위치웨이를 만나 공산주의 사상에 눈뜬 후 다시 예술평론가인 세 번째 남편을 만나 결혼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남자는 마오쩌둥이었다.
장칭은 마오저둥의 네 번째 여자로 유명하지만, 마오쩌둥 역시 그녀의 네 번째 남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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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시작과 끝
니체와 루 잘로메
* 니체 1844~1900
*루 질로메, 1861~1937
"신은 죽었다"
라고 일갈한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였던 니체는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치며 현대 철학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니체 개인의 삶은 상당히 불우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떠돌다 말년에는 정신병까지 앓은 것이다. 사람들은 니체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그가 평생 짝사랑한 루 잘루메에게서 찾는다.
시대의 지성들을 사로잡은 마력
니체가 생애에 걸쳐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는 루 잘로메뿐이었다.
취리히 대학교에서 예술학을 공부한 재능 있는 작가였던 루 잘로메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로, 주변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팜므 파탈의 전형이었다.
나체는 1882년 루 잘로메를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한다.
당시 니체는 38세. 잘로메는 21세였다.
그해 여름 니체는 자신의 여름 별장에 자로메를 초대해 한 달간 지내면서 청혼을 했다.
하지만 그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대신 잘로메는 니체의 지제이자 친구인 파울 레와 공동 생활을 하자고 제안한다.
세 사람이 함께 사는 동안 니체는 계속되는 구애에 염증을 느낀 잘로메가 파울 레와 단둘이 살기로 하자 니체는 그녀의 문란한 사생활을 세상에 폭로했지만 정작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니체는 실연의 고통 속에서 필생의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했다.
그리고 6년 후 정신병에 걸린다. 우울증과 조울증을 번갈아 겪으며 친구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간신히 연명하던 니체는 1900년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당대의 지성이자 현대 철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니체의 마지막 10년은 이처럼 퇴행과 광기로 점철됐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을 뿌린 이는 루 잘로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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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사랑의 대가를 치르다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
*원떠공1894~1972
*심프슨 부인 1896~1986
조지 5세의 맏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 8세(윈저공)는 1936년 영국 국왕 자리에 올랐다.
그는 청년 시절 자유로운 영혼의소유자로 불리며 다양한 연애를 즐겼는데,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3년 전 이혼 경력이 있는 심프슨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세련된 패션 감각과 우아한 태도, 유머 감각을 겸비한 미국 여성인 심프슨 부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그녀와 결혼을 선언한다.
죽은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오다
미국 출신의 영국 왕비는 미국인들에게는 상당히 매혹적인 일이 었겠지만 영국 왕실과 정치권은 패닉에 빠졌다.
평민인 데다 심지어 이혼녀이고 현재 유부녀인 심프슨 부인을 왕비로 인정할 수 없없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동생 앨버트 공에게 왕위를 넘기고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통해 퇴임 의사를 밝혔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 책임을 맡는 일도, 왕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는 것이 연설의 요지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세기의 로맨스'로 등극했고, 에드워드 8세는 동생에게서 '윈저 공'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윈저 공은 '심프슨이 왕비 칭호를 받지 않고 둘 사이에 낳은 아이가 왕위를 물려받지 않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할 만큼 왕위에 집착했다. .
하지만 협상안은 영국 내각과 정부, 교회와 왕실 가족 모두에게 거부당했다.
결국 망신 당하며 쫓겨날 처지에 이르자 '왕위 대신 사랑을 택한 로맨티스트'로 스토리를 각색한 것이다.
왕위를 넘긴 윈저 공은 프랑스에서 심프슨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늘 고향인 영국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다고 동생에게 간청했지만
"돌아오면 생활비를 끊겠다"
는 말에 영국령인 바하마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윈저 공은 영국에서 쫓겨난지 31년 만에 이국 땅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결국 관에 실려서야 조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윈저공은 살아생전 사람들이 '세기의 로맨스'를 운운하면
"그게 얼마나 죽을 맛인데"
라며 혹독한 사랑의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자인했다.
※ FBI 비밀 문서 속 심프슨 부인의 정체
미국 FBI의 비밀 문서에 따르면 윈저 공이 왕위를 포기할 당시심프슨 부인은 주영 독일대사와 연인관계였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심프슨 부인과 요란한 정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진 주영 독일대사가 그녀에게서 비밀 정보를 캐낸다는 정보를 보고받고 윈저 공 부부를 감시하도록 직접 지시했다.
심프슨 부인의 나치 스파이설은 윈저 공이 왕위에서 쫓겨난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치의 추종자 였던, 윈저공과 심슨부인(이 일로 바하마 로 유배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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