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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와의 신춘대담
관북 1.5세대 惠山 載均 翁, 離散의 아픔 달래려 望鄕碑 세운 主人公
* 일시 : 2021년 3월 13일
* 장소 : 철원 경일사
* 대담 : 위윤기(대종회 기획위원)
* 사진 : 위두량(대종회 사무총장)
혜산 어르신은 1950년 6․25 전쟁 때 월남한 13세의 초등학교 6학년의 이산가족입니다. 모진 세상풍파를 겪으셨어도 두툼한 얼굴과 거구에서 호인의 인상을 풍깁니다. 티 없이 웃는 얼굴에서 평생 동안 적이 없을 이웃 아저씨 같은 온유함을 느끼게 합니다.
2018년 10월 재경종친회가 주최하는 연례행사인 야유회 때입니다. 산수(傘壽)의 나이에도 혜산 어르신께서는 종친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구성진 찬가를 열창했습니다. 종친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그의 삶을 대담을 통해 약간이라도 알아봅니다. (편집자 주)
1. 코로나19 감염병을 우려해 집합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찍 뵈려했는데 코로나로 이제야 왔습니다. 건강하신지요. 6.25 때 함주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월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13세 소년의 입장에서 피난살이의 고초가 컸을텐데 당시의 기억을 부탁드립니다.
우리 가족은 1883년생인 할아버지(禎春), 1909년생인 아버지(良煥)와 어머니(文晟林) 사이에 4남 2녀가 태어나 제가 아들 막내죠. 1945년 함주군 주북면 주북초교에 입학했어요. 일제 때까지 우리 집은 상반리에서 농지가 꽤 많아 부농소리를 들었어요. 8․15 광복의 기쁨도 잠시 김일성(金日成) 정권은 첫 사업으로 토지개혁이란 구실로 전답을 몰수해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졌지요.
어느 해 폭우가 내렸는데 어머니께서는 식구의 생계를 위해 성천강 가운데 위치한 밭에 가셔서 채 여물지도 않은 감자를 캐서 바구니를 이고 목까지 차는 성천강 물을 건너 귀가한 적도 있어요. 그 어머니는 1947년에 제가 10실 때 세상을 떠나셨지요. 감자바구니를 이고 강물을 건너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애절해요. 김일성 치하에서 국민의 자유란 말이 아니어서 공포와 탄압은 일제보다 심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서로의 내막을 너무도 자세히 알고 사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면 나을까 하여 조상대대로 지켜오던 고향 주북면을 떠나 흥남으로 이사했지요. 그때 저도 본궁초교로 전학했고 주북초교는 작고하신 송당(松堂) 위재형(魏載亨) 형님께서 교사로 근무하시던 곳이라 기억이 생생하네요. 저와는 10촌쯤으로 우리 마을의 이웃마을 반송리에 사셨기 때문에 선대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었죠.
2. 남쪽으로의 피난이 극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피난과 정착과정의 고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라 궁금합니다. 처절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나 온 체험은 한편의 드라마일 것입니다. 차재에 자서전을 쓰신다는 마음으로 소상히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흥남부두에서는 12월 12일부터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는데 몰랐어요.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10군단 예하 해병사단 등 군인 10만5천명과 피난민 10만여 명이 몰려 아비귀환의 혼란이었대. 철수용 미군수송선은 숫자로는 175척이나 됐었지만 수용불능이라고 들었어. 그러자 김백일 1군단장이 미군10군단장 아몬드장군에게 우리는 중공군과 싸울 테니 피난민들을 태워 달라.고 신신부탁했대. 생사의 위급한 상황에서 그랬다니 감격스럽지. 철수작전의 전말을 나중에야 들었죠.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6․25전쟁이 발발한지 꼭 5개월째 되는 하루 전날이었어요. 둘째 형(魏載先)이 집으로 와서 바로 피난을 가자며 보따리를 싸라고 성화예요. 할아버지께서도 재선이의 뜻을 따르자며 어서 짐을 챙기라고 채근하셨죠. 형은 당시 흥남 화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수재라는 평을 받으며 황해도 송림시에 있는 송림제철소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집으로 오셨어요. 그러자 우군이 북진하여 인근에 있는 미군 헌병대에서 일했죠.
형님은 국군의 북진으로 통일의 승전가를 울릴 무렵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단행할 정보를 들었다나봐요. 할아버지를 따라 우리들은 말없이 피난을 준비했어. 마침 4촌 동생(위재협)이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이것이 운명일까? 재협이와 모두 7명이 흥남부두로 달려갔지. 12월 23일까지 군인들은 철수를 완료한 상황이었어. 오직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만 남아있어. 7600톤의 미국 상선은 승선 정원이 60명인데 피난민은 거의 2만 명이 넘었지.
우리는 형의 주선으로 승선했는데 정원의 233배인 1만4천명을 실었다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모해. 빅토리호는 흥남을 떠나 나흘간 망망대해를 항해했어. 그 4일간 배안에서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났어요. 피난민 중인데도 음식을 준비한 사람도 있었지. 대부분 미쳐 먹을 것을 준비 못한 사람들이라 차가운 철판 바닥 위에 앉아 쫄쫄 굶어야 했어요. 1만4천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의 허기를 채울 방법이 없잖아요. 물이 없어 오줌을 받아먹을 정도였으니…
그래도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으니 고통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피난선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어. 상선은 4일을 항해해 28일 거제도 장승포항구에 도착했어. 워낙 배가 커서 LST라는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드디어 남녁 땅을 밟았지. 29일은 장승포 인근의 야산에 자고 다음날 거제읍에 있던 피난민 수용소로 갔었죠. 함께 온 피난민들은 미리 준비된 막사로 분산해서 배치됐지. 그래도 김일성치하에서 탈출한 것만도 감지덕지로 여겼지 뭐야!
내 나이 13세의 소년이지만 어른들의 말을 옆에서 듣고 돌아가는 형편은 알았어요. 피난민수용소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어. 50여 평 남짓 움막에 300여 명이 숙식을 해야 했고 벽은 돌과 진흙인데 지붕은 짚으로 엮었는데 하늘이 숭숭 다 보였어. 바닥도 짚으로 대충 깔아 놓은 상태로 맨땅이나 진배없었지. 피난소생활 2년째인 1952년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셨어.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어요. 피난생활 때는 수입은 없고 쌀 배급 주는 것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는 누님, 동생들과 나무를 해서 팔기도 하고 그 후에는 껌, 담배장사, 달러장사도 했어. 엿장수는 엿 1근을 1,000환에 사서 3판을 만들어 포로수용소 인근에서 작업하러 영외로 나온 포로들에게 1판에 1,000환에 팔아 3곱장사를 하였는데 비 오는 날에는 엿장수를 할 수 없었어요. 그런 날에는 왜 그렇게 하늘이 원망스럽던지 모르겠더라구! 장사를 못해서 그래요. 그렇게 이어오던 포로들을 시찰하러 수용소에 들어온 미군장성을 납치하여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수용소 근처에는 민간인의 접근을 철저히 금지한다는 명령 때문에 엿장수를 더 할 수 없게 되었어. 궁여지책으로 그때부터 미군부대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껌, 담배장사, 달러장사를 시작했지 뭐야. 이 장사는 미군들에게 P.X에서 물건을 사다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죠. 담배 1보루에 6,000환에 사면 시장에 가서 8,000환을 받을 수 있었고, 달러는 1달러에 6,000환에 바꿔서 6,500환 받고 달러장사에게 파는 그런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았지요.
3. 북한의 위씨가 조선시대에도 크게 번성했다고 합니다. 1930년도에 발행된 新興郡誌에는 338세대, 平北道誌에도 779세대, 平北道의 구성군도 150세대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림잡아 1300세대쯤 됩니다. 북한의 장흥 위씨에 대해 아시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할아버지께서는 신흥군 우상동에 소재한 관북 장흥위씨 성지인 재각 월명사를 가끔 다녀오시면 늘 우리 장흥위씨는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두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여! 라고 자랑스럽게 손자 손녀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살았던 상반리에는 위씨가 네 집이었어, 송당 위재형 형님이 사시던 반송리에는 10여 가구가 훨씬 넘었어요. 내가 주북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한 반에 대여섯 명이 위씨였고, 흥남으로 이사와 본궁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이와 비슷했어요.
자공 할아버지 후손들이 문과급제도 10여 분이 하셨고, 벼슬길에 올라 실질적인 관북지역의 명문가였으니 관북의 위씨는 어림짐작으로도 2만여 명이 훨씬 상회한다고 봐요. 관북의 위씨는 신흥군 우상동에 있는 월명사를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성씨보다 세력이 훨씬 막강했다고 할아버지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해요. 원래 우상동에 선조께서 사시다가 자손들이 번성해서 신흥을 기반으로 인근으로 이사했죠. 아무래도 벼슬이나 결혼은 타 지역으로 이전할 수 있는 계기이랄까요!
4. 13세에 월남해 갖은 고생을 하셨을 터인데 삼흥목재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운영 잘해서 많은 돈도 버시고 자녀들도 훌륭히 키우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성공스토리입니다. 고생이 남달랐을 텐데요. 성공담을 부탁드립니다.
부모님도 모두 안 계시고 할아버지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타계하셨지요. 장남이신 재묵(載黙)형님도 1951년 꽃다운 나이인 24세에 돌아가셨어요. 둘째 재선형님과 문순(文順) 누이가 사실상 부모 역할을 했어요. 문순 누나는 할아버지 옷을 12살 때 손수 지어 드리는 등 희생을 자청했어요. 또한 재선형님은 지류(紙類) 유통사업으로 나를 성균대와 한양대 대학원까지 공부시켜주셨어요, 여동생(明子)도 국민대를 보냈어요. 또한 4촌 동생(재협)은 건국대를 졸업시켰죠.
우리 가족은 거제에서 가까운 부산으로 이사했어요. 재선형님은 제대 후 부산에서 미군부대에 다녔어요. 2년 후 미군부대를 나온 재선형님은 서울로 방산시장에서 지류유통업에 시작했어요. 나는 인창고,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거쳐 ROTC 소위로 임관해 논산훈련소에서 부관으로 근무하다 1966년 4월에 만기제대 했지요. 형님의 강력한 권유로 한양대 산업대학원에 진학하여 국토개발공학과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는데 그 당시에도 취직이 어려워서 공부하면 진로가 보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공을 택하게 되었는데 학문도 매우 흥미로워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러면서 교수님들을 도와 학부생들의 시험감독과 채점을 도우면서 지내던 중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 자문위원으로 계시던 경희대 이한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울시 도시계획과에서 계장을 추천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저에게 권유했어요. 그래서 주임교수인 이일병 교수님께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계장자리로 가서 되겠냐고 더 나은 자리를 찾아 볼테니 사양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포기했죠.
이때 고종사촌형님이 영국상사에서 발주한 옆 연초 수출용 상자제작을 의뢰받게 되어 저를 불러 같이 영국상사를 방문해 소재는 어떤 것을 사용해야하며, 규격, 제작방법 등을 설명 듣고 주문받기로 결정하여 고종4촌 형님이 이일을 저와 함께 시작하여 이 형님은 딴 사업장이 있어서 제가 창업, 제작, 납품까지 하게 된 것이죠. 나는 목상자를 제작하면서 목재에
관심을 갖게 되어 목재상을 차리면 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결국 1970년 9월이 되어서야 창업했어요.
성동구 행당동 319번지 무학여고 앞에 三興木材라는 간판을 달고 33살 나이에 장사를 시작했죠. 당시 30만원 자본금으로 시작한 사업은 매우 초라했어요. 그때 금호동에 있었던 신일제재소 사장님이 도와주었지요. 합판도매상에 이 사람이 전화하면 물건을 달라는 대로 주라고 부탁하면서 만약 돈을 못 받으면 당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해주셨고, 국민은행 금호동지점 지점장에게 신용대출도 주선해주셨지요. 당시 1백만 원은 30십만 원으로 시작한 나에게는 큰돈이었어요.
이런 고마운 분이 어디 있을까! 저를 그만큼 신뢰해주신 김성일 사장님과 김춘자 사모님께 진심의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이렇게 지인들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나날이 커가는 목재상은 점점 물건이 늘어났고 평이 좋아져서 시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되요. 그 후 1992년부터 2018년 5월 15일까지 가평에서 三興木材라는 간판을 달고 제재소를 운영하게 되었지요. 이곳 제재소를 차리면서 판로에 대해 매우 걱정을 했는데 그 해에는 시중경기가 호황이었어요.
목재가 귀해서 소비자도 목재를 자기에게만 달라고 계약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업 시기를 무난히 지날 수 있었고 제재사업을 28년간 하면서 두 아들을 공부시키고 먹고 살았지요. 제재소를 운영하면서 제재소 주위에 포도밭이 많았는데 다들 수입이 일반 벼농사보다는 몇 배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포도밭을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제재소 주변보다 토지가격이 싼 철원 토지를 구입하게 되었지요. 두 곳에 약 12,000평에다 포도를 재배했지요.
포도농사를 2002년부터 2018년까지 16년이나 하다가 신철원에 있는 포도밭을 갈아엎고 창고와 상가를 짓게 되었어요. 포도밭이 도로보다 너무 낮아 주변에서 공사를 하면 흙을 매입해 복토(覆土)하는 작업을 무척 오랫동안 했어요. 토지의 규모는 4,600평(15,180㎡)에 4층 상가, 창고 8동이지요. 임대업을 하다 보니 재각 주변에서 밭에다 태양광 발전을 하는 것을 보고 이를 벤치마킹해서 창고건물의 지붕위에 태양광발전소를 지어 임대사업과 발전사업을 겸한 셈이죠.
5. 관북 종친의 지도자로 고인이 되신 송당 어르신과 함께 문중활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종회 부회장, 장학회 상임이사, 보의론 연구위원 등을 맡아 열심히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문중에 발을 들여놓게 된 동기와 출입하시면서 그간 느끼신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문중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재선형님의 강한 권유가 계기가 되었어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형님은 서울 방산시장에서 지류유통에 종사했어요. 형님께서 번 돈으로 나와 여동생은 물론 사촌동생 재협의 학비를 지원해준 형님은 아버지와도 같은 큰 언덕으로 존경했어요. 저의 오늘은 형님의 덕이죠. 그래서 인터뷰도 주인공도 내가 아니라 형님이 해야죠. 정말로 형님의 동생들에 대한 그 희생정신은 갚을 길이 없어요. 이 자리에서나마 그 가없는 사랑에 감사함을 표시하네요.
방산시장에는 월남한 위씨들이 몇몇 있었어요. 형님이 나서서 자주 찾아가 술밥을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친하게 지내게 역할을 했어요. 그런 역할을 지속하다보니 나중에 위씨들이 하나로 뭉쳐 관북종친회를 창설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지요. 재선 형님의 주선에 의해 관북종친회가 결성되어 지금에 이르렀어요. 저도 형님의 권유로 2005년 관북종친회장을 6년간 맡았어요. 이어 도문회와 대종회 부회장, 보의론 연구위원 및 장학회 상임이사까지 깊게 관여했어요.
장학회 상임이사를 역임한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요. 더구나 보의론 연구위원을 하며 씨족사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계사 위성호 사월문중 원로의 열정과 진실에 대한 탐구력은 늘 존경의 대상으로 가슴 속에 남아 있지요. 정말 훌륭하고 대쪽 같은 선비로 본받을 점이 너무나 많았어요. 송당께서도 계사공과 1985년 사월재에서 밤샘 대화가 없었다면 관북종친의 회주대제 참례는 실현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두 분의 대화가 물고를 틀었지요.
또 하나 기억은 범곡 위찬호 대종회 초대회장이 전화를 했어요. 18년간 대종회장으로 재임했는데 한 번 더 유임하겠다는 의사였죠. 덕운 위황량 어르신께 급히 조언을 구했더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만하셔야 하는데 하는 인상이셨지요. 그래서 과감하게 위자형 씨족문화연구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는 것이 大道라고 직언했어요. 더 나아가 위자형 회장께도 12년 대종회장직을 끝내고 위승렬 상임부회장에게 대종회장직을 이양할 것을 직언했지요. 대도란 때론 멈춤이죠.
6. 관북종친들은 거의가 이산가족입니다. 이산의 아픔을 달래려 철원의 농장에 망향비와 파조이신 생원공의 위패를 모신 월명사(月明祠)를 대신해 경일사(敬日祠)를 세워 관북파의 성지로 꾸미셨습니다. 배경과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관북파의 남쪽 성지 경일사(敬日祠)는 영일문(迎日門)과 부속건물인 혜일원(惠日院), 망향비(望鄕碑)로 구성되어 있어요. 2000년 초반쯤 할아버지의 사촌동생(위정구)께서 살아생전 고향에 있는 월명사에 가기가 어려우니 북쪽이 바라다 보이는 강원도 인근에 사당을 지으라고 대뜸 삼십만 원을 나한테 주었어요. 나중에 돌려주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눈물 글썽이는 모습이 아련 거렸죠. 반드시 사당을 짓겠다고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고 재차 결심했어요.
2008년 강원도 철원군 산기슭 300평 대지에 120평 규모의 재각을 제가 목수 일을 하며 건축했죠. 물론 다른 목수들도 함께 했는데 추진도감으로 계셨던 舍兄(재선)께서 감독하셨지요. 재각의 위치가 한탄강을 끼고 고대산을 바라보는 명당자리지요. 재각 아래에 포도밭이 있었는데 나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재각과 입구도로만 남기고 모두 매각했지요. 그 매각대금으로 신철원 입구에 과거에 매입한 땅을 개발해 태양광 발전소와 임대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재각을 짓고 있는데 2008년 어느 날 관북종친회원인 위정찬 종친이 북쪽을 바라보고 망향비를 세우자는 제의를 했어요. 부랴부랴 포천시 건사리에 있는 동아석재를 방문해 망향비를 제작하게 되었죠. 마당석의 무게가 30톤을 넘어 운반하는데 진땀을 빼야 했어요. 비용 1천만 원은 자비로 충당했지요. 이 모두는 관북파의 구심점으로 작용해 이산의 아픔을 달래고 혈정을 나누는 전환점으로 작용하게 하려는 의도였어요. 하나 되는 관북파, 미래지향적인 씨족사회를 열망했죠.
▲좌 태선, 재균, 재협(4촌 동생), 재선(셋째 형), 봉열, 정찬, 성열, 재일
7. 특히 망향비 제막식에 맞춰 松堂公이 작사하신 관북 위씨의 종가(宗歌), 혜산옹께서 작사 작곡한 「우리들의 노래」도 발표됐습니다. 찬가는 매우 드문 케이스입니다. 가사에 성천강, 신흥, 우상동 등이 나옵니다. 종가와 찬가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관북종친회장 재임 때 종가와 찬가를 구상했어요. 합창은 구성원을 뭉치게 하고 미래를 향한 다짐을 하잖아요. 어느 조직이나 합창만큼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은 없다고 봐요. 그래서 관북종친회원들에게 종가를 모집한다고 공지를 했죠. 얼마 후 송당 위재형 형님께서 작사하신 원고를 저에게 주셔서 제가 원고를 들고 舍兄(재선)의 동창생인 황규렴 선생을 형님을 앞세워 찾아가 작곡을 부탁해서 종가가 만들어졌지요. 이 작곡가는 학교에서 40여 년간 음악을 가르치신 분이지요.
나도 나름 ‘우리들의 노래’란 제목으로 작사와 작곡을 직접 해 제출했죠. 여러 종친들이 모여 2곡 중 한 곡을 선택해야 했어요. 송당 형님께서 작사한 노래를 살펴보니 한 절 만이고 가사가 너무 어렵다고 했더니 송당 형님께서 버럭 화를 내시는 거예요. 나는 송당 형님과 고향 함흥에서 바로 이웃동네에 살았거든요. 괜히 형님을 불편하게 할까봐 내가 만든 노래는 찬가로 하고 송당 형님이 만든 노래를 종가로 하자고 제의했죠. 이것이 종가와 찬가제작의 숨은 이야기죠.
성천강, 신흥, 우상동은 관북파 종친들의 마음을 담은 고향 이미지예요. 마음에 고향을 그리며 위안을 삼는 일상이 벌써 70년이 넘었지요. 눈물이 나네요. 고향에 있는 성천강은 길이는 짧으나 폭은 상당히 넓어 일제강점시대 때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 곳이죠. 일본의 토목기술은 매우 뛰어나요. 특히 성천강 일대는 제방이 허술해 비가 내리면 일대가 물로 잠겼는데 공사로 편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어요. 성천강 일대에는 우리 집 전답이 네 곳에나 있어 관심이 많죠.
8. 대종회와 도문회는 아직 종기와 근조기가 없는데 관북종친회에는 오래 전에 종기와 근조기를 제작하여 사용 중입니다. 종기에 숨겨진 뜻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뜻과 이를 디자인한 건국대학교 이용우 교수와의 인연도 크다고 들었습니다. 사연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참! 앞의 질문에 대해 놓친 것이 있네요. 만세교는 관북종보에도 표지로 실렸는데 어느 종인인가가 그렸는데 함흥과 정평을 연결하는 다리로 성천강의 이미지를 담고 있어요. 물론 우상동에 소재한 월명사의 상징성도 마찬가지구요. 우리 집안에서 어머니 역할을 도맡아온 문순(文順)누나는 두 딸을 두었는데 마침 둘 다 교수가 직업이에요. 이용우 교수는 막내 사위로 건국대학교에 근무했어요.
종기와 근조기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디자인을 해주더군요. 해 뜨는 꿈은 용꿈보다 길하다고 하면서 魏 자를 중심으로 해가 빛나는 형상이지요. 더구나 아침에 뜨는 해는 만물을 소생시키고 인간을 따사롭게 하지요. 그래서 경일사, 혜일문, 영일문 모두 중간에 日 자를 넣었고 편액은 아내가 조각했어요. 그리고 종기와 근조기 하단에 있는 ‘關北長興魏氏宗親會’제자(題字)는 이 교수의 부친께서 써주셨죠.
9. 송당공은 남북종친의 화합을 위해 생전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고인의 지도력으로 1985년부터 관북종친들이 회주사 대제에 참례했습니다. 관북종보 ‘월명송’과 대종회보‘장흥위씨종보’를 창간하고, 16년간 편집해 문중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럼에도 회주사 비림(碑林)에는 송당의 송덕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고인의 송덕비를 세우려 애썼다고 합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송당 형님의 가장 큰 업적은 관북종친들을 남종 도문회와 연결시킨 대의(大義)죠. 이로 인해 관북파도 장흥의 회주사를 자주 찾게 되었죠. 자공 할아버지 관북이거 후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회주사에는 관북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비애를 느끼지요. 눈에 보여야 마음도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가능한 빠른 시일 내 송당의 공적비를 세워야 해요. 가교로서의 역할을 넘어 기록으로 문중에 기여하고 보의의 역사에도 힘을 보태 정사를 지향했잖아요.
송당 형님의 업적에 대하여 대종회나 도문회에서 이견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빠른 시일 내 건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북종친회의 의결기관인 월명회 회원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건립비용을 관북에서 부담하라면 할 수도 있다는 결정을 보내왔어요. 그러나 이것은 비석을 제작하여 철원에 있는 관북종친회 망향동산에 세우는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에 큰 뜻에서 그분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서 대종회나 도문회에서 비용까지 부담하면서 건립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봐요.
관북종친회에서도 힘껏 힘을 합하겠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계사 위성호 사월문중의 원로도 대종회와 도문회에서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하는 작업을 빨리 진행했으면 해요. 송당 위재형 형님과 함께 계사공의 공적비도 반드시 세워야 해요. 고군분투하여 씨족의 사사(邪史)를 정사(正史)로 바로 잡는 일에 20여 년을 몰두했지요.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우리가 다 알잖아요! 그 증거가 바로 1999년 기묘대동보죠. 기묘대동보는 기묘초보의 정신을 잇는 남북합보잖아요.
▲孫子 준성(準成)과 함께
10. 주제 넘는 질문입니다. 재균 어른께서는 문중행사 때 늘 부인과 함께 참석하셔서 잉꼬부부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내자랑 좀 해주시고 자녀들도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다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자식교육에 대해 무슨 비법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내는 두 아들을 무탈하게 키웠어요.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애들 옆에서 늘 지켜주고 다독여 주었어요. 아내는 늘 가정이 우선이었지요. 이에 대해 감사해요. 행당동에 살다가 청담동으로 이사해 두 아들이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영동고등학교를 나왔죠. 장남 우석은 국민대와 대학원 전자공학과를 나와 현재 미국 달라서 삼성지사에 근무하고 있고 아들 하나를 두고 있어요.
차남 원석은 홍익대와 대학원 전기제어학을 전공 현재 한국수력원자력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들만 둘이예요. 교육비법을 재차 물어보니 무슨 자식교육에 왕도는 없어요. 정직하고 성실하게 베풀며 살고 정직하게 살자고 말하고 있지요.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이 제일인줄 압니다. 늘 주변분들과 지인들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답니다. 성경에 감사는 감사를 낳는다고 하는 말을 늘 가슴 속에 새기고 살죠.
▲혜일원(惠日院)
11. 관북종친회는 위대선 초대회장, 2대 위광도, 3대 위재형, 4대 위순환, 5대 위재균, 6대 위태선, 7대 위성열 회장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런데 근래 종친모임 참여율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합니다. 미래지향적인 종친회를 위해 바라시는 점이나 부탁하고픈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울러 대종회의 발전방향에도 한마디 부탁합니다.
나이가 들면 종친회로 돌아와 과거의 씨족모임이 다시 회복되리라 봐요. 도문회와 대종회는 당연히 일원화되어야하고 뿌리인 도문회가 통 크게 대종회를 품었으면 해요. 아무래도 본관을 지키는 도문회가 타향에 흩어져 사는 대종회를 감싸 앉아야죠. 범곡 위찬호 회장은 카리스마로 대종회를 창설해 이끌다보니 도문회와 충돌이 잦아 다소 불안했으나, 후임인 송담 위자형 회장은 특유의 디지털 리더십을 조직에 적용해 지혜롭게 정착시킨 리더로 평가가 되지요. 향후 정암 위승렬 회장체제가 연착륙하길 기대해요. 좋은 말씀해줘서 감사를 드려요.
▲위재균 옹, 아내 유춘자
◇惠山 裁均翁의 家族과 履歷◇
關北 奉圭派 定相系列 38世
고조(高祖) 34世 종윤(鍾允), 1837년
증조(曾祖) 35世 系子 진원(珍源), 1860년, 통정대부
조부(祖父) 36世 정춘(楨春), 1883년~1952년 피난소 卒
配 密陽 朴殷柱, 1940년 상반리에서 卒
부(父) 37世 양환(良煥), 1909년~졸년 미상
配 南平 文晟林, 1909년~1947년
본인 38세 재균(載均), 1938년
配 江陵 劉春子, 1947년
1938 함남 함주군 주북면 상반리 출생 / 4남2녀
재묵(載黙) 1928년(戊辰)11월 20일
재선(載先) 1931년(辛未)10월 7일
재관(載寬) 1933년(癸酉) 2월 16일 고향에서 타계
재균(載均) 1938년(戊寅) 2월 20일
女 문순(文順) 1936년 4월 8일
女 명자(明子) 1941년 11월 4일
1945 주북초등학교 입학
1947 모친타계 남평문씨 성림(南平文氏 晟林)
1949 흥남으로 이사로 본궁초등학교 전학
1950 본궁초증학교 6학년 때 6.25 발발
12.24 흥남부두 미국 상선으로 월남
12.28 거제도 장승포 도착
12.30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 도착
1951 長兄(장형) 재묵(載黙) 거제 피난민수용소에서 타계
1952 피난소에서 타계 조부(祖父) 36世 정춘(楨春)
1953 피난민수용소에서 껌, 담배, 엿장수, 딸라 교환으로 생계유지
1955 서울로 이사
1957 인창고 입학
1960 인창고 졸업
성균관대 행정학과 입학
1964 성균관대 졸업
ROTC 2기 소위임관(논산훈련소 부관, 참모부 근무)
1966 한양대 대학원 입학, 국토개발공학과 도시계획 전공
1971 장남 우석(佑錫) 출생
국민대 공학석사
미국 달라서 삼성지사 근무, 손자 1명
1973 차남 원석(湲錫) 출생
홍익대 공학석사
한국원자력수력공사 차장 근무, 손자 2명
1970-1983 행당동 무학여고 앞 삼흥목재 운영
1984~1992 덕소에서 주택 건축업
1993~2018 가평에서 三興木材 운영
2005~2011 관북종친회장
종기, 종가, 찬가 제작
2008 경일사, 혜일원, 영일문, 망향비 건립
2008~현재 대종회 부회장
2008~2012 도문회 부회장
2010 보의론 연구위원
2015~2020 장흥위씨 장학회 상임이사
2019~현재 창고 및 빌딩 임대업, 태양광발전소 운영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명성로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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