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 처사 이공 유사 陶丘處士李公遺事
공의 휘는 제신(濟臣), 자는 태우(太遇), 자호는 도구(陶丘)이다. 충효의 행실과 청광(淸狂)의 절개가 있으며 젊어서 문명이 높았다. 일찍이 향시에서 〈소식론(蘇軾論)〉을 지었는데, 시험관이 보고서 크게 놀라며 2등으로 뽑았다.
현풍 사람 배신(裵紳)과 함께 성균관에서 유학할 적에 나이 순서대로 앉자고 글을 올렸는데, 일이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명성은 더욱 자자해졌다. 시사가 점점 불안해져 이름과 행적이 더럽혀지는 것이 싫어 조정에 요청하여 청하 교관(淸河校官)이 되었다. 그리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오래되지 않아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만년에 남명 조 선생을 따라 방장산 아래에 살았는데, 수석(水石)이 맑고 그윽한 곳을 만나면 문득 그곳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일찍이 인종(仁宗)이 승하하자 삼년복을 입었고, 〈동림별곡(桐林別曲)〉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이세원(李世元)의 양자가 되어 집안의 살림이 자못 넉넉하였는데, 재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모두 써버려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끼니를 자주 굶었으나 담담하게 여기고 개의치 않았다.
시를 지을 때는 정밀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강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어 비록 장난스럽고 거친 곳이 있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얻은 구절은 기발하고 뛰어난 것이 많아 사람들이 많이 외웠다. 일찍이 삼가(三嘉)의 금성산(金城山)에 올라 7언 율시 한 수를 지었는데, 첫 번째 연에 “암석 아래 맑은 샘은 새로 내린 빗물이고, 바위 사이 외로운 대나무는 옛 승려가 심은 것이네.〔巖下淸泉新雨水 石間孤竹古僧栽〕”라고 하였다. 남명 선생이 이 시를 듣고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상국 정사룡(鄭士龍)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의령 정호(鼎湖) 남쪽에 정자를 세우고 ‘십완당(十翫堂)’이라고 편액한 뒤, 공에게 시를 지어 달라 청하니 즉시 써서 보냈다. 첫째 연에 이르기를 “구름은 먼 산봉우리에 걸쳐 기이한 형상을 드러내고, 기러기는 평평한 모래밭에 내려앉아 좋은 소식 보내네.〔雲橫遠峀呈奇狀 鴈落平沙送好音〕”라고 하였다. 이 시 앞 구절은 정사룡이 창기(娼妓)를 많이 둔 것을 기롱한 것이고, 뒷 구절은 편지를 보내 시를 청한 것을 기롱한 것으로, 다른 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정사룡이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주 칭찬하며 처마 밑에 걸어 두었는데, 뒤에 상국 소세양(蘇世讓)이 보고 풀이하여 말하기를 “이는 그대를 기롱한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사룡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 같은 고을 유생이 나를 놀리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화는 내지 않았다.
남명 선생의 장례 때 수백 명의 사인이 모였는데,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이조 정랑으로서 문인의 선두로 동편에 서고, 징사 최영경(崔永慶)이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하였다. 신주(神主)에 글씨를 쓸 적에 참판 김우옹(金宇顒)과 군수 정구(鄭逑) 등이 신주에 글씨를 쓰는 자는 마땅히 소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정구가 더욱 힘껏 그 의견을 주장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나라의 제도를 따라 마땅히 길복(吉服)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여,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 이때 공이 떨어진 옷과 찢어진 갓을 쓰고 서편에 서 있다가 손을 들고 자리를 지나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오 정랑은 선생의 고제이고 지위와 명망이 가볍지 않으며, 조정의 큰일을 주관하고 참여하여 결정하니, 오 정랑의 한마디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건은 신중한 사람이어서 겸손하게 사양하며 감히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공이 정색을 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것이 그대가 이조 정랑 자리를 얻은 까닭이네.”라고 하니, 오건이 조금 웃었다. 그러자 최영경이 말하기를 “이 노인은 정정하시네.”라고 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15) 8월에 질병 없이 죽었으니, 향년 73세였다. 문생과 친구들이 상례를 치루고, 의령의 모아동(毛兒洞) 고향에 장사지냈다.
陶丘處士李公遺事
公諱濟臣。字太遇。自號陶丘。有忠孝之行。淸狂之節。少隆文譽。嘗於發解。作蘇軾論。考官覽之大驚。擢置第二。與玄風人裴紳遊國庠。上書請行年齒坐。事雖不行。聲名藉甚。見時事將有不靖之漸。欲溷其名迹。求爲淸河校官。仍佯狂不赴擧。未久。乙巳之禍作。晩從南冥曹先生於方丈山下居焉。遇水石淸幽。輒移之無定所。嘗服仁廟喪三年。爲作桐林別曲。以見其志。以世元養子。産業頗饒。而輕財好施。散盡不惜。或時屢空。而淡然不以爲意也。其爲詩。率爲應口。不致精思。故雖或有恢諧荒纇處。而其天得之句。無非警絶。人多誦之。嘗登三嘉金城山。作四韻。其一聯曰。巖下淸泉新雨水。石間孤竹古僧栽。南冥先生擊節歎賞。鄭相國士龍。被罷來鄕。築亭鼎湖之陰。扁曰十翫堂。請公作詩。走筆書呈。其一聯曰。雲橫遠峀呈奇狀。鴈落平沙送好音。上句譏其多畜娼妓。下句譏其折簡徵索。他句類是。鄭未之覺。亟稱之。懸于楣。後蘇相國世讓見之曰。比乃譏令公也。釋之。鄭大笑曰。豈意洞生侮弄我也。然未之慍也。南冥先生之葬也。士子之會者殆數百餘人。吳德溪健。以吏部郞。在門人之首。立于東偏。崔徵士永慶居其二。將題主。金參判宇顒,鄭郡守逑等以爲題主者當素服。而逑尢 力主其議。餘人皆曰。宜從國制著吉服。久未決。公以弊衣破笠。立于西偏。抗手歷位而進曰。吳正郞以先生高弟。位望非輕。朝廷大事。尙且參決。宜定于一言。正郞。謹愼人也。謙讓以未敢。輒正色大聲曰。此足下所以得銓曹地。正郞微哂之。崔徵士曰。是翁矍鑠。癸未七月無疾而逝。享年七十四。門生親故以其喪。旋葬于宜寧毛兒故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