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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덮어 주며
정경미
새우잠을 자는 남편을 똑바로 눕히고 베개를 받혀주었다. 이내 벽 쪽으로 또 돌아눕는다. 천장을 바라보며 편히 누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평생 몸에 밴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다섯 식구가 함께 지냈던 단칸방에서는 모로 누워야만 잘 수 있었다고 남편이 얘기한 적이 있다. 팔다리를 벌리고 누워도 남을 만큼 공간이 넓어졌어도 여전히 모로 눕는 남편. 구부정한 어깨가 유난히 좁아 보인다. 그 어깨에서 삶의 무게가 느껴져서일까.
병환 중이신 부모님과 아직 끝나지 않은 아들딸의 학업, 인생의 못다 한 숙제는 여전한데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찌 내 남편만의 시름이겠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들의 가슴과 어깨는 그와 비슷한 무게에 눌려 휘어져 있을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두어 해 전 승진했다고 좋아했지만 올해부터 재임용을 받지 못해 막막하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하고, 명예퇴직을 권고 받았으나 몇 년 더 근무하는 대신 급여를 줄였다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들 나름의 고뇌가 있으니, 삶이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무게를 견디는 과정이 아닐까.
남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모로 누우면 입가와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다고 소곤거렸더니 바로 눕는다. 조금 더 자라고 이불을 덮어 주고는 살그머니 방을 나왔다.
간간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들의 코 푸는 소리에 마음이 쓰인다. 비염이 심해진 건 아닌지…. 행여 깰세라 살며시 들어가 보았다.
두상이 예뻐진다기에 엎어 키웠더니 청년이 되어도 엎드려 잘 때가 있다. 갸름하니 얼굴 모양은 예쁠지 모르나 가슴이 답답해 보인다. 바로 누워 자라고 말하며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뾰족뾰족 올라오는 수염도, 피부에서 느껴지는 촉감도 까칠하다. 얼굴에 윤기가 흐르도록 거둬 먹여야지 싶어, 아들이 좋아하는 게 뭐가 있는지 떠올리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꿈은 크고 세상은 넓다지만 기회는 그렇지 않다며 사회의 부조리를 힘주어 말하는 아들. 기성세대가 앞세우는 관행이며 전통이라는 명분이 젊은이들에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얼마나 거대한 벽인지 강조한다. 어느 시대건 세대 간의 갈등은 있기 마련이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과 사회 모두 발전해 가겠지만, 청년세대의 고충을 들을 때면 가슴 한편이 묵직하다. 세상은 달라졌는데,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가치관과 방식을 강요하면서 그들을 더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찾아가는 아들에게 이제는 해줄 것이 없다. 고단해 할 때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주고 뒤에서 그저 기도하는 것밖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더 자라고 귀엣말하며 가만가만 방문을 닫았다.
자명종이 울릴 시간이 지났는데 딸의 방에서는 기척이 없다. 버튼을 눌러놓고 계속 자는 건 아닐까.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발 디딜 틈이 없다. 뽀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자는 모습이 편안해 보여, 너저분한 방 때문에 짜증스러웠던 마음이 녹고 미소가 절로 머금어진다.
늦게 들어온다고 꾸지람을 해도 딸아이의 귀가 시간은 빨라지지 않는다. 직업은 물론 여타의 일에서 남녀의 구분이 없어졌다지만 나는 딸의 귀가 시간 만큼은 관대해지지 않는다. 세상이 무서운데 어찌 그리 늦게 다니느냐고 나무라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여자도 강해져야 한다며 동시에 두말을 하는 내가 얼마나 이중적인가.
곱고 뽀얀 얼굴 저 너머에도 고뇌가 있을 것이다. 어려운 사회적 상황 때문에 포기할 것이 수없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N포세대. 딸아이도 어쩌면 꿈과 현실 사이에서 버거운 싸움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키워주겠느냐고 딸아이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도 일하면서 너희를 키웠고, 엄마에게도 엄마만의 인생이 있는 거라며 야멸치게 대답했을 때 얼마나 서운했을까. 자신만의 일을 꿈꾸며 여자로서의 삶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겠지만, 주위에서 보고 듣는 이야기로 지레 겁먹고 있을 것이다. 남자와 겨루어 정정당당하게 인정받으라고 압박하면서, 여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은 너그럽게 나누어주지 않는 불합리한 태도에 분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윳빛 고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 더 자고 싶다고 몸을 뒤척이며 어리광을 부리는 딸아이가 사랑스럽다. 어른인 듯해도 나에게는 사뭇 어린아이인 것 같아 살며시 안아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하루하루 생각이 더 깊어지고 역량을 키워가기를 소망하며 방문을 닫았다.
살갗에 와 닿는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심호흡을 하여 맑은 기운을 한껏 들이마셨다. 모두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다. 그 곁에서 나도 함께 걷는다. 마음을 모아 보내는 나의 염원이 좋은 기운으로 전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햇살은 어김없이 얇은 커튼을 헤집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또 하루가 시작이다.
(2016년)
마음의 깊은 소리
2층 입구에 들어서면 병원 특유의 냄새가 들어온다. 절로 숙연해진다. 시어머님은 오늘도 주무시고 계실까.
병실에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는 두 번째 병상 할머니의 아들 내외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아들은 물수건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할머니의 연세가 아흔넷이고 입원하신 지 3년이 되었다는 것은 침대 발치의 기록을 보고 알았다. 아들 내외도 반백인 데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 한 채 의식이 흐릿한 상태로 누워 있지만, 그 부부가 팔다리를 주무를 때면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신다. 아무도 알아보시지 못한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은 본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오감이 모두 닫히고 단지 호흡만 할 수 있다 해도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으로 아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의 손길이 와 닿을 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시어머님의 침대는 창가에 있어서 나뭇잎의 변화로 사계절을 느낄 수 있다. 가로수가 발갛게 물들기 시작하면 빛깔이 오묘해서 할 말을 잊는다. 가을이 완연하다고 얘기해도 어머님은 눈만 껌뻑이셨다. 단풍처럼 고운 노년을 꿈꾸셨을 텐데 그 곁에 누워만 계시는 당신. 삶이 아득하고 아파서 말문을 닫으셨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누군가 켜놓은 TV 소리로 말머리를 돌리면 오히려 담담해진다.
어머님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겨서 마음의 준비를 했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움직임은 점점 더 무뎌져서 마침내 누워만 계시게 되었다. 마음대로 안 되는 몸을 느낄 때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남편과 자식들에게 늘 할 말이 많았던 어머님. 병환이 깊어질수록 말씀은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요양병원에 모시고 나서 어머님은 어떠셨을까. 병원으로 옮기는 것은 시아버님의 결정이었으며,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물론 어머님에게나 주위의 모두를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정작 어머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의사 표현이 분명해서 끝까지 당신의 주장을 관철시키시던 불과 몇 년 전의 모습만 떠올려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강인하게 살아오신 어머님. 떠나는 날까지 자식을 품어주는 편안한 둥지로 남고 싶으셨을 것이다.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은 것은 모든 이의 한결같은 바람이 아닐까.
작년 가을, 어느 여인의 임종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자신의 존엄사를 인터넷에 예고했기 때문이다. 말기 뇌종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29세의 여인은 샌프란시스코에 살다가 존엄사를 허용하는 오리건주로 이사했다.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곳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남편의 생일파티도 하며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러고는 가족과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작별한 후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존엄사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그 여인을 비난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비명이나 더 큰 고통이 오기 전에 죽음을 맞고 싶다는 호소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이 논쟁했으나 흑백으로 가릴 수 없는 난제를 새삼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며, 설령 내가 그 같은 경우에 놓인다 해도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 귀엔 그녀의 신음이 들린다. 의식 없는 육체로서가 아니라온전한 인격을가진 존재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절규가 들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은 그 여인의 마음이 보인다.
얼마 전 남편과 나는 ‘사전 의료 의향서’를 구해 서명을 해두었다.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서 자신의 치료에 관한 의사를 미리 밝히고 상대에게 위임한다는 글이다. 우리 부부에게 지금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자의적인 소망으로 맑은 정신 하에’라는 전제가 의향서에 있듯이 건강할 때 맑은 정신으로 각자의 삶을 생각하며, 혹여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무의미한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둔 것뿐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식들에게 줄 짐을 덜고 싶은 배려와 사랑이기도 하다.
자필 서명을 한 후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어디에 두었는지도 잊은 채 종이가 누렇게 바랠 때까지 꺼낼 일 없이 살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고는 백발이 된 어느 날 빛바랜 종이 두 장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중년의 어느 길목을 지나던 우리가 아들과 딸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우리 마음의 깊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2017년)
골목에 볕이 든다
3층 정도의 벽돌 건물들이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다.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고 이정표의 페인트도 벗겨져 세월이 그대로 드러난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색 바랜 건물 벽에 마구 써댄 걸 보면 낙서가 분명하다. 그러나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왠지 찜찜하다.
길을 따라 좀 더 들어가 본다. 빛깔이 점점 화려해진다. 벽은 알록달록 옷을 입었지만 거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원래 런던의 동쪽에는 산업단지가 몰려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그중 이곳 브릭레인에는 벽돌과 타일 공장이 밀집해 있었는데, 외국 이주민들이 터를 잡으면서 한때는 범죄율이 높은 빈민가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있던 맥주 양조장이 문을 닫고 폐허로 방치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양조장 건물의 임대료가 싸다는 이유로 슬슬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벽돌집 특유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2층 높이의 벽면 전체에 소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금세 울음을 터뜨릴 듯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빨갛고 노랗고, 강렬한 색으로 얼굴을 칠해 놓아 피부색이 보이지는 않지만 엉키듯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흑인이 분명하다. 몇 걸음 떨어진 가게 입구의 벽면. 여인의 눈매가 매섭다. 두툼한 입술을 꽉 다물고 정면을 응시한다. 이 여인도 가무잡잡하다. 왜 그림 속 여인네의 피부는 모두 검은색일까.
모퉁이를 돌아서니 높다란 시멘트벽이 눈길을 끈다. 뭐라고 썼는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기호와 글귀가 빼곡하다. 마치 암호문 같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한 획 한 획에 힘이 들어가 있다. 억눌렸던 것들을 쏟아내듯 페인트를 뿜어낸 흔적들이다. 필체가 다르고 크기와 색깔이 각기 다른 글자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하나둘 모여 거대한 행렬이 꿈틀거린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뭔가를 구경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일인지 나도 비집고 들어가 본다. 청년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분무기의 구멍이 열리면서 높은 압력에 갇혀있던 분홍색 물감이 세차게 뿜어져 나온다. 권총 두 개가 벽면을 모두 차지한다. 총구는 비스듬히 허공을 향하고 있다. 많고 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 권총일까.
건물 벽이나 터널에 낙서하듯 그린 그림을 그라피티(graffiti)라고 한다. ‘긁다, 긁어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된 말인데, 대부분 긁어서 그리기보다 페인트를 분무기에 넣고 내뿜어서 문자나 그림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빨리 작업을 마치고 자리를 뜨기 위해서는 그 만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라피티를 우리말로는 ‘낙서화’라고들 한다. 공공장소에서 허가 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낙서’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되는대로 끄적인 것이 아니다. 소재가 예사롭지 않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완성작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색감은 화려하고 감각적이다. 표현하려는 의지나 솟구치는 감정의 무게만큼 강렬할 것이다. 억압을 강하게 느낄수록 뿜어내는 분무기의 힘도 더욱 강해지지 않았을까.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기에는 벽 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묵묵히 받아만 준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감히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애꿎은 벽에만 퍼부어 댔을 것이다.
불법 이주민으로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되지 않는 가난, 피부색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차별과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질곡. 질척거리는 하루살이 인생을 한탄하는 눈물이 모여 그림이 되었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어 냉소와 풍자가 되었고, 그 거리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되었다.
길거리 그림 속 사연이 어쩌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감내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세상살이가 아닐까.
수많은 미술관에서 보았던 거장의 명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건물의 화려한 외관만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허름한 골목에서 눈길을 주고받았던 소녀의 눈망울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허구가 아니라 리얼, 하루하루 그들을 살아있게 하는 생생한 숨소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저항이며 소통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어두침침한 골목에 볕이 들고 있다.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열린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소녀도 언젠가 세상 한가운데로 나왔으면 좋겠다. 기지개를 켤 수 있는 날이 곧 왔으면 좋겠다.
(2018년)
김환기의 푸른색
선으로 윤곽만 그려놓은 항아리에 눈길이 머물렀다.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화백의 ‘항아리’. 상아색 도자기에 시선이 모이는 것은 바탕색이 잘 받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바탕의 푸른색은 느낌이 오묘하다. 달항아리를 돋보이게 하면서도 그윽하고 멋스럽다.
김 화백이 주로 썼던 푸른 색조는 파랗다고 하기에는 왠지 거리가 좀 있다. 자주 사용했던 색의 가짓수도 많고 채도(彩度)에 따라 색감이 사뭇 다르며, 색색깔의 이름은 우리말로 붙여진 것이 없어서 기억하기도 어렵다. 그 푸른색 계열을 통틀어 나는 ‘김환기의 푸른색’이라 불렀다. 고요하면서도 신비한 기운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어둠이 갓 내리기 시작하는 하늘빛처럼 모호하다. 높디높은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기도 하며, 몸부림치며 되돌아오는 바다 물빛같이 처연하기도 하다. 부드러운 듯하나 뚝심이 있고, 차가운 듯하나 미덥다. 혹자는 가슴 가득 품고 있던 고향의 바다색이라 하고, 애타게 그리던 고국의 푸른 하늘색이라고도 한다. 김환기의 고향은 전남 신안 앞바다 안좌도. 그곳 지주의 아들이었으며 식민국 일본에서 공부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 빨리 자손을 보려는 부모님 뜻에 따라 조혼했다가, 이혼 후 세 딸을 데리고 재혼했다. 두 번째 결혼의 상대는 작가 이상(李箱)의 부인이었다. 그 여인은 사별한 후 김환기와 재혼했던 것이다. 두 남편이 모두 비범한 인물이라니! 걸출을 알아보는 혜안(慧眼)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인지, 잠재력이 있는 사람을 걸출로 키워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인지.
더욱 놀라운 것은 결혼하기 위해 개명했다는 사실이다. 김환기의 아호 ‘향안(鄕岸)’을 필명으로 하여, 변동림(卞東琳)에서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호까지 받을 만큼 그토록 그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싶을 만큼 아픈 그녀만의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바꾸고 새로이 시작한 삶은 어떠했을까. 김환기와의 결혼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천석꾼의 외아들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살았고 그림 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제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퍼 쓰기만 하는 생활을 어찌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유산을 모두 써버린 후의 생활고는 김향안이 고스란히 몸으로 맞서며 감당했다. 신문과 잡지에 기고해서 돈을 벌었고 과외선생을 하기도 했으며, 남편을 위해서는 담뱃값을 꾸러 다니는 것조차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도 예술적인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예술은 어차피 남편 몫이고 생활은 자신의 몫이라 여겼던 여인.
불어를 못 하는 수화 대신 파리로 갈 때는 먼저 떠나서 자리를 잡더니, 뉴욕으로 향할 때는 뒤따라가겠다며 남겨진 아이들을 도맡았다. 시어머니와 전처소생의 딸 셋에 아들 양자까지, 험난한 세월 속에도 잘 보듬었다. 삼십 년 결혼 생활의 뒷바라지로도 모자랐던지, 남편의 사후에는 유작을 모으고 미술관을 건립했다. 김향안은 그렇게 남편의 거름이 되었고, 바람막이가 되었으며, 물길이 되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며 헌신했던 이유는 김환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온몸을 녹여 평생 남편 삶에 바탕이 되었을 그녀.
아내의 편지를 보고는 ‘아물아물하던 것이 맑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선연하고 개운하고, 석 달 장마가 일시에 거둔 것 같다’던 수화의 답장. 암울한 상황마다 향안은 그렇게 가닥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너른 화폭 가득하게 칠한 검푸른 배경색은 희뿌연 달을 밝혀준다. 캔버스를 그득 메운 잿빛 푸른 점들은 하얗고 자그마한 네모 무리를 가지런히 줄로 세운다. 숨겨져 있던 형체를 드러내며, 하나둘 질서를 찾아준다. 그녀의 삶과 닮아있다. 곁에서 자신의 그림자조차 만들지 않았으나 어느새 바탕의 깊고 푸른 빛깔이 되었다.
김 화백의 푸른색은 하늘이나 물의 의미를 넘어서서 무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다고 어느 미술 평론가가 말했다. 광대한 공간을 꿈꾸다 그는 그리로 나아갔다. 그녀가 없었더라도 수화는 세기의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 영민했던 그녀는 시대를 앞서갔으나 오롯이 김환기의 아내로만 살았다. 자신의 이름을 두 사람과 나누지 않았던 여인. 세상에 다녀간 흔적을 그렇게 남겼다.
오랜만에 수향산방(樹鄕山房)에 들러서 수화의 몇 작품을 보고 왔다. 붓 자국이 거칠게 드러나서 짙푸른 바탕색이 더 힘 있게 느껴지는 그림을 보며 어느 여인을 생각했다. 떠나고 없는 빈자리에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 살아있다.
(2019년)
마지막 뒷모습
1
사진 속 여인이 수줍은 듯 웃고 있다. 촘촘히 앉은 성가대원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은은히 빛났었고, 우연히 마주칠 때면 반갑다며 앞니가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두 아들의 기도 제목을 이야기하면서 겸연쩍다는 듯 싱긋 웃을 때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어느 해던가, 송구영신 예배가 끝날 무렵 뒤쪽에 앉아있던 나를 향해 온몸을 돌려 바라보면서 새해 덕담을 해주었다.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지만 함박 웃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언제나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서로 다른 소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느 날, 멀찍이에서 스치듯 잠깐 보았는데 무척 수척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흔들며 밝게 웃기에 그저 야위었다고 생각했건만, 폐암과 싸우는 중이라는 것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떠났다.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는 소식이 날아와 내 가슴 한편에 깊숙이 꽂혔다.
웃으며 빈소를 내려다보는 그녀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빈 공간에는 적막만 가득하다. 장례예배는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떠나간 이를 기리며 영혼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와 찬송. 그러나 이 땅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에는 무척 아쉬운 시간이었다. 짧은 의식이 못내 서운하다. 한 생명이 이렇게 스러지는구나, 허무하고 애통하다.
조문을 다녀온 후 여러 날 동안 나는 우울함을 떨치지 못했다. 환한 미소에 야윈 얼굴이 겹쳐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과 홀로 싸웠을 것이다. 둘째 아들의 결혼을 그토록 기원했는데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남편과 함께 여행하며 여생을 보내겠다더니, 죽음이 걷어간 그녀의 이야기로 내내 마음이 아팠다. 침잠으로 나를 아득하게 몰아간 것은 그것뿐이었을까.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고, 열심히 뒷바라지해 온 그녀에게 감사의 편지 한 장 읽어주었더라면. 굽이굽이 넘었던 고갯길, 이만큼 살아낸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고 예배의 말미에 감사와 애도의 인사라도 한마디 해주었더라면…. 어쩌면 그것은 언젠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더니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인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몇 걸음 나에게 다가오더니 여느 때처럼 살포시 안아준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있다. 남편의 그림자로, 자식의 거름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며, 괜찮아, 괜찮아, 내 등을 토닥인다.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노라, 도리어 인사를 전하고 있다.
2
얼마 전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쓴 어느 작가의 글을 읽었다. 노부부가 미국에 사는 딸네 집에 갔다가 남편이 낙상을 당하여 결국 몸져누웠다고 한다. 투병하는 내내 아내와 딸의 가족이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부부는 평소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는데,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류도 이미 써 놓았고 천국에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어떤 장례식을 원하느냐고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너의 결혼식 때처럼 해달라고, 그때 정말 행복했었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으며 식구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즐겁게 식사하고, 집안의 전통을 따랐던 소박한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결혼식은 기쁨과 축하의 마당이 아니던가.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이 축제 같기를 원했던 그의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가족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육신의 고통이 끝나면 평안한 곳으로 간다는 확신으로 희망에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들…. 어찌 헤어짐의 슬픔이 없겠는가. 그러나 멍에처럼 짊어졌던 인생의 숙제를 마치고 나면 가는 길이 홀가분해질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면,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던 혈육마저도 집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떠나는 심정이 좀 가벼워질는지 모르겠다.
장례식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치러졌다. 잠자듯 평온히 떠났고 남은 이들도 편안하게 고인을 보냈다고 작가는 더듬었다. 온전히 아버지를 추억하고 기리며 애도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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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가족만 모여 장례를 모두 마친 후 뒤늦게 부고를 낸 것이다. 고인의 뜻이었다고 한다. 타산이 맞지 않아 남들이 주저해도, 꼭 필요하다면 어려움을 자신이 감당하며 책을 냈던 출판인에 관한 기사다. 병세가 나빠져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서도 평소처럼 흐트러짐 없이 지내다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살아왔던 모습과 이 땅과 결별하는 모습이 한결같구나, 생각했다.
살았던 모습대로 떠나고 있다. 죽음으로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기까지가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몫의 인생인가 보다.
(2021년)
정경순(丁卿純)
≪에세이21≫로 등단(2015)
산영수필문학회 회원
이학박사(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전 국립보건원 후천성면역결핍증과 보건연구사
전 함춘여성크리닉 연구실장
에세이 『한여름의 영국 산책』
에세이(공저) 『홍콩, 몽중인』
수필집(공저) 『깊은 소리 세월의 향기』
작품 순서
이불을 덮어 주며 (2016년) ‧‧‧‧‧‧‧‧‧‧‧‧‧‧‧‧‧‧‧‧‧‧‧‧‧‧‧‧‧‧‧‧‧‧‧‧‧‧‧‧‧‧‧‧‧‧‧‧‧‧‧‧‧‧‧‧‧‧‧‧‧‧‧‧‧‧‧‧‧‧‧‧‧‧ 2
마음의 깊은 소리 (2017년) ‧‧‧‧‧‧‧‧‧‧‧‧‧‧‧‧‧‧‧‧‧‧‧‧‧‧‧‧‧‧‧‧‧‧‧‧‧‧‧‧‧‧‧‧‧‧‧‧‧‧‧‧‧‧‧‧‧‧‧‧‧‧‧‧‧‧‧‧‧‧‧‧‧‧ 4
골목에 볕이 든다 (2018년) ‧‧‧‧‧‧‧‧‧‧‧‧‧‧‧‧‧‧‧‧‧‧‧‧‧‧‧‧‧‧‧‧‧‧‧‧‧‧‧‧‧‧‧‧‧‧‧‧‧‧‧‧‧‧‧‧‧‧‧‧‧‧‧‧‧‧‧‧‧‧‧‧‧‧ 6
김환기의 푸른색 (2019년) ‧‧‧‧‧‧‧‧‧‧‧‧‧‧‧‧‧‧‧‧‧‧‧‧‧‧‧‧‧‧‧‧‧‧‧‧‧‧‧‧‧‧‧‧‧‧‧‧‧‧‧‧‧‧‧‧‧‧‧‧‧‧‧‧‧‧‧‧‧‧‧‧‧‧‧‧ 8
마지막 뒷모습 (2021년) ‧‧‧‧‧‧‧‧‧‧‧‧‧‧‧‧‧‧‧‧‧‧‧‧‧‧‧‧‧‧‧‧‧‧‧‧‧‧‧‧‧‧‧‧‧‧‧‧‧‧‧‧‧‧‧‧‧‧‧‧‧‧‧‧‧‧‧‧‧‧‧‧‧‧‧‧‧‧ 10