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 가톨릭의 상륙
일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들어온 시기는 1549년이며, 예수회 선교사이자 바스크 출신의 에스파냐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들여왔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하비에르는 ‘무슬림과 유대인이 없는 일본은 선교 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1548년에는 ‘야지로’라는 당시 35세의 청년 부시(무사)를 만나게 된다. 막부 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자국인의 외국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에 야지로는 국가에서 무역을 허락했다는 증서를 소유한 무역선인 슈인선(赤印船)을 타고 인도에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비에르와의 만남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과 에스파냐 말에 능숙해진 야지로는 1549년 일본에 귀국하자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때 하비에르는 다이묘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전도하였으며, 세례성사를 집전하느라 팔이 아플 정도로 많은 신자를 얻게 된다.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에서는 다이묘의 영향으로 영지 내 주민이 모두 로마 가톨릭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묘들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묵인한 진짜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호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학식이 풍부한 예수회 선교사를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중 일본 제국주의 욕심을 촉발시킨 서양 발명품인 총기에 관심이 많았다
탄압 시기
하지만 교회에 대한 환영은 잠시 동안이었고, 바오로 미키를 위시한 26명의 순교자가 나가사키에서 발생하는 등 탄압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조선인 기리시단도 탄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들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식민주의 세력이라고 선동했고, 시마바라의 난(1637년)이후 카톨릭교는 일본의 국가 체제에 전면 배치되는 위험한 체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 이외의 로마 가톨릭 국가와는 거래하지 않았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기리시단들은 사회 기강을 흐리므로 금한다.’라는 내용의 〈기리시단 금지령〉 발표(1612년), 청동으로 만든 예수의 성화를 밟게 하는 후미에 실시, 로마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공경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모독 강요 등의 탄압을 받자, 불교 예불로 가장한 로마 가톨릭미사를 드리거나, 이불(異佛)이라고 불리는 불상을 가장한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사용하면서 몰래 신앙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수난사는 그 자신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신앙소설 《침묵》과 《여자의 일생》에 잘 언급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세월이 흘러 이들 가쿠레다 기리시단들은 1857년 강제 개항된 일본에 입국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신부 앞에서 자신들이 로마 가톨릭 신자임을 밝혔으며, 탄압으로 소멸된 줄 알았던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세계 기독교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가쿠레다 기리시단이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신토 이외의 종교(불교, 기독교)를 금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일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천황 숭배에 반대하였고, 이성교제를 하는 등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주의자로부터 공개적으로 반대받고 배척받았다.
일본 천주교 초기 수용 과정
예수회에서 파견된 서양의 신부들은 지방 영주들을 ‘무역을 통한 수익’으로 보상해 주었다. 16세기 중후반은 일본의 전국시대로 각 가문 간 세력 다툼이 지속되었던 시기(다이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무역을 통한 富의 축적은 영주들이 영토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당시 중국 왜국 세력의 쇠퇴로 일중무역이 침체한 상황에서, 큐슈의 지방 영주들은 빈 공간을 메꿀 새로운 무역 파트너가 절실했다. 무역과 포교를 연계시키는 예수회의 전략은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의 통상 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천주교의 확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제한책
히데요시의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은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과 기독교적 신관에 대한 거부감이 오랜 기간동안 축적되다가 폭발하면서 발생하였다. 1571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하고 태평양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일본에 스페인 선박들이 자연스럽게 출몰하게 되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예수회의 敎會領이 되어있던 나가사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스페인의 식민지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자신의 권력유지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결국 히데요시는 산 펠리페호(San Felippe) 사건이 발생한 같은 해 10월 오사카와 교토 일대에서 포교 활동에 종사한 사제와 신도 26명을 처형할 것을 지시하였다(1596년. 나가사키 26성인 순교 사건). 이는 다이묘의 사적 처벌이 아닌 일본 최고 권력자의 공식 명령에 의해 기독교도가 처형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히데요시로서는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인 나가사키에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공포를 극대화하는 효과도 얻으려 했을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의 막부의 기독교 정책 변화
이에야스가 목도한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 과정과 막부 초기의 대내외적 불안정성을 생각할 때, 막부 초기에 실시된 이에야스의 강력한 기독교 탄압 정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배척의 흐름이 서양과의 군사적 충돌이 없는 평화의 시기(에도 막부)에도 지속되어, 심지어는 메이지 초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에는 추가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서양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음에도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일례로 18세기 말 일본은 ‘러시아 쇼크’로 인해서 본격적으로 서양에 대한 과장된 위기의식을 키워갔다. 林子平나 會澤安는 당시 러시아가 일본을 침략할 계획도 힘도 가지고 있지 않던 상태에서 그들을 춘추전국 시대의 패자에 비유하며 경계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평화의 시대는 오히려 사소한 정보나 위험요소에도 과장된 위기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했고 이는 정치적 불안감을 조성하여 대내적으로 서양의 기독교에 대한 강화된 통제 정책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우라카미 천주당과 원폭신화 우라카미 번제설
나가사키는 일본 기독교사 초기에 인구 4만명의 대부분이 천주교도일 만큼 천주교의 중심지였다. 나가사키 북부에 위치한 우라카미(浦上)에는 에도 막부의 종교 탄압 이후에도 많은 잠복 기리시탄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막부의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기도문을 읽어가며 신앙을 지켜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지령이 내려진 지 252년만인 1865년 3월 17일 나가사키 오우라(大浦) 성당에 우라카미의 주민들이 찾아와 세간을 놀라게 했다. 다름이 아니라 우라카미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신들도 대대로 천주교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동안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거의 소멸되었다고 알고 있던 유럽의 천주교계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그러나 막부정권은 여전히 기리시탄 금지령에 의한 탄압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미 지역에 숨어있던 3,300여명의 신자들을 고문한 뒤 유배를 보냈다(浦上4番崩れ: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4번에 걸쳐 우라카미 지역의 잠복 키리시탄을 색출하고 탄압한 사건).
이러한 피폭 반응의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이에 대해 박수경(2007)은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원폭 구호 활동을 펼친 나가이 타카시(永井隆1908-1951)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나가사키에서 나가이는 당시 매우 유명한 대중 작가였는데, 그가 작성한 소설들이 우라카미 지역을 희생양 또는 구원의 대상으로 승화시키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가이 타카의 대작인 『나가사키의 종』(『長崎の鐘』)에서는 우라카미에 원폭이 떨어진 것을 종교적인 번제에 바쳐진 것으로 비유함으로써 원폭투하를 천주교적 ‘신의 섭리’와 관련짓고 있다. 아울러 히로시마는 비교적 넓은 범위에 피폭 피해가 확산된 반면에, 나가사키는 지형상 우라카미에 원폭의 영향력이 집중되어 주변 지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희생 논리’가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 뒤에는 GHQ와 미국의 정치적 개입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지적해 볼 수 있다. 당시 나가사키는 GHQ로부터의 재원 확보라는 목적으로 나가이의 소설을 대중에게 의도적으로 확산, 노출시켰으며 미국은 나가사키 대중의 원폭관을 ‘고귀한 희생’으로 굴곡시켰다. 이러한 2차 가해는 정치적 죽음을 종교적 죽음으로 변모하여 전쟁에 대한 책임소재를 희석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가지 특이할 점은 히로시마의 피해자적 인식과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공감 의식과 달리, 나가사키의 경우 종교적 서사의 부과를 통해 피폭자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옅어져 일본 내부에서도 피해에 대한 위로와 공감을 얻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라카미 지역의 사람들은 ‘갓파’, ‘대머리’ 등의 언어로 같은 나가사키의 타지역 주민으로부터 사회적 차별을 받은 사례도 존재한다.
현재
일본 천주교회(로마 가톨릭)는 신자가 70만 명 정도다. 비록 상대적으로 숫자는 많지 않지만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우리나라 천주교에서 정식 세례를 받은 첫 신앙인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 북경에서 세례받은 때가 1784년이다. 그러나 일본 천주교회 역사는 우리나라보다 200년 이상 일찍 선교되었다. 그런데 일본 천주교는 한국에 씻을 수 없는 큰 비극인 임진왜란과 연관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천주교 신자 부하들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1597년께 나가사키에서 신자 26명이 순교하기도 했다. 이 중 3명이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인 포로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노예로 팔려 가는 포로들을 구하고 노예 상인들을 파문하였기 때문이다. 1600년 '고니시'가 권력 투쟁에 패하여 사망하고, 1637년에 가혹한 세금 징수와 천주교 탄압에 맞서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다. 난을 진압당하면서 천주교는 거의 궤멸된다. 이때 신앙을 숨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며 그 후 1873년이 되어서야 금지령이 풀리게 되었다.
진해 웅천에 왜성이 있는데, 그곳이 '고니시' 군대가 진을 쳤던 곳이다. 이곳에 1593년 스페인 '세스페데스' 신부를 불러서 미사를 봉헌했고 그 후 2015년도에 '세스페데스 공원'이 만들어진다. 우리 지역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나쁜 기억과 역사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아베 정권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경제 압박을 가해오는 때에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장 '가쓰야 다이지' 주교가 '한일 정부 관계의 화해를 향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그는 "한일 갈등 원인은 과거 식민지 지배 관련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있다"고 지적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와 한·일 간 화해를 기도했다.
일본 천주교와 조선의 첫 만남은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본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이루어져, 한일 관계가 제대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첫댓글 가톨릭 우라카미 교회(일본어: カトリック浦うら上かみ教きょう会かい 가토릿쿠 우라카미 쿄카이[*])는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기독교(가톨릭) 성당이다. 성당은 이전 이름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うらかみてんしゅどう)라는 이름으로도알려져 있다.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파괴되었으나, 1959년에 재건되었다. 1962년 이후 가톨릭 나가사키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소속 신도수는 약 7천명으로, 건물 및 신도 모두 일본 최대 규모의 가톨릭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