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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이름짓기 문화 및 호짓기
-꿈꾸는 자의 이름. 호짓기
-미술교사 민 학 기
들어가며
벌써 십 수 년 전 부터 몇 권의 책을 기획해 놓고 있다. ‘아아! 우리들의 18세기’라든가 ‘쫀쫀함의 경제학’, ‘아줌마예찬론’ 따위의 것들인데, 이러한 것들이야 얘기의 줄기가 잡혀져 제목까지 만들어진 것이지만 또 다른 하나는 그 기획의도만 있을 뿐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살붙이기의 버거움과 21세기를 사는 지금 과연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에 쉽게 결과를 내오지 못하고 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우리 민족의 이름 짓기 문화’ 정도가 될 터인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조 명사들의 호(號)짓기 문화라든가 당호(堂號)짓기 문화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중심 의도는 그런 이름 짓기 문화를 오늘에 되살려볼 수 있지 않을까해서다. 그리하여 동아리문화를 더 윤기 있게 하고 끈끈하게 확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십 수 년 전 새해 첫 날을 광주 무등산 한 암자에서 보내고 이어 담양 소쇄원에 들른 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답사 열풍에 의해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곳이 되고 있지만 이 소쇄원에 들러 내가 진정 주목한 것은 자연과 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양산보의 원림 조영안목과 더불어 누정 및 담장, 작은 화단 등 인공 조형물은 물론이려니와 조그만 돌덩이, 보잘 것 없는 계곡 한 구석 수목에 이르기까지 뜻과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짓고 시를 지어 노래한 것에 있다. 또한 당대의 명유(名儒), 명문(名文), 명류(名流)들이 모여들어 공부하고 토론하고 시를 짓고 노래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정서를 교감하며 우정을 돈독히 했음은 사료를 통하지 않고도 익히 떠올릴 수 있는 풍경이다. 비록 세상을 등진 자들의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매우 특별한 호사취미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자연과 환경, 인간, 사회와 교감하면서 작은 것에도 시선을 놓지 않고 애정 어린 의미를 부여하며 이름 지어 관계를 살피는 것은 우리 민족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것과 나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명제가 우리를 더욱 살찌울 수 있다. 늘 가까이 있어 우리를 지탱해주는 유형・무형의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나와의 관계를 살피는 일들이 사랑의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우리의 삶은 변화 빠른 속도만큼이나 주변을 살피는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저 희번덕 지나갈 뿐 눈에 담아 두지 않는다. 마음에 새겨두는 일에 도무지 익숙하지 않다. 선조들이 호 지어 낙관 새기고 당호지어 현판 내건 일들은 바로 주변을 알뜰히 살피는 일에서 출발했다고 생각된다. 자기 자신의 성장과 발달을 살펴 성찰하는 가운데 자신을 일궈 세우는 일의 첫 출발이 자신의 호를 짓는 일이었을 게고, 당호를 짓는 이유였을 것이다.
항상 가까이 지켜보던 친구의 삶의 모양새를 관찰해 호 하나 지어준 들, 아끼는 후배나 제자를 위해 바램과 기대를 모아 호 하나 내려준 들, 한 학파나 동아리가 계보의 돌림자를 넣어 호를 나누고 그 동아리를 단도리해 간 들 서로의 아낌과 기대를 싹 튀어가는 데 무에 나쁠 것이 있겠는가? 새로 구한 친구의 집에 근사한 이름 하나 붙여준들, 방 한 칸 더 늘려 서재를 꾸미고 열심히 공부해보겠다는 다짐으로 서재 이름 지어 걸어본들 무에 어색하고 쑥스럽겠는가? 굳이 크나큰 업적을 세우고 명사로 소문나야만 호를 갖고 당호를 갖겠는가? 호를 갖는다는 것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이름 외에 또 다르게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이름인 것임에야. 자기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강조하는 것 이상이겠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도 그 스스로 500여 개의 호를 사용했다잖는가. 워낙에 삶의 태도가 기고만장한 사람이라 각 시기별 그의 사상 편력과 관심의 편린들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해낸 증거들인 것이다. 또한 당대 최고의 신학문 신예술의 수용자로서 고루한 겸손쯤으로 해결되지 않는 호기와 변덕, 자기에 대한 애착이 그의 힘의 원천이었음을 숨김없이,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호와 당호를 갖고 서재 이름을 갖는 것이 좋은 사람, 좋은 가정, 좋은 부모, 좋은 사회 구성원이 되겠다는 다짐과 무에 다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름 짓기 문화는 개인 및 가정에만 국한할 것도 아니다. 최근 짓는 아파트들이 기존의 건축회사들의 이름을 붙여 ‘현대1차’, ‘선경2차’라는 상투적인 이름 짓기에서 벗어나 ‘사랑마을’, ‘매화마을’하듯이 그 안의 놀이터나 노인정도 또 다른 그들만의 정겨운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근사한 현판 하나 내어걸면 또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이런 이름 짓기 문화가 널리 정착된다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동아리들이, 우리의 환경이 더 사랑스럽고 윤기 있고, 생기 있게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바램에서 생각해봤는데 혹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욕하지 않을는지.
이런 이름 짓기 문화와 궤를 같이하는 대표적인 표현장르가 아마도 서각(書刻)이나 전각(篆刻) 등의 새김 장르가 아닐까 한다. 서각 또는 전각이 가지는 멋을 ‘좋은 글을 지어 돌이나 나무 등에 쓰고 가슴속에 새기는 멋’이라고 내 나름으로 정리하고 있다. 비록 나무와 돌에 새기지만 진짜는 내 가슴 속에 새기는 것 아니겠는가. 새긴다[刻]는 것은 물건의 바탕에 글씨나 형상을 파거나 잊지 아니하도록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는 일이다. 나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내 주변을 깊이 성찰하고 더듬어 마음속에 깊이 새겨 넣는 일이 바로 ‘새김의 문화’다. 의미 부여하기, 이름 짓기, 마음에 새기기는 바로 관계 맺기, 마음 주어 사랑하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첫 출발이 자신의 호를 지어 갖는 것이다.
호를 한 번 지어 볼까요?
이 글은 미술 시간에 서각과 전각 수업을 펼치면서 학생들에게 호 짓기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참고자료로 만든 것에 살을 붙여본 것이다.
1. 이름이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잘 알려진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서기 위한 것이 이름입니다.
나를 넘어 ‘관계’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2. 내 이름에 이의(?)있습니다.
민학기(閔鶴基)
참 이름 좋습니다. 참 맘에 듭니다.
국민학교 때는 ‘학이 노는 터’ 등으로 해석하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뭔가 신령스럽기도 하고, 신선이 된 듯도 하고....’
제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십장생 중 하나인 학(鶴)을 집어넣어 오래 무병장수하란 뜻으로 지어주셨다 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鶴’자와 ‘基’자는 참으로 좋습니다.
민학기(閔鶴基)
이건 제 이름입니다.
내 이름이긴 하되 내가 짓지 않았습니다. 살아생전, 죽어도 내가 쓸 내 이름인데 우리 할아버지는 최소한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감히(?) 내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이란 그렇습니다. 내가 쓸, 내가 주인인 내 이름을 내가 짓지 않았으며 내가 동의해준 적도 없는 것이 우리의 이름입니다.
3. 이름에는 부모의 욕심이 묻어있다.
내가 짓지 않은 내 이름에는 부모의 욕심이 묻어 있습니다.
부자 되라고, 오래 살라고, 남보다 뛰어나라고, 빼어나게 이쁘라고(秀美), 번듯하라고, 부귀와 영화를 한껏 누리라고, 높은 벼슬하라고.....이런 탐욕(?)이 아니더라도 우리 딸 시우(時雨 : 때맞춰 내리는 비처럼 만물을 기쁘게 해주라)처럼 제법 겸양과 미덕을 강조한 이름에도 색깔을 달리할 뿐 부모의 욕심이 묻어있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4. 우리의 이름 짓기 문화
사람이 삶을 누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불리기 시작했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수단이 아니라 명예와 인격성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 형태는 국가나 민족, 그리고 배경이 되는 사회나 문화에 따라 복잡다양하며, 보통 각기 다른 유래와 의미나 이유 등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토박이말로 지었던 우리의 이름이 한자의 유입과 함께 한자 이름으로 지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4-1. 참고로 토박이 이름 짓기의 유형을 살펴보면
1) 출산 장소에 따른 것(부엌손, 마당쇠)
2) 간지(干支)나 달 이름에 따른 것(갑돌이, 정월이)
3) 성격에 따른 것(억척이, 납작이)
4) 기원을 곁들인 것(딸고만이, 붙드리)
5) 순서에 따른 것(삼돌이, 막내)
6) 복을 비는 천한 것(개똥이, 돼지)
7) 동식물, 어류 이름에 따른 것(강아지, 도미)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동물 이름입니다.
이름을 한자로 지을 경우의 성명 3자 가운데에서 선택권은 1자밖에 없지요.(외자이름도 있지만). 성과 항렬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1자도 같은 항렬의 동명이인을 피해야 하고 가까운 조상의 이름에 나오는 글자도 피했습니다.
4-2. 일생 네다섯 개 이상의 이름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에는 실명을 삼가는 것이 세계적인 경향인데,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모독이라 생각하여 금기시 하는 풍습이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보통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착된 사대부집안의 이름 짓기의 경우 일생에 걸쳐 네다섯 가지의 이름을 갖게 됩니다.
◆ ① 아명 (兒名 : 어린아이 때의 이름)
아명은 보통 생존확률이 높지 않았던 옛날에 무병장수를 염원하며 천하게 짓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개똥이, 쇠똥이, 말똥이 등의 이름이 흔했지요. 이름을 너무 귀하게 지으면 운명을 관장하는 하늘이 시기해 일찍 명을 앗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관명이 '희(熙)'였던 고종 황제의 아명이 개똥이었고, 황희(黃喜)의 아명은 도야지(都耶只)였음이 그 사례입니다.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논개(朱論介)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무남독녀인 논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논개의 부모는 일부러 천한 이름인 논개(개를 낳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도 갑술년(甲戌年, 1574년), 갑술월(甲戌月, 음력 9월),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 오후 7∼9시 사이)의 4갑술(甲戌)의 사주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술(戌)은『개』를 상징하므로 사주(四柱)가 모두 개이기 때문에『개를 놓았다(‘낳았다’의 사투리)』는 뜻에서 이두(吏讀)의 한음(漢音)을 따서 논개(論介)로 작명하였다고 전합니다.
아명이 그대로 관명으로 되어 한자로 '개동(介東), 계동(啓東), 소동(召東), 소동(蘇同), 마동(馬銅), 마동(馬東)'으로 되기도 합니다. 또한 서민들은 아명으로 평생을 살기도 했습니다.
◆ ② 관명( 冠名 : 본명. 장성해서 그 집안의 항렬에 따라 짓는 이름. 호적에 올리는 이름)
본명임에도 일상생활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보통 생후 백일은 지나야 ‘이 놈이 살 기미가 있겠구나!’하고 생존확률이 명확해진 뒤에 짓게 됩니다.
◆ ③자 (字 : 혼인한(성인식) 후에 본 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 )
우리의 전통 예법에 의하면 남자가 20세가 되거나 여자가 15세가 되면 요즘의 성인식(成人式)에 해당하는 관례(冠禮)와 계례가 있었는데, 이때 남자는 어른의 의복을 입히고 모자인 관(冠)을 씌우고 여자에게는 비녀를 꽂아 성년(成年)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이 관례(冠禮)가 행해질 때 비로소 성인(成人)임을 인정해 주기 위해 어린 아이의 이름인 아명(兒名)을 버리고 관자(冠字)라 해서 지어주는 이름이 바로 자(字)입니다. 자(字)가 붙은 이후로는 임금이나 부모 또는 웃어른에 대해서는 자신을 본명(本名)으로 말하지만, 동년배이거나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 대해서는 자(字)를 사용하여 명(名)과 자(字)를 구분하여 사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도 자(字)를 사용하는데 자기보다 손위 사람을 부를 때에는 자(字)를 사용하고 아래 사람은 본명(本名)을 사용했습니다.
자(字)를 지을 때에는 본인의 기호나 윗사람이 본인의 덕(德)을 고려하려 짓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장유(長幼)의 차례에 따라 정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자(字)를 부르고 사용함은 곧 성인(成人)이 되어 상호 예(禮)를 갖추고 품격(品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 ④ 호(號)
호(號)는 본명인 명(名)과 자(字) 이외에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또 다른 이름으로 아호(雅號), 당호(堂號), 필명(筆名), 별호(別號) 등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택호(宅號)와 시호(諡號) 예명(藝名) 또는 법명(法名)도 넓은 의미로 호(號)라 할 수 있습니다.
아호(雅號)는 문인(文人)이나 예술가(藝術家) 등의 분들이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畵) 등의 작품에 본명 이외에 우아한 이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이를 글 쓴 사람의 이름이라 하여 필명(筆名)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호(堂號)란 원래는 당우(堂宇)인 본채와 별채에 따로 붙인 이름이었는데 이것이 그 집의 주인을 나타내는 이름이 되어 당호(堂號)가 그대로 그 사람의 호가 되기도 합니다.
여성은 호를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의 관례입니다. 대신 당호, 또는 택호를 갖지요. 평민의 경우 순천댁, 수원댁 등처럼 친정의 지명을 딴 택호를 갖게 되지만 사대부집안의 여인들은 신사임당, 허난설헌처럼 당호를 갖습니다. 조선의 여인 중 유일하게 호를 지어 쓴 이는 이매창(李梅窓)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명이 향금(香今)이며 계유년에 낳아 아명은 계생(癸生)이며 천향(天香)이란 자를 갖고 있습니다. 황진이와 더불어 명기의 쌍벽을 이루는 이로써 유희경, 허균 등 당대의 호걸들과 교유한 특출한 신분이 여성임에도(?) 당호가 아닌 호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별호(別號)는 본 이름 이외의 이름이라는 뜻으로 보통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용모 또는 특징을 따서 지어 부르는 별명과 같은 호(號)를 말합니다. 그리고 택호(宅號)는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의 가옥 위치를 그 사람의 호(號)로 부르는 것으로 ○○ 대감댁 등으로 불렀으며, 출가한 여인에게는 친정의 지명을 붙여 진주댁, 하동댁, 부산댁, 공주댁 등으로 불렀는데 이를 택호(宅號)라고 합니다.
법명(法名)은 승명(僧名)이라고도 하는데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사람이나 또는 불법을 공부하는 신도에게 의식에 따라 속명(俗名) 대신에 지어준 이름을 법명(法名)이라 합니다. 이 법명에도 이름의 항렬처럼 모시는 스승의 계보에 따라 항렬자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호(諡號)란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王)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말하는데, 착한 행적이나 나쁜 행적에 따라 정하는 시호(諡號)를 달리하였는데 이는 여러 신하의 선악(善惡)을 구별하고 후대에 권장(勸獎)과 징계(懲戒)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시호(諡號)인 충무공(忠武公)이 한 예라 하겠습니다. 살아있을 때의 본명을 휘(諱:부르기를 삼가야할 이름이라는 뜻)라고 하고 죽은 후에 주어진 이름을 시(諡)라고 합니다.
점차 사회의 계층이 확대되고 계층간 또는 상하간 만남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이름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는데 성인(成人)의 본명(本名)은 부모와 스승 등 윗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되자 더욱 호(號)의 사용이 촉진되어 일반화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후세인들도 선인들의 본명(本名)이나 자(字)보다는 호(號)를 더 많이 부르고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명이 짧아진다는 속설에 따라 실명을 기피하는 실명기피풍속(實名忌避風俗)과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선호하는 복명풍속(複名風俗)에 기인해 허물없이 부르는 이름을 짓고자 한 것이 호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5. 우리시대에 호는 무엇인가?
일생 4-5개 이상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이 한 이름으로 평생을 사는 오늘에 비춰본다면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명분에 휩싸인 사치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럿의 이름이 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름도 불리고, 어떤 이는 이름보다 별명이 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주기도 합니다. 또 김부장, 이과장, 박선생님, 강변호사님 등의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시우아빠, 경윤이엄마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불리는 상대에 따라, 직함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어느 블로그를 뒤지다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IMF때 명퇴를 한 이였습니다. 퇴직을 하고 나니 김부장, 이과장 등의 직함을 그대로 부르기도 무엇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호를 하나씩 지어 보기로 했다는.... 그래서 자기의 호가 00이되었는데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 새로운 호를 하나 새롭게 짓게 됐노라고.
1) 호는 누가 불러도 좋습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불러도 실례되는 일이 없습니다. 부르기가 적절찮아 ‘어이!’, ‘야!’, ‘너!’, ‘저-어-’ 등의 모호함이 없습니다.
2) 호는 바로 ‘나’입니다.
아랫사람, 윗사람, 아직 친밀한 밀착이 되지 않아 그 이의 이름 부르기에 적절하지 않을 때 우리는 00이 엄마, 00이 아빠, 00이 할아버지, 00이 처 등으로 부릅니다. 살아있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관계를 대리한 나일뿐입니다. 이렇듯 살아가면서 종종 나를(나의 이름을) 잃어 버리게 되지요. 호는 다른 이를 통하지 않고 나를 드러내는 내 이름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나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개방형’ 이름입니다.
3) 호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더 명확히 해줍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의 본명이 나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에 의해 지어집니다. 그 이름에 따라 내 성품이 닮아가기도 합니다만 보통은 나의 주체성과는 상관없는 것이 우리의 이름이기도 한 것입니다.
4) 호는 자신을 반영합니다.
별명이 그 사람을 어떠한 형태로든 반영하듯이 호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 바램, 의지 등을 반영하는 그릇이 됩니다. 스스로 자호하든 남이 지어주든 주인의 동의를 전제로 사용되는 것이 호이기 때문입니다.
5) 호는 자신을 가꾸게 합니다.
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남에게 나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삶의 방향을,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자신의 삶을 되보고 가꾸게 됩니다.
6) 호는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게 해줍니다.
자신을 가꾸는 이름이기에 그 사람의 ‘격’이 됩니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일지라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이름이 됩니다.
7) 호는 사회적 활동을 왕성하게 해줍니다.
호는 부모를 떠나 한 인간으로 내가 서 있음을 공표하는 이름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받치는 당당한 한 축임을 공표하는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열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싹을 가리키는 부름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본 듯 합니다. 어떤 것의 이룬 결과가 이름이 아니라, 이루고자하는 스스로의 과제가 스스로의 이름이란 얘기입니다.
6. 호를 어떻게 지을까?
호는 나를 가장 나답게 드러내는 주체적인 이름입니다. 따라서 가장 나답게 지으면 됩니다.
특별히 정해져 있는 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꼭 한자를 이용해야 할 이유도 없고 글자수의 제한이 있지도 않습니다. 지어 쓰다 맘이 변하거나 다른 생각이 일면 또 지어 써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경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503개의 호를 지어 썼습니다. 70성상을 산 그 의 일생에 500여 개의 이름을 사용했다 함은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일입니다. 성년이 된 20세 전후부터 호를 지어 썼다 가정할 경우 70세까지 50년간 한 해에 10개 이상의 새 이름을 지어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 워낙에 삶의 태도가 기고만장하고 지적 활동이 왕성한 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가히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김정희 입니다.
김정희의 호 짓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그의 관심 영역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이름이 생겨난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그에게 시서화와 경학, 금석학에 큰 영향을 준 중국의 거유 담계 옹방강과 교유할 땐 ‘담계 옹방강을 아주 보배롭게 생각하는 선비’라는 뜻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담계 옹방강의 또 다른 호인 보소재(寶蘇齋)를 재치 있게 차용한 것인데, 이는 옹방강이 적벽부로 유명한 북송 때의 시인 소식(蘇東坡)의 시에 흠뻑 빠져 보소재(寶蘇齋 : 소동파를 보배롭게 생각하는 선비라는 뜻)라는 호를 사용한 것을 같은 방식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또 보통은 호를 두 자로 짓는 경우가 많겠으나 외자, 석자, 넉자 그 이상의 글자수를 짓는 경우도 흔하긴 합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경우 10자로 된 호(향각자다처로향각노인香閣煮茶處로香閣老人)도 사용했습니다.
워낙에 삶의 태도가 기고만장한 사람이라 각 시시기별 그의 사상편력과 관심의 편린들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해낸 증거들입니다. 또한 당대 최고의 신학문, 신예술의 수용자로서 고루한 겸손쯤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호기와 변덕, 자기에 대한 애착이 오히려 그의 힘의 원천이었음을 숨김없이,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송의 화가 鄭思肖는 송이 망한 후 스스로 호를 "所南", "木穴國人"("木"과 "穴"을 합쳐 쓰면 "宋"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호와 그 사람의 행실이 별개인 경우도 있습니다. 袁世凱는 파직을 당하여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스스로 "洹上漁人"이라고 했으나 그의 뜻은 "東山再起"에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름과 字는 부모나 연장자가 지어 주지만, 호는 본인이 스스로 취하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6-1. 이번에는 호를 짓는 기준이나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고려시대 이규보는 그의 [백운거사록(白雲居士綠)]이란 책에서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기준으로 호를 지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신용호라는 사람은 호를 짓는데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소처이호(所處以號): 생활하고 있거나 인연이 있는 처소를 호로 삼은 것
(예컨대 도곡 김태정 선생은 도곡이란 지명을 호로 삼았지요)
2) 소지이호(所志以號):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을 호로 삼는 것
(예컨대 여초 김응현 선생은 항상 처음과 같은 자세로 공부에 임하겠노라고 여초(如初:처음과 같이)라고 하였지요)
3) 소우이호(所遇以號):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삼은 것
(퇴계 이황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시내를 벗하면서 공부에 전념하겠노라고 퇴계(退溪)라고 하였지요)
4) 소축이호(所蓄以號):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은 것이지요.
이와 비슷하기는 하나 저는 조금 더 세분화 된 기준으로 나눠볼까 합니다.
서로 기준이 중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호 짓는 발상을 돕고자 편의상 분류해본 것입니다. 유래와 같이 적어 봅니다.
1) 인연 깊은 장소나 처소를 호로 삼은 것 - 소처이호(所處以號)
○ 퇴계(退溪) 이황
고향이 안동 하회이다. 河回를 순 우리말로 바꾸면 ‘물돌이 마을’이 된다. 낙동강이 이 마을을 에두르고 지나간다. 집 뒤로 시내가 흘러가는데 이 시내를 일러 퇴계라 했다. 집 앞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집 뒤로 흐른다하여 ‘물러나는 시내’라 해서 퇴계이다. 어렸을 적 노닐던 이 퇴계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경우이다. 자신의 어릴 적 자양분이 되어준 장소에 대한 그리움 등이 녹아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이 속에 비유도 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뒤로 물러나는 것의 겸손함.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던 이황의 겸손의 덕이 호에 반영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표를 쓴 사람이 이황이다. 무려 79번의 사표를 썼으니 겸손도 그만하면 허물이 될 듯도 하다. 평생 야인으로 살고 싶어 동시대의 학자 남명 조식을 한없이 부러워했다는 그다. 임금이 그를 놓아주지 않아 임명과 사퇴를 번복하며 살았다. 그런 만큼 퇴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으리란 짐작을 해본다.
○ 연암(燕巖) 박지원
만년을 제외하고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글로 인하여 정조와 불화를 겪게 된다. 문체로 인한 필화를 겪게 되는 것인데 정조의 대리인 격인 홍국영에 몰려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살 것을 다짐하며 그 지명을 빌려 연암이라 자호했다.
○ 다산(茶山) 정약용
19년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의 뒷산 이름을 호로 삼았다. 19년 유배생활을 통해 그의 학문과 500여권이 넘는 저술이 여유당전서란 이름으로 완성되었다. 여유당(與猶堂)응 그의 당호이다. 다산 외에 삼미, 사암, 태수, 자하도인 등의 호가 있다.
○덕암(德岩) 이선열
나의 고등학교 미술선생님. 학교에서 그의 본명을 아는 이는 동료 선생님들과 미술부 학생들 뿐. 나머지는 모두 덕암 선생님이라 불렀다. 지금은 대한미협 경기지부장이다. 그 분의 고향 뒷산 큰 바위 이름을 따서 자호한 경우다. 어렸을 적 동무들과 총싸움도 하고 헤집고 다니던 뒷산의 큰 바위. 그 위에 벌렁 누워 흘러가는 구름도 보았으리라.
한번은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문제로 ‘한국 근 현대 화가 5인을 아는 대로 쓰시오.’라는 주관식 문제를 출제했다. 학생들 아는 대로 김환기, 이중섭, 나헤석 정도를 써 내려가다가 더 이상 답이 나오지 않자 ‘에이! 누가 알쏘냐? 우기면 되지!’하며 자기 친구 이름, 아버지 이름, 마구 튀어나오는데 그 중 센스 있는 몇몇 학생 답하기를 ‘덕암’하고 버젓이 적어 놨겠다. 그런데 그 중 몇 놈은 보란 듯이 부르던 대로 ‘더감’이라 적어놨겠다! 덕암 선생님에게 불려나가 귀때기 적잖이 뜯겼구나. “어딜 더 가! 어디로 더 가라고!”
○ 토정(土亭) 이지함
마포 근처의 초라한 흙더미 집에서 헐벗은 자들을 구휼하며 지냈다하여 토정을 호로 삼았다.
○ 화담(華潭) 서경덕
화담은 개성의 교외에 있는 연못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여기에 은둔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교지식인들이 호를 지을 때 보편적으로 사용한 방식은 자신의 향리나 승경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젊은 시절 학문을 닦았던 한양의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따서 지은 호. 이단의 학문을 배격하고 자신의 학문을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봉(峰)으로 표현하고 있다.
2) 자신을 한껏 낮춰 비유한 호
○ 쇠귀 신영복
‘쇠귀에 경 읽기’에서 따온 한글 호다. 즉 ‘나는 미련하고 아둔한 자로소이다.’의 속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일까? 이재와 이세, 처세에 밝지 못하지만 자신이 믿는 것 소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갈 줄 아는 소의 숭고함이 진짜 속뜻이 아닐까? 한문으로는 牛耳를 쓴다. 또 간혹 그의 집이 있는 마을인 서울 목동(木洞)의 우리 말인 ‘나ᇚ골’을 쓰기도 한다.
○ 태골(怠骨) 도정일
도정일 교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냥 영문과 교수 또는 문화평론가, 인문학자 등으로 소개하기에는 너무 적절치 않다. 하여튼 그는 머리통이 무척 크다. 머리통이 커서 아는 것도, 든 것도 많다. 머리통이 무거워서인지 나는 그가 머리통을 꼿꼿이 세운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한쪽 팔에 책 뭉치 또는 서류뭉치를 들고 고개를 15도에서 45도 정도 옆으로 기울이고 걷는다. 거기에 죽죽 뻗쳐나간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은 그의 머리통을 더 크게 보이게 만든다. 그러면 그의 호 태골은 머리통이 커서 생긴 것일까? 아니! 그는 호를 내놓고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책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게으른 뼉다구’. 태골怠骨이다.
그의 집은 우이동이다. 북한산을 지척에 두고도 남들 일부러 오르내리는 길. 그는 가본 적이 없다. 에라! 이 게으른 뼉다구야! 怠骨!
엄청 분량의 저술 계획을 잡아놓고도 이런저런 잡문청탁에 휘둘려 그의 이름 석 자 들고 나온 책이 별로 없다. 에라! 이 게으른 뼉다구야! 怠骨!
간만에 잡문이라도 엮어 부추김에 냈다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서문의 내용을 내 맘대로 옭아 썼다. 그에게 실례가 되질 않길 바란다. 나의 대학 때 교수다. 한번도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다.
○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
영남사림의 거두로 사화에 휘말려 부관참시까지 당한 성리학의 달통문인.
점(占)은 본다는 뜻이며 필(畢)은 간략하다는 뜻이다. 본 것이 적어 견식이 얕은 까닭으로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학문을 겸손히 표현함.
○ 櫟翁(역옹) 李濟賢
자신은 나라의 큰일을 할 사람이 못되며 단지 오래나 살고 싶다는 겸손한 소망을 표현. 櫟(상수리나무 역)은 재목감이 못되는 하찮은 나무를 뜻함.
○ 눌재(訥齋) 박상(朴詳)
자신이 아주 못났음을 나타내는 뜻. 졸(못날 졸)이나 눌(어눌할 눌)자를 써서 자신의 재주를 감추고자 했다.
○ 수졸당(守拙堂) 유홍준, 이의잠
우리나라에 수졸당이라는 당호를 가진 건축물이 두 군데 있다. 경주의 양동 수졸당이 그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서울의 학동(논현동) 수졸당이다. 경주의 수졸당은 400년 전의 건축물이고 학동 수졸당은 이제 채 10년이 못된 건축물이다. 경주 양동의 수졸당은 회재 이언적의 4대손인 이의잠이 그의 호를 붙여 지은 집이고 서울 학동의 수졸당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이자 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 교수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이로재 승효상의 손을 빌려 지은 집이다. 수졸당이라는 이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경구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재주는 별 볼일 없다.’에서 따온 것이다. ‘별 볼일 없는 남루한 집’ 정도로 이해해도 될 듯. ‘욕심 없이 큰 재주를 부리지 않은’.
○ 백범(白凡) 김구
백범 선생의 처음 호는 연하(蓮下)였는데 1912년 37세 때 서대문 형무소에서 백범(白凡)으로 고쳤다.
백은 백정(白丁)에서 따온 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범(凡)은 범부(凡夫). 즉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교육사업에 열중하던 중 한 번은 인근 아낙네들에게 이르기를 “아주머니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白丁이 아니겠오? 무, 배추를 짤라 먹으니 무백정이요, 닭을 잡아먹으니 닭백정이요, 소돼지를 잡아먹으니 역시 소백정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런 신분계급을 따질 시대는 지났습니다. 누구나 다 하늘아래 똑같은 이 나라 백성으로 계급을 얘기할 것이 아니다”고 타일렀던 것이다.
3) 분기탱천형 호
○사암(俟庵) 정약용
정약용의 20세 전후로 사용한 호.
정약용을 얘기하는데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정약용의 최대 후원자는 바로 정조다. 뒤주에 갇혀 8일 동안 울부짖으며 죽어간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며 왕위에 등극한 정조.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도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가 내정된 세손의 신분이었지만 18차례의 자객침입을 당했을 정도였다. 잠을 청할 수도, 잠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 정조의 세손 시절이었던 것이다. 매일 잠자리 처소를 비밀리에 옮겨야 했던 정조는 밤 동안 무섭게 공부를 했다. 왕의 신분이었지만 정조는 그 시대 최고의 학자였다. 사후에 정조의 호인 홍재를 붙여 엮은 그의 저서집 [弘齋全書 184권 100책)을 포함해 그의 총 저서가 5천권에 이른다 하니 세계 어느 나라의 왕이 이만할까? 학자군주인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를 자처했다. 군주이자 신하와 만백성의 스승으로서의 君師. 규장각을 설치하고 젊은 인재들을 길렀다. 신하들과 무릎을 맞댄 자리에서 스스로 강학하고 시험을 치렀다. 이 강학과 시험에서 늘 우등을 차지한 이가 바로 약관의 정약용이다. 스무살 남짓한 나이에 임금의 머리쓰다듬음을 받는 다는 것은 그를 매우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 사암은 그가 23세때 정조의 중용강의 80여조의 질문에 답술하여 1등평정을 받은 뒤 젊은 혈기에 득의만면하여 지었다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1표2서를 완성한 50대 이후에 지은 호라는 이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중요에 나오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왔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즉 ‘훗날성인이 나오더라도 내 학설을 바꾸지 못하니 의심할 바 없다.’는 뜻이니 기고만장 분기탱천도 이만하면 국보 양주동, 우주보 김용옥에 비견할만하다.
○도올 김용옥
도올은 무슨 뜻일까? 도올은 맹자에 나오는 역사 책 이름이다. 노나라에는 춘추가 있듯이 초나라 역사책에는 도올이 있었다. 도올은 다듬어지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통나무를 뜻한다. 또 전설 속에서는 사나운 맹수 이름으로도 쓰이고 옛날 황제의 고집 불통 아들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용옥은 어려서부터 「돌대가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도올=돌」의 음을 취하여 호를 삼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엣날에 도올 김용옥의 책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의 이름이 ‘통나무출판사’였다.
學人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력하는 돌머리 天才’ 도올 김용옥.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 구가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에듀테이너(Edutainer). 중고교 시절 술, 담배, 여자, 당구 등에 빠져 지낸 그가 마지막 빠진 곳은 바로 학문이었다는. 氣철학 원리 완성해 인류의 보편적 자산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인생의 설계를 가진 이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학술분야 베스트셀러 작가. 그의 끊임없는 호기심은 어린애 같은 순수함이 아닐까? 도올!
*국보 양주동 VS 우주보 김용옥
한평생 자기가 "인간 국보 1호" "걸어다니는 국보" 라고 자칭하며 살았던 학자가 한 명 있다. 바로 국어학자 양주동(梁柱東)선생이다.
양주동 선생은 다 알다시피 향가연구에 가장 뛰어났던 권위자다. 중고등학교에 실려 있는 향가 <제망매가><찬기파랑가><안민가> 같은 작품들은 아마 양주동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양주동 선생 이전에는 향가를 표시하는 향찰과 이두의 뜻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양주동 선생에 대한 몇 가지 일화.
재기와 천재성, 박람강기(博覽强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애 양주동(无涯 梁柱東·1903∼1977) 선생은 생시에 인간국보를 자처했다. 선생의 자화자찬에 대해서는 물론 찬반논란이 있지만 그가 남긴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와 ‘여요전주(麗謠箋注)'에 대해서는 누구나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한다.
양주동 선생은 택시운전사에게 “국보가 탑승했으니 각별히 운전을 조심하라”고 했고, 노상방뇨를 단속하는 경찰관에게는 “국보를 몰라보느냐”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국보가 보아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신문도 무료구독을 고집할 정도였으니 참 재미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선생이 자신을 처음으로 국보라고 말할 때는 한국전쟁 때다.
1.4후퇴 당시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6.25 때 피난을 못한 바람에 수복 후 부역자(附逆者)딱지가 붙어 곤욕을 치렀던 양주동(梁柱東)선생은 피난을 서둘렀다. 열차 편을 알아보기 위해 신문사에 들렀다가 복도에서 서성대고 있던 같은 처지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孫基禎)과 동양화가 이용우 (李用雨) 를 만났다. 양주동은 "우리나라 국보들이 다 모였군. 국보를 이렇게 푸대접해서야 쓰나"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 후 양주동은 자칭 '국보' 로 행세했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崇實)전문학교 영문학교수로 부임했다. 이 때부터 양주동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양주동은 돌연 국문학자로 변신했다.
1937년 학술지 '청구학총(靑丘學叢)' 에 논문 '향가(鄕歌)의 해독(解讀)'을 발표하면서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에 도전했다. 경성(京城)대학 교수 오구라는 29년 발표한 '향가 및 이두(吏讀)연구'를 통해 신라 향가를 최초로 해독한 조선어연구의 권위 있는 학자였다.
양주동이 향가연구에 뜻을 둔 것은 1935년 무렵이다. 평소 향가가 일본인에 의해 비로소 해독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다가 스스로 향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주동의 향가연구는 정확성과 문학적 감성에서 오구라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1942년 단행본으로 발간된 '조선고가(古歌)연구' 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으로부터 "1백년 뒤 남을 한권의 책" 이란 극찬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향가연구의 정본(定本)으로서 위치를 유지해왔다.
게다가 양주동은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술과 재치가 철철 넘치는 입담으로 유명했다. "내 이름이 양주동이니 양주(洋酒)동이, 입이 걸쭉해서 양(兩)주둥이오"라며 희희낙락했다.
돈에 대해선 지독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주례를 부탁받으면 주례 값을 흥정하고, 원고청탁이나 방송국 출연요청이 오면 으레 선금을 요구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신문은 국보가 읽어주는 것만도 영광이라며 언제나 무료구독이었고, 집에 도둑맞을 물건이 없다는 이유로 방범비조차 내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 어느 날 양주동 선생이 도로를 무단 횡단하고 있었다. 달리던 택시가 급정지를 했다. "끼-익, 끼기끼기 끼-익"하는 소리와 동시에 택시 안에서 기사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양주동선생이 "어허, 이 사람아, 큰일 날 뻔했잖은가! 조심하지 않고 국보 1호 다칠 뻔 했네, 다음부터 조심하게!" 라고 말하며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또 이런 얘기도 있다.
어느 날 선생이 술을 거나하게 걸치고 비틀비틀 거리를 걷다가 그만 시궁창에 빠졌다. 그러자 선생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시궁창에 국보가 빠졌다"라면서 소리치자 길 가던 행인들이 놀라 시궁창으로 모여 들었다. 하지만, 국보라는 물건이 있을 리가 없으니 행인들은 양주동 선생보고 국보가 어딨냐고 물었다. 이에 선생 왈 "내가 바로 국보일세, 걸어 다니는 국보, 양주동!!"
선생의 연애편지사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시인으로서의 문재도 뛰어났던 선생은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 서울에서 짝사랑했던 여대생을 잊지 못해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구구절절한 미문의 연애편지는 흠모하는 여대생의 손에 닿기도 전 사감의 검열로 번번이 차단되곤 했다. 미션 스쿨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선생은 성경 가운데서 "사랑"과 관련된 대목들을 뽑아 연서를 보냈고, 정성에 감복한 여학생으로부터 마침내 승낙을 얻어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희대(稀代)의 천재이자 기인(奇人), 그리고 괴짜 양주동 선생, 그의 호가 국보는 아니다. ‘무애’다. 역시 우주보를 자처한 김용옥 또한 그의 호가 우주보는 아니다. ‘도올’이다. 스스로 최고라는 자부심이 그들을 키웠고 호언에 마땅한 능력을 스스로 갖췄다. 그것만으로도 국보이며 우주보이다.
여기에 내가 아는 이 한명을 덧붙이자면 젊은 민속학자 주강현을 꼽을 수 있다. 이 셋을 삼보(三寶)로 삼으면 되겠다.
4) 은자, 빈자의 호
화쟁에 자의, 타의 몸담았다가 환멸을 느끼고 몸과 마음을 숨긴 이들이 선택한 호다.
○ 조은(釣隱) 최치운 :
태조, 세종 때의 청백리로 어려운 정치현실에서 몸을 숨기고자하는 뜻과 함께 신유학(주자학) 추종자들의 학문적 지향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낚시(釣)는 은자의 최대 소일거리였다.
○ 망천(忘川) 이고(李皐)
여말 이성계의 창국에 반대하여 수원의 팔달산으로 은둔한 학자로 忘川은 수원천에서 낚시를 하며 망국의 시름을 잊겠다는 뜻으로 쓰임. 수원천의 옛 이름이 망천으로 불렸음. 한편 팔달산의 팔달도, 권선동의 권선도, 인계동의 인계도 이고 선생과 관련한 지명이다.
○ 무위자(無爲子) 강희맹(姜希孟)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 즉 자연의 상태대로 맡겨놓고 아무런 인공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는다는 뜻.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매화와 달을 벗 삼아 현실에서 초연하여 은둔하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거처하는 서재의 이름으로 지은 당호. 어려서부터 시문에 재주가 뛰어나 五歲神童으로 불려 金五歲가 별명이 되었으나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분개하여 오세의 음을 빌려 汚世(더러운 세상!)로 호를 짓고 승려가 되어 산수를 방황하며 일생을 마침. 설악산에 그가 거쳐하던 오세암(五洗菴)이 있다.
한편 김시습의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라! 그 이름 참 명쾌하다!
○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세속의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걱정 없이 한가로이 지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호. 세조의 왕위 찬탈 후 벼슬을 물러나 고향 태인에서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 賞春曲 불우헌곡, 불우헌가 등 시가문학사상 중요 자료가 그의 작품들이다.
○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시인이 강가에 살며 낚시와 술과 시작으로 소일하며 지내겠다는 뜻의 호. 가을 강은 고독과 은둔의 이미지를 표현할 때 많이 쓰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
5) 존경하는 인물을 기려 짓는 호
○ 청련거사 이후백
명종대의 이조판서. 이백(이태백)의 뒤를 잇는다하여 이름도 이후백. 호도 이백의 호인 청련거사의 ‘청련’을 그대로 썼다
○ 보담재(寶覃齋) 김정희, 보소재(寶蘇齋) 옹방강
위에서 언급
○ 사임당(사임당) 신씨-신인선
흔히 신사임당이라 불리는 이 율곡의 어머니 신씨. 본명은 인선이다. 신사임당이 스스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당호)을 지은 것이다.
師任에서 師는 스승 '사'자로 ‘흠모하여 존경하다’란 뜻을 갖는다. 사임의 任은 옛날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뜻한다.
신사임당이 태임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태임을 스승으로 본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師任이라고 지은 것이다. 특히 태임의 태교를 본받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오직 덕(德)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문왕을 임신해서는 눈으로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淫亂)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입으로는 오만(傲慢)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을 낳으니 총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더니, 마침내 주(周)나라의 으뜸 임금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태임의 태교와 교육을 본받고 싶어서 당호를 사임이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堂은 본채나 별채 등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 건물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임당은 사람의 호가 아니라 집안 건물의 이름이다.
6) 즐겨하는 취미와 일, 그리고 완물을 이용한 호
○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
늙은 시조가인들이 모여 시와 시조를 읊는 서재라는 뜻. 자신의 화개동(삼청동) 집에서 가객들과 교류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지으며 살았다. 아전 출신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 시조작가.
○ 삼혹호(三酷好) 이규보(李奎報)
세 가지를 지독히 좋아한다는 뜻. 시와 술과 거문고를 지독히 좋아하여 스스로 지은 호.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區陽修)
장서 일만 권, 금석문 일천 권, 거문고 한 개, 바둑판 한 개, 술 한 병,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늙은 자신을 가리켜 육일이라 했다.
○ 주선옹(酒仙邕) 이백(李白)
이태백이다. 태백은 그의 字다. 술을 즐겨 주선옹이라 자호했다. 詩仙이자 酒仙을 자처한 셈. 행동거지가 초연하여 이 세상으로 귀양 온 신선이라 불렸다. 靑蓮居士는 그의 또 다른 호다. 맑은 물에 씻기운 연꽃이란 뜻으로 군자가 좋아하는 꽃의 상징이다.
○ 취묵헌(醉墨軒) 인영선
먹 향기에 취하는 방. 서예가 인영선의 호다.
○ 석치(石痴) 정철조
조선후기의 벼슬아치다. 벼루에 미친 사람이다.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아 나눠줬다. 무엇엔가 미친 사람을 일러 벽(癖) 또는 치(癡)라고 한다. 돌에 미친 사람 석치!
○ 석당(石堂) 이유신(李維新)
신위(申緯)라는 이가 있다. 괴석에 미쳐 괴석 모으길 좋아하는데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며 수레에 괴석만 잔뜩 실어왔다고 한다. 동행한 화가를 시켜 그 그림을 그리게 하며.
이유신이란 화가가 있다. 그 또한 돌에 미친 사람이다. 어느 해 정초에 돌을 좋아하는 신위에게 세배하러 갔다가 그만 돌에 마음을 빼앗겨 세배하는 것도 잊고 돌만 어루만지고 있더란다. 신위가 그 돌을 선물로 내주자 역시 세배하는 일도 잊고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횡하니 내빼더란다. 그의 호가 석당(石堂)이다.
○ 억만재(億萬齋) 김득신(金得臣)
자못 엽기적인 노력가다. 절대로 IQ가 두 자릿수를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위인이다. 그의 아버지가 태몽으로 노자를 보았다하여 노자의 이름인 담(耼)을 따서 ‘몽담(夢耼)’이란 아명을 주었다. 신통한 꿈을 꾸고 낳은 아이라 한 문장 하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머리가 지독히 나빴다. 10살에 이르러 글공부를 겨우 시작했는데 스무 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편을 지어 아버지께 올렸다고 한다. 머리가 나쁜 대신 지독한 노력을 하였는데 그 아버지는 “저 아이가 저리도 미욱하나 포기하지 않으니 대기만성 할 걸세”하며 그의 아들을 두둔했다고 한다.
그의 독수기(讀數記)가 전해지고 있다. 독수기란 책을 읽은 수를 기록한 문서다. 백이전이란 책은 1억1만3천 번. 모두 36종의 책을 1만 번 이상 읽었다. 1만 번 이하로 읽은 책은 아예 여기에 적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횟수를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김득신의 미련이 아니고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의 엽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1억 번 이상 읽었다는 책. 때는 단옷날이라 그와 관련한 좋은 시제를 하나 얻었는데 그 댓구가 영 떠올려지지 않아 끙끙거리자 그의 말고삐 시종이 왜 그런지를 물었다. 이유를 말하자 그의 말 시종이 대뜸 그 다음 시제를 읊더란다. 그러면서 말하길 “마님이 노상 읽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하도 읽어 주어들은 종도 다 외울 지경인 글을 그는 또 잊고 만 것이다. 이에 김득신은 말에서 내려 “네가 내 재주보다 나으니 내가 네 말구종을 들겠다”며 하인을 말안장에 앉혔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자신의 호를 억만재(億萬齋)로 삼았다. 억 만 번을 읽고, 읽고 또 읽고.
6) 이름으로 세상을 조롱하다.
○ 필재(疋齋) 이단전(李亶佃)
천한 신분의 조선 후기 시인이다. 그의 이름 亶佃은 ‘진실로 단’에 ‘밭갈 전’자로 소작인 또는 종놈을 뜻한다. 이를테면 ‘진실로 종놈’인 셈이다. 여기에 스스로 붙인 그의 호가 또 걸작이다. 필재(疋齋)! ‘필(疋)’자를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진짜 종놈에 불과하다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운 것이다. 천한 신분에 시인이라면 필시 筆才임에 틀림없겠으나 疋齋라!
○ 송산(松山) 조견(趙狷)
여말선초.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도와 일등공신이 된 조준(趙浚)이 있다. 그러나 그의 아우 조견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어찌 두 왕조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해서 개성을 버리고 수원의 인근 청계산에 은둔했다. 원래 이름이 윤(胤)을 버리고 아예 견(狷)으로 고쳤다. 견(狷)은 지조와 절의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리그 그의 자(字) 또한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옛 주인을 잊지 못하는 것이 개와 같고, 나라를 잃고도 죽지 못하는 것이 개와 같다’는 얘기다.
○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원 장승업. 세속의 일은 안전에도 없이 예술 혼을 불사른 조선의 3대가 또는 4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19세기의 화가. 금전도, 권력도, 가정도 심지어 임금의 명도 거부한 채 살아가는 호기방탕한 사나이.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등 가장 뛰어난 화가에게 붙여 준 원(園)에 빗대어 “나도(吾) 원(園)이다!”라고 자호 했다.
○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나와 시詩와 담배는 이음異音 동곡同曲의 삼위일체三位一體. 나와 내 시혼詩魂은 곤곤滾滾히 샘솟는 연기. 끝없는 곡선曲線의 선율旋律을 타고 영원永遠히 푸른 하늘 품속으로 각각刻刻 물들어 스며든다....
담배와 함께 평생을 살다간 6.25를 전후한 시인 공초 오상순. 잠에서 깨어 담배를 피워 물면 다시 잠 잘 때까지 담뱃불을 꺼뜨리지 않았다던 그다. 세수할 때도, 밥 먹을 때도. 그래서 그의 별명은 ‘꼴초’다. 허나 어쩌랴! 그 전쟁 통에 시가 밥이 되었으랴! 담배 한 갑이 되었으랴! 꼴초인 그는 늘 남이 피우다 버린 꽁초나 탐내는 위인이었던 것을!
그의 별명을 빌려 공초(空超)라는 호가 만들어졌다. 시가 밥 한 줄이 되지 못하거늘! 늘 남의 꽁초에나 눈독 들이는 처지인들 가진 것을 탐할 소냐? 집 한 채! 시집 한 권!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자유인 空超! 다.
북한산자락 그의 무덤 앞에 재떨이가 있다. 자연석 재떨이. 죽어서도 담배 공양을 받는다. 담배 굴뚝인지 구멍 뚫린 석비도 하나 서 있다.
○ 봉이 김선달
조선 후기의 풍자적인 인물 봉이 김선달 (본명 김인홍. 자호로는 낭사. 평양출신의 재사 김선달이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서북인 차별정책과 낮은 문벌 때문에 뜻을 얻지 못하여 울분하던 중 세상을 휘젓고 다니며 권세 있는 양반, 부유한 상인,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기지로 골탕 먹이는 여러 일화들이 있다.
김선달이 봉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김선달이 하루는 장 구경을 하러 갔다가 닭전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닭장 안에는 유달리 크고 모양이 좋은 닭 한마리가 있어서 주인을 불러 그 닭이 '봉'이 아니냐고 물었다. 김선달이 짐짓 모자라는 체하고 계속 묻자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던 닭장수가 봉이라고 대답하였다. 비싼 값을 주고 그 닭을 산 김선달은 원님에게로 달려가 그것을 봉이라고 바치자, 화가 난 원님이 김선달의 볼기를 쳤다. 김선달이 원님에게 자기는 닭 장수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하자, 닭장수를 대령시키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그 결과 김선달은 닭 장수에게 닭 값과 볼기맞은 값으로 많은 배상을 받았다. 닭 장수에게 닭을 '봉'이라 속여 이득을 보았다 하여 그 뒤 봉이 김선달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유명한 일화로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재밌는 얘기가 있다.
김선달이 대동강가 나루터에서 사대부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물장수를 만났을 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물장수를 데리고 주막에 가서 얼큰하게 한잔을 사면서 내일부터 물을 지고 갈 때마다 내게 한 닢씩 던져주게나 하면서 동전 몇 닢씩을 물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의관을 정제하고 평양성 동문을 지나는 길목에서 의젓하게 앉아서 물장수들이 던져주는 엽전을 헛기침을 하면서 점잖게 받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모든 사람들이 수군대며 살피고 있었다. 이때 엽전을 내지 못한 물장수가 선달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이를 본 한양인들은 대동강물이 선달 것인데 물장수들이 물 값을 내지 못하게 되자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여 내일부터는 밀린 물 값까지 다 지불하여야 한다고 엽전준비에 야단이 났다.
이를 참다 못한 한양상인들은 어수룩한 노인네 하나 다루지 못할 것인가 하면서 장수꾼들이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꼬득여 주막으로 모시게 된다. 술잔이 오가고 물의 흥정이 시작되었다. 선달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것이므로 조상님께 면목이 없어 못 팔겠다고 버티면서 이를 물려줄 자식이 없음을 한탄까지 하였다.
한양상인들은 집요하게 흥정을 했다. 거래금액은 처음에는 1천 냥이었다. 2천 냥, 4천 냥으로 올라가 결국 4천 냥에 낙찰되었다.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의 매매계약서는 다음과 같다.
품 명: 대동강(대동강)
소유자 봉이 김선달
상기한 대동강을 소유자와의 정식 합의하에 금년 5월 16일자를 기해 인수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천하에게 밝히는 바이다.
인수자- 한양 허풍선
인수금액-일금 4천 냥
인도자 김선달
선달은 못내 도장 찍기를 서운한 듯 도장 찍기를 주저한다. 그러자 상인들은 졸라대기 시작하여 결국 계약이 체결된다.
재산은 모으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풍류와 시를 좋아하고 어려운 서민을 보면 양반들을 골탕 먹이고 뺏은 돈을 서민에게 다고 한다.
7) 한글로 지어진 호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의 '한흰샘', 이병기 선생의 '가람', 최현배 선생의 '외솔' 등은 널리 알려진 한글 호다. 서예가 가운데도 '꽃뜰 이미경 선생, 갈물 이철경 선생께서 한글호를 사용한다.
앞서 설명한 쇠귀 신영복 선생도 마찬가지.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신의 호를 짓게 된 경위를 그의 일기장에서 술회한 바가 있다. 그의 일기장에는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물이 된다.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니 근원도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다. ...중략...우리말로는 가람이라하고 한자로는 임당(任堂)이라 하겠다"라고 호를 지은 연유를 밝히고 있다.
또 문익환 선생님은 ‘늦봄’을 사용한다. 고희에도 만년 청춘이었던 그다.
이외에도 오리 전택부(전 YMCA 명예회장), 한솔 이효상(전 국회의장), 눈뫼 허웅(한글학회 이사장), 한결 김윤경, 한벗 김계곤, 구름재 박병순, 높세율 남영신 (이상 한글학자), 얄라 이봉원(영화감독), 늘봄 전영택(소설가) 등이 있다.
한글호를 짓는 또 하나의 경향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고한어(古韓語)를 살려 호로 사용하는 예가 그렇습니다. 주로 한배달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인데 봄수레 노재춘, 사라아리 권희영, 해머슴, 아라가비, 수바마니, 나난도리, 다라사니, 마루달, 나랑아루, 무파랑 등이 그 예다.
호를 지으매 같은 자수로 한글도 되고 한자도 되면 더욱 좋겠다. 쇠집 鐵齋, 쇠귀 耳牛, 늦봄 晩春, 눈뫼 雪山 등.
8) 그룹 짓기 호
흔히 스님들의 법명을 지을 때 사승관계에 따라 돌림자를 넣거나 한 동아리에서 인연이 있는 한 글자와 각자의 특징에서 찾은 한 글자를 따서 짓는 경우다.
정조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미스테리를 엮은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보면 죽란사(竹欄舍)란 비밀조직의 동아리들이 주자를 붙여 호 하나씩을 지어갖는 장면이 나온다. ‘얼굴이 검은 이유수는 오죽(烏竹), 담배를 많이 피워 공방대 장죽을 물고 사는 윤지눌은 장죽(長竹), 홍시제는 청승맞게 생겼다고 상제 지팡이를 뜻하는 상장죽(喪杖竹), 깡마르고 키가 큰 유치명은 수죽(脩竹)....’하는 식이다.
9) 선조의 대를 이은 호
호의 대종을 이루는 것 중 자신이 사는 곳이나 마을 · 산이름 · 강이름 등에서 한 글자를 따서 거기에 동 · 서 · 남 · 북 방향을 가리키는 글자를 넣거나 은거한다는 뜻으로 '은○' 자를 붙인 것이 많다. 자기를 겸손하게 표시하여 한낱 나무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초○' 자를 넣어 자호하기도 하였고, 선향의 땅이름을 담은 글자에 ○암 · ○당 · ○재 · ○헌· ○와 등의 글자를 붙여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조의 호에서 한 글자를 따고 그 후손이라는 뜻으로 '후○' 자를 앞에 붙이든가, '운○' 자를 뒤에 붙여 짓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어느 부분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경우 그 후손이 선조의 호를 그대로 쓰고 ‘○○二代’ 식으로 대를 잇는다는 뜻을 표하기도 한다.
○ 철재(鐵齋) 오옥진 그리고 철재이대(鐵齋二代) 오윤영.
서각의 원류인 각자(刻字)에서 독보적 위치를 갖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기능보유자 오옥진의 호는 쇠집 철재(鐵齋)다. 4대를 이어온 목수집안의 손이다. 각자에서 일가를 이룬 그를 이어 장남 윤영의 호는 鐵齋二代다. 철재를 통해 사사받은 이들을 鐵齋刻緣이라 한다.
○ 이향(里香), 호호득(呼好得) 민학기
명성왕후 민비의 조카로 19세에 조선조 최연소 이조정랑이 된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이향 민학기에게는 증조부 뻘이 된다.
선비화가로 자는 자상(子湘),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또는 천심죽재주인(千尋竹齋主人)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미국전권대신,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냈다. 개화기 외교업무를 통괄하는 자리에 있은 이유로 한국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일물로 기록되고 있다. 1905년 러일 전쟁 후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홍콩, 상해로 망명하여 오창석(吳昌碩)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묵란(墨蘭), 묵죽(墨竹)을 특히 잘 그려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과 쌍벽을 이뤘다. 상해 망명 시 칠리향장(七里香蔣)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칠리향이란 ‘한눈에도 다 뵈는 아주 작은 마을에 맑은 향기를 전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향은 선대의 당호에 장난기를 더해 지은 호다. ‘우리 할아버지가 7리를 풍기니 난 그 두 배 쯤 풍겨보지. 뭐! 십사리(十四里)는 그렇고 시오리향(十五里香) 정도!’ 그래서 사용한 것이 ‘시오리향’이고 그 중 두 자를 취해 ‘里香’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다. 내 머무는 자리에서 한 시오리쯤 풍기는 맑은 향이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지었습니다. 주변에서 향기는 무슨? 발구린 내에 입구린내만 풍기고 다닌다는 조롱도 참아내며 사용하고 있지요. 담배도 하루 두 갑 정도 피워대는 왕골초니 그런갑다 이해하기를 빌며.
또 다른 호로는 호호득(呼好得)을 사용하고 있다. 전각을 새길 때 칼로 새겨낸 돌가루를 입으로 호호 불며 새기는데 이때 입부는 소리인 호호(呼呼)와 칼로 돌 새기는 소리인 득득 소리를 합치면 ‘호호득득’이 되는데 이 소릿말을 약간 바꿔 ‘득득[得] 새겨 호호 불면[呼] 좋은 한 세상을[好得 : 篆刻 一顆] 얻는다[득]’란 뜻으로 전각의 일과를 얻는 과정을 호로 표현 했다.
10) 특이한 호
○ 상백(想白) 이상백(李相佰)
국호도 없었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를 가능케 만든 체육인 이상백(李相佰). 그의 호는 상백(想白)이다. 그의 4형제 모두가 독출한 지사들인데 그의 맏형은 이상정 장군이며 둘째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항일 시인 이상화다. 농구를 올림픽 종목에 올려놓았으며 국제심판 1호도 그의 몫이다. 체육인 뿐 아니라 그는 사학자이기도 하다. 진단학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서울대사회학과를 만든 장본인이기 하고 몽양 여운형과 건준과 근로인민당 등의 활동을 했다. 체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한 선각자다.
그의 형 이상화(李相和)의 호도 음이 같은 상화(尙火)다.
○ 이호우(爾豪愚) 이호우(李鎬雨)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도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이호우의 당호는 청우헌(聽雨軒)이다. 빗소리 들리는 집. 가람 이병기의 [청우헌에서 빗소리 듣다]라는 시조가 있다.
10) 호기(號記)를 적는다.
옛사람들은 자신이 호를 지으면 호를 짓게 된 변(辨)이나 기(記)를 짓기도 하고, 남에게 호를 지어 줄때도 그 글자의 출전이나 뜻을 밝힌 글을 주기도 하였지요. 이런 종류의 글을 호변(號辨) 혹은 호기(號記)라고 합니다. 다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김지하의 호기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참고로 옮겨본다.
○ 노겸(勞謙) 김영일( 일명 김지하)-그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다.
5. 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스물두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詩畵展)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筆名)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길을 갈지 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해서 김지하의 지하 시대(地下時代)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내내 정보부 지하실과 경찰서, 유치장, 감옥, 지하 술집, 뒷골목과 허름한 싸구려 여관,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하거나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일쑤인 스산하고 을씨년스런 지하시대 삼십여 년이 펼쳐진다.
작명가(作名家) 김봉수 왈, “이것도 이름이야? 감옥에 서너 번은 족히 가겠구먼!” 그랬다.
심지어 한창 지하시대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한 특파원이 내게 처음 악수하며 던진 말이,
“헬로! 미스터 언더그라운드 킴!” 이었으니까 뒷말은 할 필요가 없다.
‘언더그라운드’라면 혁명가를 뜻하는데, 모자라게도 그걸 은근히 즐길 때까지 있었으니 고생해도 싸다고 하겠다. 이름을 고치라고 충고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고집도 부렸지만 또 고쳐서 신문에 발표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것이 그것,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그대로 ‘지하’였다. 왜일까? 때가 차지 않아서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과시 나의 필명 지하의 유행과 삶에서의 지하시대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은 ‘위(位)’요 ‘궁(宮)’이라 ‘중(中)’ 즉 ‘마음’이 놓이는 ‘자리’를 말함이다. 일종의 ‘닻’의 뜻이다. 큰 바람이 불기 전에 벌레들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 때문이니 내게 큰 변화가 올 것이 틀림없다.
연초에 역(易)에 물으니 왈,
‘견군용(見群龍)’이라 했다.
천지가 요동하는 대개벽이다. 짐작대로다.
처신을 물으니 왈,
‘무수길(無首吉)’이라 했다.
‘목이 없으면 길하다’는 뜻이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목을 숙이지 않으면 가차없이 잘려나간다는 뜻이니 그러매 크게 깊이 겸손해야 겨우겨우 길하다는 말로도 된다. 그만큼 내게 다가올 변화는 심각하고 그에 대한 대응은 어렵다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연초 한낮 내 방에 그냥 홀로 무료하게 앉아 있을 때다. 문득 ‘노겸(勞謙)’이란 두 글자가 뇌리에 떠올라와 그 의미가 깊이 각인된다. ‘근로’와 ‘겸손’이니 언뜻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앞으로 내 호(號)로 삼기로 작정하였다.
‘열심히 일하는 겸손’이요 ‘활동하는 무(無)’요 ‘아상(我相) 없는 노동자’, ‘노예 노동자’의 옛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게을렀으면 ‘근로’가 나오고 또 얼마나 오만방자했으면 ‘겸손’이 나오랴 싶었으니 앞날이 더욱 걱정되었다. ‘근로’와 ‘겸손’ 아니면 갈가리 찢겨나가 살 수조차 없는 운명이라는 내 맏아들 놈의 연초 카드점괘가 이미 나와 있었으니까.
물론 나도 안다. 『주역(周易)』의 겸괘(謙卦)는 노겸군자(勞謙君子)가 곧 타고난 천자(天子)이면서도 남의 밑에서 고개 숙여 근신하며 온갖 선행을 다 베푸는 그 아름다운 법(法)으로 결국 하늘을 차지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뜻에는 일말의 흥미도 없다. 나 같은 뼛속까지의 쌍놈, 민중에게는 도무지 안 맞는 뜻풀이기 때문이다. 그저 윤리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근로’와 ‘겸손’일 뿐이니 내게 지금 결핍되어 있고 앞으로 그렇게 일관하여 고개 숙이고 살다 가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할 것이 빈번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굳세게 견지할 따름이고, 미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곧 ‘활동하는 무(無)’의 뜻이리라! 언어작업에서 훨씬 더 여백(餘白)과 틈과 침묵을 살리고 설명을 없애며 말을 줄이는 대담한 소통성(疏通性)으로 ‘흰 그늘’과 ‘한’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삶의 내면에서 무궁무궁 저절로 살아 생성하게 하는 그런 텅 빈 창조력의 언어구조를 갖추고 닦으라는 가르침으로 일단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이제 작년 개천절에 공언(公言)한 대로,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 꽃 한 송이 ‘영일(英一)’로 돌아가고자 한다. 내 인생과 민족 역사에 작고 소담하고 예쁜 삶의 꽃 한 송이만 피우고 가겠다는 조촐한 서원과 함께…….
그렇게 하여 결정된 것이 바로,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이다.
그런데 여러 친구들이 말한다. 영일은 너무 애 이름 같으니, 그냥 한글로 ‘김노겸’이라 부르면 어떠냐는 것이다. 그 편이 무던하고 친밀감이 있어 좋다는 것이니 원컨대 부디 앞으로는 이 이름을 즐겨 불러주길 바란다.
○ 공재(空齋) 진영근의 호기(號記)
다음은 전각가 ‘아주 특별한 선물 심인당 도장가게’의 주인 진영근이 ‘내 별명에 대한 사족’이란 이름으로 간략히 적은 호기다.
아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이 텅 빈 놈이라는 뜻으로‘空齋’라 ‘빈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木口’, 부평초 같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되돌아 본다는‘顧萍軒’, 향기롭고 거창스런 理想은 엄두도 못낸다고 ‘察地人’, 허허로이 길을 걸어 간다는 ‘空步’, 수리산을 소요하면서 ‘수리산지기’, 마음을 새기고 마음에 새긴다는 ‘心印房’, 月·木房을 주재하면서 ‘月木舍主’, 분분한 세상사 능히 볼 수 있으나 굳이 말하지 않으리라 ‘수리산 벙어리’, 虛名을 쫓다가 문득 깨달은 빛 좋은 ‘개살구’, 천둥에 개 뛰듯 살아온 부질없는 人生流轉을 되돌릴 수 없음을 지각하였는 바 이제부터는 ‘달팽이 걸음’, 사과나무도 시궁창도 다 보고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