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
15시간 ·
지성은 지식의 통섭(統攝:Consilience)이다.
; 지성인은 현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하는가?
: 지성의 의무는 문제 해결보다 문제 발견이 우선이다.
학문의 발달로 전문 영역의 갈래는 마치 나무뿌리처럼 세분화하고 각 갈래마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식 습득에 재능이 탁월한 자들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영역에서 울타리를 치고 자신이 느낀 부분으로만 세상의 가치를 재단하려 하는 게 우리사회 풍토다.
지금 우리사회 엘리트라 부르는 고교 시절 전교 1등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의사들이 그렇고, 낙타에게 바늘이라는 사법시험을 통과한 검사들이 특히 그렇다.
의학의 시조라 일컫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기술(Ars; 技와 術)을 익히고 수련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데에 인생은 짧다”란 말을 남겼다.
그 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기술(Ars)’을 예술(Art)로 해석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로 바꾸어 지금까지 인류의 잠언으로 남아 있다.
세네카는 탄식했다. “서로 뺏고 빼앗기고 휴식을 망쳐놓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이에 그들의 인생은 소득도 없이, 즐거움도 없이. 정신의 향상도 없이 흘러가 버린다. 아무도 죽음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저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에 희망을 걸고 살 뿐이다”
세네카의 탄식은 2천여 년 전에만 유용했을까.
우리 시대에 학문(Ars)에 재능 있는 자들은 눈앞의 돈‧명예‧권력을 추구하는 출세에만 혈안이다. 출세를 위한 전문 지식만 있고 삶에서 가치를 찾는 지혜가 없다. 윤리 의식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 우리 ‘지식 엘리트’들에게 인격의 성숙을 기대하기보다 강바닥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이 쉬울지도 모른다.
인생은 짧다는 것을 깨닫고 탁월한 학문적 재능으로 삶을 더 멀리 내다보며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지성의 엘리트’ 찾으려면 대낮에 등불을 켜야 할 지경이다.
사회 구조와 구조에 따른 문제점을 종합적이고 논리적으로 성찰하는 학문의 태도를 일컬어 ‘통섭(Consilience)’이라 한다.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포함한 모든 현상은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부분만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고 전체 현상과 관련지어서만 부분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지식을 지극히 작은 단위로 쪼개어 본다면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한 분야의 지식이란 다른 분야의 지식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이 연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어떠한 지식이라도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생물학자가 철학으로 생물학의 가치를 이해하고, 철학자(=인문학자)가 생물학을 통해 과학적인 사유를 하는 태도를 말한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과학 없는 철학은 맹목이고 철학 없는 과학은 공허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맹목이나 공허에 빠지지 않으려면 학문의 통섭이 필요하다.
지금 지구촌은 ‘불평등’, ‘기후위기’,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우리 소중한 자식들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지경으로 위협받고 있다. 공룡이 순식간에 사라졌듯 기후위기로 인간은 물론 현존 생물의 대량전멸을 뜻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의 종말’로 이어진다는 학자들의 구체적인 경고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핵심인 검사 권력은 이런 지구의 위기에 아주 무식하다. 검사가 무식하다는 뜻은 법 지식 획득 능력은 뛰어났겠지만 법 적용이란 울타리에만 갇혀 권력을 휘두르는 맛에 길들여 있기 때문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법에 맹목이다. 그들은 통섭의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권력에 심취해 지식의 통섭 즉 지성을 갖추는 데에 아예 관심이 없다.
이들에게 재능 있는 지식인으로서 지성이나 높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기대하기에는 언감생심이다.
나는 한 TV 강의를 보다가 원효를 해박한 지식으로 설파한 교수를 보았다. 그 교수에게 관심을 가졌더니 어떤 경로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 분과 술자리에서 대화했더니, 내가 찾던 통섭의 지식인 곧 지성인이라는 걸 느꼈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의 전공의 폭은 넓다. 본래 전공은 고전시가 연구로 원효의 화쟁사상을 기호학과 연결해 ‘화쟁기호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다. 이 이론으로 향가, 고려속요, 시조 등 한국 전통 시가를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이쿠와 같은 외국문학, 대중문화도 분석했다.
화쟁과 맑시즘, 들뢰즈, 레비나스의 철학을 종합해 타자 속의 나, 내 속의 타자가 서로 소통해 하나가 되는 ‘눈부처’ 사상을 주장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면 상대방 눈동자에 내 모습이 보이고 내 눈동자에도 상대방 모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게 되겠죠. 그건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에요. 내가 화가 나서 누군가를 때리러 가는데 그 사람 눈동자에 내 모습이 보이면 못 때리게 되죠.
우리 안에 있는 선함과 우리 안에 있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스러운 것들이 눈부처의 모습에 들어간다고 봤어요. 그것이 저의 눈부처 사상입니다.”
또한 이 교수는, 소수자들을 대변하고, 사회에 쓴 소리를 던지는 비판적 지성인으로 사회적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 ‘민교협 상임의장’을 역임했고, 백기완 선생의 맥을 잇는 ‘노나메기 민중사상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도흠 교수의 저서를 보면 이교수의 통섭의 영역을 알 수 있다.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 등. 역서로 틱낫한의 『엄마』.
최근 저서로는『엄마는 어디에』가 있다. 엄마를 찾아 떠나는 아기 연어의 여정 속에 ‘기후위기’와 ‘불평등’ 그리고 ‘학교 폭력’ 등 미래 세대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올 문제들을 ‘눈부처 사상’으로 이 책에 녹여냈다.
11월 9일 이도흠 교수의 <두:목회>에서는 인류 사회가 파국을 맞을 지경에 있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폭력과 전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7가지 지혜를 세 연어 자매를 통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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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회 여러분!
통섭의 지식인 즉 우리 사회에서 아주 귀한 지성인을 만나 실 수 있습니다. 많은 참석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