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1) †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은 누구인가? (묵시11,19-12,4)
묵시11,19절은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의 궤(언약궤)가 나타나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떨어졌습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19절은 일곱째 나팔을 분 후의 하늘의 광경을 펼치고 있다.
묵시15,5절에서 계속되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려졌음을 본다. 또 하나의 두렵고 장엄한 사건으로 이 11장의 끝을 맺는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렸다고 요한은 기록한다. 동시에 요한은 성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요한은 거기에서 하느님의 언약궤를 보았다. 이는 땅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을 가리킴이다.
그러나 이에 상응하는 땅의 사건은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과 큰 우박이었다(묵시8,5). 일곱째 나팔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장황한 소개가 여기에서 끝을 맺고, 16장에서 다시 재개된다. 곧 11,19절은 우리에게 세 번째 화인 마지막 화의 마지막 광경을 보여 주고, 16,17-21절에서 다시 재개된다.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무척 가깝다.
묵시록은 두 부분, 곧 1-11장, 12-22장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4장2-3절에 있는 무지개를 두른 보좌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6-11장까지의 땅 위에서 집행되는 모든 심판의 중심이며, 반면에 언약궤를 가진 성전은 적극적인 측면에서 12장부터 22장까지에서 수행되는 우주 가운데 하느님의 모든 성취의 중심이다.
곧 하느님의 심판을 위해서는 무지개를 두른 보좌가 그 중심이며, 하느님의 건축을 위해서는 그분의 계약의 궤가 있는 그분의 성전이 그 중심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이 책의 첫째 부분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둘째 부분의 주된 사상은 하느님의 건축이다. 누가 성전이 되는가? 바로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이며, 주로 교회이다.
누가 언약궤인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건축의 중심은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들일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믿지 않은 이들은 모두 무지개를 두른 하느님의 보좌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언약궤가 있는 성전 안에, 곧 그리스도가 계신 하느님의 건축 안에 있다.
19절에서 하늘의 전망과 광경이 무지개를 두른 보좌에서 언약궤가 있는 성전으로 바뀐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건축을 위한 언약궤가 있는 성전을 반드시 보아야만 한다. 하느님의 건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흙으로 된 사람들은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나무로 된 사람들은 돌로 변하게 해야 한다. 나무가 돌로 변화되는 길은 오랜 동안 생수로 나무의 본질을 씻어내고 견고한 광물질의 요소로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석화의 과정은 영적 실제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일곱째 나팔이 음성과 함께 11,15절에 소개되어 있지만, 일곱째 나팔 후에 있을 일들이 자세히 계시된 곳은 16장이다. 따라서 12-15장은 마지막 때에 관하여 다른 관점에서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7년 중, 후 3년 반의 시대에 있을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 인물들이 12-13장에 등장하고 있음이 강조되어 왔다.
(1) 해를 입은 한 여인 – 이스라엘 왕국의 예루살렘을 대표한다(12,1-2).
(2)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용 - 사탄을 상징한다(12,3-4).
(3) 사내아이 - 이기는 그리스도인, 곧 혼이 처리된 유기적인 구원을 성취한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12,7-12).
(4) 하늘로부터 사탄을 내어 쫓은 천사장 미가엘(12,7-12).
(5) 용에게 핍박을 받는 여인의 자손들(12,13-17).
(6) 미래의 세계 정부의 지도자인 바다의 짐승, 곧 적그리스도(13,2-10).
(7) 거짓 예언자인 땅의 짐승(13,11-18).
이 장에서 나오는 사건들은 시간적으로 계속 진행되는 사건들이 아니고, 나팔들을 부는 때에 함께 있는 사건들이며 상황들이다. 시간적인 진행은 16장에서 재개된다.
12,1절에서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본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요한묵시록 12장에 있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1. 어떤 사람은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1) 마리아가 어떻게 12장 1절의 광경에 나타날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마리아가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내용이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여인을 마리아라는 해석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조작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2) 주 예수님은 독생자이지만 이 여인은 이미 다른 아들들을 가지고 있었다(묵시12,17).
(3) 이 말과 이 책의 예언의 성질은 일치되지 않으며, 만일 이 여인이 마리아라고 한다면, 사내아이는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성질을 갖게 되므로 이 책의 예언의 성질과는 일치되지 않는다. 이 책, 곧 요한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2. 또 어떤 사람은 이 여인를 가리켜 교회라고 하는데 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1)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교회는 그리스도 앞에서 처녀의 위치이고(1코린11,2),
(2) 교회는 결코 어머니 혹은 딸의 형태의 비유로써 말해진 적이 없고,
(3) 결국 교회는 휴거될 것이지만 이 여인은 아직 휴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또 어떤 사람은 이 여인을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이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창세37,9-11절에 의하여 해와 달은 요셉의 부모인 야곱과 그의 아내 라헬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여인의 면류관에서 빛나고 있는 열 두 별은 분명 야곱의 열 두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약에 치우친 견해이다.
4. 그렇다면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인가?
(1) 창세37,9-11절에 의하여 해는 야곱을 가리키고, 달은 이스라엘 왕국의 어머니를, 열 두 별은 열 두 지파를 가리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해, 달, 별 이 셋은 분리하여 말할 수 없고 반드시 함게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성, 곧 이 여인은 이스라엘 왕국의 예루살렘 성을 대표한다.
(2) 해(日)를 입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어머니임을 밝히 나타내며, 별 아래 달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바 된다는 것이고, 머리의 열 두 별의 면류관은 열 두 지파를 분명히 나타내는데, 창세기 37,9-10절에서 말하는 것이 열 두 지파이기 때문이다.
(3) 묵시12,2절의 해산은 이사야26,17-18, 예례미야6,22-25(시온은 곧 예루살렘이다), 13,19-21, 30,6-7, 미가4,8-10, 5,1-3절에서 선지자는 장래의 예루살렘에 있을 고난이 마치 해산하는 것과 같을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다.
(4) 12,7절에서 천사 미가엘이 그녀를 돕는다는 것이 나오는데, 다니엘12,1절은 미가엘이 대환난 가운데 일어나 이스라엘을 도울 것임을 말한다.
(5) 이 여인은 이스라엘 왕국의 예루살렘을 대표하며 하느님은 그녀를 이끌어 광야로 도망가게 할 것이다(묵시12,6, 14). 주님께서는 마태24,16-21절에서 그들이 도피할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고, 루카21,20-24절도 분명히 이를 말하고 있다.
12,2절은 “그 여인은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본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여인의 모든 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잉태하고 해산하는 것, 울부짖는 것 모두를 문자적으로 말할 수 없다. 2절은 “그 여인이 아기를 배었다”고 말하고, 5절은 “그녀가 아들, 곧 사내 아이를 낳았다”고 말한다.
2절에서 이 아기는 여인 안에 있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그를 아이(a baby)라고 부르지 않고 사내아이(a male-child)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사내아이가 아기를 가리키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사내 아이는 모든 세대에 걸쳐서 하느님의 백성 중에서 소수의 보다 강한 이기는 자들을 가리킨다.
전체 성경에서 해산에 관한 것은 오직 세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곧 문자적 의미의 해산, 영적인 의미의 해산, 부활의 의미가 있다. 묵시12,2절이 상징이기 때문에 문자적인 것이 아니다. 사내아이가 철장으로 열국을 다스리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해산은 이김을 말하는 것이지 영적인 거듭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활의 해산이 되어야 한다.
부활의 해산의 외적인 근거는 사도행전13,33, 로마1,4절에 있으며, 본 장에도 증거가 있는데, 12,1절에의 마지막에서 그들이 죽은 적이 있고 순교자였었으며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말하기 때문에 부활임에 틀림이 없다.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 때 대환난을 통과할 것이며, 그들의 기도가 여인이 해산할때의 고통과 부르짖음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주님이 유다 지파의 사자이기 때문이며(묵시5,5), (2)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며(요한4,22), (3) 예루살렘이 우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갈라4,26). 이 여인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어 있었다.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이스라엘 나라가 출현하여 고통가운데 있을 것을 가리킨 것이다. 묵시12,3절도 이를 지지한다.
용에게는 두 방면이 있는데 (1) 하늘에서는 용이고, (2) 땅 위에서는 마귀이다. 예루살렘에도 두 방면이 있는데, (1) 하느님 앞에 높은 지위가 있으며, (2) 땅에서는 환난의 도피자이다.
묵시12,3절은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라고 말한다. “큰 붉은 용” 곧 12,9절의 마귀, 사탄은 하느님의 대적이며 창세기 3,1절의 뱀이다. “붉은” 은 전쟁의 색이며, “큰 붉은 용”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살인자였음을 말한다(요한8,44; 1요한5,19).
“일곱 머리와 열뿔”은 묵시17,9-12절은 참고해 보면, 열 뿔은 큰 임금의 분봉왕이다. 머리는 뿔보다 더 크고 뿔은 머리가 정한 것을 집행한다. 용은 로마 제국을 부흥시킨 후 열 명의 작은 왕들을 이끌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핍박할 것이다.
다니엘7,7-8,24절과 묵시3,1절의 이와 비슷한 모습을 참고해 볼 때, 이 짐승은 대환난 때에 세계 제국을 통치할 사탄의 지배력을 묘사하고 있다. 열뿔은 다가오는 세계 정부의 왕과 함께 다스릴 열왕을 상징하는 것이다(다니엘7,24).
묵시12,4절은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말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던지워지는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은 12,9절에서 말한 사자이다. 천사 중의 삼분의 일이 마귀에게 복종한 이들이다.
용이 땅으로 던지움을 당하는 것은 사내아이가 휴거된 후에 발생할 것이다. 용이 새로 태어난 아이를 삼키려 하는 것은 어린 예수를 없애버리려는 사탄의 시도이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특히 메시야의 핏줄을 반대하는 것은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매우 명백하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