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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3일 금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공직에 들어가 로마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성소)을 느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590년 9월 3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가난한 이를 돌보면서 교회 쇄신과 복음화에 일생을 바쳤다. 특별히 신앙과 윤리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성인은 604년 3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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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루가 5,33-39)
“No one tears a piece
from a new cloak to patch an old one .
Otherwise, he will tear the new
and the piece from it will not match the old cloak.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면서 생활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제1독서). 우리는 가끔, 신앙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낡은 체제와 구조를 고집하며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단식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을 더해 주는 보조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식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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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단식은 음식을 끊는 행위입니다. 먹기 싫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어도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겼을 때 단식하라.’고 하십니다. 신랑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에 동참하려면 단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본능을 참을 때 변화를 느낍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체험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는 음식의 절제를 강조해 왔습니다. 절제를 통해 사람의 본능을 훈련했던 것이지요. 단식 역시 ‘본능의 조절’을 연습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다면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됩니다.
예로부터 많은 종교가 음식에 대해 까다로웠습니다. 지금도 ‘못 먹는 음식’을 규정한 종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먹기만 하면 선이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그런 음식이 있다면 매일 먹기만 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먹기만 하면 악이 되는 음식’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식의 절제는 자유로움을 줍니다. 음식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면 그만큼 기쁜 삶으로 바뀝니다. 본능을 절제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식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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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하늘의 기운을 얻고자 할 때 단식하였습니다. 먹고 싶은 욕망을 참을 때 하늘이 도와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덕을 닦는 사람에게 단식은 필수적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겐 단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단식은 강렬한 참회의 수단이었습니다. 부정을 씻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방법으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의 단식을 법으로 정해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의무적인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만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단식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 자체보다 단식하는 동기를 더 중히 여기십니다. 단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먹는 자유를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단식뿐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한 방법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활동 자체에 매달려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굶는다는 것
촛불소녀들-새 감각과 새 정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크는 것도 아프네요>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성찰과 자숙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최인호 작가님은 최근 발간한 ‘산중일기’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연히 들었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제1악장이 요즘 내 삶의 화두를 이루고 있다.
‘느리게,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내 삶을 작곡한 하느님이 지휘자인 내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나는 그 작곡가의 숨은 뜻을 따라가며 연주하듯 살아가야 할 것이다.”
빠르고 쉬운 길의 유혹이 신앙생활에도 스며듭니다. 교회마다 신속 무통(無痛)의 변화와 성장의 길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것을 ‘값싼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길에서도 자기 비움과 쇄신을 위한 땀이나 눈물, 고통이나 십자가는 뒷전인 채 ‘지름길 신앙생활’만을 추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여정이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은총의 여정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동시에 멀고도 힘든 길이라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외면합니다. 그 길은 때로 우리에게 너무도 힘든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포도주’로 소개하시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새로운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우리 영혼에 담기 위한 작업은 그냥, 저절로, 가만히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새로운 부대가 되기 위한 노력은 어쩔 수 없이 힘겹습니다.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한 산고와도 같은 고통이 필수적입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한 지속적인 ‘새 출발의 노력’ 이것은 우리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인 것입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한 지름길은 결코 없습니다. 깨달음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 극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과정 없이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내 영혼 안에 건설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들은 열네 살 때 다리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사는 ‘성장통’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것이 실제로 있는지도 몰랐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나는 아들의 침대 밑에 앉아, 아파서 끙끙 앓는 그의 정강이를 문질러 주었다. 하룻밤은 아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크는 것도 아프네요.”
아들이 내게 인생의 깊은 진리 하나를 들려주고 있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성장통을 겪는다는 뜻이다.(수몽크 키드, ‘기다림’, 복있는 사람들 참조)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저를 괴롭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키도 저보다 크고 힘도 저보다 훨씬 셌지요. 그러다보니 자주 이 친구로부터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맞았지요. 한 번도 울었던 모습을 못 봤던 그 큰 덩치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울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니 피도 보입니다. 저는 무서워서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집의 창고에 들어가서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인터넷에 악플을 달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본 뜻
-김인한 신부- 차를 즐겨 마시는 편입니다. 삶이 사람을 만든다 -박기호 신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후회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새 인간상을 본 것이며 제자로 산다 함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얻는 것이다. 이제까지 기어 다니며 구르는 재주와 잔꾀로 먹고사는 굼벵이가 아니라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창공의 삶을 얻는 것이다. 그것을 번신(飜身)이라 한다. 예수님과 합일되어 사는 자, 번신의 몸을 얻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ㄱ)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별 연습> -양승국신부- 형제들과의 공동생활을 중시하는 수도자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하나의 큰 화두이자, 고민거리이자 도전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동료 수도자들과의 관계입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동료들과의 관계가 원활하고 부드러울 때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원활하고 부드럽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이웃들과의 관계 역시 원활합니다. 한 형제가 열심히 기도생활에 전념하기는 하는데, 기도가 끝난 후 현실로 돌아와서 그 결과가 좋지 않다면, 예를 들어 사사건건 형제들과 충돌한다거나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면, 그 형제의 기도생활은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날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재산이 많다하더라도 이웃들과의 관계가 완전히단절되어, 마치 무인도처럼 고립되어 산다면, 그래서 철저하게 혼자라면, 그게 잘 사는 것일까요?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것은 이웃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이웃들과의 관계, 활발한 상호소통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운 만남, 그것이 잘 살고 있다는 한 표시가 아닐까요? 여기, 이웃들과의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참 나’와 ‘참 너’가 만나기 위한 소통을 잘하기 위한 비결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비결은 오늘 복음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이웃들, 우리가 매일 신앙하는 하느님과 매일 아침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새 옷, 새 포도주로 바라보며 관계 안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어제 나와 제대로 한번 충돌한 그 형제, 내 영혼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 그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간밤에 새롭게 태어난 새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길고도 고된 하루 일과에 시달려온 그, 관계 안에서 상처입고 방황하던 그, 이제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침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과 매일 밤마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간에 주고받았던 깊은 상흔과 그로 인한 괴로움, 내면의 아픔과 분열과도 하나하나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형제는 오늘이 지나면 이제 다시는 못 볼 형제로 바라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매일 떠남을 전제로 합니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는 매일의 이별 연습이 필요합니다. 어제의 그를 떠나보내는 연습, 어제의 나와 작별하는 연습...
속빈 강정 -전삼용신부- 한 신부님이 자신의 신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반에 ‘상투스’가 있었답니다. ‘상투스’는 거룩하다는 뜻이고 성인처럼 사는 사람을 신학생들은 “쟤는 상투스야!”라고 말합니다. 이 말 안에는 약간 비꼬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 신부님과 같은 반이었던 상투스는 늦게 신학교에 들어와 나이가 같은 반 신학생들보다 좀 많았다고 하는데 그 거룩한 것이 정도를 지나쳤다고 합니다. 그 상투스 형은 자신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열심히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주위 사람들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기도에 늦거나 빠지거나 하면 교수 신부님들보다 그 형에게 먼저 한 소리 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옆에서 졸면 가지고 다니는 바늘로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배가 아픈지 그 신학생이 혼자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것도 희한한 일인데 미사와 기도가 끝날 때까지 그 형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투스에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미사가 끝나고 같은 반 학생들이 화장실로 갔더니 그 선배는 씩씩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빨고 있더랍니다. 그것은 신학생들이 입는 흰 와이셔츠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배가 너무 아파서 대변을 보고 휴지로 엉덩이를 닦았는데 이상하게 변이 휴지에 묻어나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닦아도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엉덩이 밑까지 내려와 있던 흰 와이셔츠 위를 닦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결국 와이셔츠로 밑을 닦아버린 것입니다. 결국 상투스는 남들 보기엔 거룩해 보일 수 있지만 자기의 밑도 제대로 닦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거룩한 행위를 하면 그 사람이 거룩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사실 이들은 지켜야 할 모든 규정들을 다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신랑이고, 제자들은 그 혼인잔치에 온 친구들인데 신랑이 있는 혼인잔치에서 어떻게 단식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 때는 그들도 단식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규율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하고 새 옷은 새 천으로 꿰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떤 거룩한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해 준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덜 거룩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때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사랑이 될 때도 있습니다. 주위에 아픈 사람을 위해 주일미사를 빠져야 했다면 그 사람을 모른 채 하고 미사에 나온 사람보다 더 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고해성사는 주일미사에 빠진 사람이 보고 사랑을 저버리고 미사를 온 사람은 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로마에 유학 나와서 있을 때 이런 분을 또 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지도 신부님이셨는데 본인 스스로 매우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살고 또 우리에게는 규칙대로만 살지 않으면 매우 화를 내시는 분이셨습니다. 밤에 순찰을 돌고 신학생들의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엿듣거나 들어와 보기까지 하는 모든 신학생들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제가 영성체를 하는데 그 때 그 신부님이 성혈을 찍어서 영해 주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성혈을 찍으면서 몇 방울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 성혈을 신발 신은 발로 쓱쓱 문질러서 닦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남들이 자신을 거룩하게 생각한다고 믿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항상 경직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건 사제들도 마찬가지고 수녀님들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벗어버리려 해도 남들에게 ‘사제처럼’ 보여야 한다는 마음에 자신을 포장하게 만들고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는 경직되어버립니다. 스스로 거룩해지고 위해 거룩한 행위를 하지만 사실은 속빈 강정에 불과합니다. ‘속빈 강정’이란 겉은 번들번들하고 달고 맛있어 보이지만 딱딱한 겉에 비해선 속은 텅텅 비어있는 경우를 들어 하는 말입니다. 겉만 포장하며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텅 빈 속을 감추기 위해 그 겉도 얼마나 단단히 굳어져 있습니까? 이렇게 살다보면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예인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해서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되고 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새 옷은 새 천으로 꿰매야 합니다. 각자 때와 장소에 맞는 행위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 자체가 거룩함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다른 사람의 행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판하기 보다는 먼저 내 자신의 내면을 채우는데 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비판하는 나 자신도 속빈 강정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다이어트’다. 살을 빼면서 건강하고 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이어트’가 아닌 ‘단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단식은 한마디로 밥을 먹지 않는 행위이다. 종교적 단식은 모든 이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자신을 정화하고 속죄하면서, 가난한 이웃을 돕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단식의 목적이다.
건배! -김찬선신부-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강정웅 신부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새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만 바라보고, 모세의 율법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아예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데도 그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한다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맛보아왔고 맛보고 있는 묵은 포도주에 너무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묵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셔온 묵은 포도주가 이 세상의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새 포도주는 그들에게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얽매어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들이기에, 눈과 귀만 먼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굳어버린 그들이기에, 구세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예수님을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실 때에 제일 먼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드릴 수 있도록 회개의 생활로써 새 가죽부대를 마련하도록 합시다. 부족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나직이 기도해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시다. -서영남 - 경석씨는 민들레 국숫집의 VIP 손님이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혼자 삽니다. 술을 드시지 않을 때는 얼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모릅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아주머니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부끄러워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이창신 신부- 시간의 구분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년, 월, 일, 시간, 분 등으로 시간을 나누고 구분합니다. 만일 시간의 구분이 없다면 얼마나 우리의 생이 무료하겠습니까? 일의 보람도, 반성도, 새로운 일에 대한 희망도 어쩌면 시간의 구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시편저자도 날 수 샐 줄 아는 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조성풍 신부- 요즈음 ‘변화’라는 말과 더불어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이기양 신부- 새 옷에는 새 천으로, 새 부대에는 새 술로 -강영구신부-
†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다. -박상대 신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분명히 좋은 구절이었고, 결혼하는 친구에게 힘이 되는 구절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체국 직원이 ‘1’을 빼고서, ‘요한 4,18’로 축전을 보낸 것입니다. 사실 직원은 ‘1’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았지만, 숫자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1’이라는 숫자를 뺐던 것이지요.
주례신부님께서 성당에 도착한 축전을 들고 와서는 “신부의 친구로부터 요한복음 4장 18절이라는 축전이 왔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리고는 요한복음 4장 18절을 펴신 뒤, 큰 소리로 읽어주십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말씀을 들은 시부모와 하객들은 모두 까무러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 18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8)
‘1’이라는 숫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이렇게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은 그 ‘1’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일지 몰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혼식을 ‘1’이라는 숫자 때문에 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안일한 마음이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은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 내 뜻을 내세우는데 더 노력하게 만듭니다. 또한 안일한 마음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비꼬듯이 말하지요.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단식을 하며 기도하는 제자들을 둔 요한과 바리사이는 훌륭한데 반해서, 먹고 마시는데 열중하는 제자를 둔 예수님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만 옳다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 또한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안일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정도면 되었어.’라는 마음보다는 ‘조금만 더 노력하겠어.’라는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충실한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북원 신부-
예수님은 그 당시 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을 하셨습니다. 사실 그 내용을 본다면
어느 면에서는 지도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적인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단식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는데,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선적인 단식의
모습을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단식을 하는지 궁극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한 끼 굶고 그 다음에 모자르게 먹은 양만큼 마저
보충하는 것이 단식의 의미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분명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우리 어머니들이
매 식사 준비 때 성미로 한 숟가락씩 항아리에 쌀을 봉헌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이러한 모습이 있었는데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지금은
오히려 이런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순절을 이용해서 실천해보자는
제안을 해도 별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단순하게 한 끼 굶는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신앙인인 우리들은 본래의 취지를
잘 살려 이웃 사랑 실천을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5월 이후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촛불의 뜨거운 열기는 올바른 시민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통쾌한 표징이었다. 그런데 이 촛불을 처음으로 점화시킨 장본인은 알다시피 10대들이었다.
필자도 5월에 동료들과 함께 처음으로 촛불문화제에 참가했다. 그날은 촛불문화제가 시작된 지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촛불지킴이는 10대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나이 든 아저씨가 자신들 틈에 끼어 어색한 투로 구호를 따라 복창하는 모습에 호감이 갔던지 한 소녀가 내 손에 촛불을 건네주었다. 말없이 작은 미소와 함께 오간 이 짧은 순간의 통교는 지금 생각해도 기분 좋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언젠가 옛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배움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처음에는 인생의 선배들한테서 그들이 전승받은 지혜를 배우고, 두 번째는 동년배들 사이에 서로 겨루면서 배우고, 마지막으로는 후배들한테서 새로운 감수성과 통찰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릇 배움이란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라야 무르익게 된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교훈을 확증해 준다. ‘가려져 있던 진리’, 곧 동일한 진리의 보다 심층적인 차원은 ‘새로운 감수성’에 의해 포착되기 마련이다. 지하철에서 정신없이 문자나 주고받는 철부지로만 보였던 어린 세대들이 그들만의 소통매체로서 그 거대한 촛불의 군중을 만들어 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들이 처음으로 제기한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눈과 귀’도 열리게 되었다. 그에 맞물려 생명권이야말로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진리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낡은 부대에 안주해 새 포도주 맛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험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지만, 그것에만 매일 경우 ‘경험이 사람을 우둔하게 만든다.’는 격언이 들어맞는 말이다.
-양승국신부-
하느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시종.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
그러니까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그리스도의 시종임을 일깨웁니다.
자기 정체성을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두어야지
시시하게 바오로의 졸개다,
아폴로의 졸개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그리스도의 시종이라면
자기가 세상의 심판에 연루되더라도
그 심판에 좌우되어서도 안 되지만
자기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아는 양
함부로 미리 심판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이라 하여
세상사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그런 고고한 사람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의 심판을 받아 돌아가신 것처럼
바오로도 세상사에서 발을 빼려하지 않았고
세상사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세상의 심판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에 초연하셨던 것처럼
바오로도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고 하며
세상의 심판에 초연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어서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도록 자신에 대해서건,
남에 대해서건 심판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경찰아저씨가 와서 나를 붙잡아 가지 않을까?’
하지만 다행히 별 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지요. 비록 머리에 큼지막한 반창고를 붙이기는 했지만, 학교에 나왔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기뻐서인지 친구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내가 많이 괴롭혔지? 미안해.”
그 뒤 우리 둘은 누구보다도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친구가 돌 던진 저를 용서하지 못하고 더 괴롭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평생 원수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요?
요즘 인터넷 안에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짜증나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운 생각까지도 듭니다. 이 안에는 모두 옳은 사람만 있는 것 같아요. 빈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 잘못 쓴 것을 가지고도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이 퍼지고, 이 말들이 결국 그 사람을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매장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이 짧은 새벽 묵상 글 안에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타와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들어갈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 안에는 얼마나 많은 잘못과 오류가 있을까요? 하지만 스스로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완벽함의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는데는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선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큰 죄도 용서하시는 하느님, 작은 것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
크게 보시고 끊임없이 참으시는 하느님, 작게 보고 조금도 참지 못하는 인간.
사랑이 중심이 되는 하느님, 자신의 이익이 늘 중심이 되는 인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에 대한 흉을 봅니다. 즉,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들은 ‘치사하다, 쫀쫀하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이보다 더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를 더욱 더 슬프게 합니다.
다도를 제대로 배우진 못했어도 나름 정성스럽게 마시려고 합니다.
지허 스님이 쓰신 차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도의 시작과 마침은 누워서 마시지 말 것.
즉 당연히 어떤 누구도 차를 누워서 마시는 일은 없을 테고
너무 외형적인 것, 규칙에만 매달리기보다 차 자체를 즐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차를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입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이 먼저여야 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은 낡은 우리들의 시선으로
하느님의 뜻을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은 우리의 눈으로 재단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꿈 많은 젊은이들은 얻고 싶은 것이 많고 그래서 온종일 바쁘다. 그런데 대학의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잠 못 이루며 기를 쓰고 대학에 들어간 순간부터 토익과 연수와 씨름하며 또 과외를 해야 한다. 도서관 가는 길도 전투처럼 느껴진다. 정보시대에는 안테나를 바짝 세워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몸부림의 목적은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라는데, 정말 그렇다면 왜 곧바로 행복한 삶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우리 ‘산 위의 마을’ 공동체는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오는 신문을 본다. 농업 노동은 힘들다. 그러나 그토록 열심하고 싶어도 어려웠던 신앙생활을 얻었고 건강하게 살다가 묻힐 땅도 넓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미래를 불안하게 여기지 않는다. 정보와 경쟁에 밀린다고 안달할 이유가 없는 것은 행복한 생의 길은 한없이 넓고 많다는 발견 때문이다. 삶이란 자기 삶의 항아리에서 빚은 술이다. 삶의 선택은 자신이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만든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덕밭에 풀이 많다.
병상에 누워서라도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상상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경기 장면을 하루 5시간씩 보면서 머릿속으로 선수들의 동작을 연구하고 익혔지요. 그러고는 눈을 감고 자신이 경기하는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 보았습니다. 또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이번에는 경기장에 나가 실제로 훈련한다면 어떻게 했을지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몇 달 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했고, 기적처럼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오로지 상상 훈련으로 얻은 값진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답니다.
“당신의 시계를 5분 빠르게 바꿔 놓으세요. 그러면 5분의 여유가 생기겠죠. 그 5분 동안 금메달을 상상하는 겁니다. ‘꼭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갈 거야.’, ‘이번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시키겠어!’ 등 당신의 금메달이 무엇이든지 간에 5분 동안 상상하세요. 그 상상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 것입니다.”
모 기업의 광고에서도 나오지요. 생각대로 하면 된다면서 ‘생각대로 티’를 말하는 광고처럼 우리의 생각이란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생각을 잘못된 생각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적인 생각과 과거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모습 때문에 현재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그렇습니다. 그 중요한 생각들을 잘못된 생각들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향해서 시비를 던집니다. 즉,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단식의 이유는 희생과 보속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단식이 아닌 먹고 마셔야 할 때인 것이지요.
이렇게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된 생각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나쁜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좋은 생각으로 나를 채워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분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며,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만물을 화해시키시는
분임을 노래합니다. 우리 역시 미사 중에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의
정식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 고백과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벗어버리려는 신앙 공동체의 눈물 나는 투쟁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또한
새롭게 이해된 하느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이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교회의 새로운 찬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해묵은 삶의 모습 안에서 단식 논쟁이 일어납니다. 새 옷의
비유나 새 포도주의 비유 역시 늘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자신의
욕심과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터전을
되살리는 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내는 일, 그리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삶을 살아가는 일을 통해 신앙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그분께 불러드릴 수 있도록 언제 빠질지 모르는 바리사이의 유혹을 끊어버리는 것, 우리 삶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단식과 다이어트가 비슷한 것으로, 별 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둘은 전혀 다르다. 다이어트는 자신의 몸을 가꾸는 자기중심적이고 이 세상과 물질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라면, 단식은 참회와 속죄로 자신을 정화시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자세다.
점점 단식에는 관심이 줄어들고 다이어트라는 말에 우리의 마음이 붙잡히는 것은 오로지 세상의 것에만 우리의 관심사가 놓여 있다는 현실을 말해 주는 것 같다. 그것은 하느님과 영적인 세계보다 세상이 주는 매력에 집착을 두고 사는 미약한 모습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모든 종교가 인간의 무질서한 욕구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무질서한 삶을 끊고 자신을 정화하며 영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의 내면을 채워갈 때 진정한 행복의 첫걸음이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 더욱 하느님의 것을 결단하라는 행복의 초대이다.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단식기도,
이에 대해서 저는 2중적입니다.
한 마디로 제 좋을 대로 태도를 취하는 것이지요.
나이를 먹으면서 전처럼 단식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그래서 옛날처럼 단식을 잘 하지 못해 요즘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단식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분들에 대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입니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서는 단식하면서도
영적인 목적의 단식은 소홀히 한다고.
그런가 하면 제가 술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끌어다대며 합리화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 한 번은 개신교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는 독신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술을 마시는 문제였습니다.
술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성서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왜 천주교 신부들은 그렇게 술을 잘 마시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오늘 복음과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한 증언을 하신 대목을 대며
예수님도 먹고 마시지 않았냐고 농담반 진담반 둘러댔습니다.
저의 경우는 술 좋아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지만
아무튼 예수님의 경우는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 사랑입니다.
몸매 유지가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서 안 되고
입맛이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서 안 되고
율법이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서 안 되고
오직 사랑만이 먹고 안 먹고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더욱 갈망케 하기 위해 단식을 한다면 옳은 단식이고
북한 동포를 생각하며 단식을 한다면 옳은 단식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단식의 이유인 것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때문에 먹고 마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시고 한 잔 하신 예수님은
정말 대단한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술 좋아하는 저이지만,
그래서 분위기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마시자고 하면 좋아하겠지만
주님께서 저보고 당신처럼 서울 역 노숙자들과 술 한 잔 하라시면
정말 억지로 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마실 것입니다.
언제 저는 저의 만족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서울역의 노숙자와 술 한 잔 할 수 있을런지요.
그런 제가 될 수 있고
그런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빌며
사랑이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긴
사랑의 포도주를 오늘 한 번 건배합시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제대로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이전의 낡은 악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며, 헌 가죽 부대를 버리고 새 가죽 부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 4장 말씀처럼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아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해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복음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하느님이 아닌 세속을 향해 있었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향해 있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입어야 합니다. 새 가죽 부대를 마련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예수님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막노동을 하러 다닐 때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일해서 품삯이라도 받으면 그때부터 동네가 시끄러워집니다. 누구라도 눈에 거슬리면 온갖 욕을 하며 행패를 부립니다. 술에 취해 밥을 먹지도 못하면서 민들레 국숫집에 와서는 몇 차례나 상을 차지합니다. 몇 시간을 저를 따라다니면서 주정을 부립니다. 식사하는 손님들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다가 사소한 트집을 잡고 싸우기를 밥 먹듯 합니다.
몸도 상하고 술 마실 돈도 떨어지면 경석씨는 얌전해집니다. 몸을 추스를 동안 부지런히 국숫집을 찾아옵니다. 경석씨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고 합니다. 술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너무 외롭다고 합니다. 외로워서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의 여섯 달이나 민들레 국숫집을 자기 집처럼 찾아왔습니다. 무던히도 애를 먹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게 “다른 사람들은 세 번 정도 술주정을 하면 쳐다보려고도 않는데 왜 계속 날 봐주느냐?”고 물어봅니다.
그후에 경석씨는 스스로 동사무소 사회복지사를 찾아가서 알코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몇 달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한 경석씨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막노동을 나가면서도 비가 오는 날이거나 쉬는 날에는 ‘성언의 집(무료급식소)’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합니다. 길에서 만나 술 한잔 하자고 하면 손을 휘휘 내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됩니다.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는 사람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구분된 시간, 그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오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맞이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집안에 큰 걱정거리가 있거나, 누구나 몇 차례씩 겪게되는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반대로 나름대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면서 생기 넘치게 그래서 하루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보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봤습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당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시했던 단식과 기도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를 지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보내는 즐거움에 대한 말씀과 함께, 신랑이 떠나면 그들도 단식과 기도를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혼인잔치는 가장 큰 기쁨의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결혼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랑과 신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며 모두가 하나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혼인잔치는 혼인식장에 신랑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어 일주일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얼마 후면 우리도 민족의 명절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처럼 되어라는 말처럼 명절이 되면 모든 사람이 들뜨고 기쁨이 넘칩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기쁨, 마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오심의 의미, 예수님께서 전하신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바로 혼인잔치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추구할 행복과 기쁨은 저 세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유대인들은 주님과 함께 나누는 기쁨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잔치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심의 의미를 우리가 깨닫는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그래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기에 늘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론 세상의 즐거움에 눈과 귀를 돌리며 진실된 삶을 외면하고 오늘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을 소홀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신랑을 빼앗기 뒤의 단식과 기도는 신랑과 함께 나눈 기쁨을 되찾기 위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을 거부하는 우리에게 단식과 기도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새롭게 일깨우고,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누리는 기쁨을 되찾아 줍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는 오늘을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혼인잔치의 기쁨의 시간입니다. 혹 고통의 시간이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맙시다. 즐겨 외웠던 오늘이라는 시로 강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오늘
세상에서 너 소유한 모든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오늘'이니
너의 구원자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라는 두 도적 사이에서
자주 십자가에 달리운다.
기쁨은 오직 오늘의 것,
어제나 내일이 아닌
다만 오늘 너는 행복할 수 있으리니
우리네 슬픔의 대부분은
어제의 잔재이거나
내일에서 빌어온 것일 뿐
너의 오늘을 고스란히 간직하라.
너의 음식, 너의 일, 너의 여가를 향유하라.
오늘은 너의 것이니
신께서 오늘을 너에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분의 손 안에 있도다.
오늘은 너의 것이니
거기서 기쁨을 취하여 행복을 누리고
거기서 고통을 취하여 사람이 되라.
오늘은 너의 것이니
하루가 끝날 때
"나 오늘을 살았고, 오늘을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라.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시대에 뒤쳐진다는 위기의 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 살아가는 교회 역시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단순히 사회에
순응하여 녹아 없어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곳곳에 녹아 스며들어 복음의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4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교부들은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함을 사목헌장에서 가르쳤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것은 공동체 안에
긴장과 반대를 가져올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힘들어합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끝임 없는
변화와 전환에 용기 있게 자신을 내놓는 삶이 아닐까요? *
복 음 : 루가 5,33-39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을 한 것이다)
개구리가 좋아하는 온도는 23℃ 정도라고 합니다. 그 정도의 온도에서 개구리는 가장 활발하게 잘 움직이지요. 그런데 온도를 23℃ 에 맞춰놓고 불을 서서히 달구면 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는 나오려고 하지 않고 발버둥을 치다가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푹 삶아져 죽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개구리 이야기는 자기의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해 버리면 발전은 있을 수가 없지요. 어떻게 보면 그것은 죽음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식자층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메시아의 도래 시기를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았지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였지만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만의 관습과 경험과 지식 안에서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오늘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단식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 (루가5,33)
단식하지 않는다고 따지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다시 한번 드러내 보이십니다. 즉, 신랑인 당신이 오셨고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과 지식 때문에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 고집에 더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루가5,36-37)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 것만을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질책하시지요.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일 조심해야 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이웃을 판단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도 그런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자꾸 새롭게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발전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신자분들 중에도 모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해 오신 분도 계실 터이고 영세 받은 지 벌써 십 년, 이십 년이 되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연륜이 깊은 분일수록 정말 한 해 한 해 새롭게 발전해 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된 본당에 가보면 아주 고집스런 신자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주교가 되었다며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일쑤입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한 음식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저는 나오는 음식을 보고 ‘음식을 이렇게도 만들 수가 있구나!’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음식들이 나왔는데 재료는 보통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모양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예로 한 가지만 말씀드려 본다면 이렇습니다.
하얀 큰 접시에 게 요리가 나왔습니다. 게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튀겨서 통째로 먹는 작은 게가 식사하는 인원수대로 나오는 요리였습니다. 그런데 접시 위의 모습이 새로웠습니다. 하얀 접시 위쪽에 레몬 소스로 동그랗게 달 모양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는 분말 녹차로 지평선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게 4마리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다양하게 연출해 놓았는데 맛을 보기 전에 눈부터 먼저 즐거워지는 것이 여간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보통 식당에 가면 이런 게는 접시 가득 튀겨서 놓고 마음껏 먹으라고 내놓았을 겁니다. 여기서는 겨우 4마리를 내 놓았을 뿐인데도 기억에 아주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산뜻한 요리가 되었습니다. 이 요리들이 저에게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자꾸 생각하고 노력하면 발전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지요.
이는 저도 염두에 둘 일입니다. 똑같은 미사를 드려도, 똑같은 강론을 해도, 똑같은 레지오 훈화를 해도 자꾸 발전하는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발전하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매번 ‘그게 그거지.’하는 마음으로 구태의연하게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발전이란 있을 리 없습니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익히고 알아나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배움의 기회를 넓히고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관습과 전통, 또 과거의 지식에 안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만의 중심 사고에서 또 그들만의 과거 경험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했다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요.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남의 입장을 배려할 때 나의 성장도 함께 동반되어 보다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나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이웃에게는 쉽게 열지 않는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은 퇴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바꾸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슴 속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에게
형제의 행운과 기쁨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탐욕과 이기심,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형제의 행복을 배 아파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가슴 속에 사랑과 자비심(慈悲心)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에게는
형제의 행운과 기쁨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고, 형제의 슬픔과 고통이 나에게도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누립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곳에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로마12,15-16)
눈높이를 맞추고 같은 처지가 되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새 옷에는 새 천 조각으로,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로
헌 옷에는 헌 천 조각으로, 묵은 부대에는 묵은 포도주로 다가가는 사람이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같아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우리가 이번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주간 토요일까지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줄곧 루가복음을 봉독하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의 모든 부분을 연이어 듣지는 못한다. 이 말은 평일미사에 제공된 복음을 읽고 한정된 부분만으로 복음의 참뜻을 깨우치려들면 무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도는 늘 복음의 참뜻을 위협한다. 한정된 어느 한 단락의 복음만 가지고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된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예수께서 공들여 설파한 복음전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복음사가들의 편집의도를 곡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사의 그날 복음으로 제공된 부분의 앞뒤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하며, 진정한 신자(信者)라면 ‘매일미사’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신구약 합본성서를 늘 곁에 두고 빠진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이 그렇다. 매일미사 책에 실려 있는 오늘 복음의 시작은 “그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 성서의 원문에는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느 표현이 복음의 앞뒤 문맥을 더 잘 말해주는가? 두말 할 것 없이 성서원문이다. 따라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슨 말씀을 듣고 예수께 반론을 제기하는 지는 앞부분을 살펴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행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명성이 순식간에 나자렛과 가파르나움을 넘어 사마리아와 유다지방 일대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4,37.44; 5,15) 급기야 이를 확인하고 감찰할양으로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파견된 것이다.(5,17)
그들은 이미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5,21), 못 마땅하게 여겨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으며(5,30), 오늘은 복음에서와 같이 단식문제로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묵상한다면 잘 이해할 수 있겠고, 좋은 결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단락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단식에 관한 말씀과 옷과 포도주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를 담고 있다. 물론 후반부의 이중비유는 전반부의 단식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이해해도 좋다. 오늘 담론은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보아도 타당하다.
단식(斷食)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다.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이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잔치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단식의 날이 오게 될 것인즉, 예수께서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을 때가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33-35절)
‘새 옷과 헌 옷,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 새 부대와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준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이다.
묵은 포도주는 달고, 새 포도주는 떫기 마련이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당장은 맛이 좀 떫고 불편하더라도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법칙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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